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행복하여라! sukho Buddhānaṃ uppādo!

▣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다나상가(Dānasaṅgha)담마 이야기

10. 업의 법칙

moksha 2017. 6. 13. 17:43

10. 업의 법칙

 

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선(善, kusala)과 불선(不善, akusala)이다. 모든 의도는 선한 것이 아니면 불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선과 불선의 판단 기준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이다. 궁극적으로는 어떤 행위가 해탈과 열반에 유익한가 해로운가 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라 하겠다.

그리고 마치 씨앗을 심으면 그 종자에 고유한 열매가 열리듯이 의도적인 행위는 그 의도한 선과 불선의 성질에 따라 각각 고유한 특성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업의 법칙(kamma-niyāma)이다.

 

“수행승들이여, 그에게 야마왕은 이와 같이 말한다. ‘이보게, 그대는 방일한 탓으로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지 못했다. 어찌 그들은 그대의 방일함에 걸맞게 그대를 처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대의 악한 행위는 그대의 어머니나 아버지나 형제나 자매나 친구나 동료나 친지나 친척이나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들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악한 행위는 그대가 스스로 행한 것이다. 그대가 그 과보를 겪어야 한다.”                           [천사의 경(Devadūtasutta, M130]

 

부처님과 아라한을 제외한 모든 의도적인 행위는 업이 된다. 부처님과 아라한의 경우에는 업의 근원이 되는 무명(無明)과 갈애(渴愛)를 남김없이 소멸해 버렸기 때문에 업을 쌓지 않는다. 그렇지만 부처님과 아라한도 정신과 물질(名色,nāma-rūpa)을 가지고 있는 한 그분들의 지난 생들에서 지은 업의 과보는 받아야 한다.

 

네 종류의 사람

붓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업의 법칙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업에 관련하여 이 세상에는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①어둠에서 어둠으로 나아가는 사람

②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

③빛에서 어둠으로 나아가는 사람

④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의 경(Tamotamaparāyanasutta, A4:85)]

 

간단하게 말해서 업은 숙명론(宿命論)이나 운명론(運命論)이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든지 우리가 그 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스스로가 지은 악업을 돌멩이에 그리고 스스로가 지은 선업을 강을 건너는 나룻배에 비유하곤 한다. 아무리 작은 돌멩이라도 물 속에 던지면 가라앉는다. 절대로 강을 건너지 못한다. 하지만 아무리 큰 돌덩이라도 나룻배 위에 얹어 놓으면 가라안지 않고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업의 공덕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가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노력하여 선업을 쌓도록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 무거운 돌덩어리라고 하더라도 나룻배로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누군가가 가난하고 병약하고 장애자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행위 여부에 따라서 그 업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금생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죽는다고 끝인가? 절대로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돌고 도는 윤회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우리가 경험해 보지 않은 윤회계는 없으며 우리가 가보지 않은 육도의 세계는 없다.”

라고 단언하고 있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윤회에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는 지극히 어렵다.

다른 곳의 경(Aññatrasutta, S56:61)에서 부처님께서는 손톱 끝에 얹혀진 흙먼지와 이 세상의 대지의 양과를 비교하며 인간의 다시 태어남이 어렵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다른 곳의 경(Aññatrasutta, S56:61)

한 때 세존께서는 손톱 끝으로 흙먼지를 집어 들어 수행승들에게 말씀하셨다.

[세존]“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큰 대지와 내가 손톱 끝에 집어든 이 흙먼지와 어느 쪽이 더 큰가?”

[수행승들]“세존이시여, 이 큰 대지가 훨씬 크고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든 흙먼지는 아주 적습니다.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든 흙먼지를 큰 대지와 비교하면 수량에도 미치지 못하고 비교에도 미치지 못하고 부분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세존]“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 뭇삶들은 매우 적고 인간과는 다르게 다시 태어나는 뭇삶들은 매우 많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1)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2)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3)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4)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가 있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명상해야 하고,‘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명상해야 하고,‘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명상해야 하고,‘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명상해야 한다.”

 

참으로 엄중한 가르침이자 깊이 새겨야 할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다시 인간의 몸을 받은 지금이 우리들 삶과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죽고 몸이 부서져 흩어지면 언제다시 우리가 인간의 몸을 다시 받을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