12. 업에 대한 바른 견해[정견(正見)]와 연기법(緣起法)
정견(正見) 즉 바른 견해ㆍ바른 이해란 존재의 진실된 성질에 대하여 바르게 아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실한 앎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의미하며 이 세상의 세 가지 특성인 삼특상(三特相)에 대한 바른 인식이다.
1)제행무상(諸行無常) :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Sabbe saṅkhārā aniccā)
형성된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2)제행개고(諸行皆苦) : 형성된 것은 고(苦)이다(Sabbe saṅkhārā dukkhā)
형성된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그 상대적 세계와 그것의 개인적 경험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에는 필연적으로 정신적ㆍ육체적 고통 또는 불만족스러움이 내재한다.
3)제법무아(諸法無我) : 모든 사실(실재)에는 실체가 없다(abbe dhammā anattā)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 영원불멸하는 영혼 즉 자아(自我)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하는 흐름 즉 물질적ㆍ정신적 현상이 끊임없이 변화하여 마치 흐르는 강물과 같이 단 한순간도 멈춤이 없는 유전(流轉)이다.
무아(無我)란 고정불변하고 영원불멸하는 자아(自我)라는 실체가 없다는 의미이다. 자아(自我)란 정체하고 있는 실체가 아니며 원인과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연기(緣起)의 흐름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며 흐르는 유전(流轉)이다. |
정견(正見)을 통하여 분명하게 확립해야 할 또 하나의 견해는 이 세상이 원인과 그 원인에 따른 결과가 분명하고 정확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선하고 건전한 의도적 행위는 언젠가는 그 행위자에게 반드시 행복(幸福)을 가져다주고, 그와 반대로 불선하고 건전하지 못한 의도적 행위는 그 행위자에게 반드시 고통(苦痛)을 안겨준다.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에게 금생에 지은 의도적 선한 행위와 불선한 행위에 대한 과보는 즉각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많은 세월이 경과하여 나타날 수도 있다. 물질적인 신체는 죽음 후에 분해되어 사라지지만 그 존재의 의도적 행위의 과보는 에너지의 흐름과도 같이 끊임없이 변하는 생명의 흐름에 작용하여 계속된다.
죽음 직후에 이어진 새 존재가 이 생명의 흐름을 이어받아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존재가 반드시 인간이란 보장은 없으며, 따라서 다른 차원의 존재로 재생(再生)1할 수도 있다. 어떠한 차원의 존재로 재생(再生)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전생에서의 의도적 행위에 따른다. 그리고 어떤 경우든 새 존재는 방금 죽은 존재를 곧바로 이은 속편이다.
이렇게 해서 새 존재는 이전 존재를 중단없이 잇게 되고 생의 흐름은 끊어지지 않는다. 새 존재는 이전의 존재가 지어놓은 공덕의 과보를 물려받으며, 이 공덕의 과보는 언젠가는 틀림없이 행복을 가져올 것이다. 그와 동시에 새 존재는 이전 존재의 악업의 과보도 물려받아서 언젠가는 고통을 겪어야만 된다.
사실 생명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존재는 이전의 존재와 같다고 볼 수 있다. 한 노인의 경우 생명의 흐름이 연속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갓 태어난 아기와 소년, 청년, 장년, 노년의 노인은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생명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는 측면 즉, 연속성(連續性)에 따름인 것이며 그 밖의 어떤 동일성(同一性)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순간순간, 매일매일 변화하여 조건에 따라 새로운 존재로 변화한다. 따라서 이 순간의 모든 존재는 전 순간의 그것과는 조금은 다른 존재이다. 동일성이 있다면 다만 연속성에 기인하는 것뿐이다. 같은 방식으로 새로이 태어날 존재는 죽은 이전의 존재와는 다르다. 그러나 연속성에 기인한 동일성만은 여전하다.
- 재생은 영어 ‘rebirth’의 역어이다. 영어권에선 rebirth가 빠알리어의 jāti(生)의 역어로 자리잡고 있고, 또 남방전통에선 12연기의 생(生)은 재생으로 확고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별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 rebirth를 우리말로 재생 또는 ‘다시 태어남’이라 옮길 경우엔 다소 문제가 따른다. 불교 이외의 종교나 사상에서 이해하는 관념과는 다른 불교의 특색을 나타내기에 미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윤회생사ㆍ재생 등으로 옮겼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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