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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따마 붓다의 가르침/다나상가(Dānasaṅgha)담마 이야기

13. 행위자(업을 짓는 자)와 경험자(업의 과보를 받는 자)

moksha 2017. 6. 13. 18:00

13. 행위자(업을 짓는 자)와 경험자(업의 과보를 받는 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불만족)은 분명히 원인이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의하여 발생된 고통이라면‘내 탓이야!’라며 스스로를 자책하며 더욱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반면에 누군가가 나에게 고통(불만족)을 주었다면‘네 탓이야!’라고 그 사람을 원망하며 괴로워 할 것이다.

그런데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 지금의 고통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재가 있다는 것은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금생(今生)은 전생(前生)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으며 내일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여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찰라찰라 조건은 바뀌고 변화의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존재이다. 그러므로 금생(今生)의 존재와 전생의 존재는 같은 존재가 아니며 그렇다고 다른 존재도 아닌 것이다.

 

1)전생의 행위자와 금생의 경험자가 같다면,

모든 것이 “내 탓이요!”라 한다면 괴로움은 해결되지 않는다. 전생에 지은 것까지 내 탓으로 본다면 숙명론자다. 또 변하지 않는 영원한 나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영원주의자가 되고만다.

 

2)전생의 행위자와 금생의 경험자가 다르다면,

과보는 있으나 그 업을 지은 작자가 없는 것이니,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은 모두 남 탓이 되어 괴로움이 해결되지 않는다. 조물주를 원망하거나, 부모를 원망하거나, 전생에 죄를 지은 그 놈을 탓하게 되는 등 부도덕한 허무주의자가 된다.

 

모든 괴로움(불만족)은 접촉[촉(觸)]에 따른 것이다. 눈(시각)ㆍ귀(청각)ㆍ코(후각)ㆍ혀(미각)ㆍ몸(촉각)ㆍ정신[마노(mano,의(意)]의 감각기관이 형색(형상)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사실[마노의 대상인 법(法)] 등과 접촉하여 발생된 것이다. 생각도 접촉에 따른 것이다. 이전에 행위에 대한 과보가 익어 느낌[수(受)]을 경험하는 것이다.

 

괴로움을 느꼈을 때 내 탓이라거나 남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단지 알아차리면 된다.

 

괴로움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에 따라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아, 나에게 괴로움(불만족)이 일어났구나!”라고 관찰하면 된다.

모든 존재는 무아(無我)로서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으며 연기적(緣起的) 존재라는 점을 확고하게 이해하는 것은 업과 재생에 관해 확고하게 이해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청정도론(淸淨道論) 19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중생들이 태어나는 어느 거주처에서나 불제자는 단지 정신과 물질 현상이 인과 관계의 연쇄(連鎖)를 통해 계속 유전됨을 본다. 그는 업(의도적 행위)을 짓는 자와 그 업을 떼어놓고 보지 않으며, 업의 과보를 받는 자와 그 과보를 떼어놓고 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이 업과 관련하여‘업을 짓는 자'라는 말을 사용하거나 업의 과보와 관련하여‘과보를 받는 자'라는 말을 사용할 때, 단지 관습에 의하여 그러한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업을 짓는 자를 발견할 수 없고 과보를 받는 자도 발견할 수 없다.

실체 없는 현상만이 유전할 뿐. 이렇게 보는 것이 정견(正見)이어라.

 

업과 그 과보가 계속 유전하며 모든 것을 조건 지우는 데

거기에서는 처음 시작을 발견할 수 없다.

마치 종자와 나무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

어떤 신이나 범천(梵天)도 이 윤회를 만들었다고 할 수 없으리.

실체 없는 현상이 모든 조건에 의존하여 유전할 뿐.”

 

밀린다빤하(Milindapañhā)1에서 밀린다 대왕과 나가세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대화하고 있다.

 

“존자시여,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데, 무엇이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까?”

“대왕이시여, 그것은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의 집합[名色]2입니다.”

“그래요? 존자시여, 그것은 현재의 명색과 동일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현재의 명색이 선업과 악업을 짓고 그 업에 따라 새로운 명색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궁극적 의미로 보아 실재하는 자아라고 할 실체 혹은 개별적 자아란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사실 그런 것들이 재생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명색의 과정이 죽음에 의해 단절되지만, 그 후 즉시 다른 어딘가에서 어김없이 그 인연에 따라 계속 이어질 뿐입니다.

 

밀린다빤하(Milindapañhā) 3장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존자시여, 옮겨 가지 않고도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대왕이시여,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무엇인가가 옮겨 가지 않고도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시오.”

“대왕이시여, 하나의 등잔 불꽃으로 다른 등잔에 불을 붙이면 하나의 등불이 다른 등불로 옮겨 간 것입니까?”

“아닙니다, 존자시여.”

“대왕이시여, 바로 그것처럼 옮겨감이 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청정도론』17장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여 죽음이란 오온3(五蘊 ; 色ㆍ受ㆍ想ㆍ行ㆍ識)의 소멸임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사후에 새로운 몸 등으로 이전하는 것이 한 개인이나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재생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여 재생이 오온의 생겨남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재생한 것이 어떤 개인이나 존재이며 그 사람이 새로운 몸으로 재현한다고 생각한다. 재생의 반복인 윤회(Saṃsārā)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는 실제적으로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떠돌아다니고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존재의 현상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는 그 현상이 그의 자아(自我)나 자아에 속한 무엇이라고 생각하거나 무언가 영원하고, 기쁘고, 즐거운 것이라 생각한다.

 

존재 현상이 인연에 따라 생겨났다는 것, 또한 무명(無明)에 인연하여 업이 생겨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는, 이해를 하거나 못하는 것도 자아이고, 어떤 행위를 하게 하는 자나 행위를 하는 자도 자아이며,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도 자아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원자라든가 창조주 같은 것이 태아 형성과정을 통해서 신체를 형성하고 그 신체에 여러 가지 기능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한다. 즉 감각적 인상을 받아들여 느끼고 욕망을 일으켜서 집착하게 되며 또다시 다른 생으로 태어나는 것이 바로 자아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존재가 주어진 운명으로 인해 또는 아주 우연히 생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해 버린다.”

 

“다음 생(生)에 생겨나는 것은

다만 인연으로 빚어진 현상일 뿐,

전생으로부터 옮겨온 것이 아니지만

또한 전생의 원인이 없이는 생겨날 수 없네.”

 

“이 인연 따라 생겨난 명색(名色;태아)을 어떤 사람은 전생에서 온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어떠한 존재(satta)나 생명(jīva)도 전생으로부터 옮겨온 것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태아는 전생의 원인 없이는 또한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는 것이나 사람의 목소리로 메아리를 울리게 하는 것비유될 수 있습니다. 거울 속의 영상이나 메아리가 얼굴이나 목소리로부터 야기된 것이기는 하나 얼굴이나 목소리가 옮겨 간 것은 아닌 것처럼,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전생과 다음 생이 완벽하게 같은 것이라면 우유가 버터로 변할 수는 없는 경우에 해당될 것이며, 전생과 다음 생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면 버터는 결코 우유로부터 생겨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여러 단계가 완전히 동일한 것도 아니고 별개인 것도 아니란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na ca so, na sa anno)라고 말합니다.

모든 생명은 육체이건 정신이건 혹은 잠재의식이건 간에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며 끊임없는 생성 과정이고 변화이며 변모인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진정한 개체나 사물도 없으며 창조주나 피조물도 없습니다. 다만 이 물질적ㆍ심적 현상의 과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삶이 전개되는 과정에는 능동적인 면과 수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삶의 능동적인, 즉 원인이 되는 측면은 선업이나 악업이라는 업의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면, 수동적인, 즉 결과가 되는 측면은 태어나서 자라고 썩어서 사라져 가는, 단순한 존재 현상인 재생 혹은 삶의 과정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궁극적인 의미에서 볼 때,

 

윤회(輪廻)하면서 떠돌아다니는 실질적인 개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이처럼 업(業)과 과보(果報)라는 두 측면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만이 일어날 뿐이다.

 

이른바 지금의 삶은 지나간 삶의 반영이고 앞으로 올 삶은 지금 삶의 반영입니다. 지금의 삶은 과거 업의 결과이고 앞으로 올 삶은 현재 삶에서 지은 업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업을 짓는 자라거나 그 과보를 받는 자라고 할 만한 자아라는 실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결코, 어떤 실질적인 개체가 다음 생으로 옮겨 간다고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장 고차원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자아 같은 것이 있다고 보지 않는 마당에, 하물며 그런 존재가 다음 생으로 옮겨 간다고 가르치겠습니까!


  1. 밀린다빤하(Milindapañhā)는 서기전 2세기 후반에 서북 인도를 지배한 그리스인 밀린다(Milinda)왕과 인도 나가세나(Nagasena) 장로 간에 행해진 불교 교리에 관한 문답을 담은 것이다. 중국에서는 미란타왕문경(彌蘭陀王問經),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 등으로 번역되었지만 빨리본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이것을 볼 때 이 경은 상좌부 이외의 다른 부파에도 알려져 있던 문헌으로 보인다. 스리랑카에서 형성되지 않은 상좌부의 몇 안 되는 후기 문헌의 하나로, 경에 버금가는 그 권위는 의심받은 적이 없다. 그래서 붓다고사(Buddhagosa)와 같은 저명한 주석가도 그 권위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여 여러 차례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논점들은 무아설과 같은 빨리 경의 핵심적 논제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교리는 정통 상좌부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래서 미얀마에서는 이 경을 쿳다까 니까야에 포함시키고 있다. [본문으로]
  2. 명색(名色, nāma-rūpa) : 정신과 물질, 마음과 육체로 번역된다. 원래 고(古) 우파니샤드에서는 현상세계의 명칭과 형태를 의미했으며, 불교에서도 가장 오래된 시구에서는 같은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후에는 명(名)은 개인 존재의 정신적인 면, 색(色)은 물질적인 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오온 전부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쓴다. 십이연기(十二緣起)에서는 제4항으로 식(識)에 의해 조건 지어지고, 또 육처(六處)의 조건이 된다. [본문으로]
  3. 오온(五蘊, pancakkhandha) : 존재[有]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의 집합 또는 집착 대상의 다섯 범주를 말한다. 물질(物質) 또는 신체의 요소[색온(色蘊)], 느낌의 요소[수온(受蘊)], 지각의 요소[상온(想蘊)], 의지의 요소[행온(行蘊)], 의식의 요소[식온(識蘊)]이다. 아라한의 경우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 멸하여 오온이 단순한 주관적 현상으로 존재할 뿐이므로 그냥 오온(五蘊)이라 부르고, 아직 집착이 남아 있는 범부(凡夫)와 사향삼과(四向三果)의 경우는 오취온(五取蘊, pancāupādānakkhandā)이라 구분해 부르기도 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