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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니까야는 과연 친설인가 ? ... (2)

moksha 2017. 12. 21. 15:03

제6 , 전재성 회장 “니까야는 창작 아닌 ‘리얼리티’ 자료”


최근에 법보신문에서 권오민교수와 마성스님 사이에 대승불교 경전과 초기경전인 아함과 니까야 사이의 불설비불설 논쟁이 뜨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대승비불설 논쟁은 테라바다 불교권이나 니까야 연구자들에 의해서 제기된 것이 아니라 대승불교권 자체 내에서 제기된 것이다.

도미나가 나카모도(富永仲基, 1715~1746)가 북전의 한역 팔만대장경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출정후어(出定後語)」라는 책을 출간, 일체경은 불설이라 일컬어지지만 대승은 불설이 아니고 대승의 경전은 모두 후인(後人)의 가탁이라고 했다.

그의 대승비불설론은 일본불교계에 심대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는 한역경전 가운데 오히려 소승이라고 여겨졌던 아함 경전류야말로 유일한 불설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일본불교계는 대승불교권의 중현이나 세친 등의 아비달마논서를 연구하여 대승불설론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도미나가 나카모토의 대승비불설이라는 것이 너무도 충격적인 주장이고 극단적인 것이었다면, 그에 대한 반론으로서 권오민 교수가 ‘대승경이 비불설이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이나 니까야도 비불설이다.’라는 주장도 너무나 극단적인 주장임에는 틀림없다.

 

이 논리는 마치 까마귀의 살이 검은 색이 아니므로 까마귀의 뼈도 검은 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너무 거칠고 무의미한 말이다.

여기에 마성스님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여 대승불교의 경전을 두고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가짜가 진짜 혹은 원조라고 주장한다.’라고 원색적으로 표현한 것은 너무 극단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미타경과 같은 대승경전에서도 극락조가 부르는 노래는 “무상‧고‧무아”-아함‧니까야의 핵심되는 부처님의 가르침-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심지어 천수경의 다라니인 신묘장구다라니의 핵심 사상은 탐진치의 소멸-아함‧니까야의 핵심되는 열반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대승불교를 비불설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권 교수의 말대로 한편 대승불설론의 모든 아비달마적 이론은 아함의 한 경전인 『대반열반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에 의지하라,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

생각에 의지하지 말고 지혜에 의지하라. 명료하지 않은 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말고 명료한 경(了義經)에 의지하라.’라는 네 가지 의지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 논사들은 아함에 의거하여 대승불설론을 합리화했다는 역사적 근거가 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아함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그 역사성을 무시한다면, 적어도 대승아비달마 논사들이 불멸후 천년 경에 단지 주어진 경과 율에 나타나고 법성(法性)이나 정리(定離)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대승도 불설임을 입증했다는 권 교수의 주장에 아무도 반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성스님은 대승경전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부처님의 친설이 아님은 명백하다고 주장한 것은 지나친 표현이 있지만, 형이상학적인 논쟁으로 해결되지 않는 논쟁의 핵심에 역사성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권 교수의 주장에 대한 탁월한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함‧니까야와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쟁은 각 부파나 아비달마 논사의 입장이나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경전성립의 역사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권오민 교수는 ‘사실 제1결집에서 송출된 법 즉, 경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현존의 아함과 니까야로 발전했는지 기원전 1세기까지 300여 년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때에 이미 대승경전이 편찬되기 시작한다.’라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권오민 교수는 위의 주장에서 아함‧니까야와 대승경전 사이에 대승경전의 편찬이 아함‧니까야 보다는 신층인 것임을 암시하면서도 애써 부정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아함‧니까야가 대승경전 보다도 고층의 경전임을 암시하는 역사적인 결정적 증거가 있다.

아함‧니까야와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논쟁은 관점에 따라 상대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좀 다른 관점 역사적인 고층‧신층의 문헌문제로 대체하여 접근 할 수 있다.

 

인도에서 아직까지 해독 가능한 가장 오래된 문자의 기록은 아쇼카 왕의 비문이다.

인도에서 오래된 고층의 문헌이라면 당연히 아쇼카 왕의 비문에 어떤 형태로든 반영되게 마련이다.

아쇼카 왕(대략 B.C. 268~232년)은 그의 캘컷타 바이라트(Calcutta-Bairāṭ) 비문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모두 선설하신 것으로 그 선법이 오래 지속하도록 하기 위하여 빠알리 니까야의 여러 경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비문을 완역하면 아래와 같다.

마가다의 왕 쁘리야닷씨는 승단의 수행승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에게 건강과 매사의 안녕을 기원하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존자들이여, 얼마나 짐이 부처님과 가르침과 참모임에 존경과 신뢰를 펼쳐나가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존자들이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어떠한 가르침이던지 그것은 훌륭하게 설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존자들이여, 진정한 가르침이 어떻게든 오랜 기간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길에 관하여 나에게 떠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존자들이여, 짐은 수많은 비구와 비구니들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의 경들을 항상 배우고 사유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① ‘제어에 대한 선양)’,

② ‘고귀한 삶)’,

③ ‘미래에 대한 두려움)’,

④ ‘성자의 노래’,

⑤ ‘성자의 삶에 대한 법문)’,

⑥ ‘우빠띠싸의 질문’,

⑦ ‘라훌라에 대한 교훈’.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재가의 남녀 신도들도 이 성스러운 경들을 듣고 사유하여야 합니다.

존자들이여, 이 기록은 이와 같은 목적 즉 백성들이 짐의 의도를 알도록 하게 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위와 같이 아쇼카 왕의 비문에는 일곱 경이 인용되어있다.

리스 데이비드에 의하면, 그 가운데 ④ ‘성자의 노래’는 이 숫타니파타의 ‘성자의 경(Stn. 207~221)’을 말하고, 꼬삼비나 빈터닛쯔에 의하면, 그 가운데 ⑤ ‘성자의 삶에 대한 법문’은 숫타니파타의 ‘날라까의 경’의 후반부(Stn. 699~723)를 말한다. 찰머에 의하면, 날라까 경은 실제로 ‘성자의 삶에 대한 경(Moneyyasutta)’이라고도 불리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꼬쌈비에 의하면, ⑥ ‘우빠띠샤에 대한 질문’은 숫타니파타의 ‘싸리뿟따의 경’을 말한다. 우빠띠샤는 싸리뿟따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⑦ ‘라훌라에 대한 교훈’은 자야비끄라마에 의하면, 숫타니파타의 ‘라훌라의 경’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도 있으나, 일반적인 학설로는 맛지마니까야의 ‘라훌라에 대한 교훈의 작은 경’을 의미할 가능성이 더 크다.

또한 ① ‘제어에 대한 선양’은 자야비끄라마에 의하면, 숫타니파타의 ‘올바른 유행의 경’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고, ‘서두름의 경’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제어라는 말의 어원인 비나야로 보면, 율장과 관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무라카미 신칸(村上眞完)에 의하면 초전법륜을 의미하는 것이다.

율장의 초전법륜에 나타나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가르침이야말로 최상의 계율이기 때문이다.

② ‘고귀한 삶’에 대해서는 디가니까야에 나오는 ‘열 가지 성스러운 삶( 十賢聖居)’ 또는 앙굿따라니까야)에 나오는 ‘네 가지 성스러운 전통(四聖種)’과 일치한다.

③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앙굿따라니까야의 ‘다섯 가지 미래에 대한 두려움(五種怖畏)’을 말한다.

따라서 아쇼카왕의 캘컷타 바이라뜨 비문에 언급된 일곱 경들 가운데 적게는 세 경, 많게는 다섯 경이 숫타니파타에서 유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대승불교 경전에서 극찬해 마지않는 아쇼카 왕의 비문에 직접 언급된 유일한 불교의 가르침들은 모두 니까야에 현존하는 것들이다. 이것을 두고 권오민 교수가 불멸후 300년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대승경전들이 당시에 존재했다면, 전세계에 불교를 홍포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던 아쇼카왕의 비문에 어떻게든 경명이라도 언급이 되었을 것이다.

대승아비달마논사들은 경전만을 접하고 불설비불설 문제를 다루었을 뿐 이러한 역사적 고고학적 사실을 접하지 못했다.

세친이나 청변, 중현이 제일결집은 모두 산실되었고 그 후 무량의 경전이 은몰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은몰된 무량의 경전이 아쇼카 재위시까지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말인가?

 

지금 인도에서 고대사로서 정통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고고학적 발굴과 아쇼카왕의 비문과 니까야에 등장하는 제왕들의 통치와 사회문화적인 현상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니까야는 단순히 편집되거나 편찬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가정하지 않으면, 서술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구성을 통해 수집된 자료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들은 고고학적 발굴로 대부분 입증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함‧니까야가 후대에 편찬된 대승불교의 경전보다 오리지널하고 고층적인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권 교수는 아함이나 니까야도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고 설일체유부나 상좌부에서 취사선택 편찬결집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니까야에 나타나는 구전을 수집하였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무시하거나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부파불교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테라바다의 전승은 단지 상좌부라는 부파의 전승만은 아닌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불멸후에 불교는 수많은 부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아쇼카 왕은 불법에 귀의한 뒤에 수행승의 교단을 만들었는데, 그 수행승들-수많은 부파불교의 교단에 속한-가운데는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여 ‘어떤 자들은 불을 숭배하고, 어떤 자들은 고행에 열중했다.

어떤 자들은 태양신을 숭배하고, 어떤 자들은 법과 율을 파괴하고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수행승들 가운데는 포살과 안거를 거부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쇼카 왕은 이러한 스캔들을 궁극적으로 끝내기위해 장로 목갈리뿟따 딧싸로 하여금 교단을 정화하는 차원에서 부파불교의 수행승들의 잘못된 교리 즉,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세심하게 배제하여 제일결집이후에서 전승되어 내려오던 빠알리 니까야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인 사업을 단지 존재하지도 않거나 역사적으로 단명했던 다른 부파의 사적인 소의경전들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함은 원래가 범어로 쓰여졌고, 설일체유부의 것이라고는 하나 빠알리 니까야와 3분의 2가 일치하고 나머지도 유사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아 경전 가운데 니까야와 함께 고층에 속하는 것이다.

 

더구나 빠알리 니까야의 게송언어는 언어학적으로도 베다어에까지 소급하는 경전으로 가장 고층에 속하는 경전임이 입증된지 오래되었다.

아비달마 논사들의 주장대로 법성을 불설의 준거로 삼는다면, 극단적으로 『명심보감』에 법성이 있다면, 그것도 불설일 것이다.

오늘날 누가 과연 법성이 무엇인가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불교에는 대소승을 합하여 방대한 경전 군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신층과 고층을 역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구분하여. 아함‧니까야와 다른 경전으로 구분한다면, 확실히 아함‧니까야가 고층에 속하며, 다른 논서나 대승경전은 그것을 토대로 성립되었거나 아함‧니까야의 본래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신층의 경전임이 자명하다.

단지 아함‧니까야는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이 담긴 고층의 경전이고, 대승경전은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과 깨달은 제불의 가르침을 담은 신층의 경전이다.

 

제7 , 역사성 운운은 사실성 무시한 태도


론자가 바뀌었지만 반론의 내용은 역시 놀랍다. 우리나라 불교학에서 ‘신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초기불교 연구자조차 이토록 경직된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

유연성[調柔]은 불타의 7선(善) 중의 하나라는데. 필자의 명색의 전공은 아비달마불교이다.

아비달마는 아함과 니카야로 대변되는 초기경전의 일차적인 해석체계이다.

필자는 지난 삼십 년 간 이 불교를 포함하여 이른바 ‘소승’으로 일컬어진 초기불교에 대한 부정적 편견과 구호로 점철된 우리 불교학계의 경직된 사고에 대해 비판해왔다.

허나 거기에는 아무런 메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최근 그러한 내용의 몇 편의 글을 책으로 묶어내면서 ‘투정’이라 자조하였다.

헌대 거의 모든 인도불교사에 기술된 ‘니카야는 상좌부에서 편찬 전승한 경전’이라는 이 말 한마디를 소화해낼 수 없는 지경이라니.

거듭 말하건대, 필자는 문제의 논문(「불설과 비불설」) 사족에서 “대승경이 친설이 아니기 때문에 비불설이라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 또한 친설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비불설이다”고 말하였음에도 반론자마다 그것을 “대승경이 비불설이라면 아함과 니카야도 비불설이다”고 오독하여 필자를 물귀신(Lokāyata의 vitandā sattha)으로 만드는지 모르겠다.

혹여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힐난할까 두렵다.

 

딴 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불설=친설’이라는 맹목의 신념이 두려운 것이다.

‘친설이 아니기 때문에’라는 한정사는 불설의 기준이 ‘친설’이 될 수 없음을 지시하는 매우 중요한 말로서, 필자는 오로지 이를 밝히기 위해 4백 매에 달하는 논문에서 이와 관련된 논거만도 30여 종의 대․소승의 경론 상에서 200개 이상을 제시하였다.

전재성 회장은 필자가 어떠한 근거에서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을 친설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는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알고 있다면 ‘명심보감 운운’하며 희화할 것이 아니라 필자가 제시한 논거를 비판했어야 하였다.

필자는 이미 논문의 본문에서 “베단타의 말일지라도 법성에 부합하면 불설이다”는 중관학파의 대표논사인 청변의 말을 인용하였었다.

또한 “도미나가의 대승비불설 충격으로 인해 일본불교계는 대승불교권의 중현이나 세친 등의 아비달마논서를 연구하여 대승불설론을 정당화하였다”고 하여 필자의 논문을 그것의 아류로 여기고 있지만, 중현은 대승불교권도 아닐 뿐더러 일본의 어떤 이가 소승의 아비달마논서를 이용해 대승불설론을 펼쳤는지 밝혀주기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문제의 논문에서 소승의 부파들 사이에서 왕성하게 일어난 불설/비불설론을 통해 ‘불설=친설’이라는 종래의 상식을 비판하고 대‧소승이 다같이 수용한 불설론의 자취를 탐구하였다.

헌대 전 회장은 엉뚱하게도 여기에 고층/신층의 문제를 개입시키고 있다. 불설/비불설(혹은 친설/비친설)과 이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쇼카왕 비문에 기록된 7가지 경설을 통해 볼 때 아함․니카야는 고층임이 명백하다”고 하였는데, 이 때 ‘고층’은 친설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논리인가?(『쌍윳따』 하나만 해도 경의 수는 3천에 이른다)

‘까마귀 운운’의 로타야타와 무엇이 다른가? 게다가 초기경전이나 『숫타니파타』 안에서 고층과 신층을 나눈다는 말은 들어보았어도 “아함‧니카야는 고층, 대승경전은 신층”이라는 말은 정말이지 금시초문이다.

 

한편 전 회장은 『아미타경』도 무상․고․무아를 설하기 때문에, 신묘장구대라니도 탐진치의 소멸이기 때문에 비불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아를 설하고, 번뇌소멸만 설하면 불설(=친설)인가? 무아설 등이 불설의 기준인가?

그러나 독자부나 정량부에서는 무아를 설하는 제경을 불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교가 아니다”고 한다면 필자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 현장이 인도에 체류할 무렵 유부에 버금가는 세력의 부파였다.

또한 4의설(依說) 자체가 아함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증거라고 하였지만(4의설은 아함에 나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상좌부에서는 4의설을 인정하는가?(마성 스님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혹은 “불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 것도 경과 율에 위배되면 비불설로 버려야 하고, 경과 율과 논모를 지닌 한 명의 비구로부터 들었다고 한 것도 이에 부합하면 불설로 취해야 한다”는 취지의 『대반열반경』의 4대교법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무엇이 중요한가?

다만 설한 사람인가, 경을 관통하는 정신 즉 ‘법’인가?

전 회장은 이에 따라(다시 말해 부파마다 불설/비불설의 입장을 달리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경전 성립의 역사성을 살펴보아야 하며, 그런 점에서 마성 스님의 반론은 탁월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전 성립의 역사 운운’하는 것 자체가 ‘사실성(史實性)’을 무시한 태도라 할 수 있다. 필자도 일찍이 『인도불교사』(1985, 경서원)라는 제목의 책을 번역 출판한 적이 있지만, 거기서는 대개 경전성립에 관해 불멸 직후 마하가섭 주도의 제1결집(밧지 비구들의 10사 비법(非法)에 따른 제2결집과 상좌부/대중부의 근본분열) 아쇼카왕 시대 목갈리풋타 팃사 주도의 제3결집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인가? 이는 모두 남방 상좌부 전승에 따른 것으로, 결집과 분파에 관한 한 제 전승은 어떠한 경우에도 일치하지 않는다.

제2결집의 경우, 우리는 대개 장로 야사가 밧지 비구들이 행한 금은수납 등의 열 가지 일을 비법으로 지적하자 도리어 거갈마(擧羯磨, 교단에서 일시축출)에 처함에 따라 이를 서방의 장로들에게 알려 이른바 제2결집을 단행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밧지 비구들도 대결집을 단행함으로써 불교교단은 상좌부와 대중부로 근본분열하고 이후 18개 부파로 지말분열하였다고 이해하는데, 그렇다면 대중부의 율장인 『마하승기율』에서는 금은수납을 정법(淨法)으로 인정하는가?

아니다.

역시 비법으로 배척한다.

그렇다면 근본분열에서의 ‘대중부’ 정체는 무엇인가?

 

제2결집을 근본분열과 관련시키고 있는 것은 오로지 4~5세기에 편찬된 스리랑카의 사서 『디파밤사』뿐이다.

여기서는 계속하여 불멸 100년과 136년 포살을 행하지 않는 6만의 외도 적주(賊住)를 물리치고 상좌부의 분별설을 선양하기 위해 목갈리풋타가 제3결집을 단행하고 『카타밧투(Kathāvatthu)』를 지었으며, 불멸 236년에도 다시 제3결집을 단행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마성 스님도, 전 회장도 이에 근거하여 상좌부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니카야를 친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교사에 대한 몰이해라고 비난한다.

 

“아쇼카왕에 의해 이루어진 국가적 사업(제3결집)을 존재하지도 않거나 역사적으로 단명한 다른 부파의 사적인 경전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훈계하였는데, 불교의 전승 상에 도대체 몇 명의 아쇼카왕이 등장하는지 알고 한 말인지, 무슨 근거에서 ‘사적 경전 운운’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쇼카왕 때 대천(大天)의 5사송에 의한 근본분열이나 카니시카왕의 후원으로 실행된 유부의 결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5사송 또한 대천과 관련지어 설한 것은 오로지 『이부종륜론』뿐이다. 『디파밤사』든 『이부종륜론』이든 일차사료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이 분야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우리나라의 법경 스님도 “가상적 사서인 『디파밤사』를 역사적 증언으로 수용하는데는 문제가 있다”고 하였으며, 라모트 같은 이는 “결집의 전승은 성전문헌과 그 후의 여러 부파의 성전들(양자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 오래된 것이고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였을 것이다”고 말한다.

 

최근 우리 학계에 자주 회자되었던 사사키 시즈카는 부파분열을 비롯한 초기불교 교단사에 관한 한 서로 상충되는 거의 모든 정설(定說)은 후대 개변되거나 가탁되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그의 연구를 시작한다.

사실 인도불교사에 대한 약간의 상식이 있는 이라면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유래를 동일선상에서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 또한 이에 관한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불교를 시대적으로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로 구분하고, 부파불교가 일어나면서 초기불교가 끝나고,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부파불교가 끝난 것으로 여긴다.

혹자는 여기에 불타 재세시의 불교라는 뜻의 ‘근본불교’라는 말까지 더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든 근본불교든 그것을 전하는 텍스트가 언제 어떻게 성립하였지 반문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니카야는 기원전 1세기 무렵 문자로 작성되며, 스리랑카에서는 기원 후 5세기까지도 팔리어 삼장의 분류와 구성에 대해 논란을 벌인다.

황순일 교수는 곰브리치 교수의 불교학 방법론을 전하면서 “우리는 팔리 니카야 또는 한역 아함이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부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한 문헌일 것이란 환상에서 일단 벗어나야 하며,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그리고 교리적 영향 아래서 오랜 시간에 걸쳐 변형 또는 발전해 온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라모트 역시 말하였다.

 

모든 성전들이 부파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던 초기불교시대에 이미 고정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그렇지만 제1결집 이래 3~4백여 년 간 면면히 구전되어 왔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더욱이 사자상승의 계보도 전할뿐더러 경은 송경자(誦經者, sūtrāntika)라 불린 전문집단에 의해 전승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른바 율상수나 법사들의 계보는 부파마다 다를뿐더러 후대 작성된 것이다.

송경자 또한 다수의 부파에서 그 존재가 확인된다.

그들에 의한 의도적 개변도 확인된다.

그런데 왜 송경자가 필요하였을까? 다만 경을 암송하는데 전문적 능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인가?

필자는 이들이 정법의 소멸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잡아함』제640경을 비롯한 다수의 전승에서는 샤카․야바나 등 서방에서 침입한 왕들의 무자비한 파불(破佛)과 불교 내부의 분쟁으로 인한 정법의 멸진을 전하고 있으며, 논서에서는 “불타 교법은 누구에 의해 유지 전승되는가?”라고 끊임없이 묻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불교에 누가 될지라도 불교학은 그것이 ‘학’인 이상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시작해야 한다. 전 회장은 니카야는 아무런 단절 없이 전승되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목갈리풋타가 비판하였던 이설자는 누구인가?

『디파밤사』에서는 외도 적주라고 하였지만, 리스 데이비드 부인은 『카타밧투』의 이설자로서 독자부, 정량부, 설일체유부, 대중부, 안다카, 계윤부 등을 열거하고 있다.

 

그들은 왜 외도 적주로 불렸을까? 그들은 상좌부의 무엇을 비판하였고, 이에 대한 상좌부의 대응논리는 무엇이었던가? 상좌부는 그들을 끝끝내 배척하여 불교교단에서 몰아내었던가?

이상과 같은 학적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 한 오로지 상좌부 전승의 니카야만이 불설(=친설)이라는 맹목의 주장만을 되풀이하게 될 것으로, 이를 상대로 논쟁은 이루어질 수 없다.

논쟁의 생명은 모름지기 논거의 제시와 상대방 논거(또한 비유)의 비판적 검토에 있기 때문이다.

권오민

 

 

제8 , 니까야 체계적 전승…‘친설’ 담겼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불설’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빨리어는 buddha-vacana이다. 인도유럽어에서 복합어 앞자리에 오는 용어는 단수로도 복수로도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buddha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이 용어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를 단수 고유명사로 본다면 buddha-vacana는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이란 의미를 가지며 ‘친설’이라고 할 수 있고, 복수 일반명사로 본다면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말씀’이란 의미를 가지며 보다 폭넓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게 된다.

불설과 친설은 모두다 buddha-vacana에 해당되는 한문용어로 볼 수 있지만, 그 외연은 친설보다 불설이 훨씬 더 넓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는 양자 중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까운 종교로서 받아들여졌을까? 불교가 일반적으로 Buddhism으로 영역된다면, 라이벌 종교였던 자이나교는 Jainism으로 영역된다.

 

자이나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Jina 즉 승리자로 불린다.

Jaina는 Jina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승리자들에 속하는’이란 의미를 지니다.

따라서 자이나교는 한사람의 승리자(Jina)의 가르침이 아니라 복수의 승리자들의 교리체계란 의미를 지니게 된다.

불교가 결코 Baudhism으로 지칭되지 않았다는 점은 불교가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고따마 붓다의 교리체계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번이라도 초기경전을 조심스럽게 분석하고 다른 번역본들과 대조하면서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과연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야기들이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옮겨놓은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동일한 경의 이본들 사이에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차이점들이 발견되기도 하고, 동일한 내용의 가르침이 다른 경들에서 때로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기도 하며, 교리적으로 수행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들이 초기경전의 도처에서 혼재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실상 남방불교 테라와다(Theravāda)전통의 마하비하라(Mahāvihāra)교단은 빨리 삼장(tipitaka)을 이러한 수많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부처님의 말씀(buddha-vacana) 즉 친설 로서 받아들인다.

 

이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설서로서 확실히 붓다 이후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빨리 아비담마(abhidhamma) 문헌들까지도 부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기 위해서 상카시야(Sāmkāsya)와 관련된 전설까지 동원하고 있을 정도로 빨리삼장의 정통성을 부처님의 말씀 즉 친설에서 찾으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불교가 학문적으로 연구된 이래에 남방불교 교단의 이러한 주장은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빨리어 문헌은 네팔 카트만두에서 발견된 8세기경의 필사본으로, 남방불교 국가에서 발견된 오래된 필사본들은 거의 대부분이 17~18세기경의 문헌으로 추정될 뿐이다.

특히 스리랑카의 경우 15세기 이래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의 식민통치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필사본들이 소실되어 버렸고, 12세기 미얀마 문법학자들에 의해서 음운체계가 대대적으로 수정된 필사본들이 미얀마와 태국을 통해 17세기 이후에 역수입된 것들만 남아있다.

빨리경전협회(PTS)에서 출판된 빨리 삼장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역수입된 문헌들에 기초하여 편집되고 로마자화 되어서 출판된 것에 불과하다.

 

언어적으로 보았을 때 남방불교 테라와다 전통은 빨리어(Pāli)를 마가다어(Māgadhī)라고 주장한다.

고따마 붓다가 자신이 활동했던 마가다 지역의 방언을 사용했을 것임으로, 빨리어가 마가다어라는 것은 빨리삼장의 언어가 고따마 붓다의 언어라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전역에서 그 지역의 방언으로 기록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아쇼까왕 비문석주의 언어들과 빨리어를 비교해보면 빨리어는 마가다 지역이 있는 동인도 지역의 방언들보다는 서인도 지역의 방언들과 더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빨리어는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언어일 가능성 또한 거의 없어 보인다.

 

한역 아함경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중기인도어인 프라끄릿어 (Prakrit)로 문자화 되어 최종적으로 중국에서 한역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들이 마치 단일한 부파에 속하는 것처럼 모여 있지만, 장아함은 법장부, 중아함과 잡아함은 설일체유부, 그리고 증일아함은 대중부에 속하는 문헌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최근에 북서인도에서 발견되어 독일과 영국에서 편집되고 있는 싼스끄릿어(Sanskrit) 근본설일체유부 장아함경이 한역 장함경에 비해서 크기가 거의 두 배에 이르고 중아함에 있는 몇몇 경전들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한역 4아함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외형적으로 보았을 때 빨리 니까야도 한역 아함경도 현재의 형태로서는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부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있는 문헌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친설이란 잣대를 통해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구전전통의 측면이 강한 초기경전과 문자전통이 강한 대승경전은 경전의 성립과 전승이란 측면에서 많은 차이를 가지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초기경전은 최초에 성립된 후 적어도 200~300여 년간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점차적으로 문자화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불멸직후 라자가하(Rājagaha)에서 있었던 제1결집에서 경․율․론의 삼장이 합송되었다는 율장의 기록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지만 고따마 붓다의 사후에 그 직계 제자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스승의 가르침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을 것이라는 것 또한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록 율장에서 나타나는 제1결집과 같은 규모로 500여명의 아라한들이 모이는 거대한 결집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을지라도, 스승의 가르침과 승단의 규칙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승단 차원에서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고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상식적으로 암송에 의존한 구전의 경우 인간 기억의 한계 때문에 훨씬 더 쉽게 변형되고 다른 이야기들이 쉽게 삽입될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초기경전은 구전으로 전승되던 시기에 문자로 기록되어 전승된 시기보다 훨씬 더 적게 변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초기경전은 한명의 승려에 의해서 암송된 것이 아니라 율장 암송자(vinaya-dhara), 가르침 암송자(dhamma-dhara), 아비담마 목록 암송자(mātikā-dhara) 등으로 표현되는 암송전문승려집단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테라와다 주석전통은 여기에 더해서 디가 합송자(Dīgha-bhānaka) 맛지마 합송자(Majjhima-bhānaks) 등으로 이러한 역할이 점차적으로 더욱더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경전이 일정한 숫자의 전문가집단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암송되었다는 것은 개인의 기억의 한계에 기인한 실수가 전체 승려들의 합송을 통해서 보안되고 정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인적 차원의 단순한 오기와 의도적인 가감이 은밀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문자에 의한 전승보다도 구전의 경우에 변형이 훨씬 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인도불교의 승단들이 몇몇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적으로 거대한 사원군을 형성하게 된 배경에는 많은 수의 암송전문승려들을 조직화하여 체계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숨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초기경전은 이 시기에 이미 변형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동일한 집단 내부에서는 합송을 통해 변형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지만, 승단이 지리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나가고 점차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사상적 배경에 노출되면서 서로 왕래가 부족했던 집단들 사이에서 합송을 통해 변형을 줄이고 부족한 부분을 보안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경전의 다양한 판본들을 조사했던 랑스카진이 「빨리구전문학」이란 논문에서 주장했듯이 부파를 달리하는 개별적인 판본들 사이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경이 설해진 장소, 등장인물, 상황전개순서 등과 같은 사소한 것으로서, 교리적 부파적 차이에 기인한 차이는 아주 드물게 발견될 뿐이다.

 

한편 대승경전은 체계화 분업화된 승단에서 조직적으로 성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리처드 곰브리치, 폴 윌리엄스와 같은 서구의 많은 학자들은 대승불교의 탄생을 경전의 문자화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비록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새롭게 발견된 대승불교 필사본의 연대가 기원전 1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인도의 중심부에서 대승불교의 흔적은 기원후 400년 이전에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부파불교와 같은 체계화되고 분업화된 승단조직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다양한 대승불교의 경전들을 고립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자라는 새로운 도구를 통해서 대승불교는 개개인의 생각과 개개인의 체험이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환경을 만난 것이다.

구전 전통에서 승단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을 포함하는 경전은 합송을 통해 보존되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어떤 자유로운 생각이나 개인적인 견해가 이미 문자화되어 경전의 형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경전이 소실되거나 파괴되지 않는 한 이러한 생각과 견해는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승경전이 개개인에 의해 사경될 때, 사경자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오기와 은밀한 가감이 이루어질 수 있는 여건이 문자의 도입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배경에서 반야경 계열의 초기대승불교 경전들은 판본을 달리하면서 점차적으로 분량이 많아지고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추가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구의 학계에서는 초기경전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구전전통에 기인한 부파불교의 경전전승전통의 체계로부터 일정 정도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필자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만을 불교로 보려는 교조주의적인 사고에 젖어있지는 않지만, 필자는 초기․부파불교 전공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떻게 보면 거의 불가능한 소망을 하나 가지고 있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점차적으로 변형되고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사상적 배경에 노출되면서 많은 외적 영향을 흡수하면서 번잡해져버린 초기경전에서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친설)을 정말 한번 추려내어 보고 싶다.

황순일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제9-‘하나만 진실’은 다양성시대에 역행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이 이를 반박하면서 서로 논쟁이 이어졌고, 황순일 동국대 교수도 최근 권 교수와는 다른 입장을 표명했다.(본지 1008~1015)

이런 가운데 권 교수가 다시 황순일 교수의 견해를 반박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이제 이 논쟁을 마무리할 시점이 된 것 같다.

그동안 대다수의 독자들께서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두고 서로가 불설이 아니라고 하니, 도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구차스럽게 다시 변명하자면, 필자는 초기든 대승이든 혹은 위경이든 불설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없다.

다만 “초기경전은 친설이지만 후대 찬술인 대승경전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비불설이다”고 한다면, 아함 또한 친설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그렇게 말한다면 아함 역시 비불설이라 해야 한다고 말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상좌불교에 새로이 신념을 갖게 된 분들께는 초기불교와 대승을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당혹스럽고 마음에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학자’라는 이름 하에 행해진 구업에 죄송하다는 말씀 다시 올린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이미 부파불교 당시에도 ‘친설’과 ‘불설’을 구분하고 있었다.

아함과 니카야는 부파에 의해 찬집(纂集)된 불설로서, ‘불설’이 오로지 불타의 금구언설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논쟁에 참여한 일련의 ‘니카야=친설’ 논자는 “한 명의 비구로부터 들은 것도 경에 포함되고 율을 드러내는 것이면 불설로 취해야 한다”는 『대반열반경』의 말이나, “불설에는 불타가 설한 것뿐만 아니라 성문?선인?천?변화인이 설한 것도 있다”는 팔리율장의 말에 대해 왜 해명하지 않는 것인가?

현존하는 초기경전도 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헌대 황순일 교수는 “초기경전이 고타마 붓다의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구전이라는 부파불교의 경전전승의 전통으로 볼 때 어느 정도 붓다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원론적인 말을 서구학계라는 권위를 끌어들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이미 지난 호에서 이를 전제로 “왜 전문 암송집단이 필요하였고, 부파마다 그러한 집단이 존재한 까닭은 무엇이며, 그들에 의한 의도적 개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고 물었으므로 황 교수는 이에 답했어야 하였다.

그들은 다만 불설(=친설)을 정확하고 한결같이 전승하기 위한 암송집단이었던가? 이 또한 지극히 순진한 생각이다.

a라는 부파와 b라는 부파가 전승한 경이 다를 경우, 어느 부파의 경이 진실의 불설인가?

이에 따라 제 부파 사이에 불설/비불설 논쟁이 일어났고, 그래서 마련된 것이 불설의 정의였으며, 이는 대?소승 모두에 의해 암묵적으로 승인되었다.

그것은 불타 교법(경)을 관통하는 정신 즉 법성(진실)이었다.

독자들께서는 대승과 소승뿐만 아니라 그들 내부에서조차 법성을 달리 이해하였는데 그것이 어떻게 불설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라고 의심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불타의 정법을 추구한다’는 공동의 인식이 있었다.

이에 따르는 한 비록 경전의 전승과 주장을 달리할지라도, 그리하여 극도의 비난을 가할지라도 불교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4-5세기 유부논사 중현은 말하였다.

“전승한 교법에 따라 서로의 경을 부정하게 되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황순일 교수는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친설이라는 잣대를 통해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 하였다.

필자 또한 양자를 동일선상에서 놓고 이야기할만한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고 이미 말하였다.

그러나 곰브리치 등의 서구학자의 견해를 인용하여 말한 “대승경전은 문자라는 도구를 통한 자유로운 생각이나 개인적 견해”라는 주장(이 또한 우리의 불교개론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목이고 마성 스님 역시 누차 강조하였지만)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이제 근대불교학 시대에 형성된 이와 같은 다수의 미확인 명제들을 전면적으로 검토해 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미 밝힌 대로 필자는 예컨대 『잡아함』제322경이 유부 찬술임을 인정한 중현의 말에 충격을 받았지만, 부파의 찬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경에 포함되고 율을 드러내는 것’ 즉 기존의 경전에서 파생된 것일뿐더러 ‘결집’이라는 형식의 교단의 확인절차를 거친 것이지 하늘에서 떨어진 것과 같은 독단적인 것은 아니었다.

대승경전 또한 그러하였을 것이다.

‘대승경전은 개인 견해(혹은 작품)’라는 추측성의 주장보다 훨씬 설득력을 갖는 논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잠시 밝혔지만, 우리는 대개 서구의 근대불교학에 따라 불교를 초기불교-부파(아비달마)불교-대승불교로 도식화하고 이를 실체화하여 부파불교가 생겨나면서 초기불교가 끝나고, 대승불교가 생겨나면서 부파불교가 끝난 것으로 여긴다.

초기불교를 전하는 텍스트가 부파의 산물이라는 것은 이미 밝힌 바지만, 대승 또한 부파와는 독립된 별도의 실체로 보기 어렵다.

삼장의 요지를 해설하고 있는 『유가사지론』「섭사분」에서는 경을 크게 별해탈경(戒經)?경(4아함)?성문과 관계하는 경(12분교 중 방광을 제외한 것)?대승과 관계하는 경(12분교 중 방광)으로 나누고서 성교(聖敎)를 세상에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 결집자들이 지은 섭송(攝頌, Udd?na)의 해설에 거의 모든 지면(권85-98)을 할애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아함에 관한 것이다.

『대지도론』에서도 역시 대승경은 취지(大事)가 다르기 때문에 아함 중에 안치하지 않았을 뿐이라 하여 아함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여전히 대승불교는 기존의 부파교단과는 관계없는 보살(재가)교단에서 기원한다는 히라카와 아키라의 가설을 불교의 상식처럼 여기지만, 이에 비판적인 G. 쇼펜, J. 실크, P. 해리슨, 사사키 시즈카, 시모다 마사히로 등의 학자는 대승의 기원을 부파불교의 연장선상에서 찾고있다.

시모다는 “처음에는 대?소승의 구분이 없었지만, 전통적인 부파교단에서 발생하고 발전한 지속적인 경전제작 운동을 통해 대승불교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며, 사사키는 “파승(破僧)의 정의가 어떤 시기 법륜(정법)의 파괴에서 갈마의 파괴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교리를 달리하는 각각의 부파가 갈마를 함께 시행함으로써 하나의 불교승단이라는 공통의 인식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부파불교가 성립할 수 있었고, 대승 또한 이 같은 계기에서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마하승기율』에 의하면 데바닷타는 정법을 파괴해서가 아니라 포살을 함께 하지 않아 파승자였기 때문이다.

필자의 문제의 논문에 따르면, 유부에 의해 불설의 기준이 마련됨으로써 대승경전이 찬술될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대승경전이 기존의 부파불교와 무관한 개인 견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대승의 기원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여 근대불교학에서 제시한 막연한 가설에 따라 대승경전을 초기경전과 별개의 것으로 여기고 그같이 단언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이다.

더욱이 현존하는 양 경전은 편찬시기(BC.1-AD.5)가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할 여지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 6백년 이래 우리의 불교는 굴절되었으며, 불교학은 그보다 더 오랜 세월 단절되었다.

김동화 박사는 고려의 불교를 의천과 지눌에 의한 일시적 재흥(再興)이 있었을지라도 다만 제불보살께 국가의 안태를 기원하는 타면적(惰眠的) 불교, 조선의 불교를 억불에 따른 은둔의 불교로 규정하였다.

개화이래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도 결코 정상적이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오랜 세월 불교는 민간신앙으로서만 역할하였다. 혹자는 그나마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 한다.

정말로 그럴 것이다.

5백여 년의 탄압에도 살아남은 것은 세계종교사에 유례가 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헌대 어느 시기 대중들의 학력도 눈도 높아졌고, 더 이상 민간신앙 형태의 불교에 만족하지 못하였으며, 그런 와중에 개방화에 힘입어 라즈니쉬 등의 명상법과 함께 위빠사나 수행법이 들어왔고, 니카야도 뒤따라 들어왔다.

기존의 불자들에게 이는 분명 신선한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중국의 불교 초전(初傳)시기에 이미 들어왔고 비담종이라는 이름의 종파도 형성하였지만, 분석론적 성향의 이 불교는 동아시아의 사유에 맞지 않았고, 해서 다만 소승의 관법선, 어리석은 이들이 닦는 선법으로 폄하되었으며, 사라졌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영향 미친 불교는 미타신앙과 화엄 그리고 간화선이지만, 조선의 불교는 간화선을 통해 명맥을 유지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승려들이 경을 읽게 된 것은 숙종 이후부터이다.

그나마 어느 때부터인가 교학은 ‘알음알이’ 운운하며 타기의 대상이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수미산보다 더 큰 볼륨의 불교학에서 우리의 불교이해는 황무지나 다름없으며, 그것조차 종파적 입장의 구호와 선전의 단계를 넘지 못한다.

여전히 “아비달마는 난삽하며 치심의 사견만을 더하는 불교”라고 말한다.

팔만대장경은 세계의 보물이지만, 우리에게는 다만 문화재로서의 보물일 따름이다.

한글대장경은 서가의 성물일 뿐이다.

불교철학의 핵심이라 할 논서의 경우 이성적인 머리로는 한 줄도 읽을 수 없다.

과연 우리의 능력으로 그것의 번역이 가능한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현대불교학’이라 하면 문헌학 운운하며 불교학의 이방으로 간주한다.

또한 그러면서도 외국의 불교학자들을 초빙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지만 “한국은 불교전통이 살아있다”는 그들 말에 흡족해 할 뿐 그들의 불교학 방법론에는 귀기울이지 않는다.

필자는 초기불교 신봉자들의 말과 생각을 잘 이해하고 있다.

필자도 말하자면 초기불교 전공자이다.(우리나라에서 ‘초기불교’라는 말이 언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주었으면 좋겠다. 그전에는 ‘원시불교’였다)

어떤 이는 초기불교를 공부한 이가 무엇 때문에 대승불설론을 옹호하느냐고 물었다.

대승을 위해,

출처 : 깨어있는 삶 위빠사나붓다선원
글쓴이 : 조티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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