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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생각한다/한국불교를 생각하다

[스크랩] 불교인들의 분노가 타올랐다, 승가공동체회복을 위한 불교인선언

moksha 2017. 6. 5. 18:34

 

불교인들의 분노가 타올랐다, 승가공동체회복을 위한 불교인선언

 

 

화를 내지 말라 하지만

 

부처님은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화를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불교의 목표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삼독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라도 화를 내서는 안됩니다. 만일 자칭 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자가 걸핏 화 낸다면 그를 깨달은 자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깨달은 자는 화 내는 그 자리에 자애의 마음이 가득할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라도 화를 내지 않을 것입니다.

 

상윳따니까야에 제석천의 칠대서원이 있습니다. 칠대서원에 따르면 일곱 번째에 나는 살아 있는 한 화내지 않으며 만약 나에게 화가 난다면 곧바로 그것을 제거하리라. (Yāvajīva akkodhano assa. Sacepi me kodho uppajjeyya khippameva na paivineyyanti.)”(S11.11) 라 되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한 어떠한 경우라도 (kodhana)’를 내지 않겠다는 서원입니다. 그러나 어찌 하다가 화내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 즉시에서 알아 차리겠다는 말입니다.

 

분노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분노해야 할 일, 분노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작년 촛불혁명도 아주 작은 분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분노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촛불이 횃불이 된 것입니다. 이런 분노를 거룩한 분노라 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여 폭발하는 분노가 아니라, 비법과 불법이 판치는 세상을 좌시하지 못하는 정의의 분노라 볼 수 있습니다.

 

승가공동체의 붕괴에 대한 분노

 

불교인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외부의 대상에 대한 분노가 아닙니다. 불교를 핍박하고 무시하는 타종교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불교 내부의 대상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승가공동체의 붕괴에 대한 분노입니다. 승가가 승가답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이런 분노에 대한 직선제실현을 위한 사부대중의 호소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총무원장직선제의 상징인물과 같이 되어 버린 허정스님은 스님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청정승가 공동체 회복을 위한 호소문

 

대한불교 조계종은 종헌에 명시된 것처럼 사부대중으로 구성되고 사부대중에 공의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종단을 이끄는 출가자들은 깨달음을 성취하고 중생제도 하겠다는 원력으로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무소유의 삶을 삽니다. 무소유의 삶이 가능한 것은 사찰의 수입원이 수행자들의 의식주에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교육원장 현응스님은 2014년 세미나에서 조계종의 연간 수입 추정액이 15천억에 달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한 막대한 승가의 재산이 투명하게 공적으로 관리되지 않고 있습니다.

 

처음 스님이 되는데 필요한 가사와 승복을 출가자가 사야합니다. 동국대나 승가대 등에서 기본교육을 이수하는데도 본인이 학비를 부담해야하고, 주거비나 교통비 등도 본인이 부담해야 합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비도, 종단 연수교육을 가도 연수비를 요구합니다. 돈이 없으면 스님이 될 수도 없고, 교육을 받을 수도 없는 실정입니다. 종단은 스님들의 노후복지에도 아무런 대책이 없기에 스님들은 토굴을 짓는 등 각자 도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부빅부빈익빈의 종단의 현실은 사회 같으면 폭동이나 혁명이 일어날 상황입니다.

 

부처님의 승가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조계종단이 수행자 외호라는 승가 본연의 의무를 다하길 요구합니다. 이제 정치적 거래로 선출되는 총무원장이 아닌 대중에 의하여 대중의 뜻을 받드는 총무원장이 선출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직선제를 통하여 승가회복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갈 것을 선언하며, 이에 사부대중의 적극적 동참을 호소합니다.

 

2017 2 28

 

총무원장 직선 실현을 위한 대중공사

 

 

짤막한 호소문을 보면 현재 한국승가가 처한 현실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스님으로 사는데 있어서 돈이 많이 들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승복을 사 입는 것은 물론이고 책을 사보는 것이라든가, 심지어 강원에 입학하는 것도 돈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군대의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군대보다 못한 승가공동체

 

군대에 가면 모든 것이 공짜입니다. 나라의 부름을 받아 간 군대에서 자비를 들여 군복을 사고 자신의 돈으로 총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자리가 보장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월급까지 줍니다. 국방의 의무를 다 하는 군인에게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 되고 용돈 까지 줍니다. 이것이 군대입니다. 그런데 스님들의 삶은 군대 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출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생에서 재가자로서의 생을 마감하고 출가자로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부모도 버리고 형제와 인연을 끊고 심지어 세상과도 단절합니다. 이 세상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출가하여 수행자로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연을 끊었다고 합니다.

 

수행자로서 삶을 살아 가는 자는 수행자 집단에서 모든 것을 책임지고 해 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불교라면 승가가 될 것입니다. 출가하여 스님이 되면 승가가 속한 승단 또는 종단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잘 곳을 책임져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어찌 된 일인지 출가 했어도 자신의 손으로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을 해결해야 합니다. 이런 행위는 출가의 목적에도 맞지 않고 출가의 의미를 크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군대보다 못한 승가공동체입니다.

 

혁명전야와 같은 상황

 

출가자가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려 한다면 재가자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재가자처럼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소유입니다. 승복을 사고 먹을 것을 챙겨 먹고 잠잘 곳을 마련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출가목적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엄연한 한국불교의 현실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이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해결하여 살아 가야 합니다.

 

군대 보다 못한 곳이 한국불교 승가공동체입니다. 아니 감옥 보다 못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감옥에 있으면 최소한 의식주는 보장이 됩니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승가에서는 가만 있으면 의식주가 보장 되지 않습니다. 아무도 챙겨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불교가 타락했음을 말합니다. 승가공동체가 붕괴 된 것입니다.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소유의 개념이 도입 되어 스님들 간에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승가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허정스님의 호소문에 따르면 부빅부빈익빈의 종단의 현실은 사회 같으면 폭동이나 혁명이 일어날 상황입니다.”라 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한국불교는 폭동이나 혁명전야와 같은 상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승가공동체회복을 위하여

 

작은 촛불 하나가 촛불혁명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분노가 공감대를 형성하여 이루어 낸 것입니다. 분노에 공감하면 무서운 기세가 될 것입니다. 승가공동체가 붕괴된 한국불교에서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힘 있는 스님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여 이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들 만의 리그를 만들어 요직을 독점하고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누리고 있습니다. 반면 변화를 바라는 스님들은 모두 변방으로 밀려 났습니다. 입바른 소리를 하고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스님들은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대로 두면 한국불교는 망하는 길로 갈 것입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뜻 있는 스님들과 재가자들이 뭉쳤습니다. 지난 2 28일 서울시청 시민청 지하 2층에 있는 태평홀에서입니다. 작년 사부대중 백인 대중공사에서 의기투합한 스님들과 재가자들을 중심으로 총무원장 직선제 추진 운동이 시작 된 이래 처음으로 뭉친 것입니다. 구호는 승가공동체 회복입니다.

 

출가와 재가의 결집

 

올해 처음 열린 공청회에서 처음으로 출가와 재가의 결집이 있었습니다. 이제 행동으로 보여 줄 때 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동참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작은 촛불이 횃불이 되듯이, 처음으로 촛불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눈사람을 만들 때 연탄재를 이용하면 금방 만들 듯이, 코어(Core) 역할을 한 것입니다. 공청회가 열리던 날 마치 눈사람 만들듯이 눈덩이처럼 금방 불어 났습니다. 스님발기인 116명과 재가불자발기인 154명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앞으로 승가공동체회복을 위하여 코어역할을 할 스님들과 재가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총무원장직선실현과 승가공동체회복을 위한 스님발기인 명단

 

허정 명은 지성 효림 무송 도정 선일 무용 심운 경륜 선광 황산 혜관 우봉 진각 한수 심학 탄구 한수 성은 법진 관오 효원 길상 선하 현진 부명 경보 해성 환경 혜장 혜안 성두 한산 강설 원해 향선 정도 무불 덕해 지산 일면 원웅 대기 도림 법공 달능 도성 혜오 정화 곡송 석교 선법 인선 일오 명규 정소 선오 법천 진오 공곡 담우 진원 대혜 남현 성현 보정 화영 수연 본각 무주 혜각 소암 만적 만송 혜정 원근 원유 대안 성륜 보성 보현 도운 해각 대륜 성륜2희봉 서현 동환 종명 혜륜 현웅 마가 의천 정현 금담 문수 현각 덕상 지묵 성하 인성 증악 영수 석초 각원 지정 평전 각진 남도 현장 혜덕 정묵 대원 원중 원유 (이상 116)

 

 

총무원장직선실현과 승가공동체회복을 위한 재가발기인 명단

 

강성식 강홍수 국민성 김가령 김가형 김건중 김경호 김광수 김기한 김난영 김남선 김대영 김명옥 김미옥 김문자 김병훈 김보성 김봉곤 김석규 김숙희 김영국 김영규 김영상 김영숙 김영희 김옥자 김우진 김원석 김윤길 김응섭 김인택 김재성 김정선 김정수 김종규 김종길 김종만 김종연 김주환 김진기 김춘길 김현주 김현진 김형남 김화자 남경민 노경의 류청하 류춘일 민미양 민영선 문지연 박광서 박광직 박교일 박경준 박노훈 박덕희 박도택 박문자 박병기 박수민 박신자 박재현 박재호 박종린 박충례 박호영 박호석 박효상 배동한 배병태 백도영 백호열 변택주 서순종 서영옥 서윤희 서현욱 성기서 손상훈 손혁재 송동열 송재형 안분순 양성엽 옥복연 우성란 우은자 우희종 유승주 유영무 유재경 윤종성 이경숙 이도흠 이병욱 이서현 이석만 이순남 이승락 이승룡 이영자 이재근 이재우 이정재 이정환 이종찬 이창윤 이춘화 이택용 이학범 이호광 이혜숙 이희선 임수현 임익권 임지연 임형범 장도순 장명순 전대식 전우희 전준호 정권화 정규상 정면채 정목영 정성운 정승교 정재호 정정원 정한철 조윤주 조장래 조재현 조천복 조환부 지은숙 최수영 최연 최옥곤 최은희 최인희 최훈기 하재길 한만수 한성환 한혜원 허태곤 현승엽 홍도영 황찬익 형난옥 (이상 154)

 

 

 

 

 

 

카오스이론에 따르면 나비의 작은 날개짓이 태풍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116명의 스님들과 152명의 재가들의 숫자는 적습니다. 비록 적은 인원이지만 태풍의 눈이 될 수 있습니다. 직선제실현과 승가공동체회복를 염원하는 작은 모임이 한국불교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태풍의 눈이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한국불교에서는 바른 말 하면 불이익 받습니다. 주지직 연임을 거부당하고 심지어 강등 되기 까지 합니다. 아무도 입바른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승가공동체가 무너져 가도 내버려 둡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나서서 한마디 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두 침묵하는 동안 승가공동체는 망가졌습니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이제 혁명적 상황을 맞게 된 것입니다. 이에 불이익을 감수하고 용기 있는 스님들과 재가자들이 뭉치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도 분노했다

 

부처님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화를 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비법(非法)과 불의(不義)에 대하여 침묵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마음의 오염원으로서 화를 내서는 안되지만 정의로운 사회, 법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할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할말을 하는 것이 정의로운 분노, 거룩한 분노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분노했습니다. 다만 미움과 증오에 따른 감정적 분노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잘못 했을 때 나무란 것입니다. 빠알리율장비구계에 따르면 깨달음을 사칭하는 육군비구에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나무랐습니다.

 

 

[세존]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것은 적절하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고, 알맞지 않고, 수행자의 삶이 아니고 부당하고, 해서는 안될 일이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어찌 그대들은 배를 채우기 위하여 재가자들에게 서로서로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를 성취한 것이라고 찬탄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대들은 예리한 소 잡는 칼로 배를 가를지언정, 결코 배를 채우기 위하여 재가자들에게 서로서로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를 성취한 것이라고 찬탄하지 말라.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것을 인연으로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청정한 믿음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를 더욱더 청정한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오히려,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불신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 가운데 어떤 자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Uttarimanussadhammasikhapadā-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 승단추방죄법 제4, 율장비구계, 전재성님역)

 

 

이것이 부처님의 분노입니다. 깨달음을 사칭하여 사익을 채우려는 못된 비구들에 대하여 어리석은 자들이여(moghapurisā)라며 나무란 것입니다. 이렇게 나무라며 다섯 가지 큰도둑에 대한 가르침을 설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 학습계율을 시설합니다.

 

금과 은을 받지 말라 했는데

 

빠알리 율장이 번역되어 시중에서 판매 되고 있습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박사는 율장대품, 율장소품, 율장비구계, 율장비구니계를 완역했습니다. 방대한 빠알리율장을 보면 비구로서 하지 말아야 할 사항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로 수범수제형식입니다. 죄를 범하면 그때 그때 마다 율이 만들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금과 은을 받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금과 은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누군가 금과 은을 허용할 수 있다면 그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도 허용할 수 있습니다. (S42.10)라 했습니다. 무소유의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비구에게 금과 은을 주어서도 안되고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금과 은을 받는 비구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만약 누군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허용한다면 당신은 그를 수행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거나 싸끼야의 아들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고 확실히 여겨도 좋습니다. (S42.10) 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오늘날 스님들이 비구계로 살아 가는 스님들은 거의 없습니다. 지키기 힘들뿐더러 현실과 맞지 않는 것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율장정신만큼은 지켜야 할 것입니다. 비록 금과 은, 요즘 말로 돈을 받더라도 항상 율장정신을 지키고 있다면 문제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개인사찰이나 토굴을 만들어 사유재산을 가진다면 율장정신에 어긋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입장료수입과 정부보조금에 의지하여 살아 간다면 역시 율장정신에 어긋난 것입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금과 은을 받지 말라 했습니다. 만일 금과 은을 받는다면 싸끼야의 아들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고 확실히 여겨도 좋습니다.”라 했습니다. 개인사찰이나 토굴을 가지고 사익을 추구하는 자는 부처님 제자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너무나 당연시 하는 것 같습니다. 스님들이 재산을 형성하고 권력을 향유하는 등 본래 출가 정신과 동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사회와 마찬가지로 승가사회도 부자스님과 가난한 스님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율장정신이 무너진 것입니다.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갈 뿐

 

눈사람을 만들어 아래로 굴리면 눈 점점 불어 커다란 눈덩이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구르기 시작한 눈덩이는 점점 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커다란 눈덩이가 되어 굴러 갈 때 아무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오비구에게 가르침을 설했을 때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린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법의 바퀴는 오로지 앞으로만 갑니다. 옆으로도 갈 수 없고, 뒤로 갈 수 없습니다.

 

수레를 끄는 소나 전차를 달고 달리는 말은 오로지 앞으로만 갑니다. 옆으로 갈 수 없고 뒤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수레 바퀴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립니다. 결코 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stn554, M92)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릴 때 꼰단냐에게 진리의 눈이 생겨 났습니다.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가 굴러 간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바퀴가 굴러 가자 멈추지 않게 되어 오늘날까지 굴러 왔습니다.

 

부처님의 진리의 수레바퀴는 누구도 멈출 수 없고 뒤로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가는 진리의 수레바퀴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땅의 신은 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S56.11)라고 감격에 차 외쳤습니다.

 

총무원장직선제와 승가공동체회복을 위한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진리의 수레바퀴를 누구도 막지 못하듯이, 승가공동체회복을 위한 수레바퀴는 아무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수레바퀴는 한번 구르기 시작하면 앞으로만 갈 뿐 뒤로 되돌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116명의 스님들과 152명의 재가자들로 이루어진 수레바퀴는 앞으로만 구를 뿐 뒤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서 눈덩이처럼 점점 커질 것입니다. 나비의 날개짓이 태풍이 되듯이, 하나의 작은 모임이 한국불교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한번 불 붙은 분노는 

 

승가공동체는 회복 되어야 합니다. 이대로 놓아 두면 한국불교는 한세대가 지나면 3등종교, 소수종교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놓습니다. 지금 승가공동체를 회복하지 않으면 한국불교는 깊은 산중이나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뜻있는 스님들과 불자들이 뭉쳤습니다. 마치 눈사람 만드는데 있어서 연탄재와 같은 코어(Core) 역할을 한 것입니다.

 

혁명에는 분노를 필요로 합니다. 작은 촛불이 횃불이 되듯이, 분노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이를 지난해 촛불혁명에서 보았습니다. 한번 불붙은 분노는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승가공동체 회복을 위한 불교인들의 분노가 타올랐습니다.

 

 

2017-03-0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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