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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생각한다/한국불교를 생각하다

[스크랩] [전문]한국불교의 위기상황과 재가운동의 역할

moksha 2017. 11. 30. 16:39

한국불교의 위기상황과 재가운동의 역할

우희종(여산)·바른불교재가모임 상임대표

1. 들어가며 
2. 한국불교 위기 상황의 원인 
3. 재가운동의 역할
 

1. 들어가며 

붓다의 길은 자신을 아는 것이고, 
자신을 아는 것은 자신을 잊는 것이며, 
자신을 잊는 것은 세상 만물에 의해 깨어나는 것이다. 
- 도겐(道元:1200~1253)의 ‘현성공안’ 중에서 

지난 6월 재심호계원은 20여 년 전 멸빈된 서의현 전 총무원장(이하 서의현)에게 공권정지 3년이라는 사면 판결을 내림으로써 이후의 사태는 그동안 다양한 형태로 종단과 관계를 맺어 오던 여러 재가단체의 공동 행동을 초래했고, 총무원 주도의 100인 대중공사에서 예정되었던 논의 주제마저 바꾸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서의현 사면이 담고 있는 의미는 이미 앞선 1, 2차 토론회에서 다양하게 지적되었고 이에 근거한 한국불교의 위기 상황에 대해서는 여러 번 거론되었기에 이 글에서 반복할 필요는 없으나, 본 발제에서는 한국불교의 위기상황에 대한 원인을 생각해 보고 이런 종단 현실에서 사부대중의 일원으로서 재가운동은 어떠해야 되겠는가를 다루고자 한다. 재가운동의 역할은 원인에 대한 검토로부터 도출될 것이다. 현 시점에서 ‘한국불교의 위기 상황’을 이야기하려면 다양한 층위에서 거론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출가자 숫자의 급격한 감소나 종단 내의 성차별 문제를 비롯하여 이웃 종교와의 현황 비교를 통해 접근할 수도 있으나 이런 측면에서의 논의는 이미 어느 정도 기초 조사도 있고 논의되고 있는 중이기에 본 발제에서는 서의현 사면 사태로 상징되는 지점과 논의과정에서 드러나는 한국불교의 위기 상황에 대하여 거론하고자 한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위기라는 넓은 지평에서 본다면 서의현 사면도 최근 종단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른 상황과 같이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발제자는 재가자로서 종단 비리나 부패상황에 대해서도 작년 한국 선수행의 대표적 승려인 송담 스님의 탈종 사태 이후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입장이기에 이곳에서의 시각은 매우 일천한 관점일 수도 있으나, 현 상황을 종단 권력이나 재가운동 집단 간의 역학관계로부터 무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최근 새로운 재가단체 모임을 결성한 입장에서 서의현 사면 사태로 상징되는 ‘한국불교의 위기 상황’에 대한 원인과 이에 대한 ‘재가운동의 역할’에 대하여 나름 논의해보고자 한다. 

한편, 이 글에는 선종을 표방하는 대승불교로서의 조계종단 가르침에 대한 검토와 더불어 재가자들이 지닌 문제점에 대한 반성도 포함된다. 무엇보다 많은 종도들이 승속을 떠나 서의현 건을 조계종단을 뒤흔드는 사태로 받아들이고 거론하는 상황이야말로 어쩌면 오히려 현재 한국불교의 위기 상황을 역설적으로 잘 드러내 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의현 사태가 94 개혁정신을 철저히 부정하고 있음을 지적한 앞선 토론회의 발제 내용에서도 있지만, 서의현 사태가 ‘현 조계종의 정체성’을 부정했다는 것은 오히려 이것이 우려스러운 한국불교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지점이다. 이러한 점을 포함해 우선 서의현 사면으로 새삼 거론되는 한국불교의 위기에는 사부대중 모두의 몫이 있기에 일단 승가와 재가자의 두 측면에서 살펴본다. 
2. 한국불교 위기 상황의 원인 

가. 종단과 집행부 

1) 잘못된 가르침과 수행 
긴 역사를 지닌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를 표방하며 참선 수행에 기반한 선종 형태로 우리사회에 자리 잡고 있다. 개인의 욕망의 소멸과 아라한과 증득을 강조한 초기불교에 비하여,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관점을 지닌 선종은 보살행의 큰 발원을 통한 중생 제도로 회향한다. 이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고, 화엄경 보원행원품에 있듯이 여실지견을 통한 동체대비의 마음과 자타일여의 태도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란 분리된 두 개념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이다. 
일상의 삶의 현장에서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어 가기 위한 노력 그 자체가 깨달음을 향한 수행이어야 하는 것이 대승불교라면, 우리사회에서 불교의 실행집단인 승가로서의 조계종단은 대승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을 강조하면서도 여전히 초기불교의 개인 수행과 깨달음의 형태를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준하여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선후로 분리된 두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렇기에 내가 먼저 깨달아 무상정각을 이뤄야 중생제도를 하는 것이고 개인 의 깨달음이 선행되지 않는 이들의 보살행이란 포교사 수준에 불과하다는 종정스님의 발언마저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조계종단의 소의경전인 금강경만 보아도 아상(我相)을 비롯한 사상이 없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음을 무시한 비불교적 입장이다. 내가 깨달아야 된다는 상구보리가 먼저 되어야 하화중생이 가능하다는 논리는 이미 너와 나로 분별한 상태에서 진리를 찾는 형태이기에 철저히 비불교적 전제이다. 이 지점에서 조계종은 스스로 대승불교라고 강조하면서도 개인의 깨달음을 강조한 초기불교식 수행을 강조하는 분열된 모습이고, 이러한 잘못된 불교관에 의거한 종단의 모습이기에 승속을 떠나 너도 나도 개인의 깨달음에 일생을 허비하면서 정작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자타불이와 동체대비를 상실한 모습으로부터 한국불교의 위기라는 기반이 형성된다. 

연기실상을 깨달은 싯달타는 깨어있는 붓다(覺者)로서 우리에게 깨어있는 삶에 대한 가르침을 폈고, 스스로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 실천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보살의 깨어있는 삶을 이야기하지 않고 오직 깨달음만으로 삶을 소진시키는 것이 전부인양 가르친다. 승속을 떠나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도 그저 산 속에 들어앉아 방과 할로 세월을 보낸다. 크게 깨달아 깨어있음이 되어야 한다는 ‘대오각성’이란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성은 사라지고 단지 깨달음만이 목표가 된 미완의 한국불교 현실이다. 

이렇게 대승불교를 표방하면서도 지극히 초기불교식 관점으로 분열되어 뒤죽박죽의 종단 상황에서 보게 되는 잘못된 가르침의 또 다른 사례는 철저히 너와 내가 분리된 상태와 더불어 치열한 내면으로의 수행을 강조하여 모든 수행을 개인화시킨다는 점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불이의 대승적 관점에서 보면, 수행에 있어서 치열한 자신 내면에의 성찰이라는 가르침은 너와 내가 함께 존재하는 공적 차원의 집단이나 사회에서는 너와 나를 위한 형태로 전개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에 내면의 무명을 타파하기 위한 치열한 개인 수행은 집단이나 사회의 무명을 타파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 종단의 가르침은 개인 내면을 향한 수행만을 강조하면서 집단이나 사회의 잘못된 모습에 대한 관심을 제거하는 형태의 가르침에 몰두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너와 내가, 개인과 집단이나 사회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풀어가야 함을 망각한 미완의 가르침에 불과하기에, 이는 철저히 불교를 속한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자신들만의 잔치로 국한시킴으로서 불교 발전에 치명적 영향을 줌도 잊어서는 안된다. 

초기불교에서 강조되었던 치열한 개인 수행은 대승불교에 있어서 개인수행과 더불어 치열한 현실 속 참여가 되어야 함을 철저히 무시한 종단 스님들의 가르침 자체가 한국불교의 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셈이다. 

한편, 100보 양보해서 개인 수행과 대승 보살의 삶을 구분하는 종단이 잘못된 가르침을 제쳐놓고 생각해 보아도 대부분 개인 수행으로 일생을 소진하게 되는 현 조계종단의 수행체제란 최종적으로 보살행으로 회향이 되지 않는 매우 건강하지 못한 수행관과 체제라는 점을 인식하고 이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신도에게 있어서도 병폐로서 작용하고 있다. 미완의 분열된 한국불교의 가르침에 기반한 채 평생 수행이랍시고 앉아 있어 보았자 대부분 화엄경에서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 보살행이라는 최종 회향은커녕, 깨어있음에 대한, 입전수수의 경지까지 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평생을 보내야 된다. 종단 내 많은 출가자들은 회향으로 가기도 전에 중간 단계에서 외부로 눈을 돌리고 이는 결국 방황과 타락으로까지 연결되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94년 개혁 이후에도 종단 내 가르침과 수행방법 자체가 진정한 대승 보살로의 삶으로 이어지기는커녕 종단 내부의 상황이은 더욱 더 악화되면서 출가자들의 방황은 종단의 도박, 사음, 절도, 표절 및 은처 등의 문제로 돌출되게 되었고, 이는 분열된 가르침의 결과다. 다시 말해 바른 가르침과 푸르른 정법이 살아있다면 일어나서는 안될 그런 일련의 상황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이를 묵인하며, 심지어 서의현 사면이 등장한 것은 종단 내부의 진정한 가르침의 부족과 건강하지 못한 수행체제라는 현실이 있으며, 그런 종단 문화가 현 한국불교의 위기를 초래한 기초가 된다. 

2) 계파 싸움과 천박한 화쟁 
스님들이 재가자로부터 존경과 시주를 받는 것은 모든 세속 가치를 뒤로 하고, 탐진치라는 무명을 떨치고자 출가의 길을 걷기 때문이다. 목숨을 건 치열한 청정수행을 통해 부처님이 49년간 보여준 동체대비의 삶을 구현하고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 사찰 주지스님이나 종단 집행부의 권승들은 매우 부유하다. 대형 외제차 수준을 넘어 억 단위의 돈 선거는 물론 막대한 액수의 도박도 알려져 있다. 빈손으로 출가하는 것이 출가의 기본 정신이라면 몇 십억 대의 개인 재산은 어디서 얻어진 것일까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청정수행은커녕 오히려 재가신도들의 신심을 이용해 무위도식하는 집단에 불과하다. 

국가지원금까지 포함해 일 년에 조 단위의 재정이 거론되는 교계 상황은 막대한 이윤이 걸린 싸움판으로 변했고, 이를 위해 정치인들이나 하는 계파 형성이 종단 내에 당연하게 되었다. 교계 내부의 돈과 이를 확보하기 위한 자리싸움은 결국 계파 간 세력 싸움으로 발전했고, 더욱이 이들은 이해타산 속에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전형적인 부패집단의 이합집산 형태로 움직이고 있다. 심지어는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범계승이나 은처승마저 계파 관리 차원에서 결코 제대로 징계 받지 않고 수용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승가 자체가 수행에 장애가 되는 재정 관리로부터 분리되어 수행에 집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불교자본가로 칭하면서 재정 관리 주체로 규정하고 있는 현실은 한국불교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잘 나타내고 있다. 종단 내의 권승들이 불교 발전보다는 이권 싸움에 집중하다보니 한국불교의 위기는 더욱 개선될 수 없는 구조를 지니게 된다. 서의현 사면 역시 이런 흐름의 연장에 불과하다. 

이권에 얽힌 탐욕싸움이란 많은 잡음을 낳게 마련이고 권력집단은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소중한 불교적 가치인 원효의 화쟁을 활용해 철저하게 자신들을 보호하게 된다. 본디 화쟁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이야기에 있듯이 전체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그런 주장이란 ‘옳지만 맞지 않음’을 지적한다. 서로 열린 자세를 통해 각자 관점의 모습과 한계를 인정하고, 서로 상통하여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총체적이고 바른 시각을 도출함으로서 다양한 의견과 관점에 의한 모순과 대립을 하나의 통합된 체계로 회통해 풀어가는 것이다. 화쟁은 절충이나 타협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각자의 좁은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갈등 상황이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탐욕에 의해 생겨난 상황에서는 화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일한 대상에 대한 각각 다른 해석이나 관점의 충돌로 인한 오해된 상황이 아니라, 고통이 원인인 탐욕에 의해 생겨난 왜곡된 갈등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있어서 양쪽 다 부족함이 있으니 서로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화쟁으로 무마하는 것은 일종의 사기이자, 기만이 된다. 이때에는 탐욕으로 점철된 모습을 밝히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것을 파사현정이라 부른다. 파사현정이 없는 화쟁이란 기득권자들의 권력과 폭력을 보호하고 조장하는 천박한 화쟁이다.불행히도 종단 내부 이권과 계파간의 갈등 관리를 위해 천박하고 의도적인 화쟁을 마치 진정한 화쟁인 양 몰아가는 상황에서 한국불교의 위기가 심화된다. 탐욕스런 권승들의 행태에 대한 파사현정의 비판을 종단 자체에 대한 비난으로 몰아가거나 아니면 적당히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절충과 타협으로 화쟁을 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종단에 대한 건강한 비판이란 불가능하고, 종단 권력집단에 대한 개선 노력은 무화되어 위기상황은 지속된다. 

3) 종단과 총무원 권승들의 일체화 
종단이 지향하는 선종의 모습이 매우 혼란스럽기 때문인지 승속을 떠나 조계종단과 조계종단 집행부의 분명한 구분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건강한 종단 발전을 막고 한국불교의 위기에 기여하고 있다. 
앞선 토론 발제 내용에서도 서의현 사태를 ‘현 종단 조계종의 정체성’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서의현 사태는 ‘현 조계종의 정체성’ 문제가 아니라 94 개혁정신을 망각한 ‘현 조계종 집행부의 정체성’ 문제다. 오히려 ‘현 조계종의 정체성’ 문제는 작년에 있었던 대표적 수행승인 송담 스님의 탈종 사태와 최근 노골적으로 진행 중인 해인사 사태다. 한국 선수행의 상징적 사찰인 법보종찰 해인사 방장 및 주지 선출 과정에서 드러난 돈 선거 및 폭로 싸움이다. 

그 수행 방식의 논란을 떠나 어쨌든 한국 불교 선수행의 대표적 승려인 송담 선사가 종계종단과는 수행가풍이 다르다는 선언과 함께 탈종을 선언했다. 한국불교를 상징하는 조계종단이 선종을 표방하는 선수행의 가풍을 잃어버린, 변질된 종단으로서 멸빈 선고를 받은 셈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 전국수좌회의 미미한 행동은 있었을지언정 그 후 종단 차원의 반성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송담 스님이 지적한 이런 종단의 모습은 해인사 방장 돈 선거로 극명히 세간에 드러나게 되었다. 치열한 참선 수행의 모범을 보여 수많은 종도로부터 존경받았던 성철 스님 열반 이후, 해인총림의 상징적 위치인 방장 선거와 사찰 주지 임명으로 인해 억 단위의 돈이 오고가고 세속 사법부에 호소하고 호법부에 진정하는 사태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성철 스님 열반 후 해인사 방장과 주지 자리를 놓고 스님들 간에 복잡한 줄다리기가 있어왔다는 것은 종도들로서 알만한 이는 다 안다. 그런 분규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한국 선수행의 상징적 사찰로서의 품격만 잃지 않는다면, 어느 종교집단에서도 볼 수 있는 내부 갈등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이제 해인사의 해묵은 자리싸움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 방장과 주지 자리에 대한 탐욕 현장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어찌 보면 이는 종단 권승들이 보여주고 있는 도박과 은처와 더불어 폭행, 절도, 표절 등으로 비판받는 상황에 비하여 더하면 더했지 결코 가볍게 간과할 부분이 아니다. 사판승들은 드러내 놓고 탐욕을 부리고 권승이 되어 비록 도박도 하고 가족도 숨겨두지만, 수행한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선수행의 상징 사찰인 해인총림은 겉으로 수행을 내걸지만 내부적으로는 탐욕으로 점철된 장소로 전락했고 이는 돈과 자리싸움하는 일부 사판승보다 더 초라한 모습이다. 

더욱이 무엇보다 참담한 것은 총림의 이런 상황 속에서 현재 선방에 앉아 있는 많은 수행승들을 포함하여 해인사 사부대중이 현 해인사 상황에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권력에 의한 폭력적 상황에서 침묵하는 이들은 그 폭력 상황에 동참하는 것임은 출가사회나 세속사회에서나 동일하다. 해인사 방장과 주지 자리다툼이 이미 일정 한계를 넘어 외부로까지 그 불미스런 이야기가 넘쳐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700여명의 구성원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기형적 상황 역시 한국불교의 위기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청정수행가풍의 선종을 표방한 조계종의 정체성 자체가 거의 회복 불가능 상태로 무너져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가 작년과 올해에 연이어 터져 나온 셈이다. 

비록 모든 상황은 연계되어 있기는 하나, 요즘 많은 종도들이 우려하는 서의현 사면 문제는 94년 개혁정신을 망각한 ‘현 조계종단 집행부의 정체성’ 문제의 성격이 강하다면, 송담 스님의 탈종과 해인총림에서의 방장 돈 선거와 주지직 싸움은 ‘종단 자체의 정체성’을 묻는 상황에 가깝다. 이 점이 분명하지 못할 때 종단 집행부 권승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적하고 받는 그 어느 쪽이건, 총무원이라는 집행부에 대한 건강한 비판을 마치 종단 자체를 비난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됨으로서, 지적된 문제점을 개선하기보다는 종단을 보호한다는 잘못된 착각에 빠져 건강한 비판 목소리를 죽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나. 재가자와 재가 단체 

종단에서 94 개혁 정신이 사라지고 종단 집행부의 부피와 비리가 현재처럼 상승하게 된 것에는 종단 내부의 모습과 더불어 재가자들도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사부대중에 있어서 청정 출가수행자로서의 승려는 당연히 재가신도들의 존경과 공양 받을 자격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며 소욕지족의 삶과 더불어 일반인들의 사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자등명 법등명 (自燈明 法燈明)이 있듯이 불자는 가장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의지처로 삼고, 진리를 의지처로 삼아야 한다. 그렇기에 사표가 된다는 말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군사부일체의 유교적 사고에 익숙한 이들은 사표로서의 승려가 지닌 의미는 재가가의 무조건 복종을 의미한다고 착각하곤 한다. 

1) 극복해야 할 굴종의 신앙 
승가도 사회 속 인간집단 중의 하나이기에 다른 인간 집단이 지니는 문제점은 다 나타날 수 있다.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으나 특정 종교를 떠나 모든 종교에서 부정부패와 비리는 과거로부터 늘 있었다. 이들은 단지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결단력 있는 이들이라는 점에서 일반인들과 다를 뿐이지 기본적으로 서로 다를 것은 없다. 승려들 역시 잘못하고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다. 하지만 이들이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세속적 부분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반성 및 참회를 하는 이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자세를 지니지 않고 탐욕으로 물든 승려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겉으로 보이는 상에 끄달리지 말고 진정한 실상을 보라는 금강경 한 구절만 보아도 그들은 이름하여 출가자요, 수행하는 승려일 뿐 진정한 출가수행자가 아니다. 이들은 출가수행자의 옷을 걸치고 종도들에 기생하는 이들에 불과하다. 
재가자는 탐진치가 요란한 세속의 힘든 삶 속에서 눈치보고 땀 흘리며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벌어 해결한다. 그럼에도 바른 정법을 위해 청정수행하는 스님들께는 아낌없이 땀 흘려 번 재물을 드리는 것이 재가종도들이기도 하다. 신도들에 기생하는 거짓 수행자에 비해 재가신도가 훨씬 부처님 말씀에 적합한 집단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시대를 떠나 결코 변하지 않는 현실이다. 

더욱이 사표인 승가 일원으로서 진정한 승려라면 재가신도에게 권위를 강조하며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 열반경에 보면 부처님은 당신 스스로를 교단을 이끄는 지도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단지 열반에 이르는 길을 깨달아 중생에게 일러주는 안내자이자 도우미에 불과함을 강조한다. 불교는 창조자나 초능력자를 추종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주체적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부처님은 따라야 할 사람과 따르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서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선 진저리치며 피해야 할 사람이 있고, 두 번째는 무관심으로 대하여야 하는 사람인데 이 두 유형은 따르지 말고 섬기지 말며 공경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따라야 하는 유형으로서 이런 사람은 마음으로 따르고 섬기며 공경하여야 한다. 

진저리치며 피해야 할 사람은 계행을 지키지 않고, 악행을 하고, 청정하지 않고, 의심쩍은 행동을 하고, 비밀스런 행동을 한다. 그는 사문인 체해도 사문이 아니다. 그는 바르게 사는 체해도 바르게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안으로 썩어있고 욕망과 오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사람은 진저리 치며 피하여야 할 사람이다. 
무관심으로 대하여야 할 사람은 성미가 급하고 사납다.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그는 격분하고 성내고 시비를 건다. 그는 원망하여 성냄과 증오를 드러내고 심술을 부린다. 마치 곪은 종기가 꼬챙이에 찔렸을 때 피와 고름이 더욱 더 많이 나오는 것처럼. 이런 사람은 무관심으로 대하여야 하는 사람이다. 
따라야 하고 섬겨야 하며 공경해야 할 사람은 계행을 지키고 훌륭한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사람은 따라야 하고 섬겨야 하고 공경하여야 한다. 

이제 타락하고 부패한 승려에 대한 재가자의 자세는 부처님 말씀으로 분명해 진다. 아무리 조계종 승려라 해도 승려 옷만 입고 계행을 지키기는커녕 탐욕으로 정치적 계파 형성이나 하고 도박, 절도, 표절, 폭행, 은처 등의 행위를 하는 자들은 진저리치며 멀리해야할 대상이지 결코 승려라 해서 예를 드려서는 안된다. 재가신도들이 부처님 말씀에 따라 깨어 있지 못하고 그런 자들에게도 보시하고 예를 드린다면 그들의 악행을 돕고 조장하는 악업을 짓는 행위는 분명하다. 

한편, 부처님이 강조한 수행과 마음가짐에 있어서 서로 다른 ‘개인 층위’이 논리와 ‘사회적 층위’의 논리를 교묘히 섞어서 깨어있는 신도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어 한국불교를 퇴행시키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에는 익명성에 숨어 탐욕을 드러내거나, 공유지의 비극처럼 타인의 평안과 행복을 위하기보다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모습이 늘 작동한다. 그렇기에 사회적 공공 사안에 개인 윤리를 적용시킴으로서 공적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 넘어가려는 교활한 이들이 있다. 이들의 전형적인 논리란 서로 다른 층위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동일 층위에 놓아 혼란을 유도함으로서 실상을 왜곡시킨다. 

이런 예로는 남을 비판하지 말고 스스로를 성찰하라는 식의 개인 차원의 논리를 독재 정권이나 탐욕스런 권력층 혹은 각종 비리와 부패로 얼룩진 종단 권승들에 대한 공적 비판을 없애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타락한 종교인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전략방식이자, 살아있는 종교를 사회의 마약으로 전락시키는 행태다. 

오히려 부처님 말씀에 따라 자타불이를 마음에 새기고 아상이 없는 재가신도일수록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에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무르익으면 익을수록 주변과 사회를 위한 치열한 목소리가 나오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부처님 말씀의 생활 속 실천이라는 재가자의 주체적 자세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 면에서 밖으로 작동해야 할 공공윤리에 개인 내면 윤리를 접목시켜 교묘히 뒤섞음으로서 혼란을 유도해 여러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구조적 부패와 비리에 침묵하고 방조하게 하는 자들의 논리에 길들여지면서 재가신도들이 지니게 되는 것은 굴종의 신앙이다. 삶의 현장에서 너와 나의 불필요한 고통을 야기 시키는 구조적 악과 부패 내지 공공성 파괴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이야말로 주체적인 자비이자 사랑의 행위다. 이런 분노는 스스로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또한 악행의 주도자들 역시 연민과 사랑으로 대해야 할 존재이기에 대상자 자체보다는 그들의 행위와 탐욕에 대한 분노임을 명징하게 알고 행하는 분노의 목소리다. 불가에서는 이를 파사현정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파사현정은 화쟁과 함께 자비 실천이라는 동전의 양면이자 수레의 두 바퀴임을 알 수 있다. 

2) 재가단체나 활동가의 독립성 
서의현 사면에 즈음하여 여러 단체가 문제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연대하는 과정을 거쳤다. 서의현 사태는 결코 종단 내의 돌발적이고 우연히 드러난 것이 아니라 그동안 94 개혁정신이 상실된 채 누적되어 온 부정부패의 연장선에 있음은 누구나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94 개혁정신 실천 비상대책위는 서의현 사면 건만 다루기로 하였다. 이는 종단의 부정부패나 비리 문제는 거론하지 않기로 합의함으로서 다양한 입장의 여러 단체가 연대할 수 있도록 한 상황이다. 그런 면에서 빙산의 일각으로 드러난 서의현 사태만이 아니라 수면 밑의 거대한 종단 권승들의 타락과 부패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하는 종단의 자정과 쇄신이 실종된 것에 대하여 침묵하고자 하는 재가단체가 다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부패한 종단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재가단체처럼 총무원과 밀접한 관계는 아니더라도 많은 재가단체나 활동가가 다양한 종단 스님들과의 관계로 인하여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도 한국불교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이유 중이 하나다. 94년 개혁 이후 종단과 재가단체의 우호적 관계 형성은 점차 인간적/사적 유대관계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는 점차 종단이 개혁정신을 잃어가고 계파 형성까지 진행하였을 때 함께 많은 재가단체들이나 활동가들도 그 흐름에 비판적인 날을 세우기보다는 자신들과 가까운 승려들의 성향에 따라 함께 움직여온 탓도 있다. 

심지어 과거 백양사 도박사건이 터졌을 때 특별한 대책도 없이 종단 내부의 자정을 소홀히 한 결사본부 및 본부장의 법명을 재가단체의 성명서에 넣고자 했을 때, 결사본부장과 친밀한 이들은 성명서에서 결사본부만을 거론하고 본부장의 이름을 뺀 상황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94 개혁정신의 상실과 한국불교의 위기상황에는 그런 종단에 대한 날 선 비판의식을 잃어버린 기존 재가단체나 활동가들의 책임 부분도 분명히 있다. 

이런 재가단체의 복합적 구조는 결과적으로 건강한 종단을 위한 비판단체가 아닌, 부패한 종단 권승들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는 재가단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들이 스스로 주체적 재가단체로 서지 않고 종단이 눈치를 보는 단체로 있는 한 한국불교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흐름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불행하지만 이들은 한국불교의 위기에 기여하는 재가단체나 활동가라고 할 수 있다. 

3. 재가운동의 역할 

그동안 사찰 재정의 투명화 등, 한국불교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논의와 제안이 있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불교가 위기 상황이고 더 나아가 서의현 사면이라는 종단 집행부 자신의 정통성마저 부정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렇게 더욱 상황이 악화되는 것에는 그동안 제시된 방법이나 제안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현 종단 집행부가 제시된 다양하고 건강한 제안을 실행할 의지가 없거나 실행할 능력이 없음을 말해 준다. 

총무원 현 집행부의 그동안의 행태를 보면 실행 능력이 없다기보다는 실행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불교의 위기 상황 극복이 더욱 어렵다는 것에 비극이 있다. 가깝게는 재임을 하지 않겠다던 총무원장이 말을 바꿔가면서 재임을 했고 계파도 재구성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는 첫 임기 때 정치권력에 유착하여 강남 좌파승 파문의 중심에 있었을 뿐 아니라 지금은 정부 감사원에서조차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는 사대강 사업 반대와 더불어 뭇 생명의 안위는 물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소신공양으로 요청한 문수스님의 높은 뜻을 하찮게 밟아버린 인물이다.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을 보살정신의 실천을 종단 스스로 무시한 행위로써 이는 철저히 한국불교에 해악을 끼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한국불교를 이끌어 가는 집행부와 관련 권승들의 행태를 눈앞에 두고 재가운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는 재가자 스스로 교단을 구성하는 사부대중의 당당한 한 축임을 자각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재가자들의 길들여진 굴종의 신앙으로부터 부처님 말씀에 따른 주체적 신앙으로의 인식 전환과 공유가 필요하다. 

이는 사부대중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의 극복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버려야 할 사상(四相)에 더하여 승상(僧相)과 법상(法相)에 찌들어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외호해야 하는 청정 수행승인지. 겉으로는 스님 옷을 입고 말은 스님처럼 하지만 진저리 치면서 멀리해야 하는 자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굴종적 신앙의 극복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교계를 이루는 사부대중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고 주체적인 신앙을 가질 때 비로소 깨어있는 재가자 및 재가단체가 가능하며, 한국불교의 위기상황 극복에 기여할 수 있다. 주체적인 신앙을 통해 폭력이나 왜곡된 상황에서의 침묵은 그 상황에 대한 방조임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종단개선을 위한 적극적 참여와 연대가 가능하다. 

한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미국 사회에서 불교에 대한 선호는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활성화되고 있다. 정체되어 위축되어 가는 한국불교에 비하여 해외에서 불교가 왕성히 펼쳐지고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해외 재가자 모습은 권력과 이권 싸움으로 점철된 한국불교에 타산지석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불교가 나이든 여성들의 소위 보살 불교라는 현실을 극복하는 데에 던져주는 바도 있으며, 또한 미국에서 불자라면 오히려 생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매우 긍정적 인물로 비춰지고 있는 것에 반해, 기독교인들이 수적으로 다수를 점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주류에서 재가자들은 불자임을 천명할 때 오히려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차이마저 있기 떄문이다. 

해외에서 확산되고 있는 불교 모습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평등한 사부대중이다. 세계적 흐름에서 성차별이 없는 것은 물론 어차피 재가자가 출가자인 스님들보다 숫적 우세는 어디나 같기에 출재가의 평등 구조 속에서는 오히려 다수인 재가자가 재정 관리나 집단 운영에 있어서 주도권을 갖는다. 물론 신심에 기반한 집단이기에 재가자가 지닌 관리권은 스님을 무시하는 것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수행에 도움 되도록 사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문화가 불교 내에 정착하고 있다 보니 승속이 함께 연령이나 성별의 차별 없이 오로지 너와 나의 수행이라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이렇게 민주적 절차를 확보함과 더불어 진리에 대한 평등구조도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특히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미국의 불교 수행처에서는 수행이 무르익어 서로 나누는 장소에서는 승속을 구분하지 않는다. 나름 공부가 익어 선사급이면 스님이든 재가자건 서로 존중하며 가르침을 청하고 나눔의 시간을 갖는다. 진리나 법이 스님이라는 특정 계층이나 비구 등의 특정성에 속한다는 한국불교의 암묵적 입장을 철저하게 버려야 한국불교가 앞으로의 미래세대에게 다가갈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변화 역시 굴종의 신앙으로부터 주체적 신앙으로의 전환이 요구됨은 자명하다. 

이런 주체적 수행인으로서의 재가운동이 지니는 기본 입장 중의 하나는 사부대중의 일원으로서 청정 비구, 비구니에 대한 적극적 지원과 외호 역할이다. 지금처럼 권승들의 횡포 앞에서 수행 터전마저 빼앗기고 소외되어 수행 집중은커녕 생존에 급급한 모습으로 되어서는 안된다. 종단이 바른 정법을 회복하고 청정수행 도량으로서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승가의 바른 스님들과 함께 하고 연대하며 이들이 목소리가 종단에서 다수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깨어있는 재가자들과 함께 한다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이 점을 전제로 하여 앞으로 필요한 재가 운동에서 필요한 부분을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조금 더 언급한다면 위기로 불리는 현 종단 상황에서 출가 및 재가가 이미 너무도 서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94년 이후 종단의 흐름을 볼 때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그동안 교계에서 재가활동가로 이미 잘 알려진 이들은 좋건 싫건 특정 스님들과의 연결고리가 있어서 서로 오해되기 쉬운 현실이기에 이를 인정하고 풀어갈 수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 더욱이 많은 재가단체나 활동가가 직간접적으로 종단에 경제적으로 관련성이 있는 상황에서 각 단체와 활동가의 순수한 활동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출가자나 재가자라는 인물 중심’으로 상황을 보지 않고, 논의되는 ‘사안에 대한 입장 중심’으로 접근하면 되지만, 교계의 많은 이들은 그동안의 누적된 감정 탓에 이것이 매우 힘든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한 불필요한 오해나 소모적인 진영논리로 재가운동의 역량 낭비가 생기지 않도록 앞으로의 재가운동에는 종단이나 특정 스님과의 연관성이 적은 참신한 이들을 발굴해서 재가운동 전면에 나설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며, 종단 내부 상황을 잘 아는 경력이 많은 기존 재가활동가는 그런 이들을 뒤에서 도와주고 지원하는 역할 분담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기본 틀 하에서 앞으로의 재가운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펼쳐질 수 있는 지 여러 재가 단체들의 풍성한 논의의 마중물로서 몇 가지를 던지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1) 종단 내 청정 개혁스님과 연대 추진 
이 부분에 있어서는 그동안 많은 논의가 있어 왔기에 반복할 필요는 없지만, 개혁승려들과의 연대에 있어서 어느 종교 집단이나 인간집단에 있어서 완벽하게 청정하다거나 부패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범계나 부패에 있어서 특정사회에서의 허용범위라는 것이 있다. 집단의 위기는 그러한 허용 범위를 넘어설 때 초래된다. 그렇기에 현재 제기되고 있는 다양한 측면에서의 한국 위기상황을 개선하고자하는 최소한의 개혁 의지가 있는 스님들과는 언제나 연대하려는 열린 자세로 임하고 힘을 합쳐 상황을 풀어가야 한다. 이 때 역시 연대대상의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사안을 위주로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음은 언급한 바와 같다. 
그리고 종단이 정치판 싸움으로 전락해 세속보다 더 못난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문중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계파 해체는 반드시 필요하다. 계파를 형성하는 승려는 그 의도를 떠나 정치승이라 규정하고, 종단 내에 세속 정치꾼들처럼 계파를 형성해 움직이는 승려들을 철저히 몰아내는 운동이 필요하다. 

2) 사찰 재정의 실질적 투명화 
종단 권승의 발호나 이권 싸움의 바닥에는 돈이 작동하고 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이들에게 억 단위의 돈이 부담 없이 뒷거래되고 개인소유로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미 누차 지적된 바와 같이 사찰 재정 투명화가 적극적으로 필요하다. 
국가 지원금과 신도 보시금 및 사찰 입장료 등 이 부분에 있어서 원론적인 것은 이미 충분히 종단 안팎으로 지적되어 왔고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5년 내로 종단이 망할 것이라는 현 교육원장의 발언까지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 종단이 소위 100인 대중공사의 결과로서 제시한 일정 규모 이상의 사찰 재정 투명화 안은 현실적으로 허울 좋은 사찰 재정 공개에 불과하다. 보다 많은 재가자들의 적극적 참여가 실현되어 실질적 사찰 재정 투명화가 이뤄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요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투명한 재정 공개와 관련하여 문화재 관리 및 문화재 관람료 징수에 있어서는 보다 적극적인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현재 이와 관련된 국가지원금이나 징수료의 투명한 관리는커녕, 문화재 자체에 대한 관리마저 전문지식이 없는 해당 사찰 승려가 관리하는 형태로 되어 있고, 흥국사 사자 탱화와 같이 주지 등 권력 있는 승려에 의한 내부 절도마저 벌어지고 있다. 
이 부분은 문화재 관리와 관련된 재정의 철저한 감독 및 감사가 필요한 것과 동시에 국고가 지원되는 사업이라는 점에서 사찰에서 문화재 담당하는 승려를 국가공무원직으로 만들어 국가 차원에서 관리감독하고 책임지게 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제안해 볼 수 있다. 

3) 바른 보시운동 
굴종의 신앙을 넘어 주체적 신앙이란 청정 수행을 위한 첫걸음이다. 종단 내에서 제대로 수행하며 전법에 힘쓰는 바른 승려에 대하여 널리 소개하고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보시하는 운동을 전 재가단체에서 펼치도록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껍데기 승상에 빠져 도둑들에게 보시함으로서 그들 악행을 도와주는 잘못된 신앙생활이 극복이 무엇보다 전제되어야하기에 철저한 인식 전환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교육담당 강사진의 구성을 통해 전국 순회 교육 체제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2차 토론회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부정부패와 비리, 절도, 폭행, 표절, 은처 등의 문제를 야기한 승려가 주석하는 사찰을 널리 알려 공개해 보시를 하지 않는 운동을 펼쳐야 하며, 또한 종단 내에서 총무원 보직을 하거나 특정 계파에 속한 스님들에 대한 보시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이권이나 권력을 떠나 봉사의 마음으로 월급제로 하도록 하고, 후자는 종단을 정치판으로 만드는 데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에 척결 대상이기 때문이다. 

4) 사찰 의식과 사찰 사업의 정리 
종교의 사회적 기능 중의 하나인 천도재 등 각종 의례 비용이 너무도 천차만별이라서 많은 신도들의 불만이며, 더욱이 과도하게 불합리한 비용은 스님 개인 주머니로 가는 현실이기에 합당한 기준비용 제시하고 이를 종단 차원에서 강력히 집행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납골당 사업이 사찰 주지의 개인 주머니 부풀리는 사업으로서 분별한 납골당의 난립으로 이어지는 추태가 있다. 종단 차원에서 각 지역을 담당하는 특정 사찰을 지정하고 관리하는 방안도 있지만, 그 실행에 있어서는 청정 수행집단으로서의 종단에서 직접적으로 납골 사업을 펼치기보다는 재가자나 재가단체와 연계하여 종단과 분리된 독립 사업체로 투명한 재정 관리를 통해 종단이 신도들에게 봉사하는 형태로 납골 사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 
한편 이와 더불어 무속과의 철저한 구분을 종단 차원에서 나서도록 재가자들이 요구할 필요가 있다. 단지 돈이 된다는 것 하나로 신도들을 부처님 말씀과 거리가 먼 잘못된 가르침이 횡행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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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ppam?dena Samp?detha
글쓴이 : 위숫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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