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론할 수 없는 것을 희론하는, 가르침 밖에서 찾지 않는다
신통하다는 것은
뜻에는 협의(俠義)와 광의(廣義)가 있습니다. 열반이라 했을 때 협의의 열반은 번뇌의 소멸이지만 광의의 열반은 평화입니다. 삼매라 했을 때 선정에 들어 가는 것은 협의의 삼매이지만 순간적으로 나마 자애관이나 무상관을 했을 때 광의의 삼매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통이라 했을 때 협의의 신통은 육신통을 말하지만 광의의 신통은 ‘곧바로 아는 것(abhiñña)’입니다.
어떤 아이가 공부에 몰입하고 있으면 “신통하네”라 합니다. 놀기만 하는 아이가 무언가에 몰입하고 있을 때를 말합니다. 이때 신통은 광의의 신통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도 신통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곧바른 앎(abhiññā)’이라 했습니다.
‘곧바른 앎’은 담마짝까왓타나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S56.11)라 했습니다. 또 ‘곧바른 앎’과 관련하여 마하빠리닙바니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나는 가르침을 곧바로 알아 설했는데, 많은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섬기고 닦고 반복해서 실천해야 하는 것인가?(D16)라 했습니다.
신통이라는 것이 반드시 육신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가르침을 아는 것이 다름 아닌 신통입니다. 놀기만 하던 아이가 공부하듯이, 게으른 불자가 경전을 읽기 시작하는 것도 신통스런 일입니다. 경전을 읽는 순간 마음의 평화가 온다면 신통스런 일입니다. 곧바른 앎으로 이끄는 신통스런 가르침이 경전에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화두로
초기경전을 접하면 인식의 지평을 넓혀 줍니다.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 고리타분하고 쾌쾌묵은 경전이야기 하느냐고 타박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물질문명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근원적인 괴로움을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도 행복하지 않은 것은 괴로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라며 초기경전을 열어 보아야 합니다. 신통스런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선사들은 언어와 문자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한국불교에서 선사들은 ‘분별하지 말라’라고 법문합니다. 무념무상의 경지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중생은 왜곡된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무념무상으로 실상을 파악하고자 함입니다. 이런 방법에 묵조선이 있고 간화선이 있습니다.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마음속에서 끊임 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화두라는 방편을 사용합니다. 한가지 대상에 집중하여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상이라는 것이 ‘판치생모’ 등 말도 안되는 것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화두라 합니다. 말도 안되는 것을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은 무념무상에 이르기 위한 것입니다. 분별과 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입니다.
분별은 대체로 망상과 함께 쓰여 분별망상이라 합니다. 중생들이 생각하는 것은 모두 분별망상에 지나지 않다고 합니다. 분별망상으로는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고요히 해야 합니다. 아무런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멍때리듯이’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이 말도 안되는 화두일 것입니다.
화두는 말이 안되는 의심을 하여 무념무상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즘에는 어떤 이가 “몰라, 몰라”라는 방법을 쓴다고 합니다. 몰라, 몰라 하다보면 무념무상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몰라화두’라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 뭐냐고 묻는다면
분별망상을 여의어 무념무상 상태에 들어가면 존재의 실상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 지켜 보고 있다고도 합니다. 혜민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에 관한 시에서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이 뭐냐고 묻는 그 놈을 깨닫는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혜민스님이 말하는 그놈은 “텅텅빈채로 아주 아주 고요한 그 놈이 알고 보고 말하고 다 합니다.”라 했습니다. 선사들이 흔히 말하는 ‘참나’입니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진아(眞我)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라면 하느님 또는 하나님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혜민스님은 “하나(뿐인) 님이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라 하여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혜민스님은 자신의 시에서 “그 앎안에는 부처도 사실 없습니다. 오직 앎만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도 알수 없습니다.”라 했습니다. 선가귀감에 나오는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라는 게송과 유사합니다. 과연 부처님은 뭐라 말씀했을까요?
선가귀감 게송에 따르면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釋迦猶未會)”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을 성취했다고 알고 있는데 부처님도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선가대로라면 부처님은 덜 깨달은 자가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미완성이 됩니다.
과연 그놈은 있는지
정말 부처님은 그놈을 발견하지 못한 것일까요? 그놈이 정말 있다면 부처님도 그놈을 알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는 그놈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대신 앙굿따라니까야 ‘마하 꼿티따의 경(A4.174)’에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마하 꼿티따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찾아 왔습니다. 찾아 와서는 “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더라도 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습니까?(Channaṃ āvuso phassāyatanānaṃ asesavirāganirodhā atthaññaṃ kiñcīti?)”라며 물어 봅니다. 이에 사리뿟따 존자는 “벗이여,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라며 답하지 않습니다. 이에 마하 꼿티따존자는 ‘사구분별(四句分別)’로 계속 질문했습니다. 그때 마다 반응은 똑 같았습니다. 사리뿟따존자는 왜 답을 하지 않았을까?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① ‘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영원주의이고, ② ‘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허무주의이고, ③‘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기도 하고, 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지 않기도 하다.’는 것은 부분적 영원주의라 하고, ④‘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는 것은 회의론이다.”(Mrp.III.150)
여섯 가지 감역, 즉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이 만나서 분별식이 생겨 났는데, 이 분별식이 사라졌을 때에 대한 것입니다. 분별식이 사라졌음에도 ‘무언가 다른 어떤 것이 있습니까?(atthaññaṃ kiñcīti?)”라고 물어 봅니다. 여기서 ‘어떤 것(añña)’은 ‘그놈’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놈이 있는지, 없는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인 것 물어 본 것입니다. 과연 그놈(añña)은 있을까요?
희론할 수 없는 것을 희론하면
일반적으로 사구분별하는 것에 대하여 희론 또는 망상 또는 사량분별이라 합니다.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남김 없이 사라졌다면 지각과 느낌이 사라진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지각과 느낌이 사라졌으므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무언가 있는지 없는지 말하려 한다면 희론과 망상이 될 것입니다. 이에 사리뿟따존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더라도 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희론할 수 없는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 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더라도 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희론할 수 없는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 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더라도 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기도 하고, 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지 않기도 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희론할 수 없는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 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더라도 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희론할 수 없는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 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희론이 소멸하고 희론이 그칩니다.”(A4.174)
사구분별은 모두 희론(戱論)에 지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희론은 빠알리어 빠빤짜(papañca)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구분별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희론할 수 없는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 (appapañcaṃ papañceti)”라고 번역했습니디.
초불연에서는 빠빤짜에 대하여‘사량분별’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사량분별할 수 없는 것을 사량분별하는 것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는 증식을 뜻하는 ‘proliferation’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one proliferates that which is not to be proliferated.”라고 번역했습니다.
빠알리어 빠빤짜(papañca)에 대하여 희론, 사량분별, proliferation 등의 번역이 있습니다. 또 착각 또는 망상이라고도 합니다. 빠빤짜에 대한 가장 적절한 번역은 ‘망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희론이 일어날까?
맛지마니까야 ‘꿀과자의 경(M18)’을 보면 망상이 발생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왜곡된 사유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난다.”(M18)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을 하다 보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희론할 수 없는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이 말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ppapañcaṃ papañceti: 희론(戱論: papañca)은 MN.I.111-112에 따르면,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는 것으로 보아 희론은 지각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역에서 망상이나 사량분별 때로는 장애라고도 번역한다. 희론은 ‘나는 존재한다’라는 것에 의한 확장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일상적 지각의 확산, 즉 망상을 의미한다.”(성전협 맛지마니까야 600번 각주, 전재성님)
희론에는 크게 갈애에 의한 희론, 아만에 의한 희론, 견해에 의한 희론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모두 인위적으로 조작 되어진 것들입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견해에 의한 희론입니다. 이것이 앞서 언급된 사구분별에 대한 것입니다. 영원주의, 허무주의, 부분적 영원주의, 회의론 같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서에서는 “희론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희론해서는 안된다. 그는 가서는 안될 길을 가고 있다.”(Mrp.III.151)라 했습니다.
견해희론으로서는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 실려 있는 62가지 사견이 대표적입니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등에 대한 62가지 빗나간 견해를 말합니다. 이는 지각된 것을 바탕으로 합니다. 눈이나 귀 등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형상이나 소리 등 여섯 가지 감각대상이 접촉 했을 때 일어납니다.
접촉으로 인한 수, 상, 사의 과정에서 탐욕과 성냄 등으로 오염되었을 때 사유의 왜곡이 일어납니다. 지각된 것이 망상으로 전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왜곡은 언어적으로 개념화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이에 대하여 ‘개념적인 언어를 통해 인위적으로 조작되어 범주화 된다.’(600번 각주)라 합니다. 이를 견해희론이라 하는데, 이런 범주에는 개념화된 올바른 정견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섯 감역과 현상세계
언어화 된 개념은 모두 희론이고 망상입니다. 그러나 정견에 대하여 희론이라 하지 않습니다. 실상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출세간적 정견인 사성제와 세간적 정견인 업자성정견 같은 것입니다. 모두 연기법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연기법에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희론입니다. 있을 수 없는 것이서 희론 또는 망상이라 합니다. 사리뿟따존자는 사구분별하는 희론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Yāvatā āvuso channaṃ phassāyatanānaṃ gati tāvatā papañcassa gati. Yāvatā papañcassa gati tāvatā channaṃ phassāyatanānaṃ gati. Channaṃ āvuso phassāyatanānaṃ asesavirāganirodhā papañcanirodho, papañcanirodhā papañcavūpasamoti.
“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있는 한, 현상세계가 있고, 현상세계가 있는 한, 여섯 가지 감역이 있습니다. 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현상세계가 소멸하고 현상세계가 그칩니다.”(A4.174)
여섯 감역에서 생겨난 접촉이 망상의 시발점이 됩니다. 접촉으로 세상이 생겨난것 입니다. 그런데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소멸은 여섯 감역이 사라졌을 때 입니다. 감각영역의 접촉에 따라 매순간 세상이 생겨나고 세상이 소멸합니다. 세상이 소멸하는 것에 대하여 경에서는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현상세계가 소멸하고 현상세계가 그칩니다.”라 했습니다.
서로 다른 번역을 보고
우리나라에는 두 종류의 빠알리니까야 번역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빠알리 문구 “Channaṃ āvuso phassāyatanānaṃ asesavirāganirodhā papañcanirodho, papañcanirodhā papañcavūpasamoti”에 대한 번역이 서로 다릅니다. 전재성님은 “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현상세계가 소멸하고 현상세계가 그칩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도반이여,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가 남김 없이 빛바래어 소멸할 때 사량분별의 소멸과 사량분별의 적멸이 있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구문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With the remainderless fading away and cessation of the six bases for contact there is the cessation of proliferation, the subsiding of proliferation.”라고 번역했습니다.
전재성님은 빠알리어 papañca에 대하여 ‘현상세계’라고 번역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사량분별’이라고 했습니다. 전재성님이 ‘현상세계’라고 한 것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있는 한, 희론이 있고, 희론이 있는 한, 여섯 가지 감역이 있습니다. 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희론이 소멸하고, 희론이 그칩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실제로 주석서 Mrp.III.151에 따르면,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있는 한, 세 가지 희론, 즉 갈애에 의한 희론, 아만에 의한 희론, 견해에 의한 희론이 있다.’는 뜻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나 번역은 내용상 잘 들어맞지 않고 특히 숫타니파타 Stn.530, 916, 847과 비교하면 그러한 번역이 옳지 않다는 것이 입증된다.”(601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은 빠빤짜에 대하여 희론 또는 사량분별로 번역하지 않고 현상세계로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번역한 것에 대하여 붓다고사의 주석을 따르기 보다 ‘Lba.II.175’의 번역을 따랐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독일어판에 따르면”벗이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있는 한, 다양한 세계가 있고, 다양한 세계가 있는 한, 여섯 가지 감역이 있습니다.”라고 번역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빠빤짜에 대하여 희론이 아닌 ‘현상세계’라 번역했는데, 이에 대하여 “희론을 의미하는 빠빤짜가 지각의 확산에 의한 세계의 다양성 또는 현상세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601번 각주)라 했습니다. 또한 각주에 따르면 “우파니샤드에서도 빠빤짜는 현상세계를 나타내고 빠빤짜의 소멸을 만두까우파니샤드에서 진아(眞我)로서 설명하기도 하기 때문이다.”라 했습니다.
희론은 모든 질병의 근원이라 합니다. 맛지마니까야 ‘꿀과자의 경’에 따르면 희론은 개인적으로 탐욕, 진애, 의치를 수반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싸움, 논쟁, 언쟁, 교만, 중상, 질투, 인색을 수반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여섯 가지 감역이 있는 한 희론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Yāvatā papañcassa gati tāvatā channaṃ phassāyatanānaṃ gati.”에 대한 번역입니다. 이를 직역하면 “희론이 있는 한, 여섯 가지 감역이 있습니다.”가 됩니다. 여섯 감역이 있어서 희론이 생겨나는 것은 맞지만, 희론이 있어서 여섯 감역이 생겨난다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사량분별인 있는 한 여섯 가지 감촉의 장소가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여섯 가지 감촉의 장소가 있어서 사량분별이 일어나는 것은 맞지만, 사량분별이 있어서 여섯 가지 감촉 장소가 생겨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독일어판을 참고하여 빠빤짜에 대하여 희론이 아닌 현상세계라 바꾸어서 “현상세계가 있는 한, 여섯 가지 감역이 있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빠빤짜라는 말이 희론이나 망상이라는 뜻도 있지만 ‘세계의 다양성’ 또는 ‘현상계(phenomenal world)’를 의미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놈을 찾고자 하지만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의심이 대표적입니다. 한번 사람을 의심하면 그 사람이 괴물이 되어 버립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의심으로 시작 되었으나 의심이 의심을 불러 일으켜서 상대방을 물리쳐야할 괴물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의처증이나 의부증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모든 망상은 접촉에서 시작됩니다. 접촉이 없다면 망상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여섯 가지 접촉이 남김 없이 사라져 소멸하더라도 다른 어떤 것이 남아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 사구분별에 따라 물었을 때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요? 만일 남아 있는 것이 있다고 하면 영원주의가 되고, 남아 있는 것이 없다면 허무주의가 될 것입니다. 이럴 때 부처님은 ‘있다’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설한다.”라며 십이연기의 유전문연기와 환멸문연기로 설했습니다.
사구분별에 대하여 물어 보면 침묵하는 것이 낫습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십이연기로 설명해야 합니다. 사구분별하는 것은 실체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는 것을 망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사라져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희론도 소멸하고 희론도 그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무언가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희론이 됩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희론할 수 없는 것을 희론하는 것입니다. (appapañcaṃ papañceti)”라 했습니다.
영원주의자들은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합니다. 나와 이 세상의 근원이 되는 존재의 근원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참나, 진아, 그놈 등으로 불리웁니다. 특히 그놈에 대해서는 부처님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혜민스님은 “텅텅빈채로 아주 아주 고요한 그 놈이 알고 보고 말하고 다 합니다.”라 합니다.
그놈이 있다고 합니다. 나를 지켜 보고 있는 놈을 말합니다. 그 놈에 대한 이름은 다양합니다. 각 종교전통마다 달리 부르고 있는데 궁극적 실재 내지는 존재의 근원이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빠빤짜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그놈은 희론 또는 망상, 사량분별으로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놈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희론할 수 없는 것을 희론 하는 것이고, 사량분별할 수 없는 것을 사량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침 밖에서 찾지 않는다
빠빤짜(papañca)의 반대말은 닙빠빤짜(nippapañca)입니다. 닙빠빤짜는 다름 아닌 열반(nibbāna)입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무희론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무희론이라고 한다.”(S43.23)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희론이 소멸하고 희론이 그치는 것(papañca-nirodho papañca-vupasamo)’이 열반입니다. 열반에 대하여 있다거나 없다는 등 사구분별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사구분별로 말한다면 희론이 됩니다. 수행자는 부처님 가르침 밖에서 길(magga)과 경지(phala)를 찾지 않습니다.
“허공에는 발자취가 없고
수행자는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뭇삶은 희론을 즐기지만
여래는 희론의 여읨을 즐긴다.”(Dhp.254)
2017-12-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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