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을 위해, 한국불교를 위해 옹호한 것 아니다.
대승에 의해 ‘악마의 설’로 불린 유부 아비달마를 통해 그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이지만, 적어도 필자는 그것이 진실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법성은 ‘하나’라는 획일적 사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하여 오로지 ‘진여일심’만을 외친다. 그러나 아비달마에는 아비달마의 법성이 있고, 중관과 유식에는 그 나름의 법성이 있으며, 진여일심도 이에 기반한 것이다.
그리고 ‘글자’로 이루어진 그러한 온갖 법성을 한데 모은 것이 대장경이다.
만약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중현이 말하였듯이 남아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팔리 니카야를 진실로 여겼다면 그렇게 여기면 된다.
그
러나 그것만이 진실(친설=불설)이고 다른 불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는 대승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악마든 패종(敗種)이든 소승이든, 이는 그 때의 이야기임에도 우리의 대승교가들은 지금 자신의 말로 이야기하면서도 대승의 진실은 자신의 말로 보여주지 못한다. 다만 ‘전통’이라는 권위에 기대어 말할 뿐이다.
오늘날은 더 이상 교조적 획일화시대가 아니며, ‘믿어라’해서 믿는 세상도 아니다. 심증이 아니라 구체적 논거로써 니카야의 경전사적 정통성을 의심하였음에도 불교사에 무지하다거나 극단적 궤변론자(Lok?yata)로 치부하는 것은 논쟁의 도리도 아닐뿐더러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제 바야흐로 불교교양대학과는 다른 차원의 불교계몽의 시대를 열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불교도의 지적수준이 고양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구호와 선전의 불교학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독선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제10-최초 경전 편찬은 문자의 영향
고려대 조성택 교수 ‘불설/비불설’ 기고
근대학자들, 인도 구전전통 불교에 무분별 적용
초기-대승 경전 동시대 편찬…‘기억’ 방식 차이뿐
기사등록일 [2009년 09월 30일 12:39 수요일]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문학/사학/철학」(여름 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는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후 “니까야에는 ‘친설’이 담겨있다”는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을 비롯해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장, 황순일 동국대 교수 등과 권오민 교수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오고 갔다. 이런 가운데 조성택〈사진〉 고려대 교수가 이번 논쟁 주제와 관련해 최근 발간된 「초기불교사 ‘재구성’에 관한 검토」(불교학연구 제23호)란 논문 내용을 정리한 기고문을 본지에 보내왔다. 편집자
초기불교사를 재구성하는데 적용되었던 유럽 근대불교학의 암묵적 전제들을 재검토하고 불교의 종교적 사상적 특징에 입각한 새로운 재구성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모색이 문헌학적 방법론의 한계를 넘어 고대불교를 ‘상상’하는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대불교사의 전체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문제는 짧은 글 한편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이다. 이 글은 다만 공고해 보이는 ‘고대불교사’라는 근대유럽 불교학의 ‘구성물’에서 발견되는 조그만 균열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상상’의 가능성을 열어놓기 위한 것이다.
근대불교학은 원산지인 인도에서의 ‘불교의 부재’라는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당시 발달하였던 유럽의 문헌학은 이러한 상황을 헤쳐 나가는데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경전의 언어학적 계통을 구분하고 상호 관련성은 물론 여러 이본(異本)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경전 성립의 역사를 파악하는데 문헌 비평적 접근은 매우 유효하였다. 근대불교학이 재구성한 불교사의 기본 골격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1. [불교는 본래] 하나의 교단에서 출발하여 역사적 과정 속에서 여러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2. 현존하는 초기 경전(주로 팔리 경전과 아함경)간의 내용적 차이는 본래의 동일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근대불교학이 도달한 결론이지만 어쩌면 근대불교학이 그 출발에서부터 이미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근대불교학의 관점에서는 이 두 가지 전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교단’이라는 전제는 당연히 ‘본래 동일한’ 텍스트, 즉 현존 경전들의 모본(母本, Ur-text)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며, ‘본래 동일한’ 텍스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교단’이라고 하는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하며 그것도 여럿이 아닌 반드시 ‘하나’의 교단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불교학의 이러한 전제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어느 것도 역사적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막연한 추측과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근대불교학은, 면밀한 검토나 구체적 증거도 없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브라흐마니즘(Brahmanism)의 구전 전통이 초기불교의 경우에도 그대로 ‘재현’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두 가지 점에서 이러한 ‘믿음’에는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브라흐마니즘의 구전 전통이 가능하기 위한 몇 가지 선결 조건들이 초기불교에는 없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브라흐만적 구전전통은 초기불교에서 이미 직접적으로 비판할 만큼 비불교적일 뿐 아니라 불교 교리적 측면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브라흐만 전통과 불교는 ‘텍스트’에 대한 관념이 전혀 달랐다. 브라흐만 전통에서 베다 문헌은 신성한(sacred) 기원과 신성한 힘을 가진 것이지만, 초기불교 전통에서 텍스트는 그러한 성격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가, 적어도 초기불교 전통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보존’ 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하는 ‘성전(聖典)의 종교’가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실천하는 ‘체험의 종교’라고 생각한다. 초기불교를 재구성하는데 있어 불교의 이러한 특징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되며, 이는 초기불교의 성격을 이해하는 기본 전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 경전을 편찬 전승하는 일은 초기불교, 적어도 붓다 입멸 당시의 1차적 관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현존하는 엄청난 분량의 불교 경전은 언제 만들어진 것들인가? 현존하는 대부분의 경전들은 초기불교 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 후 5세기 사이에 편찬된 것들이다. 앞서 언급하대로 근대불교학은 이 경전들의 모본(母本) 텍스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모본의 시기는 빠르게는 붓다 입멸 후 100년경을 기준으로 그 직전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하거나 또는 늦어도 2차 결집 당시에는 성립되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대로 우리는 모본(母本) 텍스트의 존재를 증명해 줄 역사적 자료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할 만한 불교 내적 증거(internal evidence)나 정황적 증거도 없다.
붓다는 80세로 입멸할 때까지 약 35년간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성도 직후의 전법과 붓다의 마지막 몇 달을 전하고 있는 텍스트를 제외하면 나머지 어떤 경전들에서도, 심지어 대승경전에서도 35년 기간 내에서 시간의 경과를 전혀 감지할 수 없다. 과연 당시 붓다가 몇 세인지, 성도 후 얼마나 경과한 때인지 등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모든 시간은 ‘한 때’일뿐 세월의 흐름에 따른 붓다 설법의 내용이나 어투의 변화 등을 전혀 읽을 수 없다. 물론 대승경전과 초기 경전은 확실히 다르다. 그러나 그 다름은 내용과 서술방식과 내러티브의 전개방식에서 오는 차이일 뿐 두 경전 간에 실제적 시간의 경과는 아니다. 즉 팔리경이나 아함경을 먼저 설한 뒤 나중에 설했다는 그러한 시간의 경과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 전통’에서는 이러한 것을 두고 붓다 가르침의 ‘영원성’ 혹은 ‘초역사성’을 역설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교 경전을 하나의 ‘텍스트’라는 입장에서 보면 불교 경전에서 ‘시간’은 멈춰 있고 시간의 경과를 찾아 볼 수 없다. 붓다가 이 모든 것들을 어느 날 ‘하루’에 설법한 것이라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이 텍스트들이 비슷한 시기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라는 추정도 전혀 무리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나는, 물론 더 많은 사료 분석과 텍스트간의 비교연구가 필요하지만, 일단 현존 경전이 불교 최초의 경전편찬의 결과물과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의 것들이라고 가정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현존하는 여러 경전들은 기원전 1세기와 기원 후 5세기 어느 시기에 비로소 편찬되기 시작하였으며 짧게는 1세기 길게는 3~4세기를 거치면서 지금의 경전으로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초의 편찬은 유럽의 근대불교학자들이 추정하였던 구술에 의한 편찬이 아니라 ‘문자’에 의한 편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당시 편찬의 자료가 되었던 ‘텍스트’들은 그 언어나 체계, 내용 등이 각 지역별로 워낙 다양했기 때문에 ‘구술’에 의해 일관성 있는 ‘정전’(正典) 체계로 만드는 것이 가능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최초로 불교 경전이 편찬되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1세기경 그리고 그 이후라면 이 시기는 곧 대승경전이 ‘만들어 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승경전이 만들어지는 시기와 초기경전이 편찬되었던 시기는 거의 동시대인 것이다. 그리고 리차드 곰브리치(Richard Gombrich) 등이 주장하고 있듯이 불교 경전에 있어 ‘문자’ 사용은 대승경전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초기불교 경전의 편찬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앞서 간략하게 언급하였지만, 붓다 입멸 후 각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붓다에 대한 다양한 ‘기억’들이 초기불교 경전들을 편찬하는 기본 원천 자료(source materials)들이었을 것이다. 세대를 걸친 전승의 과정에서 그 기억의 내용, 순서는 물론 디테일에 있어 많은 차이가 생겼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각 지방 속어의 언어학적 차이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을 것이다.
따라서 편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기억들은 ‘단편적’이거나, 다른 기억들과 ‘불일치’ ‘상충’되는 것이 다반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일관된 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단편적 이야기를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하거나, 때로는 ‘삭제’ 혹은 ‘창작’하는 등 소위 ‘편집 재량권’(editorial discretion)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피 했을 것이다.
근대불교학은 현존 경전에서 발견되는 여러 ‘기억 장치’(mnemonic device)들, 즉 ‘정형구’ ‘통일적 체제’ ‘반복’ 등을 모본(母本)텍스트로부터의 구전 전승의 흔적 혹은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구전 전승’을 설득력 있게 입증할 만한 뚜렷한 증거나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 ‘기억 장치’의 존재만을 가지고 곧 ‘모본의 구전’을 언급하는 것은 별 설득력이 없다.
나는 현존 텍스트의 ‘기억 장치’들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장치들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인들은 ‘붓다의 가르침’과 ‘붓다의 기억’을 처음으로 편집, 편찬하는 경전화의 과정에서 비로소 전승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고, 이를 위해 베다문헌 등에서 ‘정확한 저장기억’을 위해 전통적으로 활용되어 온 여러 ‘기억 장치’들을 활용하였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경전화/정전화의 작업은, ‘기억’의 관점에서 보면 ‘활력으로서의 기억’을 ‘저장기억’으로 전환하는 작업이라는 의미가 있다. ‘활력적 기억’이 있는 한 붓다는 ‘과거’의 경험이 아니라 ‘현재’적 경험이지만 저장 기억이 되는 순간 붓다는 과거의 경험이 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팔리 경전 등 초기경전의 편찬자들의 태도와 대승 경전 편찬자/창작자들의 태도는 크게 대조된다. 초기경전 편찬자들이 붓다를 ‘과거’의 기억으로 ‘저장’함으로서 붓다는 일정한 모습으로 ‘고정’되게 된다.
그러나 대승경전의 편찬자/창작자들은 여전히 붓다를 ‘활력적’으로 기억하고자 하였으며 따라서 붓다는 현재적 경험이 된다. ‘반주삼매’와 ‘염불삼매’ 등은 그 대표적인 현재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붓다는 ‘활력적 기억’을 통해 ‘항상 현현(顯現)’하는, 다시 말해서 ‘영원한’ ‘상주’(常主)하는 존재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불신(佛身)에 관한 이론적 고찰의 과정이 비록 없었다 하더라도 색신, 응신, 법신의 삼신(三身)은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의 등장을 교단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붓다에 대한 ‘기억’ 방식의 차이, 즉 ‘저장 기억’이냐 ‘활력적 기억’이냐의 차이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 방식은 그레고리 쇼펜(Gregory Schopen)이 대승불교의 기원과 관련하여 이미 지적한 교단사와 사상사의 ‘불일치’에 대한 또 다른 해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려대 철학과 교수
제11-“토론문화 드문 불교학계의 이변”
서울대 철학과 안성두 교수 기고
부파 불설논쟁 조명으로 불교학 ‘업그레이드’
대승불교 기원 논의 지평 확장하는 촉매제 될 것
기사등록일 [2009년 10월 09일 11:25 금요일]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문학/사학/철학」(여름 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는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후 “니까야에는 ‘친설’이 담겨있다”는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을 비롯해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장, 황순일 동국대 교수 등과 권오민 교수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오고 갔으며, 조성택 고려대 교수도 “최초 경전 편찬은 구술이 아닌 문자에 의해 성립됐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런 가운데 이번에는 안성두<사진> 서울대 교수가 이번 논쟁에 대한 평가 등을 정리한 기고문을 보내왔다. 편집자
권오민 교수(이하 논자)의 「불설과 비불설」이란 논문을 둘러싸고 지난 두어 달간 법보신문의 지면을 통해 벌어진 불교학자들 간의 논쟁은 참으로 직접적인 논쟁문화가 드문 불교학계에서 하나의 이변으로 받아들여져도 좋을 것이다. 이 논쟁의 경과를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켜보면서 필자가 받은 인상은 우리 학계가 얼마나 이런 종류의 진지한 문제제기와 이를 둘러싼 토론을 갈구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토론에 있어 질문 자체가 갖는 보다 긍정적 역할은 대답을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또 다른 질문을 유도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이번 논쟁과정에서 누구의 입장이 옳은가 하는 것은 부차적이며, 중요한 점은 이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각자의 견해를 그것이 논자의 입장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든 또는 확장된 이해에 의거하든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풍토를 마련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필자가 뒤늦게 이 논쟁에 대해 끼어든 이유는 논자의 문제제기에 대해 적어도 당시의 대승불교를 전공한 학도의 일인으로서 옳건 그르건 어떤 반응이라도 보이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전에 다시금 「불설과 비불설」을 몇 차례 반복해서 읽으면서, 재삼 논자의 원전읽기의 깊이와 이차문헌에 대한 폭넓은 독서에 대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실로 이 논문은 아비달마에 대한 논자의 오랜 학문적 연찬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역작으로서, 「경량부와 비유자의 의미와 관계」(2008), 「구사론에서의 경량부 (I)+(II)」(2009) 등의 논문에서 행했던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불설(佛說, buddha-vacana)이 논서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명쾌하게 논의하고 있다.
논자는 이제까지 그 난해함과 방대함으로 인해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텍스트의 하나로 간주되어 왔던 중현의 『순정리론』을 지렛대로 삼아 이전 시기에서 행해진 불설에 대한 논의가 가진 해석학적 함의를 풀어내고 있는데, 이런 과정에서 논자가 보여준 원전자료의 섭렵과 비판적 논의는 한국불교학계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고 해도 과찬은 아닐 것이다.
「불설과 비불설」의 논의를 통해 필자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불설의 논의가 오로지 대승불교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부파 내부에 있어서도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고 하는 논자의 지적이다. 논자가 말하고 있듯이 이 문제는 대승의 기원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시사를 준다. 대승의 기원이 대승경전의 편찬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불설로서의 ‘경(經)’을 ‘창작’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내부자적 시각에서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논자의 주장은 대승의 기원과 관련해 논의지평을 확장하는 촉매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중복되는 점은 있겠지만 이 논문의 가치와 논점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먼저 논자의 설명을 간략히 요약하겠다.
필자가 논문의 취지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논자의 주장의 핵심은 세 가지 점에 있다.
(1)불설은 석가모니불의 친설(親說)뿐 아니라 법성(法性)에 부합되는 가르침도 포함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불설이란 법성/도리에 부합되는 ‘잘 설해진 것(subh?sita)’의 측면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에게 전승된 체계로서의 아함이나 니카야는 특정한 학파소속성을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다. 즉 각 학파에 의해 도리에 부합되는 것으로서 수용된 것이다.
(2)이러한 전승된 ‘성교(聖敎)’와 불설의 차이에 대한 인식은 이미 부파불교시기에 확정되었다. 양자의 차이는 이미 이종철 교수 등에 의해 지적되었지만, 상기논문의 가치는 이를 여러 텍스트 개소의 인용을 통해, 특히 세친과 동시대인인 중현의 『순정리론』을 통해 제시하고 증명하고 있다는 데 있다. 논자에 따르면 불설은 『대반열반경』에서의 네 가지 ‘위대한 교설’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후 경과 율에 따른다는 규정을 넘어 법성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새로운 기준을 도입함에 의해 주로 유부의 문헌에서 인(人)·문(文)·미요의경(未了義經)·지(知) 대신에 법(法)·의(義)·요의경(了義經)·지(智)에 의지해야 한다는 4의(四依)의 해석학적 작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불설의 내용과 진리성은 역사적 붓다로서의 석가모니의 친설 여부가 아니라 그의 언어적 교설이 붓다의 원의도와 의미를 반영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으며, 그런 한에 있어 불설의 확정기준은 올바른 논리와 부합되는 것이다. 논자는 이 차이가 이미 유부아비달마 문헌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고 있었고, 대승의 선구자들도 이런 구별에 기본적으로 입각해서 대승불설론을 주창하고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3) 이러한 중현의 유연한 입장과 대비되는 인물이 경량부의 조사 슈리라타이다. 논자에 따르면 슈리라타는 “부파에 의해 결집 전승된 성교(聖敎, ?gama) 중에서 불타가 직접 설한 것만을 경(불설)으로 인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스스로 경량부라 호칭했을 것이다.” 『순정리론』의 진술에 의거해 경량부는 일종의 경전근본주의자의 관점을 가진 학파로 간주하면서 여기서 이 학파의 명칭도 나왔을 것이라고 보는 논자의 해석은 기존의 연구를 뛰어넘는 매우 창의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이 논문의 위험성(?)은 읽어가면서 너무나 논지가 뚜렷하기 때문에 원전과 비교해 논문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가지 않는 한 거의 논자의 주장을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에 있다. 논자의 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그가 인용하는 여러 자료들, 특히 『순정리론』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지만, 범본이나 티베트역이 없는 이 논서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 때문에 이제껏 이 책을 들출 엄두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하겠다.
사실 그것이 어찌 필자뿐이겠는가? 논자가 지적하듯 이 시기의 아비달마사상을 전공한 학자들에게 있어서조차 이 논서를 본격적으로 연구에 반영한 이는 아마 오래전 타계한 사사키 겐쥰(佐佐木現順) 교수나 이 책의 심불상응법에 대해 연구했던 콕스(C. Cox)를 제외하고는 드물 것이다. 논자의 『순정리론』번역이 빨리 출간되기만을 학수고대할 뿐이다. 이하는 위의 세 가지 점과 관련해 논자와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의 문제제기이다.
논자는 『대반열반경』의 이본(異本) 중에서 “법상 중에 있는 것” 또는 “아비담과 상응해야 한다”는 규정을 첨가한 이본의 편찬연대가 후대일 경우라고 추정한다.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의 진행은 일반적이기 때문에 그의 추정에는 일면 타당성도 있지만, 법성이나 법상 등의 추가가 이본들의 학파소속성에서 유래한 것은 아닌가의 여부도 검토할 소지는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법성이나 법상 등과 부합된다고 할 때 그것은 후대에 편찬된 아비달마문헌의 내용과의 일치성을 말하기보다는 논모(論母, m?t?k?)의 내용과의 일치성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인다. 경장의 편찬이 최초기 논모의 성립시기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논자는 도리 혹은 정리(yukti)를 법성의 동의어로 간주하지만 과연 이것이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불설의 확대된 정의에 포함되는 “법성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불설의 기준을 청변의 『중관심송』의 설명과 관련시켜 ‘도리=법성’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에서 두드러진다. 법성을 표현하는 정형구는 “붓다가 세상에 나건 나지 않건 그러한 것”이지만, 그러나 청변이 제시하고 있는 반대론자의 대승비불설의 근거는 “다른 도리를 설하기 때문”이다.
논자는 “청변이 불설/비불설의 판정기준으로 삼은 것은 정리(正理, yukti, ny?ya)와 추론(anum?na)”이었고, 이를 다시 『중관심송』의 구절에 따라 부연설명하면서 “성전이 성전일 수 있는 것은 다만 ‘전해져 온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론적 타당성을 갖는가, 갖지 않는가, 진실지와 해탈을 지향하는 논리적 사고와 상응하는가, 상응하지 않는가에 달려 있고” 이를 검토하는 방법이 추론이라고 말한다. 이런 논리에 따라 “잘 설해진 것이 불설”이라는 유부와 유식에서 확립된 경전관이 청변에게도 타당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대승은 정리에 따른 성전과 모순되지 않기에 불설”이며, 따라서 “베단타의 말일지라도 올바르게 설해진 것은 모두 불설”인 것이다.
청변이 정리와 추론을 같은 차원에서 하나의 인식수단(量)으로 언급한 것은 전통적으로 인식수단을 직접지각(現量)과 추리 또는 성언량을 포함시켜 설명하는 방식에서 볼 때 분류상 조금 문제가 있다고 보이지만, 여기서 필자의 문제제기는 논자가 제시하는 ‘도리=법성’의 등식이 아니라 도리(道理, yukti)라는 단어의 의미 내지 외연이다.
유식학파에 따르면 도리는 법성과 동의어가 아니라 법성은 4종 도리의 하나에 포함될 뿐이다. 4종 도리란 관대(觀待)도리, 작용(作用)도리, 증성(證成)도리, 법이(法爾)도리로서, 마지막 법이도리가 즉 법성으로서의 이치를 말한다. 이 4종의 도리는 성문지를 위시한 여러 유식문헌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 도리란 제법을 관찰하는 방법(yoga), 방편(up?ya)으로 풀이되고 있다. 반면 도리가 추론과 같은 논증수단의 의미에서 사용되는 것은 세 번째 증성도리에 국한되고 있는데 그 의미는 ‘논거에 의해 증명하는 도리’이다. 성문지에 따르면 증성도리는 제법의 무상성 등의 불교적 진리를 신뢰할만한 전승을 얻은 사람, 직접지각, 추론의 세 가지 인식수단을 논거로 해서 논리적 증명을 행하는 것이다. 반면 법이도리란 “제법의 진실성을 [세간에서] 인정된 사물의 성질(법성)로서, 불가사의한 법성으로서, [수행자가] 안주하는 법성으로서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리=법성’의 등식은 외연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이며, 다만 이런 추론 등의 인식수단을 논거로 해서 법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중관학파에 속하는 청변의 경우 유식학파가 사용하는 도리의 개념을 달리 이해하고 사용했을 수도 있겠지만 논자가 인용하는 청변의 문장은 법이도리의 맥락이 아니라 증성도리의 맥락에서 불설의 진리성을 확정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논문의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가장 독창적 부분은 경량부의 상좌 슈리라타의 성전관과 유부의 그것과의 용해할 수 없는 차이점을 보여주면서 논자가 슈리라타를 경전근본주의자로 해석하는 점이다. 그렇지만 떠오르는 의문은 논자의 해석이 옳다면 그러한 경량부적인 엄격한 경전관으로부터 어떻게 ‘종자설’과 같은 ‘새로운’ 이론이 제안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더구나 경량부도 ‘독립된’ 학파로서 삼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무엇에 의거해서 논장의 진리성을 확립할 수 있는지의 문제도 제기된다.
중국주석가들에 의해 경량부설로 귀속되는 『유가론』의 여러 이론 중에서 예를 들어 104 번뇌설은 적어도 『유가론』의 설명에 따르는 한 역시 번뇌를 삼계와 사제 및 견소단(見所斷), 수소단(修所斷)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 분류틀은 슈리라타에 의해 부정되지 않았던가? 나아가 종자설이 알라야식 등의 유식학 이론의 발전에 끼친 결정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왜 현장은 슈리라타의 저작은 번역하지 않고 중현의 것을 번역했는가 하는 의문도 남는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논문 전체의 취지에 비하면 극히 지엽적인 것이다. 논자의 불설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불교는 다양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 사사키 시즈카(佐佐木閑)의 교단사적 연구에 못지않은 중요한 포인트를 해명해 주고 있다. 논자가 논문의 ‘사족’에서 말하고 있듯이 ‘불교의 개방성’이야말로 학문적 차원에서는 물론 실천적 차원에서도 우리 시대 불교(학)의 가장 중대한 과제일 것이다. 이에 어떻게 응전하는가에 따라 불교학과 불교계의 앞날이 달려있을 것이다.
안성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
1018호 [2009년 10월 09일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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