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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생각한다/[스크랩]

[스크랩] 불가촉천민의 신분을 해방한 암베드카르와 인도불교

moksha 2018. 1. 14. 14:46

“나는 인간과 인간의 발달에 해로운 힌두교를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평등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나의 종교로 불교를 택합니다.”  (암베드카르. 불교 개종 연설 中)

 

암베드카르가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 개종을 선언하던 날, 1956년 10월14일 나그푸르(Nagpur, 인도 중부 도시)의 개종식에는 40만에 달하는 지지자와 달리트(dalit; 불가촉천민)들이 참가했다. 암베드카르가 그를 따라 불교로 개종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일어서 달라고 말하자 군중들은 저마다 준비해온 연꽃 봉오리를 손에 들고 일제히 일어섰다. 그들 대다수가 ‘달리트’들로,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인도 전역에서 다양한 교통수단으로, 또는 걸어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불과 30여분 진행된 개종식에서 40만명이 불교도가 되는(기록에 따라 20만, 또는 50만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하여 인도의 불교 역사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암베드카르와 현대 인도 불교

저자
이명권 지음
출판사
한국학술정보 | 2012-06-18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암베드카르와 현대 인도 불교 암베드카르는 인도 사회의 신분차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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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암베드카르와 현대 인도 불교>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Bhimrao Ramji Ambedkar, Dr. 1893-1956)

계급사회의 전통을 가진 인도에서 카스트 밖의 계급, 즉 불가촉천민인 마하르家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천민으로서의 굴욕을 견뎌내며 봄베이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컬럼비아대학으로 유학, 인도의 상업과 관련한 논문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곧 런던으로 돌아가 인도 경제사를 연구하다가 귀국, 후견자와의 약속에 따라 군대의 서기관으로 근무했으며, 봄베이에서 시드넘대학 정치경제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그가 불가촉천민이라는 그의 신분의 벽은 어디에나 따라다녔다. 대학에서는 교수실의 주전자 물을 먹는 것조차 여전히 허용되지 않았다. 암베드카르는 다시 런던으로 건너가 경제학과 법학을 공부하여 학위를 더하고, 독일의 본대학에서 경제학을 연구한 뒤 1923년 인도로 돌아온다. 이때부터 그의 일생을 바친, 인도 불가촉천민 해방운동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는 마트마 간디의 지지를 얻었고(구체적인 신분해방운동에서는 노선 차이가 있었으나),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직후 네루(Nehru) 정부의 초대 법무부장관이 되었다. 암베드카르는 신생 인도의 헌법을 기초한 책임자였다.   

  

신분혁명과 종교혁명

암베드카르의 위대한 삶이 집중되어 있는 주제는 신분해방운동과 종교혁명이다.

이 두 가지는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 인간 평등의 신념에 따라 해방시키고자 하는 불가촉천민이란 개념은 바로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의 교리(사성제도)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묵은 진리- ‘마누법전’을 불태우다>

암베드카르는 미국에 유학하는 동안 실용주의 철학과 교육사상가인 존 듀이의 영향 아래 그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바로 힌두교의 경전임을 깨닫는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나는 스승인 존 듀이 교수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분은 이렇게 말했다. ‘각 사회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고사목(dead wood of the past) 같은 아주 잘못되고 진부한 것으로부터 방해를 받고 있다. … 하나의 사회가 각성되면, 그 사회가 성취한 것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일뿐 아니라, 보다 나은 미래사회를 건설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그 사회는 깨닫게 된다. …”

 

그는 듀이의 영향아래 ‘과거로부터 인정되어 온 진리라도 그것이 현재의 도덕적 관점에서 실효성이 없는 것이라면 철폐되어야다'고 믿었다. 그리고 믿음을 실행에 옮겼다.

1927년 그는 고향 마하드에서 불가촉천민들에게도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물탱크를 설치해 달라는 평화적 시위를 이끌었으며, 몇 달 뒤에는 카스트제도의 종교적 근거가 되는 힌두교의 경전 <마누法典> 한 권을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의식을 가졌다. 정부나 정통 힌두교도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가열되고 있는 신분혁명의 편에서는 큰 기폭제가 된 사건이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35년 욜라Yeola에서는 급기야 1만여 명이 모인 연설자리에서 힌두교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다.

나는 힌두교도로 태어났지만, 힌두교도로 죽지는 않겠다.”(욜라선언)

 

<이슬람과 기독교를 거절하다>

이 놀라운 소식이 전해지자 힌두교 외의 여러 종교 교단들로부터 그를 영입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그를 따라 개종할 것으로 보이는 달리트의 숫자는 적어도 수백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욜라선언 후 그가 불교를 받아들이기까지는 20년 넘는 간격이 있다. 그만큼 그는 신중했으며, 자신을 따르는 달리트들의 운명과 인도의 운명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슬람 부호 니잠은, 암베드카르가 그를 따르는 불가촉천민들을 이끌고 이슬람으로 개종할 경우 막대한 금전으로 보상하겠다고 유혹하기도 했다. 그러나 암베트카르는 제안을 거절한다.

“사실 무슬림은 힌두의 모든 사회악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그보다 더하다. 무엇보다 여성에 대한 푸르다 착용 등 차별적 요소가 가장 심한 악이다.”

 

기독교로부터의 유혹도 거절했다.

“이슬람이나 기독교로의 개종은 억압받는 계층으로 하여금 국민성을 잃게 만들 것이다. 이들이 만일 이슬람으로 넘어가면 무슬림이 수는 배로 늘어날 것이고, 무슬림 통치의 위험이 현실화될 수 있다. 만일 이들이 기독교로 넘어가게 된다면 기독교인의 숫자는 5-6천만명으로 늘어나 영국의 인도 지배력을 강화시켜 주게 될 것이다.”

그는 서구 유학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으나, 특히 인도에서의 기독교가 복음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설에서, 인도의 기독교인들은 교회 내에서도 카스트를 준수하고 있고, 사회적 불의에 대해 결코 맞서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지적한 일도 있다. 

 

그는 시크교에 우호적이었으며 가장 오래 고려했다. 1936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순전히 힌두적 관점에서 대안적 신앙을 찾는다면 어느 것이 최선일까. 그들이 만일 시크교도가 된다면 힌두 문화에 남아있게 된다(이슬람이나 기독교의 경우와 달리). 이것은 힌두인들에게 결코 적은 소득이 아닐 것이며, 인도의 정치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힌두교를 포기했으나 힌두민족, 즉 인도민족에 대한 사랑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는 결국 시크교도 아닌 불교에 귀의했으나, ‘불교 또한 인도의 종교’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면 힌두민족에 대한 사랑이란 전제는 포기된 것이 아니었다.

 

힌두교 포기를 선언한 이후 암베드카르는 불교에 대한 관심을 본격화한다.

그는 불가촉천민의 기원을 연구한 끝에, 그들이 바로 불교도였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에 따르면, 불가촉천민이란 본래 ‘유목민들끼리의 경쟁과정에서 밀려난 제3의 집단’에서 시작된 ‘몰락한 사람들’(broken men)이 기원이다. 한때 브라만교가 불교를 정복했을 때, 그들에게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마을 밖에 살면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브라만교 입장에서는 이들에게 증오와 경멸의 감정으로 ‘불가촉성’을 부여함으로써 불가촉천민이란 개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암베드카르가 그를 따르는 달리트들과 함께 불교를 선택한, 가장 이해가 분명한 이유는 불교가 평등사상(자유 평등 박애)을 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첫째, 사회는 법과 도덕의 강제력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 어느 한쪽을 잃으면 사회는 균열된다. 둘째, 종교는 과학적 지식과 일치해야 한다. 다시 말하여 종교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성과 일치해야 한다. 셋째, 사회도덕 법전으로서의 종교는 자유 평등 박애의 기본적 교의를 인정해야 한다. 이 세 가지 기본적 사회생활의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는 소멸될 것이다. 넷째, 종교는 빈곤을 신성시하거나 고상하게 해서는 안된다. 부자가 재산을 포기하는 것은 축복된 상태일 수 있다. 그러나 빈곤은 그렇지 않다. 빈곤을 축복이라 주장하는 것은 종교를 악용하는 것이고 악과 범죄를 영속시키는 것이며 세상을 생지옥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문제를 만족시킬 수 있는 종교로서 암베드카르는 불교를 선택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출처 : 자유세상만들기
글쓴이 : coolwis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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