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행복하여라! sukho Buddhānaṃ uppādo!

▣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니까야(Nikāya) 항수 독송집

이교도의 경(Titthāsutta, A3:61) : 세 가지 외도의 주장 : 이 세상에 잘못된 견해 3가지

moksha 2016. 8. 14. 12:32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3번)

               나모     땃싸     바가와또     아라하또          쌈마쌈붓닷싸 (3번)

그 분,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예경하나이다.



이교도의 경(Titthāsutta, A3:61)

 

1. 한 때 세존께서는 싸왓티 시에 계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이교도의 관점이 있는데1, 그것들은 현자에 의해서 조사되고, 탐구되고, 철저하게 연구되고, 단지 전승 때문에 그것들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무작설2로 드러난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2. 수행승들이여, 한 부류의 수행승들이나 성직자들은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더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3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본다.

3. 수행승들이여, 한 부류의 수행승들이나 성직자들은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더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4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본다.

 

4. 수행승들이여, 한 부류의 수행승들이나 성직자들은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더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만들어진 것이다.5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본다.

 

5. 수행승들이여, 그들 한 부류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보는데, 나는 그들에게 접근해서 이와 같이‘존자들이여, 그대들이‘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본다는데, 그것이 사실인가?라고 말한다.

 

내가 질문하면 그들은 ‘그렇다’고 동의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존자들이여, 그렇다면 사람들이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이간질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욕지거리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꾸며대는 말을 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탐욕스럽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분노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잘못된 견해를 지니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전생의 행위가 결정적인 것이라고 고집한다면, 그들에게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나 정진이 없는 셈이다. 그들에게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진실로 확실히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들을 사띠를 잃게 되고 수호를 잃게 되는데, 자신을 수행자라고 칭할 타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6.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보는 수행승들이나 성직자들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논박이다.

 

7. 수행승들이여, 그들 한 부류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보는데, 나는 그들에게 접근해서 이와 같이 ‘존자들이여, 그대들이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본다는데, 그것이 사실인가?라고 말한다.

 

내가 질문하면 그들은 ‘그렇다’고 동의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존자들이여, 그렇다면 사람들이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고,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고, 이간질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고, 욕지거리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고, 꾸며대는 말을 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고, 탐욕스럽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고, 분노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고, 잘못된 견해를 지니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절대자가 결정적인 것이라고 고집한다면, 그들에게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나 정진이 없는 셈이다. 그들에게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진실로 확실히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들을 사띠를 잃게 되고 수호를 잃게 되는데, 자신을 수행자고 칭할 타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8.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보는 수행승들이나 성직자들에 대한 나의 두 번째 논박이다.

 

9. 수행승들이여, 그들 한 부류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조건 없이 조건 없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보는데, 나는 그들에게 접근해서 이와 같이 ‘존자들이여, 그대들이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조건 없이 조건 없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본다는데, 그것이 사실인가?라고 말한다.

 

내가 질문하면 그들은 ‘그렇다’고 동의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존자들이여, 그렇다면 사람들이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더라도 원인이 없고 조건이 없을 것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더라도 그 원인이 없고 그 조건이 없을 것이고,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더라도 원인이 없고 조건이 없을 것이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 원인이 없고 그 조건이 없을 것이고, 이간질하더라도 그 원인이 없고 그 조건이 없을 것이고, 욕지거리하더라도 그 원인이 없고 그 조건이 없을 것이고, 꾸며대는 말을 하더라도 그 원인이 없고 그 조건이 없을 것이고, 탐욕스럽더라도 그 원인이 없고 그 조건이 없을 것이고, 분노하더라도 그 원인이 없고 그 조건이 없을 것이고, 잘못된 견해를 지니더라도 그 원인이 없고 그 조건이 없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원인 없는 것과 조건이 없는 것이 결정적인 것이라고 고집한다면, 그들에게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나 정진이 없는 셈이다. 그들에게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진실로 확실히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들을 사띠를 잃게 되고 수호를 잃게 되는데, 자신을 수행자고 칭할 타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10.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보는 수행승들이나 성직자들에 대한 나의 세 번째 논박이다.

 

11.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지의 이교도의 관점이 있는데, 그것들은 현자에 의해서 조사되고, 탐구되고, 철저하게 연구되고, 단지 전승 때문에 그것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무작설로 드러난다.

 

12. 수행승들이여, 내가 설한 이러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내가 설한 어떠한 가르침이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가?

 

13. 수행승들이여, 내가 ‘이러한 것들이 여섯 가지 세계이다.6’라고 설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내가 ‘이러한 것들이 여섯 가지 접촉감역이다.’라고 설한 가르침은 논박 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내가 ‘이러한 것들이 열여덟 가지 정신적 사유이다.’라고 설한 가르침은 논박 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내가 ‘이러한 것들이 네 가지 진리이다’라고 설한 가르침은 논박 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을 것이다.

 

14.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이러한 것들이 여섯 가지 세계이다.’라고 설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무엇을 조건으로 그것을 말했는가?

 

15. 여섯 가지 세계, 즉 땅의 세계, 물의 세계, 불의 세계, 바람의 세계, 공간의 세계, 의식의 세계이다.

수행승들이여, 나는‘내가 ‘이러한 것들이 여섯 가지 세계이다.’라고 설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 받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것을 조건으로 그것을 말한 것이다.

 

16. 수행승들이여, 나는‘내가 ‘이러한 것들이 여섯 가지 접촉감역이다.7’라고 설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무엇을 조건으로 그것을 말했는가? 여섯가지 접촉의 감역, 즉 시각의 접촉감역, 청각의 접촉감역, 후각의 접촉감역, 미각의 접촉감역, 촉각의 접촉감역, 정신적 접촉감역이다.

수행승들이여, 나는‘내가 ‘이러한 것들이 여섯 가지 접촉감역이다.’라고 설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것을 조건으로 그것을 말한 것이다.

 

17. 수행승들이여, 나는‘내가 ‘이러한 것들이 열여덟 가지 정신적 탐구이다.8’라고 설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무엇을 조건으로 그것을 말했는가?

 

18. 시각으로 형상을 보고 쾌락을 야기하는 형상에 대한 탐구, 불쾌를 야기하는 형상에 대한 탐구, 평정을 야기하는 형상에 대한 탐구를 행하고,

청각으로 소리를 듣고 쾌락을 야기하는 소리에 대한 탐구, 불쾌를 야기하는 소리에 대한 탐구, 평정을 야기하는 소리에 대한 탐구를 행하고,

후각으로 냄새를 맡고 쾌락을 야기하는 냄새에 대한 탐구, 불쾌를 야기하는 냄새에 대한 탐구, 평정을 야기하는 냄새에 대한 탐구를 행하고,

미각으로 맛을 보고 쾌락을 야기하는 맛에 대한 탐구, 불쾌를 야기하는 맛에 대한 탐구, 평정을 야기하는 맛에 대한 탐구를 행하고,

촉각으로 감촉을 촉지하고 쾌락을 야기하는 감촉에 대한 탐구, 불쾌를 야기하는 감촉에 대한 탐구, 평정을 야기하는 감촉에 대한 탐구를 행하고,

정신으로 사실을 인지하고 쾌락을 야기하는 사실에 대한 탐구, 불쾌를 야기하는 사실에 대한 탐구, 평정을 야기하는 사실에 대한 탐구를 행한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이러한 것들이 열여덟 가지 정신적 탐구이다.’라고 설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것을 조건으로 그것을 말한 것이다.

 

19.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이러한 것들이 네 가지 진리이다.9라고 설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무엇을 조건으로 그것을 말했는가?

 

20. 수행승들이여, 여섯 가지 세계를 조건으로 입태가 있고, 입태를 조건으로 명색이 있고10,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역이 있고, 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나는 느끼는 자의 관점에서11 ‘이것은 괴로움이다.’ 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선언한다.

 

21.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인가?

태어남도, 늙음도, 병듦도, 죽음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고, 간략히 말해서 다섯 가지 집착다발12이 괴로움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이다.

 

22.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발생인가?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13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

23.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인가?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14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가지 접촉이 소멸하고, 여섯 가지 접촉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24.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사띠, 올바른 사마디이다.15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25.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이러한 것들이 네 가지 진리이다.’라고 설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것을 조건으로 그것을 말한 것이다.”

 

이교도의 경이 끝났다.





  1.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이교도의 관점이 있는데(tīṇimāni bhikkhave titthāyatanāni) : 일반적으로 tittha(sk. tīrtha)는 ‘나룻터, 도장(渡場)’ 라는 말인데 ‘해탈의 교리’라는 의미로 쓰인다. 빠알리 경전에서는 이교도의 교리를 나타낸다. 이교도는 띳티야(titthiya)라고 한다. 그리고 titthiyāyatana는 Mrp.Ⅱ.272에 따르면 DN.1에 나오는 62가지의 사견을 말한다. [본문으로]
  2. 무작설(無作說, akiriyavāda) : 무작(無作)은 akiriya의 한역이다. 이는 인간의 도덕적인 삶을 부정하는 강한 결정론이나 강한 비결정론을 무작설이라 한다. 뿌라나 깟싸빠(Pūraṇa Kassapa)의 비결정론의 예를 보면 “대왕이여, 참으로 어떤 일을 하거나 하도록 시켜도, 도륙하고 도륙하도록 시켜도, 학대하고 학대하도록 시켜도, 슬프게 하고 피곤하게 하고, 전율하고 전율하게 만들고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가택을 침입하고 약탈하고 절도하고 노략질하고 타인의 처를 겁탈하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DN.Ⅰ.52)” 이는 일상적 의미의 우연론이 아니라 절대적인 우연론으로서의 무인론(無因論, ahetuvāda)이다. 그는 모든 원인과 결과는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는 것처럼 초월적이고 완전히 우연적이어서 절대적으로 예측가능하지도 않고, 무법칙적으로 변화하므로 인과관계는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으며, 인과적 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으므로 단멸론(斷滅論, Ucchedavāda)에 속한다. 따라서 인간 행위에 있어서도 도덕적 책임감은 성립될 수 없다. 이것이 뿌라나 깟싸빠(Pūraṇa Kassapa)가 윤리적인 삶을 부정하는 무작설(無作說, akiriyavāda)이라고 불리우는 견해를 갖게 된 이유이다. AN.Ⅰ.287에 따르면 부처님은 그러한 깟싸빠를 무작론자(無作論者, akiriyavādin)라고 부르고, 자신은 작론자(作論者, kiriyavādin)라고 불렀다. 그와는 반대로 막칼리 고쌀라(Makkhali Gosāla)의 주장은 인과법칙의 가혹함에서 연원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숙명론(宿命論)은 결과적으로 정신적인 인과성에서 자명한 자유의지마저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팔만사천 대겁이 있어서, 그 사이에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유전윤회하면서 괴로움의 종극을 이룬다. 그래서 그 사이에는 ‘나는 계행과 덕행과 고행과 범행에 의해 미숙업을 성숙시키고 혹은 이미 익은 업을 참아내고 그것을 소멸시킨다.’는 것이 없다.ㆍㆍㆍㆍ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유전윤회한 뒤에 괴로움의 종극을 이룬다.(DN.Ⅰ.54)” 그의 이론은 뿌라나 깟싸빠(Pūraṇa Kassapa)처럼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무력하게 만든다는 측면에서는 무작설(無作說, akiriyavāda)이라고 하며, 팔만사천 대겁 뒤에는 윤회가 종식된다는 측면에서는 단멸론(斷滅論, Ucchedavāda)이며,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절대적인 결정론으로서의 무인론(無因論, ahetuvāda)이고, 정해진 윤회의 기간이 종식하면 청정해진다는 측면에서는 윤회청정(輪廻淸淨, saṁsarasuddhi)의 이론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밖에 이 경에서는 절대자에 의해 모든 것이 운명지어졌다고 하는 절대신(絶對神, issaro)에 의한 창조신 즉 존우화작설(尊祐化作說, issaranimmāṇahetuvāda)이나 절대신(絶對神)의 창조자(創造者, sañjitā)로서의 창생(創生)과 일체견자(一切見者, aññadatthudaso)로서의 전지(全知)와 주재자(主宰者, vasī)로서의 전능(全能)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신학적 견해도 무작설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경에서 무작설의 전형으로 거론되는 숙작인(宿作因, pubbekatahetu)은 자이나교도인 니간타(Nigaṇṭha)들의 사상을 말하는데, 그 교주인 마하비라(Mahavira)는 사물들이 ‘부분적으로는 결정되고 부분적으로는 비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것이 강한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조합이고 업에 관한한 강한 결정론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불경에서는 주로 간한 결정론자로서 나오며 결국 무작설(無作說)로 인정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3. 니간타들의 숙작인설(宿作因說, pubbekatahetuvāda)이다. 숙작인설(宿作因說)은 모두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는 주장을 한역에서는 숙작인론 혹은 숙명론(宿命論, pubbekatahetuvāda)이라 한다. 붓다는 원인과 결과를 설하신 분이고 인과를 설하신 분이고 업을 설하신 분이다. 그렇지만 지금 겪는 모든 즐거움과 괴로움은 원인이 있다는 말과 지금 겪는 모든 즐거움과 괴로움은 전생의 업보이다라는 말은 다르다. 붓다는 숙작인론을 잘못된 극단적인 원인결과론으로 비판하고 계신다. 붓다는 지금 겪는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의 원인으로 업(업보)을 포함하여 8가지 요소가 있음을 상윳따니까야 몰리야 씨와까의 경(Moḷiyasīvakasutta, S36:21)에서 설하고 있다. [본문으로]
  4. 존우화작설(尊祐化作說, issaranimmāṇahetuvāda)이다. 창조론(創造論)이라고도 하며 창조론은 신학적(神學的) 결정론(決定論)이다. 절대신(絶對神, issaro)의 창조자(創造者, sañjitā)로서의 창생(創生)과 일체견자(一切見者, aññadatthudaso)로서의 전지(全知)와 주재자(主宰者, vasī)로서의 전능(全能)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 모든 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존우화작설(尊祐化作說, issaranimmāṇahetuvāda) 혹은 존우론(尊祐論)이라고 한다. 붓다 당시 이러한 존우론을 주장한 것은 바라문들의 창조주 브라흐마론과 불을 섬기던 배화교(拜火敎,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론이 있다. 그리고 배화교도로서 불교로 귀의한 우루벨라 가섭삼형제가 유명하다. [본문으로]
  5. 무인론(無因論, ahetuvāda)을 말한다. 우연론(遇然論)으로서 모두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라는 것을 한역으로는 우연론 혹은 무인무연론(無因緣論)이라고 한다. 이는 인과론적으로 허무주의(虛無主義)에 속하는 도덕부정론(道德否定論)을 주장하는 단멸론(斷滅論)이다. [본문으로]
  6. 땅[지(地)], 물[수(水)], 불[화(火)], 바람[풍(風)]의 네 가지 광대한 세계와 허공[공(空)]과 의식[식(識)]을 말한다. 주석서에 따르면 땅은 확립의 요소(patiṭṭādhātu)이고, 물은 연결의 요소(ābandhanadhātu)이고, 불은 성숙의 요소(paripācanadhātu)이고, 바람은 지탱의 요소(vitthambhanadhātu)이고, 공간은 채워지지 않은 요소(asaphuṭadhātu)이고, 의식은 인식의 요소(vijānanadhātu)로 의식의 다발이라고 한다. 그와 동시에 발생하는 느낌의 다발, 지각의 다발, 형성(접촉-의도)의 다발이 있다. 이 네 가지가 빗물질의 다발이다. 땅, 물, 불, 바람은 근본물질이고 허공에서 파생된 물질인 공간이 있다. 이것들이 물질의 다발이다. 이렇게 해서 근본적으로는 두 가지 즉, 빗물질의 다발과 물질의 다발이 있다. [본문으로]
  7. 시각의식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생겨난다. 이 세 가지의 화합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상태가 감수된다. [본문으로]
  8. 땅[지(地)], 물[수(水)], 불[화(火)], 바람[풍(風)]의 네 가지 광대한 세계와 허공[공(空)]과 의식[식(識)]을 말한다. 주석서에 따르면 땅은 확립의 요소(patiṭṭādhātu)이고, 물은 연결의 요소(ābandhanadhātu)이고, 불은 성숙의 요소(paripācanadhātu)이고, 바람은 지탱의 요소(vitthambhanadhātu)이고, 공간은 채워지지 않은 요소(asaphuṭadhātu)이고, 의식은 인식의 요소(vijānanadhātu)로 의식의 다발이라고 한다. 그와 동시에 발생하는 느낌의 다발, 지각의 다발, 형성(접촉-의도)의 다발이 있다. 이 네 가지가 빗물질의 다발이다. 땅, 물, 불, 바람은 근본물질이고 허공에서 파생된 물질인 공간이 있다. 이것들이 물질의 다발이다. 이렇게 해서 근본적으로는 두 가지 즉, 비물질의 다발과 물질의 다발이 있다. [본문으로]
  9. 사제(四諦, cattāri ariyasaccānī) 즉 사성제(四諦聖)를 말한다. [본문으로]
  10. 십이연기에서 식(識)이 들어설 위치에 입태(入胎)가 들어가 있다. 이것은 식(識)이 결생식(結生識)을 의미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입태는 다음과 같이 일어나다. MN.38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합하고, 어머니에게 경수가 있고, 태어나야 할 존재가 현존하여, 이러한 세 가지 일이 조화가 되어 입태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태어나야 할 존재인 건달바(乾達婆, gandhabba)는 생명현상으로서의 의식을 말하는 것인지 애매하다. 만약에 그것이 주석가들의 의견처럼 결생식(結生識)을 의미한다면, 의식의 윤회라는 무아설과 모순되는 이론이 생겨날 소지가 있다. 그래서 붓다고싸의 해석(Pps.Ⅱ.310)처럼, ‘태어나야 할 존재’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그것을 용인한다면, 생명체가 어떤 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①암수의 교합 ②적당한 시기 ③생명현상으로서의 의식[결생식(結生識), gandhabba]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본문으로]
  11. ‘느낌을 경험하는 자에게’라는 것 뿐만아니라 ‘아는 자에게’를 의미한다. 따라서 느낌에 대한 사띠(sati)를 하는 것과 관계된 표현이다. [본문으로]
  12. 다섯 가지 집착다발 :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pañcupācupādānakkhandha)을 의미하며 한역하여 오취온(五聚蘊)이라 한다. 존재의 집착다발이란 의미는 존재의 다발[오온(五蘊) : 물질(色, rūpa)ㆍ느낌(受, vadanā)ㆍ지각(想, saññā)ㆍ형성(行, saṅkhārā)ㆍ의식(識, viññāṇa)]이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라는 유위법적 사유의 근본구조 속에서 나타날 때 성립한다. [본문으로]
  13. 조건적 발생의 법칙(pali. paṭiccasamuppāda, sk. pratītyasamutpāda)이라고 하며, 한역하여 연기(緣起)라 한다. 연기의 각 항목은 ①무명(無明, Avijjā)→②행(行, 형성, Saṅkhārā)→③식(識, 의식, Viññāṇa)→④명색(名色, 정신과 물질, nāmarūpa)→⑤육처(六處, 여섯 가지 감역, Saḷāyatana)→⑥촉(觸, 접촉, Phassa)→⑦수(受, 느낌, Vedanā)→⑧애(愛, 갈애, taṇhā)→⑨취(取, 집착, upādānā)→⑩유(有, 존재, bhava)→⑪생(生, 태어남, jāti)→⑫노사(老死, 늙고 죽음, jarāmaraṇa)이다. 이것은 생성연기[生成緣起, 발생연기(發生緣起)]를 나타낸 것이고, 다음에 나오는 것은 환멸연기[還滅緣起, 소멸연기(消滅緣起)]를 표현한 것이다. [본문으로]
  14. 남김없이 사라져(asesavirāganirodhā) : 여기서 ‘virāga’를 한역하여 이탐(離貪)이라 할 수 있으나 십이연기의 고리의 중간에 갈애가 존재하므로 무명에 앞서는 신체조건으로서 이탐을 상정할 필요가 없으므로 이염(離染)의 의미로서의 사라짐이 타당하다. ‘virāga’는 원리(遠離)의 의미로도 널리 쓰인다. ‘nirodhā’는 소멸을 뜻하므로 ‘없어짐’의 의미로 해석한다. [본문으로]
  15. 여덟 가지 고귀한 길[팔정도(八正道), ariya aṭṭhaṅgikaṁ maggaṁ]을 말한다.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ㆍ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ㆍ바른 말(正語, sammāvācā)ㆍ바른 행동(正業, sammākammanta)ㆍ바른 생계(正命, sammā-ājīva)ㆍ바른 정진(正精進, sammāvãyāma)ㆍ바른 새김(正念, sammāsati)ㆍ바른 집중(正定, sammāsamãdhi)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