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는 요지경(瑤池鏡)
입니다. 되는 대로이고 마음 내키는 대로인 것 같습니다. 오피니언 리더라 볼 수 있는 스님이 마음 내키는 대로 산다면 재가불자들은 따라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스님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알량한 지식으로 깜냥으로 내키는 대로 살아 갈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불교에 돌아 올 것입니다.
철저하게 초기경전에 근거하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구전되고 문자화 되어서 지금까지 전승된 가르침은 부처님 원음에 가장 가깝습니다. 전승과정에서 첨삭이나 편집이 있을 수 있지만 큰 흐름에 있어서는 부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전승된 빠알리니까야에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는 근본 가르침에 대하여 56개의 주제로 2,904개의 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는 중간길이의 경으로 수행을 위한 심오하고 깊이 있는 가르침으로 152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는 34개의 긴 길이의 구성되어 있는데 웅대하고 철학적인 내용이 특징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는 2,344개의 경이 법수별로 구성되어 있는데 윤리적인 가르침이 많아 재가자에게 적합합니다. 이 밖에도 주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 법구경, 숫따니빠따, 우다나, 이띠붓다까, 테라가타, 테리가타 등 쿳다까니까야 계통의 경이 있습니다. 이들 경들을 모두 모아 놓으면 작은 수레가 될 것입니다.
어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방편이라 합니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언설로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마음과 뜻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언어와 문자로 표현된 8만4천 법문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가르침에 반신반의 하는 자들
흔히 빠알리 삼장이라 하여 율장(Vinaya), 경장(Nikaya), 논장(Abhidhamma)이라 합니다. 그러나 읽어 보지도 않고 접하지도 않은 자들은 폄하하기에 바쁜 듯합니다. 니까야를 읽어 보지 않은 자들은 니까야를 근거로 하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니 하여 폄하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읽어 보지 않은 자들 역시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 하여 무시합니다. 율장을 읽어 보지 않은 자들은 율장은 몰라도 되는 것이라 합니다. 빠알리 삼장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보니 경전을 근거로 이야기하면 의례 하는 말은 ‘문자에 집착한다’느니 ‘체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스님들과 불자들은 가르침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아니 공부를 하려 하지 않습니다.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어 출간되어 있음에도 사 보려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 같은 논서가 번역되어 나온지 10년이 되고 인터넷에는 수 많은 동영상 강좌가 있음에도 알려고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율장은 더더욱 관심 밖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빠알리삼장에 무지하다 보니 자신의 알량한 지식에 의거하여 깜냥으로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다보니‘개구즉착(開口卽錯)’입니다. 입맛 벙긋하면 어긋나는 것입니다.
흔히 듣는 말이 “부처님 말씀(불경에서 그렇다고 주장하는)이라서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입니다. 또 “종교경전을 무조건 믿는 것은 광신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부처님이 설한 8만4천 법문은 방편입니다.”라 합니다. 가르침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느 것 하나 경전적 근거나 증거도 제시하지 못합니다.
승보개념부터 뜯어 고쳐야
가르침에 대하여 회의 하는 자의 말을 믿을 것인지 전승된 가르침을 믿을 것인지는 독자의 판단이라 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삼보에 귀의한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Buddha)과 가르침(Dhamma)과 상가(Sangha)에 귀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상가대신에 스님들께 귀의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글 삼귀의문을 보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되어 있어서 승가공동체가 아니라 개별스님들께 귀의하는 것으로 둔갑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 하는 것이 승가에 귀의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국회의원들을 국회라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국회는 이름이 국회이어서 국회가 아니라 입법활동 등 국회로서 역할을 했을 때 국회라 합니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국회라 하면 넌센스입니다. 마찬가지로 스님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승가라 하지 않습니다.
승가가 성립 될려면 스님들이 최소한 4명 이상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자자와 포살 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입법기능이 있어야 국회라 부르듯이, 자자와 포살 등 학습계율을 지키는 공동체를 승가라 합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을 승가라 간주하여 승보라 합니다. 경장과 율장 등 초기경전을 전혀 접하지 않은 자들이 만들어낸 코미디 같은 넌센스입니다. 한국불교가 개혁하려면 가장 먼저 승보개념부터 뜯어 고쳐야 할 것입니다.
차제설법으로
부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설했습니다. 중생들의 근기가 다양하다 보니 각자 수준에 맞추어 법을 설한 것입니다. 이를 차제 설법과 대기설법이라 합니다. 차제설법은 순서에 맞게 설법하는 것을 말합니다. 처음부터 어려운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보시와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식으로 쉬운 가르침부터 설했습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부처님은 야사에게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과 오염과 타락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감각적 욕망을 여읨에서 오는 공덕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법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사성제를 설했습니다. 이처럼 ‘1) 보시를 설함, 2) 계행을 설함, 3)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설함, 4)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재난과 욕망의 여읨의 공덕을 설함, 5) 네 가지 거룩한 진리와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설함, 6) 수행적 관점을 설함’이 차제설법입니다.
대기설법으로
부처님은 대기설법(對機說法: pariyāya-desanā)으로도 교화 했습니다. 여기서 대기설법을 ‘방편설법’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 듣기 쉬운 비유 등을 들어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법화경에서 화택의 비유처럼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대기설법(방편설법)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의 가르침은 여러 가지 다른 방편으로 설해진 것이므로, 만약 사람들이 그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것을 서로 시인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그것에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말다툼하고 언쟁을 하고 논쟁하고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를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의 가르침은 방편으로 설해진 것이므로, 만약 사람들이 그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것을 서로 시인하고, 인정하고, 그것에 기뻐한다면, 그들에게는 조화로움, 기뻐함, 평화로움, 물과 우유 같은 화합이 생겨나고, 서로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M59)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기설법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중생의 수준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비유 등을 들어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대기설법에 대하여 자기 편한대로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이 업과 윤회에 대하여 설했는데 이를 방편으로 취급하여 어느 정도 법을 알고 나면 버려야 할 뗏목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몰랐을 때 하는 말입니다.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 경전을 읽어 보지 않는 자들, 논장을 접해 보지 못한 자들은 알량한 지식과 깜냥으로 말합니다. 모두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전을 근거로 들지 않으면 모두 사견입니다. 부처님이 알기 쉽게 비유를 들어 대기설법으로 말 했다하여 업과 윤회를 없는 것이라 말한다면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말이고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 말을 믿을 것인가?
어떤 이는 부처님 말씀이라도 그대로 믿지 말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경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다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부처님 말씀은 다 방편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언어와 문자로 표현된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경전을 읽어 보지도 않고 경전을 접하지도 않은 자들의 무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르침에 대하여 회의 하는 자들은 업과 윤회를 부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성제와 팔정도, 십이연기와 함께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이 업과 윤회 임에도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믿지 않고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고 하여 믿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 거의 대부분이 업과 윤회에 대한 가르침임에도 염처경 등 수행에 대한 가르침만 취하는 것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연 이런 자들의 말을 믿어야 할까요? 회의론자들의 사견에 의지할 것인지 전승된 경전에 의지할 것인지는 각자 판단의 몫입니다.
한국불교는 요지경(瑤池鏡)
부처님은 자귀의 법귀의를 말씀했습니다. 이는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회의하는 자들에게 의지해야 할까요?
한국불교는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을 거룩한 스님들이라 하여 승보의 반열에 올려 놓았습니다. 스님들을 부처님과 동급으로 격상시켜 놓은 것입니다. 더욱 더 모순인 것은 법귀의에 대한 것입니다. 경전을 의심하며 업과 윤회를 무시하는 자들이 삼귀의 할 때는 “가르침에 귀의합니다.”라 하는 것입니다.
한국불교는 뒤죽박죽입니다. 승보의 개념을 잘못 적용하여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하는가 하면, 법에 대하여 의심하면서도 “가르침에 귀의합니다.”라 합니다. 한국불교는 요지경입니다.
2017-11-1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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