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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불교를 생각한다/한국불교를 생각하다

[스크랩] 출가해서는 안될 사람

moksha 2017. 6. 3. 17:26

 

출가해서는 안될 사람

 

 

성직자와 신도들은 신분이 다릅니다. 타종교에서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불교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머리를 깍고 가사를 걸쳤다고 하여 승보라 하여 삼보중의 하나로 간주됩니다. 잘못을 보고 비판하면 삼보를 비방하였다고 하여 비난 받습니다.

 

신도들이 무지할수록 성직자의 권위는 자꾸만 올라 갑니다. 성직자들은 신도들이 많이 아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궁금한 것을 자꾸 질문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도들이 모르는 말을 하고 신도들이 모르는 주문을 외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신도들은 성직자들을 하늘처럼 떠 받들고 살아 갑니다.

 

번뇌로 가득한 자가

 

가사를 입는 다는 것은 신분이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나 가사를 입을 수 없습니다. 가사를 입은 자는 인천의 스승으로서 간주하고 권위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가사를 입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혼탁을 여의지 못하고

가사를 걸치고자 한다면,

자제와 진실이 없는 것이니

가사를 입을 자격조차 없다.”(Thag.969)

 

 

 

 

 

 

이 게송은 부처님이 뿟사존자에게 읊은 게송으로 법구경 Dhp.9번 게송과 병행합니다. 혼탁을 여의지 못한다는 말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로 오염된 것을 말합니다. 번뇌로 가득한 자는 가사입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사가 어울리지 않는 자

 

가사를 입어도 어울리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도저히 수행자 같지 않아 보이는 자들입니다. 마치 양복입고 갓 쓴 것 같습니다.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 같은 사람이 가사를 입었을 때 어울리지 않습니다. 목에 살이 쪄서 돼지목살처럼 보이는가 하면 뒤뚱뒤뚱 것는 자가 가사를 입었을 때 역시 어울리지 않습니다. 테라가타에서 뿟싸존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계행이 금가고, 지혜가 모자라고,

제어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고,

방황하는 마음을 지니고, 정진이 없으면,

가사를 입을 자격이 없다.”(Thag.971)

 

 

가사를 입을 수 없는 조건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계행이 엉망이고 지혜도 없는 자, 그리고 방황하기만 하고 정진도 없는 자가 가사를 입고 있으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 차라리 가사를 벗는 것이 낫습니다. 그래서 교만하고, 허세부리며, 어리석고, 계행이 없는 자에게는 흰옷이 어울리지 어찌 가사가 어울리겠는가?”(Thag.973) 라 했습니다. 여기서 흰옷은 재가자를 상징합니다.

 

부처님 당시 재가자는 흰옷을 입었습니다. 반면 출가자는 가사를 입었습니다. 가사착용 여부로 재가자인지 출가자인지 구별되었습니다. 이런 구별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사를 입은 자들이 행위가 재가자와 구별이 되지 않을 때 가사만 걸쳤을 뿐입니다.

 

힌두교 문학작품 속에

 

계행이 엉망인자나 지혜가 없는 자, 그리고 욕망으로 가득한 자가 가사를 걸쳤을 때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외면하고 심지어 비난할 것입니다. 특히 이교도들이 맹렬히 비난 할 것입니다. 일아스님의 아소까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불교 비구를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심지어 꿈속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재수없고 보는 것을 피해야 한다.(야즈나발까, 유명한 힌두법전 문헌가)

 

“브라흐민이 불교도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심지어 큰 위험에 처했을 때라도 죄가 된다.(아그니 뿌라나)

 

“하얀 이빨, 눈은 절제하고, 머리를 삭발하고,

노란 가사를 입은 이 노예들이 종교적인 행위를 거행할 것이다.(바유 쁘라나)

 

“불교로 개종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며

머리 깍은 사문과 말하는 것만으로도 지옥에 떨어진다.(비누 쁘라나)

 

(아소까 412-413p, 일아스님지음)

 

 

일아스님의 책 아소까에 따르면, 힌두교 문학작품 속에 실려 있는 것을 발췌한 것이라 합니다. 계행을 지키지 않고 지혜도 없고 정진도 없는 타락한 승려에 대한 혐오가 묘사 되어 있습니다. 문학작품 속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왔다고 합니다.

 

출가시켜서는 안될 사람

 

부처님 당시에도 타락한 승려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격미달 승려들도 많았습니다. 단지 생계 때문에 승려가 된 자들도 있었습니다. 율장에 따르면 출가시켜서는 안될 사람들의 유형이 있습니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No

   

  

  

1

다섯 가지 질병에 감염된 사람

1)나병, 종기, 습진, 폐병, 간질 등 질병의 치유 목적

2)계행이 쉽고 삶이 평안하고 좋은 음식을 먹을 것 같음.

3)수행승들이 보살펴 줌

병이 낫자 환속함

2

왕의 신하

전사들이 악을 멈추고 선을 지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함

-군대의 명령을 어김

-빔비사라왕의 요청

3

강도

사람들이 무서워 도망치고 길을 피하고 얼굴을 돌리고 문을 잠금.

사람들이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함

4

감옥문을 부순 도적

빔비사라왕의 “출가한 자들을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감옥문을 부순 도적이 출가함

사람들이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함

5

방부에 적혀 있는 도적

“싸끼야의 아들들은 안전하고 두려움이 없다”라는 말을듣고 지명수배된 도적이 출가함.

사람들이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함

6

태형을 당한 자

처벌로서 태형을 당한 자

사람들이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함

7

낙인형을 당한 자

처벌로서 낙인형을 당한 자

사람들이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함

8

빚 진 도둑

빚을 지고 도망 간 자

사람들이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함

9

노예

주인이 “이 자는 우리의 노예입니다”라고 주장함

사람들이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함

10

삭발자

부모와 싸운 대머리대장장이

사람들이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함

11

생계형아동

1)부모가 생계를 위해 아동을 출가시킴

2) 아동들이 떠들며 “죽을 주시오, 밥을 주시오”라고 말함

스므살 미만인 자들에게 구족계를 주어서는 안됨

12

열다섯미만의 소년

1)아버지와 아들이 출가하여 함께 탁발

2)사람들이 수행녀의 소생이라 오해함

사람들이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함

 

 

 

출가자 중에는 빚을 지고 도망간 자도 있습니다. 출가자 중에는 계행이 쉽고 삶이 평안하고 좋은 음식을 먹을 것 같아서 출가한 자들도 있습니다. 출가자 중에는 생계 때문에 출가한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악의 출가자는 범죄자들입니다.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하다 출가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출가하기에 부적격 자들입니다.

 

첫 번째 항에서 다섯 가지 질병을 가진 자입니다. 이들은 이 수행자의 아들들은 계행이 쉽고 삶이 평안하고 좋은 음식을 먹고 바람이 들지 않는 침상에서 잔다. 나도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 가운데 출가하면 어떨까? 거기서 수행승들이 잘 보살펴 줄 것이다. 지바까 꾸마라밧짜가 치료해 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병치료를 목적으로 출가한 자들입니다. 병치료를 목적으로 출가한 자들이 병이 나았을 때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율장대품에서는 그러자 그 사람은 수행승들을 찾아 가서 출가를 청했다. 수행승들은 그들을 출가시키고 구족계를 주었다. 수행승들은 그들을 보살폈고 지바까 꼬마라밧짜는 치료해 주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질병이 낫자 환속했다.”라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병, 종기, 습진, 폐병, 간질 등 다섯 가지 질병을 가진 자는 출가시켜서는 안된다는 계율이 생겨났습니다.

 

두 번째 항에서 왕의 신하입니다. 이는 이들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은 진리를 실천하고, 평등을 실천하고, 청정한 삶을 실천하고 진리를 말하고 계행을 갖추고 선한 원리를 갖고 있다. 만약에 우리가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에게 출가하면, 우리가 악을 멈추고 선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이유로 출가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안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에게 왕의 신하를 출가시키지 않는다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청하여, 이후부터 왕의 신하를 출가시켜서는 안된다는 계율이 생겨 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항에서 강도입니다. 이는 앙굴리말라 출가와 관련 있습니다. 앙굴리말라가 출가하자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두려워하고 도망치고 길을 피하고 얼굴을 돌리고 문을 잠갔다.”라 했습니다. 흉악한 연쇄살인자가 상가에 들어 갔을 때 모두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로 도적인 표상인 강도를 출가시켜서는 안된다.”는 계율이 생겨났습니다.

 

네 번째 항에서 감옥문을 부순 도적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저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은 안전하고 두려움이 없다. 그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어찌 감옥을 부순 도적을 출가시킬 수 있단 말인가?”라며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감옥을 부순 도적은 출가시켜서는 안된다.”라는 계율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여덟 번째 항에서 빚진 자입니다. 빚진 자는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 가운데 출가하는 자들 가운데 출가하는 자들에게는 어떠한 처벌도 할 수 없다.”라는 빔비사라왕의 명령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출가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저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은 안전하고 두려움이 없다. 그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어찌 빚을 진 자를 출가시킬 수 있단 말인가?”라며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했습니다. 이후에 빚진 도둑을 출가시켜서는 안된다.”라는 계율이 생겨났습니다.

 

열 한번째 항에서 생계형 아동이 입니다. 부모가 생계를 위해 아동을 출가시킨 것을 말합니다. 이는 부모가 이 수행자의 아들들은 계행이 쉽고 삶이 평안하고 좋은 음식을 먹고 바람이 들지 않는 침상에서 잔다. 만약 우빨리가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 가운데 출가하면, 우빨리는 우리가 죽은 뒤에도 궁핍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것이다.”라는 이유로 출가시킨 것입니다. 아이들은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떠들면서 “죽을 주시오, 밥을 주시오”라며 떠들고 침상에 오줌을 누고 똥을 쌌습니다. 이후 스므살 미만인 자들에게 구족계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계율이 생겨났습니다.

 

 

부적격 자들

 

출가하기에 부적한 자들이 출가해서 구족계를 받았을 때 범죄집단이 됩니다. 한국불교에서도 소위 정화라는 이름으로 사찰 빼앗기를 하던 시절 출가한 자들이 있습니다. 절을 빼앗기 위하여 힘을 쓰는 자들을 고용했는데 그들이 절에 주저 앉아 스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회에 나가면 폭력조직의 일원이 되었을 자들이 절에 들어 오니 스님대접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절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제 중진스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화라는 이름으로 절 뺏기하던 신공을 발휘하여 종단을 완벽하게 장악했다는 사실입니다. 소위 돈이 되는 사찰 100여 개를 접수하여 입장료 수입과 국고보조금으로 살아 가고 있습니다. 신도들의 도움 없이도 살아 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입니다. 신도들이 줄어들든 말든, 불교가 망하든 말든 그들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불교가 망하면 가장 나중까지 절에 남아 있을 자들입니다. 그들은 옛날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해서일까 처자식을 두고, 도박을 하고, 음주를 하는 등 속인들과 다름 없는 반승반속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신도들은 승보로 간주하여 떠 받들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태를 비판하면 삼보를 능멸한다고 하여 비난 받습니다.

 

최후의 시대가 오면

 

출가 부적격자들이 출가 했을 때 불교는 쇠퇴할 것입니다. 불자인구 3백만이 감소한 것도 자신이 불자임을 유보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특별한 조치가 없는 한 10년 후에는 더 줄어 있을 것입니다. 부적격자들이 가사를 입었을 때 적격자들이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부적격자들의 세상이 되었을 때 불교는 껍데기만 남아 말세라 볼 수 있습니다. 테라가타에서 뿟사장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한 마음을 지녀 공경이 없는

수행승들과 수행녀들이

자애의 마음을 지닌 여여한 님들을

오히려 미래에 매도하리라.”(Thag.974)

 

미래의 시기에

최후의 시대가 오면,

수행승들과 수행녀들의

행실이 이와 같으리라.” (Thag.977)

 

 

마치 예언서 같습니다. 부처님 당시 장로가 본 일부 빅쿠의 타락한 모습을 후대에 남긴 것입니다. 여법하게 살아 가는 수행자들이 부적격자들에게 밀려 나는 것이 그때 당시에도 있었음을 말합니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많이 배우고 유능하고 양심바른 스님들은 모두 주변으로 밀려 나서 거처 걱정을 해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조폭같은 스님들은 이익이 되는 모든 것을 차지하여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섯 시대가 있는데

 

뿟사장로는 미래를 예언했습니다. 최후의 시대가 오면 부적적격 자들이 판을 쳐서 불교가 사라질 것이라 한 것입니다. 이를 최후의 시대라 합니다. 최후의 시대와 관련하여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섯 시대가 있는데, 해탈의 시대, 삼매의 시대, 계행의 시대, 학습의 시대, 보시의 시대이다. 첫 번째 해탈의 시대인데, 그것이 사라지면 삼매의 시대가 전개되고, 그것도 사라지면 계행의 시대가 전개되고, 그것도 사라지면 학습의 시대가 전개되고, 그것도 사라지면 보시의 시대가 전개되는데, 학습의 시대부터가 최후의 시대(말세)에 해당된다. 학습의 시대에는 탐욕 등의 욕망 때문에 계행이 완전히 청정하지 못하고 학습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논의의 주제를 끝으로 하는 학습이 일체 사라지면, 그로부터 흔적만이 남을 것이고 그때부터는 재물을 모아서 보시로서 베푼다. 이것이 최후의 올바른 실천이다.”(ThagA.III.89, 전재성님역)

 

 

뿟사존자는 다섯 시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해탈, 삼매, 계행, 학습, 보시의 시대를 말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 말씀 한마디에 깨달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해탈의 시대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갈수록 정법은 변질되어 갑니다. 삼매, 계행, 합습, 보시의 시대로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후의 시대를 보면 재물을 모아서 보시로서 베푼다라 했습니다. 출가수행자가 재물을 모아서 사람들에게 보시는 하는 현상일 것입니다. 육바라밀중에 보시바라밀이라 하여 최고로 간주하지만, 무소유와 소욕지족으로 청정한 삶을 살아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정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출가자가 소유하게된다면 더 이상 부처님 제자라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누군가 금과 은을 허용할 수 있다면 그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도 허용할 수 있습니다.(S42.10)라 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허용한다면 당신은 그를 수행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거나 싸끼야의 아들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고 확실히 여겨도 좋습니다.(S42.10) 라 했습니다. 금과 은을 받는 자는 부처님제자가 아님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재산을 축적하여 보시를 한다면 정법이 사라진 말세일 것입니다.

 

전장에서 갑옷을 입은 것처럼

 

역사는 매번 반복됩니다. 출가해서는 안될 자들이 가사를 걸치고 있는 것은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계행이 엉망인 자들이 가사를 입고 있을 때 어울리지 않습니다. 가사는 계행을 잘 지키는 자가 입었을 때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위풍당당합니다.

 

청정도론 두타행에 따르면 마라의 군대를 항복받기 위해 분소의를 입은 수행자는 전쟁터에서 갑옷으로 무장한 왕족처럼 빛난다.”(Vism.2.22) 라 했습니다. 또 테라가타에서 씰라바뜨 존자가 읊은 게송에 따르면 계행은 비할데 없는 힘, 계행은 최상의 무기이자 최상의 장식이니, 계행은 놀라운 갑옷이다.”(Thag.614) 라 했습니다.

 

계행은 갑옷과 같습니다. 갑옷을 입으면 적의 어떤 화살도 막아 낼 수 있습니다. 계행이 바른 수행자가 분소의를 입었을 때 전장에서 갑옷을 입은 것처럼 위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위하여 소유하고 축적하는 삶을 산다면 가사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머리만 깍았다고 하여 수행자는 아닙니다. 그래서 삭발했다고 수행자가 아니다. 욕망과 탐욕을 지닌다면 어찌 그가 수행자가 되랴?”(Dhp.264)라 했습니다.

 

머리깍은 죄인

 

머리 깍은 자가 계행이 엉망이고 축적하는 삶을 산다면 머리깍은 죄인에 지나지않습니다. 걸식의 경에 따르면 이 탁발이라는 것은 삶의 끝이다.”(S22.80)이라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 세상 사람들은 손에 바루나 들고 다녀라라는 저주가 있었다고 합니다. 세상사람들이 분노하면 중옷이나 입고 그릇을 들고 빌러 돌아다녀라라며 적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말이라 합니다.

 

오늘날 한국불교 승려들은 탁발하지 않습니다. 특히 권승들은 백여개 돈 되는 사찰을 독차지 하여 입장료수입과 국고보조금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축적된 재산으로 종권을 장악하고 매관매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이교도의 문학작품 속에 불교 비구를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심지어 꿈속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재수없고 보는 것을 피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실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한국불교가 말세가 된 것은

 

한국불교가 말세가 된 것은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 하여 경전을 무시한 대가입니다. 설령 경전을 보더라도 부처님 원음이 담긴 빠알리경전을 접하지 않는 한 말세의 시대에 사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한국불교가 바뀌려면 초기경전의 가르침이 널리 확산되어야 합니다. 출가자나 재가자나 모두 법(Dhamma: 가르침)대로 살았을 때 머리깍은 죄인, 삭발처사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미래의 시기에

크나큰 공포가 다가오기 전에

온유하고 친절하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한다.”(Thag,978)

 

자애의 마음과, 연민을 갖추고

계행을 잘 지키고,

용맹정진하고, 결의를 다지고,

항상 분발해야 하리라.” (Thag,979)

 

방일에서 두려움을 보고

방일의 여읨을 안온으로 보고

불사의 경지에 닿는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닦아야 하리.”(Thag,980)

 

 

2017-05-3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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