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행복하여라! sukho Buddhānaṃ uppādo!

▣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불교를 생각한다/[스크랩]

[스크랩] 범부는 미친 사람과 같다

moksha 2018. 3. 13. 22:59


범부는 미친 사람과 같다

 

 

범부는 미친 사람과 같다.” 이 말은 청정도론에 나오는 말입니다. 범부는 “‘이것은 옳다. 이것은 그르다.’라고 숙고하지 않고, 어떠한 집착을 통해서든, 어떠한 존재든지 원하여 어떠한 업을 짓는다.”(Vism.17.261)라고 합니다. 악업이든 선업이든 지어서 다시 태어남을 유발한다면 미친 행위와 같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결혼

 

결혼은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라 합니다. 그럴거라면 해서 후회하자고 합니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들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 합니다. 그런데 더 미친 짓은 재혼하는 것입니다.

 

초혼에서 실패한 자가 있습니다. 그토록 고통을 당했으면서도 단지 외롭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재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음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혼을 해서 이혼할 것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결혼은 어리석은 자가 하는 것이고, 더 어리석은 자는 재혼하는 자입니다. 범부는 미친 사람과 같다고 했을 때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성립합니다. 범부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어떠한 행위이든지 서슴지 않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대 왜 슬퍼하는가

 

여기 슬퍼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비탄에 빠져 있고 근심하고 육체적으로 고통받고, 정신적으로 괴로워하고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가장 근본원인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르침 모르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에게 슬픔이 일어난 것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번뇌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경(Sn4.1)’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감각적 쾌락의 길에 들어서

욕망이 생겨난 사람에게

만일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면,

그는 화살에 맞은 자처럼 괴로워합니다.”(Stn.767)

 



 

욕망이 충족되지 못했을 때 불만족이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게송에서는 화살에 맞은 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화살을 맞으면 아플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정신적 화살입니다.

 

모든 것은 모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괴로움도 슬픔도 무명 때문입니다. 무명은 번뇌로 인해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단지 외롭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결합을 했을 때 살다 보면 견해 차이도 있을 것입니다.

서로 다른 인격체가 만나 끊임 없이 갈등 했을 때 차라리 혼자 사느니만 못합니다.


범부는 예전의 괴로웠던 기억을 잊어 버리고 새로운 대상과 새출발합니다. 그러나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감각적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재혼 역시 미친 짓이 되기 쉽습니다.

 

왜 슬픔이 생겨나는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하면 일시적으로 행복할지 몰라도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됩니다. 괴로움은 비탄, 근심, 고통, 슬픔, 절망을 야기하게 됩니다. 감각적 욕망과 관련하여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습니다.

 

 

욕망에서 슬픔이 생겨나고

욕망에서 두려움이 생겨난다.

욕망을 여읜 님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두려움이 또한 어찌 있으랴.”(Dhp.215)

 

 

욕망에서 슬픔이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슬픔이 생겨나는 원리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사물에 대한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분리될 때에 슬픔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번뇌를 원인으로 생겨난다.”(Vism.17.276)라고 했습니다. 욕망과 분리 되었을 때 슬픔, 비탄, 괴로움이 발생함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 때문에 슬픔이 생겨납니다. 사랑하는 자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납니다. 처음부터 사랑하는 자를 만들지 않았다면 슬픔도 괴로움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사랑하는 자를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자와 헤어지는 것은 참으로 불행이다.”(Dhp.211)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 때문에 슬픔이 생겨납니다. 애착 때문에 슬픔이 생겨나고, 쾌락 때문에 슬픔이 생겨나고, 욕망에서 슬픔이 생겨나고, 갈애에서 슬픔이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무명은 번뇌로부터 생겨난 것이라 했습니다. 더 이상 번뇌를 일으키지 않으면 무명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안다면 더 이상 슬퍼하지도 않고 괴로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애착 때문에, 쾌락 때문에, 욕망에서, 갈애에서 슬픔이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때문에 번뇌가 생겨납니다.

 

 

그는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되지만 그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 물질이 변화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 (S22.1)

 

 

오온에 대하여 자아와동일시 했을 때 온갖 번뇌가 일어납니다. 오온 중에 느낌을 나의 것이라고 여긴다면 즐거워도 내가 즐거운 것이고, 슬퍼도 내가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느낌은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한 느낌에 대하여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안다면 더 이상 즐거워하거나 슬퍼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범부는 미친 사람과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온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오온을 떠나서 달리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 밖에서 해답을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관찰하여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즐거운 느낌도 괴로운 느낌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느낌을 나의 것이라 여기면 갈애가 발생합니다. 괴로우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하는데 이것도 갈애입니다. 즐거우면 즐거운 느낌이 오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갈애입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무덤덤한 상태는 중립적 느낌이어서 언제 변할지 모르지만 즐거움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에 갈애로 봅니다.

 

괴로움은 본래 괴로운 것이어서 슬픈 것입니다. 즐거운 것과 중립적인 것은 오래 가지 않아 슬픈 것입니다. 이래저래 모든 느낌은 슬픈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자는 느낌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현자에게는 슬픔이 없습니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욕망으로 사는 범부는 오온을 나의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슬프게 살아갑니다. 가르침을 모르는 범부는 어리석어서 미친 사람과 같습니다.

 

 

괴로워하는 자는 즐거움을 원하고

즐거워하는 자는 더욱 즐거움을 원한다.

또한 평정은 적정인 까닭에

마찬가지로 즐거움이라고도 설해진다.

 

그러므로 세 가지 느낌도

갈애의 조건이 된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고

위대한 선인께서 설했다.”(Vism.17.238)

 

 

 

2018-03-12

진흙속의연꽃


출처 : 진흙속의연꽃
글쓴이 : 진흙속의연꽃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