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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괴로움을 즐기려 하는가, 안심(安心)법문과 생멸(生滅)의 지혜

moksha 2017. 12. 13. 23:18


괴로움을 즐기려 하는가, 안심(安心)법문과 생멸(生滅)의 지혜

 

 

사람이 한번 싫으면

 

사람들은 싫어함과 좋아함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람이 한번 싫으면 죽어도 싫은 것이고, 한번 좋은 것이면 죽어라 좋아라 합니다. 사람에 대한 호()와 불호(不好)못지 않게, 사람들은 쾌()와 불쾌(不快)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싫은 사람을 만나면 불쾌하게 여기고 좋은 사람을 만나면 유쾌하게 받아 들입니다.

 

호와 불호, 쾌와 불쾌 모두 즐거움과 괴로움의 범주 안에 있습니다. 느낌이 즐거우면 거머쥐려 하고, 반대로 느낌이 괴로우면 밀쳐 내려 합니다. 거머쥐려 하기 때문에 탐욕이 생기고, 밀쳐 내려 하기 위해 분노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매 순간 탐욕과 분노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중생이라 합니다.

 

본능에 충실한 삶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일반적으로 탐진치삼독이라 합니다. 세상사람들은 매일 탐진치로 살아갑니다. 마치 몸에 독소가 쌓이는 것처럼, 탐진치 삼독에 물든 삶입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듯이, 욕망이 일어나면 욕망을 충족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 합니다. 마치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다 보면 느낌대로 살아야 합니다. 느낌에서 갈애가 일어납니다. 갈애가 더욱 강화되면 집착이 됩니다. 한번 들러 붙으면 이제 떨어지지 않습니다. 욕망대로 살다 보면 새로운 탄생이 있게 됩니다. 행위가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듯이 지은 행위에 따른 과보가 뒤따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오욕(五慾)에 따른 식욕, 성욕 등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아 갑니다.

 

변덕이 죽 끓듯

 

호와 불호, 쾌와 불쾌는 모두 조건발생하는 것입니다. 일어날 만 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 발생하는 것은 반드시 조건소멸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감각적 욕망에 불타는 마음일지라도 조건이 바뀌면 순식간에 증오의 마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조건에 따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입니다.

 

웃다가 울다가 하는 것도 조건이 바뀐 것이고, 좋았던 사람이 밉게 보이는 것도 그 사이에 조건이 바뀐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때 그에 대한 사랑이 미음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사랑하는 자 때문에 슬픔이 생겨나고 사랑하는 자 때문에 두려움이 생겨난다.”(Dhp.212)라 했습니다.

 

느낌이 갈애로, 갈애가 집착으로 바뀌었을 때 필연적으로 괴로움을 야기합니다. 법구경에서도 애착 때문에 슬픔이 생겨나고 애착 때문에 두려움이 생겨난다.”(Dhp.213)라 했습니다. 결국 욕망입니다. 더 따지고 들어가면 갈애입니다. 좋으면 거머 쥐려 하는 갈애, 싫으면 밀쳐 내려는 갈애로 인하여 괴로움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갈애에서 슬픔이 생겨나고 갈애에서 두려움이 생겨난다.”(Dhp.216)라 했습니다.

 

내뜻대로 안되어서

 

사람들은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돈이 많으면 마냥 행복할 것 같아 보이는 자들도 한꺼풀만 파고 들어 가다 보면 괴로움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할지 모르지만 내면에는 말 못할 괴로움을 안고 사는 것입니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내뜻대로안되어서 괴로운 것입니다. 아내 또는 남편이 내뜻대로 따라주지 않아 괴롭습니다. 자식이 내뜻대로 되지 않아 괴롭습니다. 돈이 내뜻대로 벌리지 않아 괴롭습니다. 모든 괴로움의 뿌리를 찾아 가다 보면 결국 ()’와 만나게 됩니다.

 

내뜻대로 안되어서 괴롭다면 나를 떼어 놓으면 괴롭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돌아 가는 일에 내가 개입 되어 있지 않다면 괴로울이 없을 것입니다. 괴로워도 내가 괴로운 것이고, 즐거워도 내가 즐거운 것이고, 슬퍼도 내가 슬픈 것이고, 기뻐도 내가 기쁜 것입니다. 모든 것들의 중심에 내가 있습니다.

 

아내 또는 남편이 내뜻대로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나의 욕망입니다. 자식이 내뜻대로 공부잘해서 원하는데 붙기를 바라는 것 역시 나의 욕망에 따른 것입니다. 욕망은 갈애이고,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되면 집착이 됩니다. 집착단계에 이르면 이제 빼도 박도 못합니다. 내뜻대로 되기를 바랬지만 내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고통을 겪게 됩니다.

 

달마스님의 안심법문(安心法門)

 

혜가스님이 달마스님을 찾아 갔습니다. 혜가스님은 “저의 마음이 편안치 않으니, 스님께서 편안하게 해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달마스님은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안케 해주리라”라 했습니다.

 

혜가는 불편한 마음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은 원래 없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달마스님은 “그대의 마음을 벌써 편안하게 해 주었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혜가스님이 불안한 마음을 찾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이미 불안한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종에서 말하는 유명한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달마스님의 안심법문은 초기불교에서 연기법과 유사합니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고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하는 연기의 법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멸하는 마음에서 불안한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있다면 그 상황과 그 여건에 맞아 떨어져 발생한 일시적인 마음일 뿐입니다.

 

혜가스님은 불안한 마음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어서 마음 어딘가 마음 한켠에 변치 않고 존재하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뱀의 경(Sn1.1)’에서는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아도 얻지 못하듯,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하는 수행승은,”(Stn.5)라 했습니다. 

 

마음은 실체가 없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찾는 다는 것은 마치 무화과 나무에서 무화과 꽃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탐욕, 성냄, 질투, 인색 등 52가지 마음부수 역시 실체가 없습니다. 다만 자성은 있습니다. 조건 발생 했을 때 고유의 성질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탐욕이라 하면 거머 쥐려 하는 것이고, 성냄이라 하는 것은 밀쳐내려 하는 것이 고유의 성질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마음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한다는 사실입니다.

 

조건발생 조건소멸하는 것임에도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는 탐욕이나 성냄은 실체가 없습니다. 몸의 경안이나 마음의 경안과 같은 선법 역시 실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좋은 느낌이 일어나면 거머 쥐어서 영원히 계속 되기를 바라고, 싫은 느낌이 일어나면 밀쳐 내어서 영원히 지속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에 대한 호와 불호, 사물에 대한 쾌와 불쾌에 대하여 분명하게 반응합니다.

 

내뜻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발생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만한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내나 남편이 내뜻대로 안되고 자식이 내뜻대로 안되고 돈이 내뜻대로 안벌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만일 조건을 만들어 놓는다면 내뜻대로 될지 모릅니다.

 

모든 것은 조건 발생될 뿐 내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이 말썽을 피워 고통스럽다면 그 고통을 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이라는 것이 단지 조건에 따라 생멸할 뿐인 것임에도 나의 고통이라고 생각했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오취온을 말합니다.

 

느낌을 자아로 여겼을 때

 

몸과 마음을 나의 것이라고 여겼을 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 이를 거머쥐어 행복을 맛보았다면, 이 행복이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이는 자아가 개입된 것입니다. 반대로 괴로운 느낌이 발생하여 물리치고자 하는 성냄이 발생되었을 때 어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역시 자아가 개입되었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나의 것이라고 여겼을 때 행복과 불행을 경험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다름아닌 탐욕과 성냄입니다. 탐욕과 성냄으로 산다는 것은 자아에 집착되어서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느낌이나 감정을 자신의 것이라 착각합니다. 즐거운 느낌이라면 행복은 나의 것이고, 행복은 나이고, 행복은 나의 자아이다가 될 것입니다. 괴로운 느낌이라면 고통은 나의 것이고, 고통은 나이고, 고통은 나의 자아이다가 됩니다. 자식문제로 고통스러워 하는 자는 고통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연기송(緣起頌)은 생멸구조로

 

지금 마음이 몹시 불안합니다. 불안한 마음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마음은 조건에 따라 생멸하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마음, 괴로운 마음, 싫은 마음은 실체가 없습니다. 모두 연기하는 마음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연기송(緣起頌)으로 알 수 있습니다.

 

 

imasmi sati ida hoti.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

Imassuppādā ida uppajjati.      이맛숩빠다 이당 웁빳자띠

Imasmi asati ida na hoti.      이마스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룻자띠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若有此卽有彼)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若生此卽生彼)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若無此卽無彼)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若無此卽滅彼)

 

 

이와 같은 연기송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연기송의 구조를 보면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라 하여 상호의존적 연기와,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 하여 조건발생적 연기의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연기송을 잘 보면 조건발생연기와 더불어 생멸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생겨남(uppādā: )사라짐(nirodhā: )입니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연기송은 생멸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는데 결국 생멸현상입니다. 불안한 마음 역시 조건에 따라 생겨났기 때문에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실체가 있어서 마음 한켠에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마음이 일어날만한 조건이 형성되어 발생된 것입니다. 혜가스님이 불안한 마음을 찾으려 하는 과정에서 불안한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와 회환,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은 실체가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그 때 상황과 조건이 같지 않아 후회 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은 지금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심 해 보아야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조건에 따라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조건을 만들어 주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연기법은 조건법이고 동시에 생멸법(生滅法)입니다. 이와 같은 연기법에 따르면 어느 것 하나 고정된 것이 없습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나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 깟차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S12.15)라 하시면서 십이연기를 설했습니다.

 

양극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양극단은 연기의 법칙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괴로움과 즐거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히 괴로움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즐거움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S56.11)라 하여 고락중도(苦樂中道)를 설했습니다. 고락중도는 다름 아닌 연기법입니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조건발생입니다.

 

난다의 어머니처럼

 

조건발생한다는 것은 조건이 다하면 소멸함을 말합니다. 행복에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불행하다고 하여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것을 안다면 난다의 어머니처럼 대범할 필요가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난다마따의 경(A7.53)’에 따르면 자식을 잃은 난다마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여, 바로 저에게는 난다라고 하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왕들이 그를 어떤 원인인지 몰라도 끌고 가서 폭력으로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존자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들이 붙잡힐 때나 붙잡혀 있을 때나 포박되었을 때나 상처받을 때나 살해될 때나 살해되었을 때 저는 저의 마음의 변화를 알지 못했습니다.(A7.53)

 

 

난다마따는 아들이 붙잡혀 살해 되어 죽었을 때 “저는 저의 마음의 변화를 알지 못했습니다.”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매정한 어머니 같습니다. 아들이 죽었는데, 그것도 살해 당해 죽었음에도 그 어떤 슬픔이나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어찌보면 인간성이 매말랐다고 볼 수 있으나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Sn3.8)’을 보면 이해가 갑니다. 경에 따르면 죽은 자에 대하여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를 알아 슬퍼하지 않습니다.”(Stn.581)라 했습니다. 그대는 오거나 가는 사람의 그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대는 그 양끝을 통찰해 보지 않고 부질없이 슬피웁니다.” (Stn.581)라 했습니다.

 

난다마따는 자식이 살해되어 죽었음에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고 죽은 남편이 야차의 모습으로 나타났어도 마음의 청정을 유지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선정에 들어 원하는 대로 행복과 고통이 버려지고 만족과 불만도 사라진 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에 듭니다.”(A7.53)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또 난다마따는 존자여, 저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이 있는데, 저는 그들 가운데 어떠한 것도 제 안에서 끊어 버리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A7.53)라 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난다마따는 오하분결이 풀린 아나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으뜸 가는 재가 여자신자들

 

자식의 죽음에도 초연한 난다마따에 대하여 부처님도 칭찬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서원의 경(A4.176)’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믿음 있는 재가의 여자 신자는 이와 같이 내가 재가의 여자신자 쿳줏따라와 난다의 어머니 벨루깐따끼야처럼 되기를!’라고 서원으로 원을 세워야 한다.” (A4.176)라 했습니다.

 

부처님의 으뜸 가는 재가의 여자신자들이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하나 모아 엮음제일의 품이 있는데, 모두 11명의 재가의 으뜸 여자신자들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친절하게 말하는 님 가운데 제일은 나꿀라삐따, ‘먼저 귀의한 님 가운데 제일은 수자따, ‘보시하는 님 가운데 제일은 위사카 미가라마따, ‘많이 배운 님 가운데 제일은 쿳줏따라, ‘자애를 닦는 님 가운데 제일은 사마와띠, ‘선정을 닦는 님 가운데 제일은 웃따라 난다마따, ‘뛰어난 것을 보시하는 님 가운데 제일은 숩빠와사 꼴리야디따, ‘환자를 돌보는 님 가운데 제일은 숩삐야, ‘청정한 믿음을 지닌 님 가운데 제일은 까띠야니, ‘친근하게 대하는 님 가운데 제일은 나꿀라마따, ‘소문을 듣고도 청정한 믿음을 내는 님 가운데 제일은 깔리입니다.

 

부처님이 수 많은 으뜸 여자 재가 신자 중에서도 특별히 쿳줏따라와 난다의 어머니 벨루깐따끼야처럼 되기를!”라고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쿳줏따라는 많이 배운 님 가운데 제일(bahussutāna agga)이고, 난다마따는 선정을 닦는 님 가운데 제일(jhāyīna agga)’이라 합니다. 이 중에서도 난다마따를 언급한 것은 생멸의 지혜를 안 수행자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생멸의 지혜를 안다는 것은

 

수행에 있어서 생멸의 지혜를 안다는 것은 매우 큰 진전이라 합니다. 생멸의 지혜는 위빠사나 16단계의 지혜중에서 4번째 단계에 해당됩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에 이어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가 생겨납니다. 이와 같은 생멸의 지혜는 칠정정에서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patipadā-ñāadassa visuddhi)’에 해당됩니다. 생멸의 지혜를 알면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 가게 됨을 말합니다.

 

생멸의 지혜를 안다는 것은 성품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즐겁거나 괴로운 현상이 일어났을 때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지금 통증이 있을 때 아픔이라고 알아 차리자 마자 통증은 사라집니다. 이는 통증을 아는 마음이 느낌을 제압하기 때문이다. 아픔하고 알아 차릴 때 통증을 알아 차리는 마음도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통증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통증을 아는 의식도 영원한 것이 아니며, 이것을 알아차리는 마음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이 세 단계야 말로 생멸의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생멸의 지혜를 안다는 것은 연기법을 안다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이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느낌이나 지각 등에 대하여 내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멸의 지혜가 생긴 자는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S22.59)라고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즐거운 느낌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까지

 

생멸의 지혜를 아는 자는 수행에 큰 진전을 이룬 자입니다. 행복한 숲에서 발간한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 따르면 생멸의 지혜가 생겨난 자에 대하여 그의 얼굴 표정이 온화하고 은은하며 깨끗하다. 그는 스승을 향해서 공손하고 부드럽게 인사를 할 것이다. 또한 스승에게 예의가 바르고 조용하게 보고 한다. 이는 매우 훌륭한 일이다.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의 수준에서 생멸의 지혜로 올라선 것이다.”(323)라 했습니다.

 

생멸의 지혜가 생겨나면 즐거운 느낌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괴로운 느낌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즐거운 느낌이라는 것이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괴로운 느낌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형상의 즐거움에 대한 경(S35.136)’에 따르면 그것들은 하늘사람과 인간의 세상에서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그들이 소멸할 때가 되면 그들은 그것들을 괴로운 것이라 여기네.” (S35.136)라 했습니다. 그래서 현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말하네.” (S35.136)라 했습니다.

 

수행자들은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즐겁다고 여기는 것에 대하여 괴로운 것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조건발생한 것은 조건소멸하기 마련입니다.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영원한 것이 아니어서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즐거운 것에 대해서는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수행자는 그것이 괴로운 고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때까지 알아차려야한다.”(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326)라 했습니다.

 

괴로움을 즐기려 하는가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에 목숨을 거는 듯 합니다. 단지 느낌에 지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이대로 죽어도 좋아!”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느낌은 사라지고 맙니다. 만약 느낌이 그대로 지속된다면 커다란 고통일 것입니다. 즐거운 느낌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괴로운 느낌 역시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연기법에 따르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조건발생 조건소멸하는 연기법에서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조건이 다 되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불안한 마음도 조건이 바뀌면 사라집니다. 불안한 마음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이유와 같습니다.

 

지금 아내나 남편, 자식 때문에, 돈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자식이 말을 듣지 않아 괴롭다면, 자식이 내뜻대로 따라주지 않아 괴롭다면 그 또는 그녀는 괴로움을 즐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체도 없는 괴로움에 집착되어 놓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울면서 즐거움을 느끼듯이, 분노하면서 쾌감을 느끼듯이, 지금 괴로워 하는자는 괴로워 하면서 괴로움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괴로움 그 자체는 실체가 없습니다. 조건이 다 되면 사라지고 말 괴로움을 붙들고 있어 보았자 괴로움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말 안듣는 아이에게 말을 잘 들을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어 주고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괴롭다고 하여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화를 내지만 상황만 악화시킬 뿐입니다. 괴롭다고 하여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에 의지하여 기도해 보지만 그때뿐입니다. 근원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부처님의 생멸의 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이 없어서 조건에 따라 생멸한다는 것을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생멸을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 보다

 

생멸의 지혜를 아는 자는 더 이상 안달복달 하지 않습니다. 재가의 여신자 난다마따처럼 아들이 살해당했어도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짜증을 내거나 괴로움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겨 더 이상 괴로움을 즐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이네.

생겨나고 또한 소멸하는 것,

그것을 그치는 것이 행복이네.(S15.20)

 

 

2017-12-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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