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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분 고따마 붓다/고따마 붓다의 생애

6. 사문들의 도시 라자가하

moksha 2017. 5. 13. 21:45

6. 사문1들의 도시 라자가하

 

라자가하는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사상가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은 웨다의 전통과 사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사상을 주장하였다. 직접적인 체험과 자유로운 사고로 무장한 그들을 사람들은 사문이라 불렀다. 그러나 바라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비판하는 그들은'발뒤꿈치에서 태어났다'며 천시하였고, 그들을 후원하는 사람들을 바라따까(Bhārataka) 즉 짐꾼이라며 경멸하였다.

수행자들을 환대하던 마가다국의 젊은 빔비사라왕 덕분에 라자가하는 사문들의 도시가 되었고, 그들 가운데서도 뿌라나깟사빠(Purāakassapa)ㆍ빠꾸다깟짜나(Pakudhakaccāna)ㆍ아지따께사깜발라(Ajitakesakambala)ㆍ막칼리고살라(Makkhaligosāla)ㆍ산자야벨라티뿟따(Sañjayabelaṭṭhiputta)ㆍ니간타나따뿟따(Niganthanātaputta)ㆍ웃다까라마뿟따(Uddakarāmaputta) 등은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과 주목을 받고 있었다.

 

뿌라나깟사빠(Purāakassapa)는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사문이었다. 그를 혐오하고 비판한 이들은 나체 수행자였던 그를 '도망치다가 주인에게 붙잡혀 옷을 빼앗기고는 평생 발가벗고 사는 자' 라며 비하하였다. 그는 웨다에 근거한 제사의 공덕과 도덕, 바라문들의 권위를 부정하였다. 도덕이란 특정 사회의 일시적 관념일 뿐 영원한 규칙도 진리도 될 수 없다며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살생이나 사음ㆍ음주ㆍ강도 등의 행위도 악업이 아니며, 또 악업에 의한 과보도 존재하지 않으며, 제사ㆍ보시ㆍ극기ㆍ절제 등도 선을 쌓는 것이 아니며 선의 과보도 없.”는 극단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빠꾸다깟짜나(Pakudhakaccāna)는 변화하지 않는 일곱 가지 즉 흙ㆍ물ㆍ불ㆍ바람ㆍ괴로움 ㆍ즐거움ㆍ영혼으로 세계는 구성되어 있으며, 이 외엔 인격적 주체는 달리 없다고 주장하였다. 즉 이 일곱 가지 요소는 파괴되지도 않고 상처받지도 않는 것이므로 예리한 칼로 사람의 머리를 베어도 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며, 단지 칼이 일곱가지 요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행위와 인격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그는 도덕과 윤리를 불필요한 덕목으로 보았다.

아지따께사깜발라(Ajitakesakambala)는 흙ㆍ물ㆍ불ㆍ바람의 네 가지 요소만 실재로 인정하였다. 몸과 감각기관과 감각의 대상 등이 모두 이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 것이며, 의식 역시 누룩에서 술이 생기듯 물질에서 생성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현명한 자건 어리석은 자건 죽으면 몸과 감각 기관이 파괴되어 사대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단멸론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현세에서의 선악은 어떤 과보도 없고 수행이라는 것 역시 무의미하며, 오직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도 부르짖었다.

 

막칼리고살라(Makkhaligosāla)는 한때 니간타나따붓따와 함께 수행한 적이 있었고, '단식과 고행으로 완벽한 자기 억제를 얻었다고 신들의 칭찬을 받았다'는 명성을 누린 사상가였다. 그 역시 나체로 생활하였으며, 마가다와 꼬살라 등지에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이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고통과 즐거움은 주어진 운명과 그들이 속한 종, 그리고 그들의 천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따라소 정해진 기간 동안 이미 결정된 고통과 즐거움을 감내해야만 하며, 인위적인 노력이나 행위는 여기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해탈이란 그 정해진 기간이 끝나는 것을 말하므로 어리석은 자건 현명한 자건 던져진 실타래처럼 실이 다 풀릴때까지 840만 대겁을 윤회해야 고통이 소멸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의지적 노력을 부정한 운명론자였다. 막칼리고살라를 따르는 이들을 아지위까(Ājīvika)라 불렀다.

 

산자야벨라띠뿟따(Sañjayabelaṭṭhiputta)는“저 세상이 있는가?” 하고 물으면“만약 내가 저 세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남과 다르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나는 다른 세상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미끈거리는 뱀장어가 이리저리 빠져나가듯 갈피를 못 잡게 하는 사람이라며 아마라윅케삐까(Amarāvikkhepika)라 불렀다.

 

니간타나따뿟따(Niganthanātaputta)는 나따(Nāta)족 출신의 니간타(Nigantha) 교도인 와르다마나(Vardhamāna)를 지칭한다. 니간타는‘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니간타는 몸과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으로 고행하던 사람들로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 무렵 지나의 전통을 잇는 새로운 지나가 등장하게 되었다. 상업 도시로 번창한 웨살리 북부에서 태어난 왕족 출신 와르다마나(Vardhamāna)가 30세 때 니간타에 출가하여 고행으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는 위대한 영웅 즉 마하위라(Mahāvina)로 칭송되며 웨살리와 라자가하에서 존경받고 있었다. 그는 웨다의 권위를 부정하였으며, 바라문들의 제사 의식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짐승을 죽이는 것은 도리러 죄가 된다며 배척하였다. 그는 살생ㆍ도둑질ㆍ음행ㆍ거짓말을 금하는 윤리강령을 제정하고 철저한 무소유를 생활방식으로 채택하였다. 또한 현실을 고통이 가득 찬 곳으로 보고 이런 고통이 반복되는 윤회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하였으며, 또 그 길도 제시하였다. 그는 모든 생명체들이 무한한 지혜와 힘을 가지고 있고 본래 안락한 순수 영혼, 즉 지와(Jīva)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업ㆍ어업ㆍ의업의 속박에 갇혀 자유롭지 못하므로 고통스러운 삶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지와가 업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도덕적 행위를 하고 감각기관의 활동을 제어함으로써 새로운 유입을 차단해야 하고, 고행(苦行)을 통해 내재된 업을 정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웃다까라마뿟따 역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으며 칠백 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보살은 새로운 스승을 찾아 라자가하의 수많은 수행자들을 편력하다가 드디어 그를 찾아갔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나는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수행자여, 나는 실로 환히 아는 자입니다. 나는 실로 일체를 이긴 자입니다. 굽은 뿌리를 뽑아버린 자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나는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을 가르칩니다.”

“당신이 가르치는 해탈이란 어떤 것입니까?”

“해탈이란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말합니다. 그것이 곧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입니다.”

보살은 생각하였다.

‘웃다까라마뿟따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라면 내게도 있다. 그가 가진 노력과 집중과 선정의 힙과 지혜라면 나 역시 갖추고 있다. 그가 스스로 알고 터득산 것이라면 나 역시 알고 터득할 수 있다. 좋다, 노력하자. 그가 성취한 최고의 진리를 나 역시 실현하리라.’

열심히 수행한 보살은 오래지 않아 비상비비상처정을 경험하고 그 전모를 파악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웃다까라마뿟따의 가르침은 고뇌로부터의 완전한 해탈도 해탈에 이르는 길도 아니었다. 웃다까라마뿟따는 분명히 알지 못하면서‘나는 분명히 아는 자다’라고 하고, 일체를 극복하지 못했으면서‘나는 일체를 아는 자다’라고 하고, 굽이진 뿌리들을 뽑아버리지 못했으면서‘나는 굽이진 뿌리를 다 뽑아버렸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보살은 웃다까라마뿟따에게 다시 물었다.

“이것보다 더 높은 경지와 지혜는 없습니까?”

“이것보다 더 높은 경지와 지혜는 없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깨달음이고 해탈입니다.”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경지에‘나’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나’라는 것이 없습니까? 만약 내가 없다고 말한다면‘생각이 있는 것도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만약‘내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여전히 분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분별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목석과 다름없게 됩니다. 만약 분별함이 있다면 아직도 번뇌에 물들고 매달림이 있다는 것이니, 해탈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웃다까라마뿟따는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터득한 최고의 선정과 지혜는 이것뿐입니다. 그대의 수행력과 지혜는 놀랍습니다. 벗이여, 우리 둘이 이 교단을 함께 이끕시다.”

보살은 만족할 수 없었다.

“당신은 거친 번뇌는 끊었지만 아직 미세한 번뇌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미세한 번뇌는 보이지 않게 다시 자라나 비참한 삶으로 이끌 것입니다. 당신은 영원한 안락의 땅으로 건너간 것이 아닙니다.‘나’라는 관념을 남김없이 모두 없애야만 진정한 해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리의 반을 비우며 앉기를 권하는 웃다까라마뿟따의 호의를 뿌리치고 보살은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라자가하에 더 이상 의지할 만한 스승은 없었다.


  1. 사문(沙門) : 사마나[Samaṇa / Sk. 슈라마나(Śramaṇa)]의 음역이다. 이는 ‘구도자’, ‘도인(道人)’ 등을 의미한다. 중국에서 사문(沙門)이라고 음역했고, 영어로는 recluse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비구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 원래 사문은 고대 인도에서 반(反)베다적이고 반(反)브라만적인 출가 수행자를 가리켰다. 그들은 종래의 전통적인 정신원리인 베다 성전이나 사제인 바라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비전통적인 사상가였으며, 이런 의미에서 자유사상가라고도 말할 수 있다. 불교의 개조인 고타마 부처님도 이런 사문 중의 한 분이셨고, 동시대 외도들로부터 사문 고따마라고 불렸다. 불교가 흥기할 무렵인 BC 6~5세기의 인도 사회는 인도에 침입한 아리안족의 정착이 마무리되면서 농업 생산의 증대와 더불어 상공업이 발달하여 도시의 발전을 촉진하고, 이 도시들을 중심으로 하는 많은 국가들이 형성되었다. 이 결과 브라만 계급을 대신하여 왕족 계급이 발흥하고, 상공업자의 경제적 실권이 증대하게 된다. 결국 기존의 계급제도와 종교의 권위가 실추된 시대적 상황에서 등장한 신흥종교가 또는 사상가가 사문이다. 사상적으로 보면 이들은 베다 종교의 제식(祭式) 만능주의에 반대하고, 극단적인 유물론자들도 있지만 대체로 업(業)과 윤회(輪廻)의 사상에 입각하여 고(苦)의 세계인 윤회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불전(佛典)에서 전하는 육사외도(六師外道)가 당시의 대표적인 사문들이다. 불교에서 비구를 사문이라 칭하는 이유는 사문들의 특징이 출가주의를 지향한 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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