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도론에서 본 아공법공(我空法空)
열반은 있어도 열반에 들어 간 자는 없다
누군가 ‘내가 깨달았다.’라 했을 때 그는 깨달은 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럴 때 하는 말이 열반은 있어도 열반에 들어 간 자는 없다는 말입니다. 청정도론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괴로움은 있어도 괴로워하는 자는 없고
행위자는 없더라도, 행위는 존재한다.
입멸은 있어도 입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길은 있어도 행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Vism.16.90)
이 게송은 오로지 청정도론에만 나옵니다. 사성제에 대하여 사구게로 고, 집, 멸, 도에 대응하여 괴로워 하는 자, 행위자, 입멸자, 행도자로 구분하여 설명해 놓았습니다. 오온이 무상하고 무아이기 때문에 괴로워 하는 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고 또는 팔고는 있어도 이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자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론 논리로 따졌을 때 ‘입멸은 있어도 입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 할 수 있습니다. 열반은 있어도 열반에 들어 간 자는 없다는 말입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사성제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성제를 ‘짐’으로 비유하면, 괴로움의 진리는 짐이고, 괴로움의 발생의 진리는 짐을 실는 것이고,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짐을 내려 놓는 것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는 짐을 내려 놓는 방법이 됩니다. 사성제를 ‘질병’으로 비유하면, 괴로움의 진리는 질병이고, 괴로움의 발생의 진리는 질병의 원인이고,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질병의 치유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는 약이 됩니다.
사성제를 공(空): suñña)으로 설명하면
사성제를 공(空): suñña)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공법공(我空法空)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공으로 한다면 앞서 언급한 게송에서 향유자, 행위자, 입멸자, 행도자가 없는 까닭에 공(空)이라 합니다. 향유자, 행위자, 입멸자, 행도자를 무아의 개념으로 본 것입니다. 아공(我空)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성제를 공으로 비유했을 때 법공(法空)과 같은 게송이 청정도론에 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 소멸에는 세 가지가 공하고
소멸에는 또한 세 가지가 공하다.
원인에는 결과가 공하고
그 결과에도 역시 원인이 공하다.”(Vism.16.91)
첫 번째와 두 번째 게송에서 세 가지는 고성제와 집성제와 도성제를 말합니다. 청정도론 주석에 따르면, 집성제 가운데 고성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도성제 가운데 멸성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공의 관점으로 본다면 소멸이 실체가 없는 공이기 때문에 원인이 있다고 하여 결과가 산출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상키야학파의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
소멸이 공이라면, 즉 실체가 없다면 “불사의 진리에는 실체가 없다.”(Vism.16.90)라는 말이 성립 되어서 결과가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소멸에 대하여 마치 법공(法空)식으로 ‘진리도 공하다’는 식으로 설명했을까? 이는 “원질론자들의 원질처럼 결과가 함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구절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원질론(原質論)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pakativadin: 자성론자(自性論者)라 한다. 불교적 자성론과 구별하기 위해 원질론이라 한다. 쌍키야(Samkhya) 학파를 말한다. 쌍키야 학파는 결과가 태초부터 존재하는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을 주장한다. 결과는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원인의 전변일 뿐이다. 결과는 원인속에 내재 되어 나타날 뿐이다. 그 원인을 근본원질이라 하는데, 이것은 무한한 다양성을 가지고 물질적 우주를 전개시키는 실체로서 우주의 제1원인이다.”(Vism.16.91.각주)
청정도론은 5세기 붓다고사가 앗타까따라는 고주석을 참고하여 저술한 것입니다. 그 시기에 대륙에서 대승불교가 꽃 피우고 있었고 또한 힌두교의 교리가 체계화 되어 가던 시기입니다. 테라와다에서는 위기를 느꼈음에 틀림 없습니다. 마치 대승의 아공법공 논리로 상키야학파의 논리를 부수고 있습니다. 그런 상키야학파의 논리를 ‘자성론’이라 하는데 전재성박사는 불교의 자성과 구분하기 위하여 ‘원질론’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상키야학파의 자성론을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이라 합니다. 결과는 원인속에 내재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원인이 전변된 것이라 하여 이를 ‘전변설(轉變說)’이라 합니다. 그런데 붓다고사는 인중유과론에 대하여 “불사의 진리에는 실체가 없다.”(Vism.16.90)라 하여 도성제와 멸성제와의 인과관계를 부수어 버립니다. 이는 “괴로움의 발생의 진리 가운데 괴로움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 가운데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원인에는 결과가 없다는 뜻이다.”(각주)로 설명됩니다. 소멸에는 실체가 없어서 “이처럼 이것들에는 공만이 존재한다.” (Vism.16.90)라 한 것입니다.
바이세쉬까 학파의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
또한 붓다고사는 또 하나의 학파를 부숩니다. 그것은 “조합론자들의 두 원자 등처럼 원인이 원인의 결과와의 조합인 것은 아니다.” (Vism.16.90)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조합론자(samavayavadin)는 바이세쉬까 학파를 지칭합니다. 이 학파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역에서는 합론자라 한다. 역자는 조합론자로 번역한다. 바이세쉬까 학파를 말하는 것이다. 이 학파의 이론에 따르면, 결과는 실제로 존재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중유과론과 대조적으로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으로 불리운다. 원인속에 내재 하는 인과적 효능은 없다. 또한 원인속에 초경험적인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과적 행위는 기계적인 원자적 운동의 속성에 불과하다.”(각주)
그때 당시 유물론에 바탕을 둔 과학주의라 볼 수 있습니다. 이 학파는 상끼야학파와 정반대입니다. 상키야학파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함께 있어서 전변설을 주장했으나 인중무과론에 따르면 원인속에 내재 하는 인과적 효능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초경험적인 제1 원인이 힘이 내재 되어 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오늘날 과학에 바탕을 둔 무신론과 유사합니다.
5세기 붓다고사 시대가 되면
이와 같이 붓다고사는 공의 입장에서 사성제를 설명하면서 상키야학파의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과 바이세쉬까학파의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를 비판했습니다. 이렇게 아공법공이라는 공의 논리로 비판한 것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멸성제에서 소멸은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중유과론도 아니고 인중무과론도 아닙니다.
연기법으로 허무주의와 영원주의는 논파됩니다. 이는 사성제에서 “괴로움의 발생에 의한 앎은 허무주의를 차단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의한 앎은 영원주의를 차단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의한 앎은 무작주의를 차단한다.”(Vism.16.85)라 하여 부처님 당시 모든 외도 사상이 논파됩니다.
그런데 5세기 붓다고사 시대가 되면 부처님 입멸후 천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인도대륙에서는 대승불교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동시에 힌두교 교리도 정교해졌습니다. 붓다고사는 “행위자는 없더라도, 행위는 존재한다.”라 하여 아공의 논리와 “입멸은 있어도 입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법공의 논리로서 상키야학파의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과 바이세쉬까 학파의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를 부수었습니다.
사성제로 외도를 부순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모든 외도의 논리를 논파했습니다. 연기법적으로 보았을 때 성립할 수 없는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5세기 붓다고사는 청정도론에서 사성제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중에 하나로서 공의 논리로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괴로움은 있어도 괴로워 하는 자는 없고,..”로 시작되는 게송입니다. 결국 외도의 견해를 부수는 사성제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 됩니다.
“괴로움에 의한 앎은
항상하고, 아름답고, 안락하고,
실체가 있는 상태의 지각으로 여겨지는
결과에 대한 잘못된 가설을 차단한다.
괴로움의 발생에 의한 앎은
주재자나 제일원인이나 시간이나
고유한 본성 등에 의해서 세상이 작용한다고 하는
원인이 아닌 것 가운데 원인이 있다는 사유에서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잘못된 가설을 차단한다.
괴로움의 소멸에 의한 앎은
미세한 물질계나 세상의 정점 등에
최상의 해탈이 있다는
소멸에 대한 잘못된 가설을 차단한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의한 앎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나 자신을 괴롭히는 고행에 몰두하는 것과 같은
불청정한 길에 대해 청정한 길이라고 고집하는 것에 의해
작용하는 방편에 대한 잘못된 가설을 차단한다.”(Vism.85)
집성제와 관련하여 ‘주재자나 제일원인이나 시간이 작용한다’라는 말은 상키야 학파의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을 겨냥한 것입니다. 또 ‘고유한 본성 등에 의해서 세상이 작용한다.’라는 말은 바이세쉬까학파의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을 겨냥한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붓다고사가 살던 시기의 시대사조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성제는 불교의 핵심교리입니다. 흔히 사성제라 하면 괴로움과 관련하여 괴로움의 소멸과 더 나아가 윤회의 종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5세기 붓다고사는 고주석을 참고하여 외도를 부수는 논리로도 활용했습니다. 그런 사성제는 연기법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또 사성제를 공의 비유를 들어서 아공법공(我空法空)으로 붓다고사 당시의 외도의 견해도 부수는데도 활용되었습니다.
2018-03-0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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