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행복하여라! sukho Buddhānaṃ uppādo!

▣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진리의 바다/진리의 종교, 불교(佛敎)

고빠까 목갈라나의 경(Gopakamoggallānasutta, MN108) : 부처님 가르침이 우리의 귀의처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10가지 청정한 믿음

moksha 2016. 9. 5. 22:56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3번)

               나모     땃싸      바가와또    아라하또          쌈마쌈붓닷싸 (3번)

그 분,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예경하나이다.


고빠까 목갈라나의 경(Gopakamoggallānasutta, MN108)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존자 아난다는 세존께서 최후의 완전한 열반에 드신 뒤에 얼마 되지 않아 라자가하 시에 있는 벨루 숲의 깔란다까니바빠1에 있었다.

 

2. 그 때 마가다 국의 베데히 비의 아들 아자따쌋뚜 왕은 빠좃따 왕을 의심하여 라자가하를 요새화하였다.

 

3. 마침 존자 아난다는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라자가하 시에 탁발하기 위해 라자가하 시로 들어갔다. 이 때 존자 아난다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일어났다.

‘지금 라자가하 시에서 탁발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내가 지금 고빠까 목갈라나라고 하는 바라문이 일하는 곳을 찾아가면 어떨까?’

 

4. 그래서 존자 아난다는 바라문 고빠까 목갈라나가 일하는 곳을 찾아갔다. 바라문 고빠까 목갈라나는 존자 아난다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보았다. 보고나서 존자 아난다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존자 아난다께서는 어서 오십시오. 존자 아난다께서는 잘 오셨습니다. 존자 아난다께서는 오랜만에 이곳에 오실 기회를 만드셨습니다. 존자 아난다께서는 앉으십시오. 여기 자리가 있습니다.”

 

5. 바라문 고빠까 목갈라나는 낮은 자리를 취해서 한 쪽으로 물러나 앉아 존자 아난다에게 물었다.

“존자 아난다여, 각각의 관점에서나 모든 경우에서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인 고따마가 성취한 모든 특징들을 갖춘 단 한 명의 수행승이라도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각각의 관점에서나 모든 경우에서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인 고따마께서 성취한 모든 특징들을 갖춘 단 한 명의 수행승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일어나지 않은 길을 일으켰으며, 생겨나지 않은 길을 생겨나게 했으며, 선포되지 않은 길을 선포했습니다. 그 분은 길을 아는 님이었고 길을 발견한 님이었고 길에 통달한 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제자들은 그 길을 따라 나중에 그 길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6. 그러나 존자 아난다와 바라문 고빠까 목갈라나의 대화는 단절되었다. 왜냐하면, 마다가 국의 대신 바라문 밧싸까라가 라자가하 시에서 공사를 감독하다가 바라문 고빠까 목갈라나의 일터에 있는 존자 아난다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존자 아난다에게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주고받은 뒤에 한 쪽으로 물러나 앉아 마가다 국의 대신 바라문 밧싸까라는 존자 아난다에게 이와 같이 물었다.

 

7. “존자 아난다여, 지금 여기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존자 아난다여, 어떠한 이야기가 중단되었습니까?”

“바라문이여, 바라문 고빠까 목갈라나가 내게 이와 같이 ‘존자 아난다여, 각각의 관점이나 모든 경우에서나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인 고따마께서 성취한 모든 특징들을 갖춘 단 한 명의 수행승이라도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바라문 고빠까 목갈라나에게 이와 같이 ‘바라문이여, 각각의 관점이나 모든 경우에서나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인 고따마께서 성취한 모든 특징들을 갖춘 단 한 명의 수행승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일어나지 않은 길을 일으켰으며, 생겨나지 않은 길을 생겨나게 했으며, 선포되지 않은 길을 선포했습니다. 그 분은 길을 아는 님이었고, 길을 발견한 님이었고, 길에 통달한 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제자들은 그 길을 따라 나중에 그 길을 성취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대가 도착해서 중단된 이야기는 이와 같습니다.”

 

8. “존자 아난다여, 세존이신 고따마께서 ‘내가 적멸에 든 뒤에 그대들이 귀의할 피난처가 될 것이다.’라고 정해서 그대들이 귀의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수행승이라도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세존이신 고따마께서 ‘내가 적멸에 든 뒤에 그대들이 귀의할 피난처가 될 것이다.’라고 정해서 우리가 귀의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수행승도 없습니다.”

 

9. “존자 아난다여, ‘세존께서 적멸에 든 뒤에 우리들이 귀의할 피난처가 될 것이다.’라고 참모임이 선택하고 그리고 장로 수행승들이 정해서 그대들이 귀의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수행승이라도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세존께서 적멸에 든 뒤에 그대들이 귀의할 피난처가 될 것이다.’라고 참모임 선택하고 그리고 장로 수행승들이 정해서 우리들이 귀의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수행승도 없습니다.”

 

10. “존자 아난다여, 그대들에게 귀의처가 없다면, 그대들이 화합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바라문이여, 우리에게 귀의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르침을 우리의 귀의처로 합니다.”

 

11. “존자 아난다여, ‘세존이신 고따마께서 ‘내가 적멸에 든 뒤에 그대들이 귀의할 피난처가 될 것이다.’라고 정해서 그대들이 귀의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수행승이라도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수행자께서는 이와 같이 ‘바라문이여, 세존이신 고따마께서 ‘내가 적멸에 든 뒤에 그대들이 귀의할 피난처가 될 것이다.’라고 정한 단 한 사람의 수행승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존자 아난다여, ‘세존께서 가신 뒤에 우리들이 귀의할 피난처가 될 것이다.’라고 참모임이 선택하고 그리고 장로 수행자들이 정해서 그대들이 귀의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수행승이라도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수행자께서는 이와 같이 ‘바라문이여, ‘세존께서 적멸에 든 뒤에 우리들이 귀의할 피난처가 될 것이다.’라고 참모임이 선택하고 그리고 장로 수행승들이 정해서 우리가 귀의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수행승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존자 아난다여, ‘그대들에게 귀의처가 없다면, 그대들이 화합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수행자께서는 이와 같이 ‘바라문이여, 우리에게 귀의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르침을 우리의 귀의처로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존자 아난다여, 그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12. “바라문이여,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 아는 님, 보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에 의해서 모든 수행승에게 수행의 규범이 설해졌고 계율의 항목이 제정되었습니다. 포살일에는 한 마을에 의지해서 사는 우리 모두가 한 곳에 모입니다. 우리가 만나면, 계율의 항목을 아는 자에게 그것을 외울 것을 요청합니다. 계율의 항목을 외우는 동안 어떤 수행승에게 잘못이나 위범이 발견되면, 우리는 배운 바대로 그 가르침에 따라 그 사람을 다룹니다. 우리를 다루는 것은 존귀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르침이 우리를 다루는 것입니다.”

 

13. “존자 아난다여, 지금 그대가 존중하고 존경하고 공경하고 예배할 뿐만 아니라 존중하고 존경하여 의지해서 사는 단 한 사람의 수행승이라도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지금 내가 존중하고 존경하고 공경하고 예배할 뿐만 아니라 존중하고 존경하여 의지해서 사는 단 한 사람의 수행승이 있습니다.”

 

14. “존자 아난다여, ‘세존이신 고따마께서 ‘내가 적멸에 든 뒤에 그대들이 귀의할 피난처가 될 것이다.’라고 정해서 그대들이 귀의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수행승이라도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수행자께서는 이와 같이 ‘바라문이여, 세존이신 고따마께서 ‘내가 적멸에 든 뒤에 그대들이 귀의할 피난처가 될 것이다.’라고 정한 단 한 사람의 수행승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존자 아난다여, ‘세존께서 가신 뒤에 우리들이 귀의할 피난처가 될 것이다.’라고 참모임이 선택하고 그리고 장로 수행자들이 정해서 그대들이 귀의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수행승이라도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그대는 이와 같이 ‘바라문이여, ‘세존께서 적멸에 든 뒤에 우리들이 귀의할 피난처가 될 것이다.’라고 참모임이 선택하고 그리고 장로 수행승들이 정해서 우리가 귀의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수행승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존자 아난다여, ‘지금 그대가 존중하고 존경하고 공경하고 예배하는, 존중하고 존경하여 의지해서 사는 단 한 사람의 수행승이라도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그대는 이와 같이 ‘바라문이여, 지금 내가 존중하고 존경하고 공경하고 예배할 뿐만 아니라, 존중하고 존경하여 의지해서 사는 한 사람의 수행승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존자 아난다여, 그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15. “바라문이여,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 아는 님, 보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에 의해서 선포된 열 가지 청정한 믿음의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자에게 이러한 원리가 발견되면, 우리들은 그를 존중하고 존경하고 공경하고 예배할 뿐만 아니라 존중하고 존경하고 의지해서 삽니다. 열 가지 원리란 어떠한 것입니까? 바라문이여, 세상에서 수행승이

1) 계행을 닦고 계율을 갖추고 계율의 항목을 수호하고 지켜서 행동규범을 완성하고,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을 받아 배웁니다.


2) 많이 배워서 배운 것을 기억하고 배운 것을 모읍니다.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고,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가르치는 그러한 원리들을 많이 배우고 기억하고 언어로써 습득하고 정신으로 탐구하고 올바른 견해로써 꿰뚫습니다.


3) 자신의 옷, 음식, 처소, 필수의약품에 만족합니다.


4)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난관이나 어려움이 없이 보다 높은 마음을 구성하는 네 가지 선정을 얻어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한 삶을 영위합니다.


5) 여러 가지 신통의 종류를 체험합니다. 하나에서 여럿이 되고 여럿에서 하나가 되고,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자유로운 공간처럼 장애 없이 담을 통과하고 성벽을 통과하고 산을 통과하고, 물속처럼 땅속을 들어가고, 땅위에서처럼 물위에서도 빠지지 않고 걸어 다니고, 공중에서 앉은 채 날개 달린 새처럼 날아다니고, 손으로 이처럼 큰 신비를 지니고 이처럼 큰 능력을 지닌 달과 해를 만지고 쓰다듬고, 하느님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육신으로 영향력을 미칩니다.


6) 청정해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귀로 멀고 가까운 하늘사람들과 인간의 두 가지 소리를 듣습니다.


7)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어 다른 뭇삶이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분명히 알고,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을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을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성냄으로 가득 찬 마음을 성냄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가득 찬 마음을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마음을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주의 깊은 마음을 주의 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산만한 마음을 산만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계발된 마음을 계발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계발되지 않은 마음을 계발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고귀한 마음을 고귀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고귀하지 못한 마음을 고귀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삼매에 든 마음을 삼매에 든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을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해탈된 마음을 해탈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해탈되지 않은 마음을 해탈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압니다.


8) 자신의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에 관하여 ‘한 번 태어나고 두 번 태어나고 세 번 태어나고 네 번 태어나고 다섯 번 태어나고 여섯 번 태어나고 일곱 번 태어나고 여덟 번 태어나고 아홉 번 태어나고 열 번 태어나고 스무 번 태어나고 서른 번 태어나고 마흔 번 태어나고 쉰 번 태어나고 백 번 태어나고 천 번 태어나고 십만 번 태어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수많은 세계가 생성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생성되는 시간을 지나면서, 당시에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었고, 나는 그 곳에서 죽은 뒤에 나는 다른 곳에 태어났는데, 거기서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진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었다. 그 곳에서 죽은 뒤에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기억합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합니다.


9)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삶들을 관찰하여,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삶들에 관하여 ‘어떤 뭇삶들은 신체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고귀한 님들을 비난하고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잘못된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뭇삶들은 신체적으로 선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선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고 고귀한 님들을 비난하지 않고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올바른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가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 것이다.’라고 분명히 압니다. 이와 같이 그는 청정해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눈으로 뭇삶들을 관찰하여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삶들에 관하여 분명히 압니다.


10) 번뇌를 부수어 번뇌 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증득하고 깨달아 성취합니다.

 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 아는 님, 보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에 의해서 선포된 열 가지 청정한 믿음의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자에게 이러한 원리가 발견되면, 우리들은 그를 존중하고 존경하고 공경하고 예배할 뿐만 아니라 존중하고 존경하고 의지해서 삽니다.”

 

16. 그러자 마가다국의 대신 바라문 밧싸까라는 장군 우빠난다에게 말했다.

“장군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존자들이 존중해야 할 사람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을 존경하고 공경해야 할 사람을 공경하고 예배해야 할 사람을 예배한다면, 확실히 존중해야 할 사람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을 존경하고 공경해야 할 사람을 공경하고 예배해야 할 사람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 존자들이 그들을 존중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존중하고 존경하고 공경하고 예배하겠습니까? 그리고 누구를 존중하고 존경하고 의지하겠습니까?”

 

17. 이 때 마가다 국의 대신 바라문 밧싸까라는 존자 아난다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존자 아난다여, 존자 아난다께서는 지금 어디에서 지내십니까?”

“바라문이여, 나는 지금 벨루 숲에서 지냅니다.”

“존자 아난다여, 벨루 숲은 아름답고, 조용하고, 소음이 없고, 떨어져 있고, 인적이 드물고 홀로 지내기에 적당합니까?”

“바라문이여, 참으로 벨루 숲은 아름답고, 조용하고, 소음이 없고, 떨어져 있고, 인적이 드물고, 홀로 지내기에 적당합니다. 그대와 같은 안내자나 수호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18. “존자 아난다여, 참으로 벨루 숲은 아름답고, 조용하고, 소음이 없고, 떨어져 있고, 인적이 드물고, 홀로 지내기에 적당합니다. 그곳에는 명상에 드는 자로서 명상을 습관적으로 닦는 존귀한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존귀한 자들은 명상에 드는 자로서 명상을 습관적으로 닦는 자들입니다. 존자 아난다여,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베쌀리 시에 있는 마하 숲의 꾸따가라 강당에 계셨습니다. 존자 아난다여, 이 때 제가 바하 숲의 꾸따가라 강당에 계신 세존이신 고따마를 찾았습니다. 그 때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많은 법문으로 명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명상에 드는 자, 명상을 습관적으로 닦는 자, 모든 명상을 찬양하는 자였습니다.”

 

19. “바라문이여, 세존께서는 모든 형태의 명상을 찬양하시지도 모든 형태의 명상을 비난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바라문이여, 어떠한 종류의 명상을 세존께서는 찬양하지 않았습니까?

 ‘바라문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1)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에 정복되어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의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그가 안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면, 그는 명상하되, 앞으로 명상하고 밖으로 명상하고 떨어져 명상합니다.

2) 분노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분노에 정복되어 이미 생겨난 분노에서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그가 안으로 분노를 일으키면, 그는 명상하되, 앞으로 명상하고 밖으로 명상하고 떨어져 명상합니다.

3) 해태와 혼침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해태와 혼침에 정복되어 이미 생겨난 해태와 혼침의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그가 안으로 해태와 혼침을 일으키면, 그는 명상하되, 앞으로 명상하고 밖으로 명상하고 떨어져 명상합니다.

4) 흥분과 회한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흥분과 회한에 마음이 정복되어 이미 생겨난 흥분과 회한의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그가 안으로 흥분과 회한을 일으키면, 그는 명상하되, 앞으로 명상하고 밖으로 명상하고 떨어져 명상합니다.

5) 의심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의심에 정복되어 이미 생겨난 의심의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그가 안으로 의심을 일으키면, 그는 명상하되, 앞으로 명상하고 밖으로 명상하고 떨어져 명상합니다.

 세존께서는 그러한 종류의 명상을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20. 그러면 세존께서는 어떠한 종류의 명상을 찬양했습니까? 바라문이여, 세상에서 수행승이

1)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합니다.

2)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합니다.

3) 희열이 사라진 뒤,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평정하게 지내고, 신체적으로 행복을 느끼며, 고귀한 님들이 평정하고 새김이 있는 행복한 삶이라 부르는 세 번째 선정을 성취합니다.

4) 즐거움과 괴로움이 버려지고 만족과 불만도 사라진 뒤, 괴로움을 뛰어넘고 즐거움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합니다.

 세존께서는 그러한 종류의 명상을 찬양했습니다.”

 

21. “존자 아난다여, 참으로 세존께서는 비난해야 할 명상에 대하여는 비난을 했고 찬양해야 할 명상에 대하여는 찬양하셨습니다. 존자 아난다여, 이제는 가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바라문이여, 시간이 되었으니 그만 떠나도 좋습니다.”

 

22. 그래서 마가다 국의 대신 바라문 밧싸까라는 존자 아난다가 한 말에 대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 곳을 떠났다. 마침 마가다 국의 대신 바라문 밧싸까라가 그 곳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라문 고빠까 목갈라나는 존자 아난다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존자 아난다께서는 우리가 질문한 것에 대해서는 아직 대답하시지 않았습니다.”

“바라문이여, 우리가 이미 그대에게 ‘바라문이여, 모든 관점에서 모든 경우에서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인 고따마께서 성취한 모든 특징들을 갖춘 단 한 명의 수행승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일어나지 않은 길을 일으켰으며, 생겨나지 않은 길을 생겨나게 했으며, 선포되지 않은 길을 선포했습니다. 그 분을 길을 아는 님이었고 길을 발견한 님이었고 길에 통달한 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제자들은 그 길을 따라 나중에 그 길을 성취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고빠까 목갈라나의 경이 끝났다.


  1. 웰루와나라마(Veḷuvanārāma, 죽림정사竹林精舍)를 깔란다까니와빠(Kalandakanivāpa)라 부르기도 하는데, 다람쥐(Kalandaka)에게 먹이를 주는 곳(nivāpa)이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