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행복하여라! sukho Buddhānaṃ uppādo!

▣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다나상가(Dānasaṅgha)담마 이야기

6. 끊임없이 관찰해야 할 것

moksha 2017. 6. 12. 22:57

6. 끊임없이 관찰해야 할 것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경우를 여자든 남자든 재가자든 출가자든 끊임없이 관찰해야 한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①‘나는 늙기 마련이고 늙음을 극복하지 못했다.’라고. 여자든 남자든 재가자든 출가자든 끊임없이 반조해야 한다. ②‘나는 병들기 마련이고 병듦을 극복하지 못했다.’라고 여자든 남자든 재가자든 출가자든 끊임없이 반조해야 한다. ③‘나는 죽기 마련이고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라고 여자든 남자든 재가자든 출가자든 끊임없이 반조해야 한다. ④‘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고 헤어지기 마련이다.’라고 여자든 남자든 재가자든 출가자든 끊임없이 반조해야 한다. ⑤‘나는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의 원인자이고, 업의 친연자이고, 업의 의지처이고, 내가 선업이나 악업을 지으면 나는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여자든 남자든 재가자든 출가자든 끊임없이 관찰해야 한다.”                                               

[사실의 경(Ṭhānasutta, A5:57)]

 

위의 두 가지 경에서 보았듯이‘업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는 자주 관찰하고 성찰하여야 할 원리에 해당하고 그러할 때 업과 그에 따른 과보는 모두 버려지고 약해질 수 있다.

자신은 자기가 스스로 행한 의도적인 행위의 소유자, 상속자, 모태로 하는자, 친지로 하는 자, 의지처로 하는 자라고 하였다. 이 말뜻은 무엇일까.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의 주석을 참고하여 표를 만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설    명
업의 소유하는 자
(Kammasakkā)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경향성의 업은 정신적 지속 속에서 적절한 다른 조건들이 생겨나면 결과를 초래한다.
업을 상속하는 자
(kammadāyādā)
업의 소유자는 과거의 업에 의해 결정되는 상속자임과 동시에 현재의 업에 의해 새롭게 바뀌어 가는 상속자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존재가 과거의 업에 결정된다는 숙작인의 견해(Pubbekatahetudiṭṭhi, 宿作因見)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업을 모태로 하는 자
(kammayoni)
업이라고 하는 것은 조건으로서 마치 씨앗이 적절한 흙과 습기를 만나서 발아해서 싹이 트는 것과 같다. ‘업은 땅이고 의식은 씨앗이고 갈애는 물기이다…이와 같이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있게 된다.’ (SN.III.54)
업을 친지로 하는 자
(kammabandhu)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로 생겨난 업은 인과적 생성원리에 따라 윤회하는 동안 수반된다. 형제, 친척, 친지들은 모였다가 흩어지지만 업은 기나긴 생사여로의 윤회를 함께 하는 진정한 동반자로서 친지이므로 선업을 닦아야 한다. ‘오랜 세월을 헤매던 나그네가 무사히 돌아 왔을 때 친척들이나 친지들이 귀환을 반기듯 공덕들을 쌓고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갈 때 공덕들이 친지들처럼 사랑스럽게 그를 반긴다.’ [Dhp. 219~220]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
(kammapaṭisaraṇā)
육체적으로 몸이 아플 때 의사를 의지처로 삼듯, 선한 업을 쌓지 못해 저열한 세계에 태어났을 때 고통은 심각하므로 진정한 질병의 치료는 자신의 치유력이듯 우리의 진정한 귀의처는 선업에 관해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업은 모두 다섯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러한 업의 주체가 영원불변의 아뜨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간, 신, 자성, 업, 운명 등의 타자에 의한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업의 주체는 조건에 따라 연기하는 임시적 자아로서 철저하게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기 때문에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이다.

 

[Dhp16-219]

cirappavāsiṃ purisaṃ dūrato sotthim āgataṃ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다가 멀리서 무사히

  찌랍빠와싱     뿌리상  두라또    솟팀     아가땅       돌아온 사람을

ñātimittā suhajjā ca abhinandanti āgataṃ.            친척들과 벗들, 그리고 친구들은 반긴다.

냐띠밋따   수핫자  짜   아비난단띠   아가땅

 

[Dhp16-220]

tath'eva katapuññam pi asmā lokā paraṃ gataṃ    마찬가지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따테와     까따뿐냠   삐 아스마 록까  빠랑    가땅     공덕 쌓은 이를

puññāni paṭigaṇhanti piyaṃ ñātīva āgataṃ.          공덕들이 맞이한다.

 뿐냐니    빠띠간한띠    삐양   냐띠와  아가땅            친척들이 소중한 이가 돌아옴을 맞이하듯.

 

담마빠다(법구경)에 나타나는 예화를 통하여 업보에 대하여 살펴보면,

 

[예화 1] 세 무리의 빅쿠들 이야기 : [Dhp127] 인연담

 

첫 번째 무리

일단의 빅쿠들이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제따와나 수도원으로 오던 중에 한 마을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자 빅쿠들에게 공양을 올리려고 마을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었다. 그때 마을의 한 집에서 불이 나 불꽃이 둥그런 모양을 그리면서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러는 가운데 사람들은 한 마리의 까마귀가 동그라미 불 속으로 날다가 날개에 불이 붙어 타다가 결국은 땅에 떨어져 죽고 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빅쿠들은 그 같은 까마귀의 죽음이 어떤 악행의 결과였는지는 다만 부처님만이 아시리라 생각하며, 공양을 끝낸 다음 여행을 계속하여 부처님이 계신 제따와나 수도원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그들은 부처님께 여행 중에 본 까마귀의 죽음에 대해 여쭙기로 했다.

 

두 번째 무리

또 다른 일단의 빅쿠들도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 배를 타고 부처님이 계시는 제따와나 수도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탄 배는 바다 한 가운데서 우뚝 서더니 웬일인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승객 가운데 누가 저주를 받아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모두들 제비를 뽑아 보았다. 그 결과 선장의 아내가 저주받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러자 선장은 굳은 표정으로 선언하는 것이었다.

“저주받은 여자 하나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이 죽을 수는 없지.”

이렇게 말한 선장은 모래가 든 단지를 자기 아내의 목에 매달아 그녀를 물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자 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여 그들은 무사히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빅쿠들은 그 뒤로 여행을 계속하여 부처님이 계신 제따와나 수도원에 이르렀다. 이 빅쿠들도 그 불운한 여인에 대해 부처님께 말씀드리고 그 여인이 전생에 어떤 악업을 지었기에 그런 불행한 죽음을 당해야만 하였는지 질문하기로 했다.

 

세 번째 무리

또 다른 일단의 빅쿠들도 역시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제따와나 수도원으로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지나던 마을 근처에 있는 조그만 수도원에 들러 하룻밤 쉬어 가기를 청했다. 그러자 수도원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동굴로 안내해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곱 명의 빅쿠들이 그 동굴에서 그날 밤을 새게 되었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었을 때 아주 큰 바위가 내려와 굴의 출입문을 막아 버렸다.

 

다음날이 되어 수도원 사람들이 여행하는 빅쿠들을 찾아 굴에 가보니 굴의 입구가 꽉 막혀 버렸는지라 마을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그 돌을 치우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바위는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같이 하여 그 빅쿠 일곱 명은 꼼짝없이 그 굴속에 갇혀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채 이레 동안을 보냈다. 이레째 되는 날 바위는 기적적으로 스스로 움직여 굴 문이 열렸고, 마침내 빅쿠들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 일곱 명의 빅쿠들은 수도원에서 굶주리고 지친 몸을 쉰 뒤 사왓티를 향해 여행을 계속하여 마침내 제따와나 수도원에 도착했다. 이들 역시 부처님께 여행 중에 있었던 일을 모두 보고하고, 자기네들이 전생에 어떤 악업을 지었기에 그런 고생을 해야 했는지 질문하기로 했다.

 

이들 세 무리의 빅쿠들은 각기 수도원에서 서로 만나 함께 부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각기 자기들이 여행 중에 겪었던 일들을 보고 드리고 부처님의 대답을 청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 나서 이렇게 대답해 주시었다.

 

첫 번째 무리에 대한 답변

어느 때 황소 한 마리를 가진 농부가 있었다. 그런데 이 황소는 아주 게으르고 고집이 세서 농부는 황소를 잘 부릴 수가 없었다. 황소는 아무데나 앉아 새김질을 하거나 잠만 자는 것이었다. 농부는 이 게으르고 고집 센 황소 때문에 여러 번 화를 냈다. 어느 날 농부는 황소 때문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서 황소의 목에 볏짚을 감아 묶고는 그 볏짚에 불을 질러 버렸다. 그러자 황소는 목이 뜨거워서 펄쩍펄쩍 뛰다가 죽고 말았다. 이런 악행 때문에 농부는 지옥에서 오랜 동안 고통을 겪었으며 지금까지 그 과보가 남아 여러 형태의 몸으로 태어나 불에 타죽게 된 것이었다.

 

두 번째 무리에 대한 답변

어느 때 애완동물로 개를 기르는 한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어디를 가든지 늘 개를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그 도시의 젊은이들이 이 여인이 개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비웃으면서 개를 쿡쿡 찌르며 웃어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여인을 쿡쿡 찔러 대며 놀리기도 했으므로 여인은 창피하여 개를 미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인은 개를 죽이기로 마음먹고, 단지에 모래를 잔뜩 채워 넣고 줄로 단지와 개의 목을 묶은 뒤 물에 던졌다. 그래서 개는 물속에서 죽고 말았다. 이 같은 악행 때문에 그녀는 여러 생을 통하여 지옥에 나서 고통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그 과보가 남아 물에 빠뜨려지게 된 것이었다.

 

세 번째 무리에 대한 답변

어느 때 목동 일곱 명이 채식을 하는 도마뱀이 언덕의 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곳에 뱀의 통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통로를 나뭇가지와 덤불 등으로 꼭꼭 막아놓고 떠나 버렸다. 이들은 집에 가서 자기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이레를 보냈다. 그동안 도마뱀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꼼짝없이 갇혀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다가 그 일곱 목동들은 이레째 되는 날 자기들이 한 일을 기억해 내어 굴에 가서 구멍을 열고 도마뱀들을 풀어 주었다. 이 같은 악행 때문에 그들은 함께 빅쿠가 되었다가 굴속에 갇혀 이레 동안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지내야 했던 것이며, 그들은 이런 과보를 지난 열네 생을 거쳐서 받아온 것이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한 빅쿠가 탄식했다.

“아, 진실로 나쁜 행동을 범하고서는 그 과보를 도저히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비록 하늘에 있거나 바다에 있거나 혹은 동굴 속에 있거나 간에 말입니다!”

빅쿠의 탄식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빅쿠들이여, 실로 그러하니라. 실로 너의 말이 옳으니라. 비록 하늘에 있거나 바다에 있거나 혹은 동굴 속에 있거나 간에 악행의 결과가 미치지 않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Dhp9-127]

na antalikkhe na samuddamajjhe      공중에도 바다 한가운데도

나   안딸릭케  나    사뭇다맛제

na pabbatānaṃ vivaraṃ pavissa       산의 굴에 들어가도

나    빱바따낭     위와랑    빠위싸

na vijjatī so jagatippadeso               악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곳,

나 윗자띠 소   자가띱빠데소

yatthaṭṭhito mucceyya pāpakammā.  이 세상에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앗탓띠또     뭇쩨이야     빠빠깜마 

               

 

부처님의 이 설법 끝에 세 무리의 빅쿠들은 모두 소따빳띠 팔라(수다원과)를 성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