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행복하여라! sukho Buddhānaṃ uppādo!

▣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불교를 생각한다/한국불교를 생각하다

[스크랩]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정평불 창립법회에 참석하고

moksha 2017. 11. 23. 10:38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정평불 창립법회에 참석하고

 

 

평온한 일요일 아침입니다. 일요일이지만 일인사업자에게는 주말이 없습니다. 일이 있으면 밤낮없이, 주말없이, 휴가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일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일하는 날 보다 노는 날이 더 많은 것이 일인사업자의 일입니다. 그러나 하루도 멈출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일상이 글쓰기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주말 없이 일터에 나와 자판을 두드립니다.

 

정평법회에 초대받고

 

정평법회가 처음으로 11 18일 불광산사에서 열렸습니다. 정의평화불교연대에서 주최한 최초의 여법한 법회라 합니다. 대만불광산사의 서울분원이라 볼 수 있는 서울불광산사법당을 빌어 개최한 것입니다. 서울불광산사는 장충동에 있는데 지하철 3호선 동대역 입구인 태극당 바로 뒤에 있습니다.

 

정평법회에 초대 받았습니다. 정평불회원들의 활동을 잘 알고 있고 또한 회원들과의 안면도 있기 때문에 참석했습니다. 11 18일 토요일 오후 3시 불광산사 지하법당에서 입니다. 정평불이 생겨난 이래 첫 법회라 합니다. 교계신문에서는 승려타락 보다못해 시민 법회 창립이라는 타이틀이 실렸습니다. 부제로서는 정평불, 박경준 교수 초청 18일 첫 법회라 했습니다.

 




정평법회에 대하여 시민법회라 칭한 것이 이채롭습니다. 불교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시민들, 즉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국민법회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교계신문에서는 스님 없는법회라 했습니다.

 

정평법회에서는 왜 스님없는 법회라 했을까요? 취지를 보면 계율을 어긴 권승들로 이루어진 범계 카르텔이 너무 견고하고 스님들 타락과 범계가 극에 달해 종단이 변화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정평불은 종단 바깥에서 청신한 재가불자 중심으로 새로운 불교를 만드는 운동을 하기로 했다 법회는 스님 없는 시민법회이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스님 없는 시민법회가 열렸습니다. 지도법사는 박경준교수입니다. 박경준 교수는 동국대불교학과 교수입니다. 이제 정년퇴임을 일년 남겨 놓고 있는데 40년 가량 학생들과 스님들에게 불교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정평법회에서 매월 법문하는 것으로 그 동안 쌓은 공덕을 회향하겠다고 합니다.

 

법회는 여법(如法)하게

 

정평법회는 여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장소를 법당으로 선택한 것도 여법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국의 사찰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범계승이 판을 치는 한국불교 현실이고 또한 스님 없는 법회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절은 타당하지 않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불광산사가 비록 대만절 소속이기는 하지만 한국불교가 본 받아야 할 요소도 많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날 법회에 참석한 사람은 약 40명 가량 됩니다. 주로 정평불회원이지만 박경준 교수와 인연 있는 사람들도 많이 참석했습니다.

 






여법한 법회를 지향하는 정평법회에서는 명종(鳴鐘)’을 타종하는 것으로 시작 되었습니다. 모두 다섯 번 타종했습니다. 커다란 싱잉볼(Sing bowl)의 여운이 꽤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명종에 이어 네 가지 공양이 있었습니다. 향을 사르고, ()를 올리고, 쌀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꽃다발을 올렸습니다. 이후 삼귀의, 자비경봉독, 발원문낭독, 입정, 법문 순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명종 이전에는 우리말로 번역된 천수경 독송도 있었습니다.

 

법회 식순 자료는 이도흠교수가 준비 했습니다. 법회를 앞두고 문안을 우리말로 다듬고 프린트를 하는 등 밤을 세워 준비한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식순자료를 보면 삼귀의가 절에서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승보에 대한 것입니다.

 

삼귀의에 대하여

 

정평법회에서 삼귀의는 거룩한 불보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법보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승보에 귀의합니다.”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조계종 한글삼귀의문을 보면 승보에 대하여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글삼귀의문에서 승보를 거룩한 스님들로 한 것은 여러 가지 문제점과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박경준교수에 따르면 삼귀의문은 본래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귀의법이욕존(歸依法離欲尊)·귀의승중중존(歸依僧衆中尊)’이었다고 합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글삼귀의문으로 바뀌면서 승보의 개념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정평법회에서는 거룩한 승보에 귀의합니다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정평법회에서 불보, 법보, 승보에 귀의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보배 보()’자가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를 보배로 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삼보를 의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피난처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삼보가 왜 피난처일까요? 그것은 귀의한다라는 빠알리어 사라나(saraa)에서 알 수 있습니다. 빠알리 예경에서 삼귀의(ti-saraa)붓당사라낭갓차미 (Buddha saraa gacchāmi), 담망사라낭갓차미(Dhamma saraa gacchāmi), 상강사라낭갓차미(Sagha saraa gacchāmi)”라 합니다. 여기서 귀의한다는 뜻의 사라나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보면 ‘protection; help; refuge; a shelter.’라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귀의하는 뜻이지만 원문을 보면 피난을 뜻하는 ‘refuge’의 의미가 더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삼귀의에 대하여 ‘The 3-fold Refuge’라 합니다.

 

왜 피난처라 하는가?

 

영어로 된 삼귀의문을 보면 “I take my refuge in the Buddha! I take my refuge in the Dhamma! I take my refuge in the Sagha!”라 되어 있습니다. 영어삼귀의문에서는 분명히 피난처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승보에 대한 것을 보면 “I take my refuge in the Sagha!”라 하여 나는 상가안에서 상가를 나의 피난처로 삼겠습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한글삼귀의문에서처럼 스님들께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삼보가 피난처인 것은 상윳따니까야 자신을 섬으로의 경(S22.43)’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라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을 섬으로’ ‘가르침을 섬으로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dīpa: )’으로 하라고 했을까요?

 

윤회의 바다에서 섬은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대하여 여섯 가지 감역으로 설명했습니다. 시각에 대해서는 시각의 바다라 합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시각이야말로 인간의 바다로서 그 거센 흐름은 형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 형상으로 이루어진 거센 흐름을 견디어 낸다면, 그는 파도와 소용돌이와 상어와 나찰이 많은 시각의 바다를 건너 그것을 뛰어넘어 피안에 도달하여 대지 위에 선 고귀한 님이라고 한다. (S35.238)라 했습니다.

 

경에 따르면 시각이라는 바다에는 상어와 나찰 등이 가득해서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가장 안전한 곳은 입니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섬으로 피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을 섬으로’ ‘가르침 섬으로하라고 했습니다.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를 삼보라 하여 불자들은 귀의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는 피난처입니다. 영어에서와 같이 “I take my refuge in the Buddha!”라 하여 나는 부처님 안에서 부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겠습니다!”라 하는 것입니다. 정평법회에서 불, , 승에 대하여 보배로 보아 불보, 법보, 승보라 하여 피난처로 삼는 것에 대한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불교시민단체를

 

정평법회 지도법사 박경준 교수의 법문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청법가와 같은 식순은 없었습니다. 여법하게 법회를 하긴 하지만 한국불교의 권위주의적인 요소는 답습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박경준교수는 제일성으로 제대로 된 불교시민단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또한 가르침을 현실과 현장에서 실현하고 실천하는 단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정의평화불교연대의 창립과도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도흠 교수의 경과보고에 따르면 정평불이 생겨난 것은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이 있고 난 후부터라 합니다. 그때 당시 이명박정부의 4대강 사업이 큰 이슈이었는데 학자들과 활동가들의 열띤 세미나 등 활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문수스님이 분신하자 그 정신을 이어 받고자 학술세미나를 개최한 것이 오늘날 정평불이 있게 된 것이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전 정평불에서는 자승스님의 재선을 막기 위하여 치열한 투쟁을 했다고 합니다. 이도흠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삼보일배, 성명발표, 촛불 등 동원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해 보았다.”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올해에도 불교적폐청산에 대하여 촛불법회 등 할 수 있는 방법은 총동원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자승스님 보다 더 허물이 많은 설정스님이 총무원장이 됨으로써 이제 승가에 대한 미련은 접었다는 것입니다. 그랴래서 승가의 개혁은 물건너 간 것으로 보고 재가자들 만이라도 여법한 모임을 만들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것입니다.

 

정평불 슬로건은 우리가 우리불교를 만든다입니다. 이런 취지로 만든 것이 이번에 처음 열린 정평법회라 합니다. 그 동안  6회째를 맞는 정평불 눈부처학교와 더불어 이번에 창립법회까지 개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재가불교운동을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재가자들만이라도 여법하게

 

한국불교의 발전을 염원하는 활동가들과 불교지식인들이 모여 만든 단체가 정의평화불교연대라 합니다.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을 계기로 문스스님을 따르자라는 취지로 만들어 졌는데 적극적으로 현실참여 했다고 합니다. 유신과 오공시대에 목숨을 걸고 치열한 투쟁을 한 불교활동가들과 교수 등 불교지식인들의 만남인 것입니다.

 

올해로 여섯 번째를 맞고 있는 눈부처학교에서는 마치 불교인문학강좌와 같은 강연이 열립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법회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최초로 여법한 법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사 법회다운 법회를 가진 것입니다. 이렇게 재가단체에서 세미나도 하고 법회를 열개 된 것은 오로지 스님들의, 스님에 의한, 스님을 위한 스님들만의 불교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라 봅니다. 권승들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더 이상 희망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재가자들만이라도 여법하게 살 수 있는 불교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탄생된 것이 정평법회라 볼 수 있습니다.

 

대중공사방식을 따라서

 

박경준교수는 법문에서 더불어 사는 삶을 강조했습니다. 한국불교는 개인적 수행에 갇혀 있음을 비판하며 공동체를 이루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재가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초기경전에서 보는 승가공동체의 장점을 도입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만장일치제입니다.

 

초기승가공동체에서는 모든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했습니다. 이날 첫 법회에서도 대중공사방식을 따라서 만장일치제를 도입했습니다. 제안된 사항에 대하여 이견이 없으면 박수를 치는 식으로 통과시키는 형식입니다. 이렇게 대중공사방식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구성원들을 식구로 생각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불교공동체가 반드시 승가공동체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승가공동체가 무너진 한국불교 현실에서 여법한 재가공동체가 탄생한다면 승가공동체는 긴장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것이 재가불교공동체를 만든 가장 큰 이유라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들은 체 만 체 하며 오히려 더욱 더 그들만의 리그를 공고히 했을 때 이를 깨는 방법은 승가공동체보다 더 여법한 재가공동체를 만드는 수 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음성공양 민아 민아

 

박경준교수의 법문이 끝나고 간단한 문화행사가 있었습니다. 음악인 조현덕님의 음성공양입니다. 범능스님의 민아 민아입니다. 박경준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조현덕님은 박경준 교수의 동생인 박문옥님과 활동을 같이 해 왔다고 합니다. 박문옥님은 직녀에게라는 노래로 유명한 가수입니다. 연합뉴스에서는 박문옥님에 대하여한국의 밥 딜런이라 소개 되어 있는데 포크 가수겸 작곡자 그리고 싱어송라이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야보살 조현덕님이 부른 범능스님의 민아 민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현님은 국악풍의 이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고한 범능스님은 출가하기 전에 국악을 전공했다고 합니다. 범능스님은 정세현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음악과 국악을 접목하여 수 많은 노래를 만들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민아 민아 백성민아라고 시작되는 노래입니다. 가사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민아 민아 백성민아

꽃이 피는 춘삼월에 비 올 바람 몰아치니,

민아 민아 백성민아

바람이 불면 일어나고 비가 오면 젖지 마라.

 

민아 민아 백성민아

새가 우는 오뉴월에 비 올 바람 몰아치니

다시 한번 일어나서 참된 세상 찾아가세.”

 

 

백성을 민초에 비유한 노래입니다. 풀은 밟아도 다시 일아나듯이, 백성들은 짓밟혀도 다시 일어남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논어에 나옵니다. 공자가 말 하기를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라.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라 했다고 합니다.

 

백성은 잡초와 같은 존재입니다. 바람이 불면 눕는 풀과 같습니다. 백성을 잘 살펴 주면 바람처럼 눕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을 억압하고 짓밟으면, 마치 짓밟힌 잡초가 다시 일어나듯이 폭정에 시달린 민초들이 들고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에 대하여 바람이 불면 일어나고라 했을 것입니다.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오후 3시부터 시작된 최초의 정평법회가 5시에 끝났습니다. 간단한 질의응답과 자기소개 시간도 있었습니다. 한국불교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보겠다는 취지로 창립된 정평법회가 순항할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도법사 박경준교수의 말대로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가늠 할 수 없을 정도가 될지는 지켜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첫 발을 내 딛었다는 것은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여법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정평법회에서 시종 강조된 것은 여법(如法)’입니다. 여법이라는 말은 법답게라는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르침에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법이라는 말은 정의롭게라는 말과도 동의어라는 사실입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초기경전에서 법답게, 여법하게, 정의롭게 라는 말은 ‘dhammena’ 또는 ‘dhammika’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로는 Justly, righteously’의 뜻이기 때문에 정의롭게라 번역됩니다. 여법과 관련하여 테라가타에서는 “여법하지 못한 삶과 여법한 죽음이 있다. 여법한 죽음이, 여법하지 못한 삶보다 낫다.(Thag.670)라 했습니다. 이 게송에 대하여 명진스님은 불의에 살 것인가, 정의를 위해 죽을 것인가, 불의에 사는 것보다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이 낫다.”라 번역하여 법문한 바 있습니다.

 

만일 통치자나 성직자가 정의롭지 않을 때 어떻게 될까요? 앙굿따라니까야 정의롭지 못함의 경(Adhammikasutta)’에 따르면 “해와 달도 바르게 돌지 못하게 된다.”(A4.70) 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이는 “지도자가 잘못된 길로 가기 때문에 모두가 잘못된 길을 따르네. (A4.70) 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정의롭지 않을 때, 즉 법답지 않을 때, 또는 여법하지 않을 때 해와 달의 운행도 바뀐다고 했습니다. 해와 달의 운행이 바뀌면 지진, 태풍, 해일,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날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여법하게 살지 않는다면 자연과 환경이 파괴되어서 기후변화가 일어나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여법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법답게 사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가르침(Dhamma)대로 사는 것입니다. 가르침대로 살면 평화가 찾아 옵니다. 가르침을 실천하면 열반이 실현되듯이, 정의롭게 살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정의와 평화는 지혜와 자비의 다른 이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정평법회 발원문

 

정의평화불교연대의 정평법회가 최초로 열렸습니다. 취지는 발원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발원문 싣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합니다.

 

 

(발원문)

 

지극한 마음으로 거룩한 불보와 법보, 승보에

귀의하오니 크나큰 자비원력으로 보살펴지이다.

 

발원재자 정의평화불교연대의 법우들은

오늘 첫 법회를 맞아

마음이 흔들리고 정신이 바르지 못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등지고서

욕심내고 성을 내고 어리석어 지은 업장을

한마음으로 참회하옵니다.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진리만을 밝혀야 하거늘,

어두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헛된 생각에 사로잡혀

망상에 휘둘린 어리석음을 참회합니다.

 

하나라도 더 베풀고 나누어야 하거늘,

제 것을 더 불리는 데만 골몰하고

남의 것을 탐한 잘못을 참회합니다.

 

고운 말로 모든 이를 기쁘게 해야 하거늘,

나쁜 말로 타인의 마음에 상처 내고

거짓과 꾸밈말로 타인을 속인 잘못을 참회합니다.

 

아무리 낮고 미천한 사람이라도 부처님처럼 섬겨야 하거늘,

제 욕심과 이해관계대로 부리고 억눌러

마음과 몸을 괴롭힌 죄를 참회합니다.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참고 또 참아야 하거늘,

제 뜻과 마음에 맞지 않고

제게 이롭지 않다고 화를 낸 잘못을 참회합니다.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끼리만 몸과 마음의 하나됨을 추구해야 하거늘,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음욕을 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던지지 않은 잘못을 참회합니다.

 

온 세상 모든 생명이 부처님처럼 존귀하거늘,

죽어가고 사라져가는 모든 생명을

돌보지 못하고 가볍게 여긴 잘못을 참회합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첫 법회를 시작하는 오늘

발심의 미약함을 마음 깊이 돌이켜

참회의 눈물이 강이 되고 바다를 이루리니,

저희들의 참회를 받아들여 주시옵고

일체 어둠을 밝게 비춰

저희 정평불이 가는 길을 환히 빛나게 해 주시옵소서.

 

이제 오랜 동안 쌓인 죄업이

마른 풀이 타버리듯 남김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앞으로는 모든 욕심과 어리석음, 성냄이 사라지고

오로지 진리만을 밝히고

모든 중생을 부처처럼 섬기어서

부처로 이끌고 저희도 부처가 되기를 원하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정의평화불교연대 정평법회 발원문)

 

 

 

20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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