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행복하여라! sukho Buddhānaṃ uppādo!

▣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아! 그분 고따마 붓다/고따마 붓다의 생애

9. 인류의 영원한 스승

moksha 2017. 6. 6. 21:31

9. 인류의 영원한 스승

 

실의에 잠긴 비구들 틈에서 마하깟사빠가 일어났다.

“만달라꽃을 들고 꾸시나라에서 오던 한 아지위까(Ājīvika) 교도에게서 저는 스승의 반열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루터기를 잃은 슬픔에 모두들 쓰러져 통곡했습니다. 그때 늦게 출가한 사꺄족 출신의 한 비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비구들이여, 그만 그치시오. 슬퍼할 것 없습니다. 이것은 된다, 이것은 안된다,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선 안 된다, 그 늙은이는 살아서 늘 잔소리만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는 그 늙은이에게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은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장로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우리 승가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저도 여러분처럼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와 같은 이들이 앞으로도 생겨난다면 승가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세존께서 늘 ' 내가 설한 법이 너희들의 스승이니 높이 받들어 보호하며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제 장로들께 제안합니다. 교단의 영원한 스승이 된 부처님의 가르침과 계율을 결집하도록 합시다. 향기로운 꽃을 줄에 꿰듯, 아름다운 보석을 줄에 꿰듯, 부처님의 법과 율을 모아 교단의 튼튼한 반석을 만듭시다.”

“좋습니다, 마하깟사빠.”

장로들이 모두 찬성하자 마하깟사빠가 다음 말을 이었다.

“장로들께서는 설법을 많이 듣고 지혜가 뛰어난 아라한 가운데 오백 분을 추천해 주십시오.”

장로들은 각기 지혜와 덕망이 갖춰진 이들은 차례차례 추천하였다. 499명이 추천되고 마지막으로 아난다가 추천되었다. 그러나 마하깟사빠가 거부하였다.

“아난다는 아라한이 아닙니다. 그에겐 아직 사랑하는 마음ㆍ미워하는 마음ㆍ두려워하는 마음ㆍ어리석음이 남아 있습니다.”

재차 삼차 장로들이 아난다를 추천했지만 마하깟사빠는 입을 닫았다. 결국 오백 번째 자리는 비워두어야 했다. 비구들은 40일 뒤 라자가하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마하깟사빠와 아누룻다의 인도하에 꾸시나라를 떠났다. 홀로 남은 아난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스승을 잃은 슬픔, 스승이 계시는 동안 아라한이 되지 못한 슬픔, 더구나 스승의 유훈을 정리할 결집에 참석이 허락되지 않은 슬픔은 견딜 수 없었다. 마하깟사빠만 원망할 수는 없었다. 만따니(Mantāni)의 아들 뿐나(Puṇṇa)의 도움으로 바른 견해를 얻긴 했지만 자신은 여전히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사람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웨살리 사람들은 매일같이 아난다를 찾아와 설법을 요청하였다. 아난다는 자신이 전해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었다. 왓지족 출신의 한 장로가 아난다에게 다가왔다.

“고따마 씨족에서 태어난 아난다여, 사람들이 없는 숲으로 들어가십시오. 고요하고 행복한 열반의 법을 마음 깊이 간직하십시오. 관찰의 힘을 키우고 늘 마음에 새기십시오. 사람들과 어울려 시끌벅적 떠든다고 당신에게 도대체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결집의 날은 다가오고 아난다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몰래 웨살리를 떠난 아난다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만 골라 라자가하로 향했다. 결집이 다가왔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지만 고요한 열반은 찾아들지 않았다. 아니, 잠시 찾아왔다가 이내 흩어져버리고는 하였다.

“열심히 노력하는데.... 나는 왜 열반을 성취하지 못하는 걸일까?”

그때 불현듯 뿐나의 옛말이 떠올랐다.

“아난다, 모든 고뇌와 번민은 '나'를 집착함에서 생깁니다. '나'라는 집착은 모습을 바꿔가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얽맵니다. 그 집착이 얇은 백태처럼 지혜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난다, 그 집착은 너무 미세해서 쉽게 알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왜 열반을 성취하지 못하는 걸일까‘나’는!”

 

아난다는 고뇌의 뿌리를 찾아냈다. 새벽 먼동이 틀 무렵, 지친 몸을 잠시 누이려던 순간 아난다는 마침내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갖가지 설법 많이도 듣고

항상 세존께 공양했었지

끝없는 삶과 죽음 끊어버렸으니

나는 이제 눕고 싶구나.

 

다음 날, 걸식을 마친 아난다는 결집을 행하는 웨바라(Vebhāra)산의 중턱에 있는 굴인 칠엽굴(삿타빠니동굴, Sattapaṇṇiguhā)로 찾아갔다. 아자따삿뚜왕의 후원으로 잘 다져진 바닥, 그 남쪽 한가운데에는 두 개의 높은 법상이 마련되었다. 아난다가 들어서자 많은 장로들이 일어나 반겼다. 하지만 비아냥거리는 비구도 있었다.

“어디서 쾌쾌한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오백 개의 자리가 모두 채워졌다. 마하깟사빠가 한쪽 법상에 올라가 앉았다.

“대중 여러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과 율, 이 두 가지 가운데 무엇을 먼저 결집하겠습니까?”

“율은 교단의 생명입니다. 계율이 있어야 교단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율을 먼저 결집해 주십시오.”

“그럼, 율을 먼저 결집하겠습니다. 계율에 대한 저의 질문에 어느 분이 대답하시겠습니까?”

“장로 우빨리(Upāli)는 계율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제자입니다. 장로 우빨리께 책임을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법상에 오른 우빨리는 마하깟사빠의 질문에 따라 율을 암송하였다. 오랜 기간에 걸쳐 율장이 결집되었다. 오랜 세월 다져진 장로들의 우의와 신념으로 결집은 원만히 진행되었다. 율장이 마무리 될 무렵이었다. 아난다가 일어나 마하깟사빠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시기 직전, 승가 대중이 원할 경우 아주 소소한 계율들은 빼버려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논란이 있어 왔고, 또 논란의 여지가 많은 발언이었다. 장로들이 고개를 돌리고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마하깟사빠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난다. 무엇이 소소한 계율인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까?”

“미처 여쭙지 못했습니다.”

웅성거림으로 굴 안이 소란스러웠다. 마하깟사빠가 불자(拂子)를 높이 들어 소란을 잠재우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로들이여, 세존께서 정하지 않으신 것은 우리도 정하지 맙시다. 세존께서 이미 정하신 것을 우리는 버리지 맙시다. 세존께서 정하신 그대로 배우고 실천하도록 합시다.”

 

마하깟사빠의 엄격한 지휘아래 율장의 결집은 마무리되었다.

 

“다음은 법을 결집하겠습니다. 법에 대한 저의 질문에 어느 분이 대답하시겠습니까?”

“장로 아난다는 세존을 오래 시봉한 사람입니다. 늘 가까이세서 세존의 가르침을 받고, 그때그때 의심나는 것을 물었던 사람입니다. 장로 아난다께 책임을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든 장로들이 한 결같이 아난다를 추천하였다. 불자(拂子)1를 든 마하깟사빠는 눈을 감고 말이 없었다. 어두운 동굴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마하깟사빠가 입을 열었다.

“장로 아난다는 대중 앞으로 나오시오.”

대중 앞에 선 아난다에게 마하깟사빠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동굴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아난다, 그대는 소소한 계율이 무엇인지 부처님께 확인하지 않아 대중의 화합을 깨트릴 빌미를 남겼습니다. 그대의 허물을 인정합니까?”

“허물을 인정합니다.2

아난다는 가사를 고쳐 입고 대중과 장로 그리고 마하깟사빠에게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진중하고 진솔한 아난다의 참회를 온 대중이 침묵과 합장으로 받아주었다.

“장로 아난다는 법상으로 올라오십시오.”

아난다는 코끼리처럼 천천히 법상에 올라 반듯하게 허리를 펴고 앉았다. 그리고 동굴로 들어서던 순간부터 발끝만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정면을 또렷이 응시하였다. 온 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하깟사빠와 아난다의 발아래 예배하였다. 미소를 머금은 아난다의 입가에서 확신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와 같이 저는 들었습니다. 언젠가 부처님께서 사왓티의 기원정사에서 천이백오십 명의 비구와 함께 계실 때 일입니다.”

오백 아라한의 메아리가 천둥처럼 굴속을 뒤흔들었다.

“이와 같이 저는 들었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지혜의 등불이 다시 타올랐다.


고따마붓다의 생애가 끝났다.

 

 

▣ 이곳에 게재된 <고따마붓다의 생애>는 조계종 출판사에서 간행한 <부처님의 생애>의 내용이며 주석은 의문이 나는 용어에 대하여 별도로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이해하도록 게재하였습니다.



  1. 불자(拂子) : 법구(法具)의 일종으로 ①삼이나 짐승의 털을 묶어서 자루 한 끝에 매어 달은 것으로 수행자의 마음의 번뇌를 먼지처럼 털어버림을 상징하는 도구이다. ②선종에서는 방장스님이 손에 지녀 지휘봉과 권위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본문으로]
  2. 부처님 제자들 중에서 아난은 매우 개방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출가 이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어갈 때까지 ‘비서’ 역할을 했기에 수많은 설법을 경청했으며, 들은 것을 기억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다문(多聞)제일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문제는 결집 이후에도 아난이 여러 가지 이유로 문책을 받는다는 점이다. 〈십송율〉, 〈아육왕경〉, 〈사분율〉, 〈마하승기율〉 등 많은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하면 아난 개인이 지닌 이미지와 달리 가섭을 비롯한 교단의 지도자들은 아난을 거세게 비판한다. 그것은 대략 열 한가지의 이유 때문이다. 우선 여인을 출가시켜 정법이 머무는 시간을 단축시켰다는 점이다. 둘째는 부처님에게 일 겁만 더 세상에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이 아난에게 자신의 열반을 예고했음에도 아난이 듣고 더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셋째는 부처님 앞에서 별도로 설법한 것이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비유를 설하셨는데 아난이 그것을 듣고 그 자리에서 해설한 것을 지칭한다. 넷째는 부처님의 옷을 자신도 모르게 밟고 지나간 것을 말한다. 다섯째 부처님께서 춘다의 공양을 받고 설사병을 얻었는데도 쿠시나가라로 여행하는 도중에 목이 마르다고 물을 달랬는데 주지 않은 것이다. 아난이 물을 뜨기 위해 냇가에 가 보니 마침 마차 행렬이 지나가 흙탕물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온 사건을 지칭한다. 여섯째는 소소계가 무엇인지 묻지 않은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열반에 들어간 뒤에는 소소한 계율에는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소소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묻지 않았던 것이다. 일곱째는 부처님의 음장상을 보여주게 한 것이다. 율장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비구니들 혹은 여인들 앞에서 아난이 부처님의 음장상을 보여 달라고 청하는데 이에 부처님께서 ‘거시기’를 보여주신 사건이다. 인도의 문화적 배경에선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여덟째는 여인들이 부처님의 발을 더럽히게 한 죄이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여 전단향으로 만든 관에 입관했는데 여인들이 구태여 보고 싶다고 하자 보여 주게 되며, 보던 여인 중의 한 노파가 슬퍼 울자 눈물이 부처님 발에 떨어져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아홉째는 결집을 위해 500명의 아라한을 선정할 때 아난에겐 음욕 분노 어리석음의 세 허물이 남아 있다고 말한 것이다. 열 번째는 〈사분율〉에 의하면 부처님에게 공양하고 싶은 사람은 세 번 청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아난은 그러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열한 번째는 서른 명의 비구를 환속시킨 죄이다. 이유는 아난은 제자들이 원하는 가르침을 가르쳐 주지 않아서 그들이 환속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죄목들은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분위기를 보이고 있기에, 아난이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를 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아난은 왜 이토록 비난을 받았을까.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수행자 그룹이 부처님 열반 이후 교단을 주도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지계(持戒)를 강조한 수행자들이 부처님 열반에 즈음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아난의 권위를 떨어뜨리고자 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아난은 당시 교단 핵심 세력들에 의해 거부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때 아난이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부처님의 활달하고 자유로운 기풍은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기풍에 갇혀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힘들다. 아난은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해 부처님 가르침이 전승되도록 했다고 여겨진다. 차 차 석 동국대 강사 [불교신문 2097호/ 1월18일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