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 않았는데도 험담하는 자
재미 중에 가장 재미 있는 것은 사람이야기일 것입니다. TV를 보면 대부분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연예인들 이야기입니다. 연예인들의 사생활이나 일거수일투족은 일반사람들의 주요한 관심사입니다. 사람들은 연예인들 이야기에 넋을 놓고 봅니다. 어디를 가나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관심을 끕니다. 이른바 남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 흉을 본다든가 직장상사를 안주로 삼는 이야기 등 남 이야기만큼 흥미를 끄는 것이 없습니다.
최근 재가불교운동단체에서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재가단체 전대표가 연일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연속으로 거론 한다는 것은 불순하고 불온한 의도가 깔려 있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불교적폐청산이라는 목적을 향하여 같은 길을 가는 입장에서 적대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행위가 누구에게 좋은 것일까요?
조계종적폐청산 운동
지난 봄부터 시작 된 조계종적폐청산 운동은 매우 뜨거웠습니다. 모처럼 재가불교단체가 한데 뭉쳤고 무엇보다 그 동안 은인자중하던 스님들과 일반재가불자들이 합세하여 촛불법회 때마다 천명 이상 참여했습니다. 불자들은 일주문 앞에서 피켓팅하는가 하면 스님들은 릴레이단식을 했습니다. 마침내 수 천 명이 참여한 불교도대회 등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했습니다. 그랬음에도 바라는 목표가 성취된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범계승들은 똘똘 뭉쳐 부서지지 않는 그들만의 공동체를 더욱 더 공고히 했습니다.
사람들은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에 대하여 분노합니다. 작년 촛불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시민들의 분노는 결국 우리 사회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이미지를 주는 종교집단 마저도 알고 보면 모순과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교계 역시 썩은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에 뜻 있는 불자들과 스님들이 촛불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성과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변한 것은 없습니다.
역사적인 불교개혁운동에 동참하여 글을 남겼습니다. 이전에 한번도 이런 일을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같은 마음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소위 현장활동가들 중에는 다소 거칠고 급한 법우님들도 있었습니다. 범계승들에 대하여 분노하여 구호를 외치는데는 한목소리를 내었으나 문제는 좌절 되었을 때입니다.
분노가 내부로 향했을 때
사회에 대한 분노가 좌절 되었을 때 엉뚱하게도 내부로 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분노가 내부의 특정인에게 집중된 것입니다. 심지어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들 조차 적대시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하는데 이를 증명해 보이는 듯 합니다.
불교개혁이라는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이 있습니다. 서로 견해가 다를지라도 목적에 있어서는 같기 때문에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자신과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적대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꼭지의 꿀과 같은 분노의 가학성(加虐性)’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바 있습니다. 마치 사디스트처럼 욕먹은 자를 욕하고 맞은 자를 또 때리는 것과 같습니다.
초기경전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S1.71)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분노의 가학성(加虐性)을 말하는 대표적 문구입니다. 꼭지에 꿀이 있다는 것은 분노의 즐김을 말합니다. 분노와 함께 욕먹은 자를 욕할 때 쾌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서 쾌감은 꿀과 같고 분노는 독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분노의 쾌감 내지 분노의 가학성에 대하여 ‘꼭지에는 꿀이 있고 뿌리에는 독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분노의 가학성(加虐性)
누구나 분노의 가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루고자 하는 것이 좌절 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사회개혁을 외치는 자가 개혁이 좌절 되었을 때 분노가 내부로 향하여 동료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재가단체의 장을 지낸 A님게서 본 것입니다.
A님은 또 다른 재가단체의 리더라 볼 수 있는 B님을 문제 삼았습니다. 종단의 적폐를 보고서 침묵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으로 그치지 않은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한 것입니다. 이에 합리적으로 설명 했음에도 거론 한다는 것은 ‘분노의 가학성’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지난 뜨거운 여름 불자들은 피켓팅을 하고 촛불을 들었습니다. 현장에서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여 피켓팅한 법우님도 있고 촛불법회에 빠짐 없이 참여한 법우님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 때문에 직장 때문에 한두번 참석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매일 참석한 자나 한두번 참석한 자나 모두 동등하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부자가 가난한 자나 능력껏 보시하면 그 보시공덕은 동등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쁜 일상에서 모처럼 시간 내서 참석한 불자들이 있었기에 매회 천명 이상 되는 숫자를 기록했습니다. 설령 한번 참석했다고 하더라도 매일 참석한 자 못지 않은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기준에서 판단 했을 때 미흡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개혁이 좌절 되었을 때 분노가 내부의 특정인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전재가단체의 대표에게서 보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분노의 가학성입니다.
묻지 않았는데도 험담하는 자
누구나 단점이 있고 장점이 있습니다.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이라면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실을 왜곡하여 비방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그 사람 없는 데서 험담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없는 데서는 그 사람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없는 데서는 장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차피 그 사람 귀에 들어갈 것이라면 그 사람의 장점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험담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가 초기경전에 실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참사람이 아닌 사람의 경(A4.73)’이 그것입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없는 데서 남 말 하는 자 또는 험담 하는 자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이 아닌 사람은 남에게 단점이 있다면, 누군가 묻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힌다. 하물며 물었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군가가 캐어묻거나 질문을 제기하면, 빠짐없이 머뭇거리지 않고 완전히 상세히 남의 단점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라고 알아야 한다.”(A4.73)
단점을 이야기하는 자는 험담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 있는 것이 남 말 하는 자라 합니다. 주로 그 사람의 단점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자입니다. 입이 근질근질 한 것처럼 그 사람의 약점이나 단점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단체카톡방이나 페이스북에서 험담합니다. 마치 청중을 모아 놓고 공개적으로 험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공개망신을 주기로 작정한 것과 같습니다. 할 말이 있으면 당사자와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공개된 장소에서 험담한다면 매우 비겁하고 비열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자에 대하여 참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알아야 한다고 말씀 했습니다.
승가보다 여법한 재가단체가 출현했을 때
한국불교는 범계승들로 이루어진 단단한 카르텔에 장악 되어 있습니다. 촛불을 들고 삼보일배를 하고 성명을 발표 하고 법원에 고발해도 끄덕 없습니다. 그러나 이익으로 뭉쳐진 집단은 이해타산이 맞지 않으면 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단단한 범계카르텔을 부수려면 승가보다 더 여법(如法)한 재가단체가 출현해야 합니다.
정의로운 재가단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마치 회초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부러지지 않듯이, 각자 특성 있는 재가단체가 많이 생겨나 뭉치면 큰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여법하고 정의로운 재가단체가 커져 갈 때 자연스럽게 여법하고 정의로운 승가단체도 생겨날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여법하고 정의로운 재가단체와 승가단체가 성장해 갈 때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범계카르텔에도 균열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할 이야기가 있거든
각재가불교단체들은 한국불교 개혁을 향해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각단체마다고유의 특성을 살려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서로 격려 하고 칭찬하는 자세가 요청됩니다. 상대방의 성공에 대해서는 축하할 줄 아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무량심 ‘함께 기뻐함(喜: muditā)’에서와 같이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행복을 축하하고 공감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하여 적대시한다면 한다면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이라 볼 수 없습니다. 더구나 공개사과를 요구한다면 악의에 가득 찬, 분노에 가득 찬 폭력적 행위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A님은 당장 폭력적인 행위를 멈추어야 합니다. 할 이야기가 있거든 당사자와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카톡이나 페이스북과 같이 오픈된 공간에서 험담한다면 매우 비겁하고 비열한 행위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2017-11-3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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