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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간답바(gandhabba)와 간땁바(gantabba)에 대하여

moksha 2018. 6. 23. 21:19

 

간답바(gandhabba)와 간땁바(gantabba)에 대하여

 

 



악취나는 질문

 

무아인데 윤회할 수 있습니까?”이런 말을 악취나는 질문이라 합니다. 유아론자가 유아윤회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놓고서 넌지시 물어 보는 행위는 악한 의도가 담긴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에 답을 하면 말려 들 수 있습니다.

 

질문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육체와 영혼은 동일한 것인가?”라며 물었을 때 답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동일하다고 말하면 허무주의자라 할 것이고, 다르다고 하면 영원주의자라 할 것입니다. 이럴 경우 차라리 답을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부처님이 사구분별에 대하여 무기(無記)하신 이유입니다.

 

부처님은 예를 갖추어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을 때 설해 주었습니다. 누군가 “존경하는 세존께서는 저에게 괴로움을 보여 주십시오. 존경하는 세존께서는 저에게 괴로움을 가르쳐 주십시오.(S12.17) 라고 요청했을 때 연기의 발생과 소멸의 원리로 연기법으로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었습니다.

 

생물학적 입태조건 

 

불교에도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특히 윤회와 관련하여 유아론적인 영체를 용인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 맛지마니까야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M38)’일 것입니다. 문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Tiṇṇa kho pana bhikkhave sannipātā gabbhassāvakkanti hoti: idha mātāpitaro sannipatitā honti, mātā ca na utunī hoti, gandhabbo ca na paccupaṭṭhito hoti, neva tāva gabbhassāvakkanti [PTS Page 266] [\q 266/] hoti. Idha mātāpitaro ca sannipatitā honti, mātā ca utunī hoti, gandhabbo ca na paccupaṭṭhito hoti, neva tāva gabbhassāvakkanti hoti. Yato ca kho bhikkhave mātāpitaro sannipatitā honti, mātā ca utunī hoti, gandhabbo ca paccupaṭṭhito hoti, eva tiṇṇa sannipātā gabbhassāvakkanti hoti.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일이 조화가 되어 입태가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합하더라도, 어머니에게 아직 경수가 없고, 태어나야 할 존재가 현존하지 않으면, 입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합하고, 어머니에게 경수가 있더라도, 태어나야 할 존재가 현존하지 않으면 입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합하고, 어머니에게 경수가 있고, 태어나야 할 존재가 현존하여, 이러한 세 가지 일이 조화가 되어 입태가 이루어진다.”(M38)

 

 

생물학적 입태의 조건에 대한 설명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입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암수의 결합, 적당한 시기, 생명현상으로서 의식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세 번째 생명현상으로서 의식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태어나야 할 존재라 했는데 이 말은 빠알리어 간답바(gandhabba)를 번역한 것입니다. 초불연에서는 빠알리 원문대로 간답바라 번역했습니다.

 

최근 어떤 이는 스리랑카 퓨어담마사이트를 보고서 간답바가 있어야 인간계와 축생계의 윤회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재생연결 시점에서 멘탈바디가 형성되는데, 이는 재생연결시점과 죽음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정신적인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멘탈바디를 간답바라 합니다. 마치 맛지마니까야에 나오는 간답바를 근거로 하여 하나의 존재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결생의 과정에서 하나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십이연기의 고리에서 멘탈바디라는 간답바가 개입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M38)’에서 간답바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습니다. 대체 간답바는 어떤 의미일까?

 

인습적인 표현이 있는데

 

불교에서는 무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을 보면 에왕 메 수땅(Eva me suta)”하며 경이 시작됩니다. 이는 한역으로 여시아문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가 됩니다. 무아의 불교에서 나는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통용되는 인습적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 거룩한 님의 경(S1.25)’이 있습니다. 천신이 부처님에게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거룩한 수행승이‘나는 말한다.’고 하든가‘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고 할 수 있으랴? (S1.25)라며 마치 시비조로 말을 거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라한이라면 번뇌가 다하여 무아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말할 때마다 내가라 한다면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지적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답송합니다.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거룩한 수행승이

‘나는 말한다.’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고 하여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S1.25)

 

 

부처님이 설법할 때 라고 한 것은 인습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세상의 관례에 따라 부르는 명칭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경이 시작될 때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에서 라는 말도 세상에서 통용되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간답바라는 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간답바(gandhabba)와 간땁바(gantabba)

 

맛지마니까야 주석에 따르면 간답바에 대하여 태어나야 할 존재라고 해석했습니다. 정신적인 몸과 같은 간답바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업의 힘에 의해서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를 말합니다. 만일 간답바를 인정하게 된다면 이는 미래의 부모가 성교할 때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는 영혼과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간답바와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복주석을 근거로 들어 간답바(gandhabba)는 간땁바(gantabba)일 것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간답바는 간땁바의 속어형태일 것이라 합니다. 간땁바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gam(to go)’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디론가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간땁바에 대한 빠알리어 사전을 찾아보면 과거분사형으로 ‘should be gone’의 뜻입니다.

 

경에서 마치 유아론적 영체를 뜻하는 간답바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를 오해하여 영혼체로 볼 수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는 간답바가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사대왕천의 신들을 말하기도 하고, 두 번째로 향기나는 곳에 사는 신들을 뜻하기도 합니다. 간답바에 대한 세 번째 의미는 결생시에 업의 힘에 의해서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를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복주석에서는 업에 의해서 [다음 생으로] 가야만 하는 어떤 중생이 다시 태어날 때에 전생의 [마지막 자와나 순간에] 생긴 태어날 곳의 표상 등의 대상을 원인으로 하여 다시 태어남에 직면한 것을 말한다.”(VinAT.ii.13)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건발생의 원리에 따르면

 

예로부터 사람들은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윤회가 성립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만약 윤회의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윤회라 부르지 않고 환생이라 불러야 할 것입니다. 윤회한다는 것은 윤회의 주체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무아이어야 윤회가 가능합니다. 이는 연기로 설명됩니다.

 

십이연기는 조건발생의 원리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열두 가지 고리를 보면 주체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고라는 식으로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단계만 있을 뿐이지 연기전체를 주관하는 주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계마다 조건발생입니다. 그런데 발생만을 연기라 볼 수 없습니다. 조건소멸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를 설할 때 항상 조건발생과 조건소멸을 함께 설했습니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소멸하는 연기법에 따르면 허무주의와 영원주의는 발 붙일 수 없습니다. 당연히 윤회의 주체를 가정하는 간답바도 인정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이 매우 심오하다고 했습니다.

 

디가니까야 인연의 큰 경(D15)’에 따르면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연기법이 매우 심오함을 말하면서 저에게는 아주 명백한 것으로 보입니다.” (D15)라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이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는 깊고, 심오하게 출현한다.”(D15)라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조건적 발생의 법칙(paiccasamuppāda)라는 말입니다. 연기라는 말자체가 조건하여(paicca)’ ‘함께 발생한다(samuppāda)’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조건 발생에 창조론이나 우연론이 끼여들 여지가 없습니다. 당연히 영혼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결생시에 간답바와 같은 영혼체를 인정한다면 연기법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십이연기에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있다.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라는 것은 종자가 싹 등의 상태를 지나 나무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조건발생에 따른 상속입니다.

 

윤회의 주체는 없다

 

결생하는데 있어서 어떤 행위자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부모가 성교시에 기회를 엿보고 있는 간답바와 같은 영체가 있다면 조건발생이라는 연기의 법칙에 맞지 않습니다. 또 멘탈바디와 같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몸이 있어서 이를 명색으로 보아 식과 결합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 또한 조건발생으로 설명되는 연기와 맞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은 마치 우유에서 응유가 생겨나는 것처럼 조건발생으로 설명됩니다. 씨앗이 발아하여 나무가 되듯이 조건 발생하는데 이전의 것과 이후의 것은 것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습니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라 했을 때, 무명을 원인으로 형성이 생겨날 뿐이지 다른 것이 생겨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연기법을 알면 허무주의 영원주의를 버립니다. 그리고 원인없이 발생한다는 우연론도 있을 수 없습니다. 조건에 따라 찰라찰라 발생하고 상속해 가는 것이 연기의 법칙입니다. 여기에 어떤 주재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간답바와 같으 윤회의 주체도 있을 수 없습니다.

 

 

아난다여, 이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는 깊고, 심오하게 출현한다. 아난다여,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꿰뚫어 보지 못하면, 이와 같이 이 뭇삶들은 실타래에 묶인 것과 같이, 마름병에 덮인 것과 같이, 문자풀에 엉킨 것같이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지옥의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D15)

 

 

 

2018-06-2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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