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행복하여라! sukho Buddhānaṃ uppādo!

▣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다나상가(Dānasaṅgha)담마 이야기

(3)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자의 의지처

moksha 2017. 4. 4. 16:58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자의 의지처

부처님의 가르침의 특징을 나타내는 정형구를 경전에서 보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진실로 나를 생각하면 공포나 전율이나 소름끼치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만약에 나를 생각할 수 없다면, 그 때는‘세존께서 잘 설하신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가르침을 생각하라.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진실로 가르침을 생각하면, 공포나 전율이나 소름끼치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다작가 경(Dhajaggasuttaṃ, 깃발의 경, S11:3)

 

위의 내용은‘깃발의 경’에 나오는 삼보예찬 공덕의 내용 중에서 담마(Dhamma)공덕문에 해당한다. 이는 예불문이자 보호주(保護呪)이며 명상의 주제이기도 하다. 뿐만아니라 부처님 가르침(Dhamma)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산딧티코sandiṭṭhika)이란 불교를 믿으면 이익이 되고 가르침을 따르면 지금여기서 바로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아깔리꼬akāliko)이란 사실 시간이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적 시간은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적 의미에서 시간은 존재 하지 않는다. 시간의 초월이란 시간을 뛰어넘는다는 의미로써 연기의 특징인 무시간성을 말한다.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에히빳시꼬ehipassiko)이란 진리에 대한 자신감으로 모든 사람을 초대할 만하고 가르침에 비밀스런 그 어떤 것도 없는 개방성을 말한다. 어떤 특정인에게만 전수되는 비밀스런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래에게 감추어진 사권이 없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오빠나이꼬opanayiko)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의 목표를 말한다. 최상의 목표란 바로 열반을 말한다. 앙굿따라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 나오는‘열반 경’의 내용을 보면 가르침의 목표가 뚜렷해진다.

 

[세존]“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남김없이 탐욕이 부수어진 것을 경험하고, 남김없이 성냄이 부수어진 것을 경험하고, 남김없이 어리석음이 부수어진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바라문이여, 이와 같은 열반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열반 경(Nibbāna-sutta, A3:55)

 

[세존]“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없다면,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윔이 알려질 수 없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윔이 알려진다.”

[열반의 경 ③(Tatiyanibbānasutta, Ud.8-3)]

 

열반(涅槃)에 관한 예시한 경전의 내용에서 열반은 탐ㆍ진ㆍ치가 소멸한 상태를 말한다. 청정한 삶을 살아 탐ㆍ진ㆍ치가 소멸 되었을 때 열반이 실현되는데, 이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의 최상의 목표이자 궁극의 목표이다.

열반이란 탐ㆍ진ㆍ치의 소멸(消滅)로 표현되어 불꽃을 끄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해서 열반이 단지 이 불꽃을 끄는 것만이라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수단은 목적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불꽃을 끄는 것은 열반을 얻는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열반은 단순히 괴로움을 멈추게 하거나 갈애가 사라지게 하는 것만이 아님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멸(斷滅)이라해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열반은 절대적인 상태이고 조건지워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거기에서는 단멸될 것이라고는 없다. 불교는 영구불변하는 영혼, 즉 아트만(Ātman)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니 열반에서 단멸 운운은 어불성설이다.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 즉, 열반을 아무리 묘사한다하려해도 정확하게 선명하게 묘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어뿐만 아니라 사유의 세계마저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 즉, 열반은 자아(自我)의 소멸(消滅)이지만 이것이 단순하게 무존재 또는 허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미망(迷妄)의 소멸(消滅)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수승함에 대하여 경전에서는 또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 세상과 내세의 그 어떤 재물이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 우리들의 여래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Stn224)

라따나 경(Ratanasutta, 보배경, Sn2.1)

 

이 말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보배중의 보배이고, 그 어느 가르침보다 가장 수승하여 비교할만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스라니 보전되어 경전으로 전하고 있다. 그 경전에서 부처님은 자신이 간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계시며 제자들이 입증해 보였다. 그런 가르침이 초기경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한 가르침은 역사상 그 누구에 의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거나 거부되지 않았다. 참다운 진리의 모습이다. 진리란 특별한 조건을 필요로 하거나 특정한 존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에게 무차별적이고 무시간적이며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이러한 진리를 쌍윳따니까야(Saṁyutta-Nikāya, 상응부)의 첫 번째 경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하면 열반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하늘사람] “스승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거센 물결을 건너셨습니까?”

[세존]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물결을 건넜다.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 물결을 건넜던 것이다.”

오가따라나 경(Oghataraṇasutta, 거센 흐름을 건넘의 경, S1:1)

 

“아난다 존자님, 부처님이‘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이 사람이 그대들의 의지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의지해라.’고 지명하신 제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의지처로 지명한 제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고빠까 목갈라나의 경(Gopakamoggallānasutta, M108)

 

마가다국 대신인 브라만 왓사까라가 아난다존자에게 의지처로 지명한 제자가 있는지 아난다 존자에게 물어보자, 아난다 존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한다. 온전히 깨달으신 부처님의 자질을 가진 제자는 단 한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그러나 아난다 존자님, 의지처가 없다면 무엇이 화합의 이유입니까?”

브라흐민이여, 우리에게 의지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지처가 있습니다. 가르침이 우리의 의지처입니다.” 고빠까 목갈라나의 경(Gopakamoggallānasutta, M108)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담마)이 의지처라고 말하였다.

누구에게나 경전은 볼 때마다 구절구절이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감동의 물결을 일으키고, 뇌리에 강한 충격을 남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자애(慈愛)와 연민(憐愍)을 바탕으로 합리(合理)와 이성(理性) 그리고 도덕(道德)과 윤리(倫理)에 기반한 호소력 때문일 것이다.

 

불교는 맹목적으로 믿고 매달리는 신앙인 구원의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와서 믿으라’고 말하지 않는다.‘와서 보라(에히빠씨까ehipassika)’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철저히 의심하고 검증하여 자신의 삶에 유익하고 더 없는 행복을 가져오고 유가안온을 가져오는 것이란 확신이 들 때 믿으라고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납득되었기 때문에 믿는 신해(信解)의 종교이며, 확신하기 때문에 행동에 옮기는 신행(信行)의 종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