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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正解) 불교학 총정리/제5장 한국불교사

아!!! 팔만대장경

moksha 2016. 9. 26. 16:53



아!!! 팔만대장경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창건된 해인사는 조선시대에 7번이나 대화재가 나서 그때마다 중창해야 했다. 하지만 대장경판만은 조선 초기 태조대에 지어진 뒤, 조선 성종 19년(1488년) 인수대비와 인혜대비가 정희왕후 윤씨의 뜻을 받들어 30년간 중개축한 일이 있을 뿐 대화재 속에서도 조금도 다치지 아니하고 기둥 한 군데 기울어 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만대장경이 위기를 맞은 것은 대화재 때만이 아니었다. 선조 연간 임진년(1592년)에 대규모 왜군들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빠졌었다. 거의 절망적인 지경에서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것은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한 거창의 김면 장군, 합천의 정인홍 장군이 이끄는 경상도 의병과 소암(昭岩)대사가 이끄는 해인사 승병들이었다. 그 이후 치욕적인 일제강점기를 지낸 뒤 팔만대장경이 또 한 번 중대한 소실 위기를 맞게 된 것은 민족상잔의 비극이 전개되었던 6.25전쟁 때였다.

인천 상륙작전 후 낙오된 인민군 약 900명이 가야산에 숨어 가야산 줄기와 계곡의 요해처인 해인사를 거점으로 주변 숲을 진지화하여 소탕작전을 펴는 국군과 맞서고 있었다.

운명의 기로는 1951년 9월 18일에 일어났다. 토벌을 진행하던 육군이 공중지원을 요청하여 해인사 주변의 공비를 폭격해 달라는 요청을 하자 정찰기가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에 백색 연막탄을 투하해 폭격지점을 가리키자 즉각 미군사고문단에서 폭격 명령이 시달되었다. 당시 김영환 대령을 편대장으로 한 4대의 전폭기가 500파운드의 폭탄과 로켓탄 6발씩을 탑제하고 있었으며 특히 편대장 김영환 대령의 1번기에는 750파운드짜리 네이팜탄을 적재하고 있었다. 전폭기가 해인사로 꽂혀 가는 그 순간, 갑자기 깅영환 대령은 급상승 선회하면서 편대기들에게 폭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정찰기로부터 해인사를 네이팜탄과 폭탄으로 공격하라. 편대장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러나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날카롭게 명령을 뒤집었다. 각 기는 일체 공격을 중지하고 내 뒤를 따르라.

그러고는 기수를 돌려 몇 바퀴 선회하다가 몇 개 능선 뒤의 성주쪽 인민군을 폭격하고 기지로 돌아갔다. 그 날 바로 미군사고문단이 윌슨 장군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명령불복종을 항의하자, 이 대통령은 크게 분노하여 김대령을 총살이 아닌 포살(砲殺)에 처해야 할 것이라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 날 저녁, 미군사고문단 책임자가 국군전대본부를 방문하여 김대령과 편대원 전원 그리고 작전참모 장지량중장 등과 한 자리에 모여 군인으로서 가장 큰 죄인 명령불복종의 경위를 추궁했다. 그 자리에서 김대령은 태평양전쟁 때 미국이 일본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교토가 일본 문화의 중심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뿐만 아니라 영국이 인도를 영유하고 있을 때 영국인들은 차라리 인도를 잃을지언정 세익스피어와는 바꾸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에게도 인도하고도 바꿀 수 없는 세계적 보물인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이를 어찌 유동적인 수백 명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잿더미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투철한 군인으로서 죽기를 각오하고 민족의 유산 팔만대장경을 지키려 했던 김영환 대령은 그 뒤

1955년 강릉지구에서 순직했다. 민족적 자긍심과 참된 기개를 가진 김대령이 거기 없었던들, 팔만대장경은 일순간에 잿더미로 화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처럼 팔만대장경이 완성된 뒤 750여년이라는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전란과 화재를 맞았음에도, 그 대규모의 전질 모두가 마치 어제 만든 것처럼 깨끗하게 봉안되어 있으니 실로 신비롭고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