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소승(小乘)은 없다
홍사성 교수
이번 글은 [홍창성의 철학에세이] 3월의 두 번째 글이다. 이번 에세이는 200자 원고지 58매 분량으로 비교적 짧다(?). 홍 교수는 지난 5~6년 동안 미국과 한국에서 열린 학회들에서 발표한 글 가운데 아무 곳에서도 출판하지 않은 글들을 종합해 이번에 새로이 한 편의 철학에세이를 만들었다. 이번 에세이의 뒷부분은 홍 교수가 지난해 가을 현응 스님의 화갑연찬회에서 발표했던 논평문의 일부를 가져온 글이다. 홍 교수가 앞으로 쓰게 될 한 두 편의 에세이는 ‘자비행의 실천’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에세이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번 에세이의 제목을 ‘깨달음과 열반 그리고 자비행’으로 정했다. 이번 에세이의 전반부는 깨달음의 개념에 대해 논리적 분석을 한 글이다. 이 글은 <미디어붓다>를 통해 진행됐던 이른바 ‘깨달음 논쟁’에 도움이 될 개념적 교통정리를 해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글의 요지는 후반부의 ‘자비행 실천’의 필연성에 대한 강조가 핵심이다. 매월 2~3편의 옥고를 <미디어붓다>의 독자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집필하고 계신 홍 교수님에게 새삼 고마움의 인사를 전한다. [편집자]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드는 것은 모든 불자들의 염원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깨달음과 자신만의 열반이 불교인들의 목표일 수는 없겠다. 불교에서는 깨달음과 열반의 성취가 필연적으로 자비행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비행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깨닫지도 열반에 들지도 못했다고 판단해야 한다.
두 가지 깨달음: 철학적 깨달음과 열반적 깨달음
나는 우리가 통상 이야기하는 깨달음에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의 가르침인 불교를 창시한 붓다의 예로부터 이 점을 논의해 보겠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붓다가 되었다고 들어왔다. ‘붓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깨달은 자’이다. 그런데 그가 깨달았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 물론 그것은 진리였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에 대한 진리였는가? 그것은 세계와 그 안에서의 우리의 삶에 대한 진리였다. 그렇다면 누구나 이런 진리를 깨달으면 붓다가 되는가? 아니면, 진리 자체에 대한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하고 이 진리를 완전히 내면화해서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철저히 바꾸어야만 붓다가 될 수 있는가? 어쩌면 진리의 이해와 그에 따른 세계관의 내면화만으로는 붓다가 되기에 부족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심리적으로도 고뇌(duhkha, suffering)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품성이 완성되어야 붓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번뇌의 불길이 꺼져서 고뇌로부터 벗어난 상태, 즉 열반에 들 수 있어야 붓다라고 칭해질 수 있다. 아무리 총명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더라도 고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깨달은 자라고 인정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깨달음과 열반(고뇌로부터 벗어남)은 구분되어야 한다. 깨달음(enlightenment)이란 원래 – 최근 깨달음 논쟁에서 현응 스님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 순수히 인식적 차원에서의 성취로 이해함이 옳다고 본다. ‘깨달음’이란 말 자체의 어원도 ‘깨닫다’ 또는 ‘알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문법적으로 그 깨달음 또는 앎의 대상에 해당되는 목적어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대상이란 우리의 삶과 세계에 대한 진리가 되겠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열반(nirvana)은 도덕적 정신적 품성을 계발하고 함양함으로써(through moral and spiritual cultivation) 이루게 되는 고뇌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다. 제아무리 불교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도 모든 고뇌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는 한 열반에 이르렀다고 볼 수는 없다.
인식적 차원에서 얻어진 깨달음이 우리를 반드시 고뇌로부터 해방시켜 주지는 않는다. 쉬운 예를 들자면, 요즈음 미국 월스트리트 금융계 사람들처럼 공부만 한다면 불교의 진리를 잘 깨달을 명석한 사람들도 지나친 세속적 욕망을 조절하지 못해 그들 스스로와 세계를 번뇌의 불길 속에 빠트려 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식적 차원에서의 성취로 얻는 깨달음과 도덕적 정신적 자기 계발로 이루는 열반은 – 비록 그 둘이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 불교인들이 가지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목표로 이해되어야 하겠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깨달음’의 개념에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붓다’라는 말은 원래 ‘깨달은 자’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여러 세기가 지나가면서 ‘붓다’라는 말이 ‘열반에 이른 자’라는 뜻도 가지게 되었다. 간단한 논리적 테스트를 통해 이런 의미의 변화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붓다’라는 말과 ‘고뇌하는’이라는 말을 합쳐서 만들어진 표현이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는가를 한번 살펴보자. 우리가 모두 동의하겠듯이 ‘고뇌하는 붓다’란 표현은 단적으로 자기모순이다. ‘총각’이란 ‘결혼하지 않은 남자’라는 의미여서 ‘결혼한 총각’이란 표현은 모순이듯이, 우리는 ‘고뇌하는 붓다’라는 표현에서 같은 종류의 모순을 발견한다. 그 이유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붓다’란 말이 ‘깨달은 자’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모든 고뇌로부터 해방되어 언제나 열반에 들어있는 자’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붓다’라는 단어는 어원적으로 ‘깨달은 자’라는 뜻이고 우리는 현재도 그 뜻을 이 말의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모든 붓다는 예외 없이 열반에 들어 있다. 그래서 ‘고뇌하는 붓다’라는 표현이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모순된 표현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모든 붓다는 깨달은 자이고 그들이 모두 열반에 들어 있으니, ‘깨달음’이라는 개념을 ‘열반’의 개념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깨달음’의 개념이 ‘열반’의 개념도 포함하게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겠다. 이렇게 개념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나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깨달음을 별도로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학적 깨달음(the philosophical enlightenment)과 열반적 깨달음(the nirvanic enlightenment).
철학적 깨달음
전통에 따라 해석이 다소 다르지만, 고타마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았다는 진리는 연기법이고, 그 연기법에 대한 깨달음이 그에게 ‘붓다’라는 칭호를 가져와 주었다. 모든 사물이 조건에 따라 생성 지속 소멸한다는 연기법은 대승의 空(공) 사상으로 이어져 그 깊이를 더해 왔다. 모든 것이 조건에 의존해서만 존재하므로 아무 것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즉, 아무런 실체도 없고– 또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니 그 스스로를 스스로이게끔 해 주는 어떤 속성 –즉 본질적 속성 또는 본질, 자성-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空(공) 사상으로부터 불교의 초기부터 바라문교(힌두교)와 각을 세운 無我論(무아론, Non-Self, Anatman)도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만물에 본성(svabhava)이 없듯이 만물 가운데 하나인 나 또한 나의 본성이랄 수 있는 아뜨만(Atman)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도 대승 전통에서 空(공)을 ‘본질을 결여하는’이라는 의미로 다소 부정적인 개념으로 접근한데 비해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空(공)의 관점을 취한다는 것을 ‘사물을 관계와 변화의 관점에서 보는’ 것으로 해석하게 되어 空(공)을 오히려 긍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천태와 화엄에 이르러서는 모든 사물이 모든 사물과 서로 맞물려 존재하며 (inter-exist) 서로 철저히 삼투하고 (inter-penetrate) 있다고까지 주장하는 법계연기설로 그 백미를 이루며 空(공) 사상의 긍정적인 해석이 화려하게 장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에세이들에서도 여러 번 밝혔듯이 나는 인도에서나 동아시아에서나 空(공)을 사물의 존재 양상을 표현하는 논리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 어떤 궁극적인 존재자로서 실체화(reification)하는 것은 오류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해석이나 주장에 반대한다.)
철학적 깨달음이란 결국 변화와 관계의 관점으로 즉 연기와 空(공)의 관점으로 삶과 세계를 이해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현응 스님의 ‘이해하는 깨달음’이 나의 ‘철학적 깨달음’과 같은 종류의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적 깨달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과 존재 세계 전체를 변화와 관계의 관점으로 즉 상호연관성의 시각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열반적 깨달음
어떤 이가 철학적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무아와 연기의 진리를 매우 포괄적으로 이해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본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그래서 그는 사물을 철저히 空(공)의 진리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한다. 이렇게 인식적 차원에서 볼 때 그는 완전히 깨달았다. 그러나 이렇게 멋진 철학적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타오르는 욕망과 집착을 제어하지 못해 고통스러운 번뇌에 시달릴 수 있다. 실제로 그가 이렇게 되기는 생각보다 훨씬 쉽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다른 이들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고뇌를 가져오는 방식으로 느끼고 행동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는 식욕을 조절하지 못해 과도한 양의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오래된 나쁜 습관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우리 주위에는 지적으로 우수해서 空(공)의 진리를 잘 이해하면서도 음식과 술을 조절하지 못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또 八正道(팔정도)의 正言(정언)의 가르침을 이해는 하지만 몸으로 따르지는 못해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험한 말을 그치지 못하는 사람도 꽤 있다. 실제로 이런 이들은 거친 언사로 사람들을 해치는 데서 오는 가학적 쾌락(sadistic pleasure)을 여전히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그는 이기심과 나태함으로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아무런 책임도 맡지 않으려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인식적 차원에서는 철학적 깨달음을 한껏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다른 이들을 고뇌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깨달은 자’로 인정하기를 꺼리게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았듯이 ‘고뇌에 시달리는 깨달은 자’라는 표현은 논리적으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적 깨달음은 더 이상 완전한 의미에서의 깨달음이 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불교 초기에는 깨달음이 인식적 차원에서의 성취를 지칭했던 것 같다. 내가 ‘열반적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도덕적 훈련과 정신적 수양으로 이루어지는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으로만 이해되었다. 그러나 나는 지난 여러 세기 동안 ‘깨달음’의 개념이 ‘열반’으로도 확장되어 결국 그것까지 포함하게 되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는 누군가가 고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한 그는 깨달은 자로 간주될 수 없게 되었다.
깨달은 자들은 철학적으로 깨달은 이들의 정신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 즉 그들은 언제나 철저히 空(공)의 관점으로 삶과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깨달음의 필요조건일 뿐 결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깨달음을 위한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진정으로 깨달은 자라면 철학적으로 깨달아야 할 뿐 아니라 모든 고뇌로부터도 영원히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탐진치 삼독을 완전히 제거했고 다시는 그것들이 생겨날 수 없게 한다. 또 그는 팔정도와 그 밖에 붓다가 가르친 계율들을 아무런 힘든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따른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단지 지적인 성취의 문제일 수가 없다. 고뇌로부터 해방되어 있을 수 있도록 심신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다른 종류의 깨달음도 반드시 달성되어야 한다. 나는 이런 종류의 깨달음을 ‘열반적 깨달음’으로 부른다.
(‘깨달음’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자비행’에 대한 논의도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급한 마음에 몇 주 전에 말씀드렸던 ‘열반’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는 다른 기회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독자님들의 이해를 바랍니다. 그리고 禪門(선문)에서 말하는 ‘깨침’에 대해서는 제가 2012년 『불교학보』에 발표한 논문 <깨달음의 패러독스와 사적언어논증>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다시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佛子(불자)로서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
우리는 살아 있는 모든 순간순간 선택하고 행위하게 된다. 생물학적 본능에 의해 하는 행동(behavior)뿐 아니라 우리의 의지가 들어가는 행위(action)를 하게 된다는 말이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경우라도 실은 행동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들어가서 그렇게 되는 것이니 결국 일종의 행위에 해당된다. 결국 우리는 깨어있는 동안에는 행위하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음에 대해 논쟁하는 우리는 불자로서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깨달음 논쟁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등한 정열과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자로서 아무렇게나 행동하면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의 첫 문장에서 언급했듯이, 깨달음을 얻고 열반을 성취하는 것은 모든 불자들의 염원이다. 우리에게는 삶의 순간순간 우리가 해야 하는 각각의 행위를 규제하고 인도해 줄 어떤 원리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 행위의 원리와 깨달음과 열반의 획득이라는 불자들의 서원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논의의 편의상 이 에세이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깨달음’을 철학적 깨달음으로, 그리고 ‘열반’은 열반적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겠다.
모든 불자들이 어떤 원리에 따라 행위해야 하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깨달은 자들이 자비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대승의 가르침을 예로 들어 그 논의를 시작해 보겠다. 심리학에서 심리적으로 극단적인 경우들을 연구함으로써 정상적인 사람들의 심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듯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이들의 행위의 기준을 이해함으로써 모든 불자들이 따를 행위의 원리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깨달은 이들은 모든 고뇌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가운데 열반에 머문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다른 고통 받는 중생을 위해 자비심을 내어 그들을 번뇌로부터 해방시켜 주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깨달은 이들은 어떠한 고뇌로부터도 벗어나 자유로이 열반에 머물고 있고, 그들의 ‘행복’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그러면 왜 그들이 번거롭게 속세로 나아가 다른 유정물들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해 주어야 하는가? 이미 부족함 없이 완벽히 행복한 그들에게 그들의 자비행이 도대체 어떤 행복을 더해 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즉각 떠오르는 만족스러운 답변은 없는 것 같다. 대승불교에서는 자비행의 실천이 계율이기 때문에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계율의 존재이유부터 규명하려 하는 철학의 입장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답변이다. 8세기 인도의 승려 샨티데와(Santideva)는 기본적으로 같은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
그것들이 단지 고통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은 막아져야 한다. 만약 고통이 왜 막아져야 한다고 묻는다면, 아무도 예외 없이 그것이 막아져야 된다고 동의할 것이다. 그래서 만약 고통이 막아져야 한다면 모든 고통이 막아져야 한다; 고통이 막아지지 않아도 된다면, 자기 자신의 경우도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같다. [The Bodhicaryavatara of Santideva with the Commentary Panjika of Prajnakaramati, ed. P.L. Vaidya (Dharbanga: Mithila Institute, 1960), 8, 97-103.]
이 인용문에서 셋째 문장 “그래서 만약 고통이 막아져야 한다면 모든 고통이 막아져야 한다; 고통이 막아지지 않아도 된다면, 자기 자신의 경우도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같다”는 위의 다른 두 문장들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불자들이라면 물론 부처의 무아와 연기의 가르침을 가져와 이 셋째 문장의 주장을 지지할 것이다. 아무에게도 자아가 없고 우리는 모두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스스로의 고통을 없애는 것이나 다른 이들의 고통을 없애는데 차별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모든 이가 자신의 경우이거나 다른 이들의 경우이거나 모두 고통을 없애고자 해야 하는 이유다 – 그렇지 못하다면 자신의 고통을 포함해 아무 고통도 없애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다수 불자들에게는 이러한 샨티데와의 견해가 보살이 반드시 걸어야 하는 보편적 자비심의 길을 설명하기에 충분히 좋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견해가 비판적 시각으로 가득 찬 철학자들의 의문을 모두 해소해 주지는 못한다. 철학자들은 고통을 막아야 하는 근본적인 불교적 이유부터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불교가 처음부터 무엇에 관한 가르침인가를 되돌아보기만 하면 우리가 이런 설명을 제공하는 불교적 원리를 곧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불교는 깨달음과 열반에 대한 가르침의 체계다.
의문의 여지없이 깨달음은 모든 불교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다. 그리고 깨달음이 그토록 중요한 목표인 이유는 바로 깨달음이 열반을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었을 때 모든 고뇌에서 자유로워지는 열반의 길이 열린다. 모든 경전 공부와 명상 수행은 깨달음과 열반을 얻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깨달음과 열반은 모든 불교도들에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목표다. 만약 불교에 우리가 사건이나 행위를 평가할 하나의 기준 또는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깨달음과 열반을 산출하는데 (얼마나) 기여하느냐 아니면 그것에 (얼마나) 역행하느냐일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다음의 두 문장을 우리의 행위에 대한 ‘깨달음과 열반 산출성의 원리’로서 제안한다:
(어떤 사건 또는 행위가 깨달음과 열반의 산출에 기여한다.) ↔ (그것이 좋다/옳다.);
(어떤 사건 또는 행위가 깨달음과 열반의 산출에 역행한다.) ↔ (그것이 나쁘다/그르다.)
고통은 그것이 깨달음과 열반에로의 길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나쁘다. (One’s suffering is bad because it is counter-conducive to her enlightenment and nirvana.) 쾌락주의는 깨달음과 열반을 가로막아서 나쁘다. 명상 수행은 깨달음과 열반 산출에 기여하기 때문에 좋다. 다른 사람들에게 거친 말을 쓰는 것은 그런 언어가 그들에게 고통을 야기하고 그들의 고통은 그들의 깨달음과 열반을 산출하는데 역행하기 때문에 그른 행위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 사람의 죽음이 그의 깨달음과 열반 산출에 역행하기 때문에 그르다. 부상당한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그의 회복이 그의 깨달음과 열반을 산출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옳은 일이다. 사회의 부를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들의 깨달음과 열반을 산출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에 옳다. 그리고 무수히 다른 많은 예들을 더 들 수 있겠다.
나는 ‘깨달음과 열반 산출성의 원리’를 모든 불자의 행위의 기준으로 제안하면서 불교에서는 모든 사건과 행위가 모두의 깨달음과 열반의 산출에 얼마나 기여하느냐에 따라 평가되고 그 의미와 가치가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어떤 불자라도, 그가 불자로서 남아 있는 한, 모든 유정물이 그들의 고통을 제거하려고 애쓰며 또 그들이 깨달음과 열반을 얻음으로써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고 받아들일 것이다. 불자들은 모든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어느 누구에게도 실제로 깨달음과 열반이 궁극적 목표이며, 또 그 누구의 궁극적 목표로서의 깨달음과 열반도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불자들이라면 깨달음과 열반 산출성의 원리가 모든 유정물에게 보편적으로 그리고 차별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에게는 모든 유정물들의 깨달음과 열반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행위하는 것이 언제나 좋고 옳다.
깨달음과 열반 산출성의 원리를 살펴본 우리는 이제 샨티데와의 인용문에 대해 좀 더 제대로 해석할 수 있겠다. 샨티데와는 “그것들이 단지 고통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은 막아져야 한다… 만약 고통이 왜 막아져야한다고 묻는다면, 아무도 예외 없이 그것이 막아져야 된다고 동의할 것이다”라고 했다. 왜 고통이 막아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달리 더 나은 답변은 없고 고통은 그냥 막아져야 한다고 대답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더 낳은 코멘트를 달아 보자: 고통은 그것이 깨달음과 열반 산출에 역행하기 때문에 예방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것이 불교적으로 더 합당하고 의미 있는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샨티데와는 또 “만약 고통이 막아져야 한다면 모든 고통이 막아져야 한다; 고통이 막아지지 않아도 된다면, 자기 자신의 경우도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같다”고 한다. 우리는 이 요점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깨달음과 열반 산출성의 원리는 모든 유정물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어서, 유정물들의 깨달음과 열반에로의 여정을 방해하는 고통이 제거되도록 하는 것이 언제나 좋고 옳다. 불자들은 그들이 불자인 한 깨달음과 열반 산출성의 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깨달음과 열반 산출성의 원리가 모든 유정물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불자들은 자신들뿐 아니라 다른 모든 고통 받는 중생들의 깨달음과 열반에 기여하기 위해 모든 고통의 제거를 목표로 받아들여야 한다.
불교는 깨달음과 열반의 가르침의 체계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불자들이 모든 사건과 행위를 깨달음과 열반 산출성의 원리 아래 두고 평가함이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열반에 든 깨달은 이들이 왜 자비행을 실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불자는 연기의 진리와 모든 유정물이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불자는 깨달음과 열반 산출성의 원리와 그것이 보편적으로 적용됨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모든 불자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깨달음을 산출하는데 기여하는 일을 함이 좋고 옳다고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모든 불자는 자비행을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열반에 들어있는 깨달은 이들도 불자들이다.
그러므로 열반에 들어있는 깨달은 이들도 자비행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깨달아서 열반에 들어있는 이들이 왜 자비행을 실천해야 하는가에 답하려고 했고, 그 답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모든 불자가 자비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함께 보았다. 불자라면 깨어있는 모든 순간순간 그의 행위의 기준이 깨달음과 열반 산출성의 원리에 타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깨달음과 열반 산출성의 원리가 받아들여지는 불자들의 세계에서는 깨달은 이들을 포함한 모든 불자들이 끊임없이 자비행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소승은 존재하지 않는다
깨달음과 열반 산출성 원리의 보편적 적용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교학파가 있을까를 검토함으로써 본고에서의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필자는 모든 불교학파가 이 깨달음과 열반 산출성의 원리가 모든 유정물에게 차별 없이 적용됨에 기꺼이 동의한다고 믿는다. 어떤 이의 고통도 그의 깨달음에 역(逆)산출적이다. 그래서 필자는 모든 유정물이 그들의 고뇌를 제거할 자격이 있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불교학파가 있다고 상상할 수 없다. 어느 불교학파라도 유정물의 깨달음을 저해하는 고뇌를 제거할 자비행을 지지하고 실행하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도출해야 할 논리적 결론은 모든 불교학파는 자비행을 지원하며, 다른 유정물의 고뇌에 무관심한 이기적인 불교학파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불교에는 소승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 적도 없다고 믿는다. 깨달음은 자비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불자들을 자비의 길로 자연스럽게 이끈다는 대승의 견해가 함축하는 의미심장한 논리적 결론이 있다: 만약 자비를 실천에 옮기지 않는 불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깨달은 자들이 아니다 – 비록 그들이 깨달았다고 주장하더라도. 실은 깨달았기는커녕 제대로 된 불자조차 아니다.
▣ 필자 : 홍사성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불교를 생각한다 > 한국불교를 생각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출재가의 아름다운 만남, 부처님법대로 봉암사에서 제2의 결사를 (0) | 2017.06.05 |
---|---|
[스크랩] “불자인 것이 창피하다” 자승원장은 퇴진하시라 (0) | 2017.06.05 |
[스크랩] 불교인들의 분노가 타올랐다, 승가공동체회복을 위한 불교인선언 (0) | 2017.06.05 |
[스크랩] 직선공약 이행 않는 자승원장 퇴진, 재가불자들의 ‘자승OUT’ 삼보일배 (0) | 2017.06.03 |
[스크랩] 출가해서는 안될 사람 (0) | 2017.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