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에서 시작점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
“진리, 뭇삶, 결생,
조건의 유형 네 가지 사실은
보기도 어렵고
설하기도 극히 어렵다.”(Vism.17.25)
이 말은 붓다고사가 십이연기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게송으로 말한 것입니다.
네 가지 보기 어려운 것
붓다고사는 5세기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 마하비하라(大寺)에서 앗타까따라는 고주석을 근거로 하여 청정도론(Visuddhi-magga)을 저술했습니다. 경, 율, 론 삼장에 통달한 붓다고사는 전승되어 온 주석을 바탕으로 논서이자 일종의 수행지침서와 같은 청정도론을 완성했습니다.
붓다고사에 따르면 진리(Sacca), 뭇삶(satta), 결생(paṭisandhi), 조건(paccayā) 이 네 가지에 대하여 보기도 어렵고 설하기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사성제, 업생으로서 중생, 죽음 이후의 내세와 윤회, 그리고 십이연기로 대표되는 연기법은 범부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처럼 깨달은 자의 경지에서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모른다고 하여 ‘그런 것은 없다’거나 ‘몰라도 된다’라고 한다면 대단히 경솔한 것입니다.
조건법으로서 연기법
네 가지 보기 어려운 것 중에 조건(paccayā)이 있습니다. 이 조건은 다름 아닌 연기법을 말합니다. 그래서 연기법을 ‘조건법’이라고도 합니다. 연기를 빠알리어로 빠띳짜사뭅빠다(paṭiccasamuppāda)라 하는데, 여기서 빠띳짜(paṭicca)가 ‘조건’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연기를 뜻하는 빠알리어로 빠띳짜사뭅빠다는 조건법이 되기도 합니다.
연기법은 발생법이 아닙니다. 조건지어져 발생하기 때문에 ‘조건발생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조건지어져 소멸하기 때문에 ‘조건소멸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이연기를 보면 항상 연기의 순관과 연기의 역관이 동시에 설해집니다. 이렇게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기 때문에 연기법 또는 조건법이라 합니다.
조건법으로서 연기법은 청정도론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삼장을 통달하고 고주석에 바탕을 둔 붓다고사가 체계적으로 설명해 놓았습니다. 누구든지 청정도론을 읽으면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하셨는지 이해됩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로서 ‘무명’이 있습니다.
“번뇌가 생겨남으로 무명이 생겨난다”
십이연기 출발점은 무명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무명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무명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또한 힌두교에서 말하는 원인과 결과가 한꺼번에 들어 있다는 원질론(pakativadin: 因中有果論)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순환적 연결고리로 되어 있는 십이연기에서 다만 무명을 편의상 가장 앞에 놓았을 뿐입니다.
무명 이전에 무엇이 있었을까? 이에 대하여 붓다고사는 니까야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번뇌가 생겨남으로 무명이 생겨난다. (Āsavasamudaya avijjāsamudayo)”(M9)라 했습니다. 무명을 일으킨 근본 원인을 번뇌로 보는 것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초기경전을 근거로 합니다.
“벗들이여, 어떠한 것이 번뇌이고, 어떠한 것이 번뇌의 발생이고, 어떠한 것이 번뇌의 소멸이고, 어떠한 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입니까? 벗들이여, 세 가지 번뇌가 있는데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의한 번뇌, 존재에 의한 번뇌, 무명에 의한 번뇌입니다. 무명이 생겨나므로 번뇌가 생겨나고 무명이 소멸하므로 번뇌가 소멸합니다.”(M9)
맛지마니까야 ‘올바른 견해의 경(M9)’에 따르면 무명이 발생한 것은 명백하게 번뇌 때문입니다. 이는 “번뇌가 생겨나므로 무명이 생겨나고 번뇌가 소멸하므로 무명이 소멸합니다.”(M9.67)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번뇌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번뇌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2017년 4월에 중도세미나를 들었습니다.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린 고요한소리 창립 30주년 세미나였습니다. 그때 이유미 교수는 번뇌의 원인으로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을 들어 설명했습니다. 경에 따르면 번뇌가 일어나는 요인으로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은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입니다.
유신견은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말합니다. 그런데 자아가 있다는 견해는 모든 번뇌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몸, 느낌, 지각 등 오온에 대하여 자아를 상정하면 번뇌가 일어납니다. 모든 번뇌의 뿌리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에서 발생됩니다. 그런데 번뇌가 생겨나므로 무명이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십이연기의 출발점은 사실상 유신견에서 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윤회(輪廻, saṃsāra)라 하는가?
십이연기 정형구는 무명부터 시작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하여 형성이 일어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하여 의식이 일어나고 식으로 진행됩니다. 가장 끝에 가서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이 함께 생겨난다.”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반복됩니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번뇌가 멈추어지지 않기 때문에 번뇌가 생겨나므로 또 무명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십이연기는 돌고 돌아 갑니다.
번뇌가 생겨나므로 무명이 생겨납니다. 반대로 무명이 생겨나므로 번뇌가 생겨납니다. 번뇌와 무명은 서로 맞물려 돌아갑니다. 그래서 십이연기가 회전됩니다. 연기가 회전되기 때문에 이를 윤회(輪廻, saṃsāra)라 합니다.
윤회에서 시작점은 발견되지 않는다
윤회의 시작점은 무명이 아닙니다. 무명은 십이연기에서 편의상 앞에 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환적 십이연기의 구조에서 무명이 절대적인 시작점이 될 수 없습니다. 무명도 조건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무명과 무지를 같은 것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Pps.I.224에 따르면, 무지는 번뇌의 조건이고 번뇌는 무지의 번뇌를 포함하는데 다시 무지의 조건이 된다. 이 무지에 의한 무지의 조건은 어떠한 존재속에서의 무지는 전생의 무지에에 의해 조건지어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처럼 번뇌가 무지에 의해서 무지가 번뇌에 의해서 조건지어졌으므로 제일원인(前際)은 무지의 무명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제일원인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윤회는 시작이 없는 것이다.”(맛지마니까야 208번 각주)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까? 누구나 의문을 품는 근본적 문제입니다. 그래서일까 존재의 근원을 찾아 명상하거나 물질을 연구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하여 창조주를 제1원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윤회가 원환적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론의 경우 시작점과 끝점이 분명합니다. 창조주가 천지를 창조하는 것이 세상의 시작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종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일까 유일신교에서는 종말론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창조론과 종말론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대신 십이연기가 회전하는 윤회하는 세상으로 설명합니다.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속박되어
여기 원이 있습니다. 원은 시작점이 없습니다. 아무 곳이나 찍으면 그곳이 시작점이 됩니다. 십이연기도 그렇습니다. 십이연기에서 무명이 선두에 나오지만 회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마치 아이가 굴렁쇠를 굴리면서 달려 가는 듯한 십이연기 윤회에서 시작점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S15.1)
부처님은 뭇삶, 즉 중생이 윤회하는 시작점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무명이고 또 하나는 갈애입니다. 그런데 무명에 대해서는 덮인 것이라 했고, 갈애에 대해서는 묶인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무명이 과거의 원인에 따른 것이고, 갈애는 미래의 원인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윤회에 시작점이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제1원인을 가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로 설명합니다.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와 같은 절대자를 가정함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논리적 허구라 합니다.
누군가‘아버지의 어버지는 누구인가?’라며 물어 무한소급하다 보면 부동의 동자라는 제1원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는 존재론적으로 허구이고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와 같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브라만교가 그랬고 요즘 유실신교가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라 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무명을 필두로 하여 순환적 구조로 되어 있는 십이연기에서 어디가 시작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정 알고 싶다면 원의 한지점을 꼭 짚으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무명이 될 수도 있고 갈애도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의식이 될 수도 있고 태어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십이연기 모든 고리가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연기가 회전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물레방아처럼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리에서 도는 것이 아니라 회전하며 앞으로 나아 가는 것입니다. 굴렁쇠가 굴러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회전하는 윤회에서 굳이 시작점을 찾는 다면 무명과 갈애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S15.1)라 한 것입니다.
“경전을 가져와보라”
불교인이라 하면서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윤회는 생각일 뿐이라 합니다.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윤회는 없는 것이라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이 세상은 꿈속의 세상과 같이 환상이라 합니다. 그래서 아침이 되면 꿈에서 깨듯이 세상을 환상으로 보고 환상이 환상이 아닌 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러나 경전적 근거는 제시하지 않습니다.
경전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그의 생각을 뿐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을 견해라 합니다. 그런데 견해는 잘못된 생각이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과 견주어 보면 삿된 것입니다. 그래서 견해를 사견(邪見)이라 합니다.
어떤 이가 “이것이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럴 때그의 말을 따져 보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붓다고사는 “그들에게 ‘경전을 가져와보라.’라고 말해야 한다. 그들은 참으로 경전에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Vism.14.42)라 했습니다. 경전적 근거를 제시해야 함을 말합니다. 만일 경전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사견으로 간주하면 됩니다.
“스승의 의견을 섬기고 자신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고따마붓다는 많은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오늘날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또 가르침을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정리 해 놓은 것이 논서입니다. 그 중에서도 청정도론은 논서인 동시에 훌륭한 수행지침서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문자에 얽매이지 말라고 합니다. 심지어 수행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입만 바라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빠알리 삼장을 멀리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말하는 것과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과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경전을 인용하고 논장을 말하면 자신의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경전은 후대 편집되었다든가 믿을 것이 못된다고 말합니다. 또 논장은 왜곡이 심해서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합니다.
경전에 회의적이고 논장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론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경전을 보지 말라고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그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생각만 이야기할 뿐 경전을 근거로 하지도 않고 논장도 인용하지 않습니다.
불교인이라면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기 보다 경전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합니다. 경장이나 논장을 읽어 보면 우리들의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에 충분합니다. 그 동안 모르고 지냈던 것들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수 천년 전승된 가르침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붓다고사는 “스승의 의견을 섬기고 자신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Vism.3.64)라 했습니다.
2018-03-0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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