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행복하여라! sukho Buddhānaṃ uppādo!

▣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다나상가(Dānasaṅgha)담마 이야기

Ⅰ. 불교(佛敎)의 이해와 불자(佛子)의 삶 - (1) 거룩한 부처님

moksha 2017. 2. 27. 23:14

불교(佛敎)의 이해와 불자(佛子)의 삶


거룩한 부처님

불자로서 귀의해야 할 대상은 바로 부처님이다. 그러한 부처님에 대하여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불자로서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그분에 대하여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불자로서 믿음의 자세를 분명히 하고 명확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하여 바른 신행의 바탕을 마련하고 올바른 신심을 확립하여 바른 불자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불교를 종교(宗敎)가 아닌 신학(神學)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종교(宗敎, 싯단따데싸나Siddhanta-Desana)란‘궁극적인 가르침’을 의미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신앙 중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은 고도의 심오한‘철학적 가르침’과 시계생천(施戒生天)으로 대표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은 인류의 역사에 부처님의 가르침 이외엔 찾아 볼 수 없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인류가 가진 신앙 중에서 종교(宗敎)는 오직 불교(佛敎)가 유일하다. 나머지의 신앙은 모두가 신학(神學)에 불과하다.

 

부처님의 보리수 아래에서의 정각 후에 부처님은 범천(梵天)1 사함빠띠(Sahampatī)의 세 번에 걸친 권청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계신다.

 

[세존]“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하느님이여,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브리흐마야짜나 경(Brahmāyācanasutta,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 S6:1)

 

경에서 불사(不死)의 문이란 열반(涅槃)을 말하는 것으로 열반의 가르침을 펴니 귀 있어 듣는 자들은 모두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자신의 낡은 신앙을 버리라고 위대한 천명을 하고 있다.

숫타니파타 쎌라의 경(Selasutta)에 나타나고 있는 부처님은 누구인가를 대한 내용을 보면,

 

[아빠나의 군중] “싸끼야 족의 아들로서 싸끼야 족에서 출가한 수행자 고따마가 천 이백 오십 명의 수행승들과 함께 앙굿따라빠에서 유행하시다가 아빠나라고 하는 앙굿따라빠의 한 마을에 도착하셨다. 그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길들이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의 존귀한 님이다.2’라고 명성을 드날리고 있다. 그는 이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 관해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가르친다. 그는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고,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가르친다. 이와 같은 거룩한 분을 만나 뵙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Stn554][세존]“셀라여, 왕이지만 나는 위없는 가르침의 왕으로 진리의 바퀴를 굴립니다.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

[Stn558][세존]“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

셀라의 경(Sela sutta, Sn3:7)

 

부처님은 진리의 왕으로 거꾸로 돌릴 수 없는 진리의 바퀴를 굴리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오취온(五聚蘊)]’에 대해 확연히 아는 것이고, 닦아야 할 것은‘멈춤과 관찰’을 말하며, 버려야 할 것은‘무명과 존재의 갈애’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다 버렸으므로 자신 스스로‘깨달은 자’즉 붓다[Buddha, 불타(佛陀)]라 하였다.


구 분

내 용

사성제

목표

알아야 할 것

(pariññeyyā)

오취온

(pañcupādānakkhandhā)

고성제

(苦聖諦)

교학(pariyatti)

: 빠알리 삼장(ti-piṭaka)

버려야 할 것

(pahātabbā)

무명과 갈애

(Avijjā & taṇhā)

집성제

(集聖諦)

통찰(paṭivedha)

: 출세간도를 통찰

실현해야 할 것

(sacchikātabbā)

명지와 열반

(Vijjā & Nibbāna)

멸성제

(滅聖諦)

출세간도

열반(nibbāna) : 성스러운 과를 증득

닦아야 할 것

(bhāvetabbā)

멈춤과 통찰

(Samatha & Vipassana)

도성제

(道聖諦)

수행(paṭipatti)

(삼학ㆍ팔정도)


실현해야 할 것 : 커다란 여섯 감역에 대한 경(Mahāsaḷāyatanika suttaṃ, M149)과 손님의 경(Āgantukasutta, S47:83)에서는 ‘실현해야 할 것’ 하나가 더 나온다.

 

      

[Dhp7-96]

santaṃ tassa manaṃ hoti santā vācā ca kamma ca

   산땅   따싸    마낭   호띠  산따   와짜 짜    깜마   짜

sammadaññāvimuttassa upasantassa tādino.

       삼마단냐위뭇따싸      우빠산따싸   따디노

 

▣ 완전한 지식으로 자유로워지고 평온해진, 그러한 마음은 고요하고, 말과 행동 또한 고요하다.

올바른 앎으로 해탈하여 적멸을 얻으면 그의 정신은 적정에 들고 언어와 행위도 지멸한다.


성스러운 가르침

부처님이 설하신 고통의 발생(發生)과 고통의 소멸(消滅)의 길 그리고 도덕적, 철학적인 체계를 법(法, Dhamma)이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 법(法, Dhamma)의 체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러한 가르침에 의한 종교를 불교(佛敎)라고 한다.

불교는 부처님의 제자들과 불자들을 이끌어 청정한 삶을 살게 하고 또한 그들의 생각 자체를 청정하게 만들어 마침내 최상의 지혜를 얻게 하고 모든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는 길이다.

불교에선 맹목적 믿음은 설자리가 없고 오직 지혜를 바탕으로 한 확신이 있을 뿐이다. 불자는 부처님을 유일무이의 지도자와 스승으로 받들어 그에게 귀의하지만 맹목적으로 복종하지는 않는다.

불교에는 강요하는 신앙과 숭배의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불자는 경전에만 얽매이는 사람도 아니요, 또 초자연적 신에 대해 충성을 바칠 의무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부처와 같은 존재에 예속된 노예도 아니다.

 

불자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닌 채로, 자유로운 의지를 활용하고 지혜를 계발하여 끝내는 부처의 경지에까지도 이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불자들은 물론 부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받들지만 부처님은 한 번도 자신이 초자연적 권능자라는 식의 주장을 하신 적이 없다. 또한 팔만사천의 경전 어디에도 도그마3는 볼 수 없다. 불교에서는‘지금 여기에서[diṭṭhadhamma, 현법(現法)]4’의 직접적 깨달음만이 진리를 점검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그 깨달음의 관건은 합리성에 바탕한 바른 이해[정견(正見)]이다.

 

불자들이 불단에 꽃이나 다른 공양물을 올리는 등 부처님을 공경하는 의례와 의식을 행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살아 계신 동안 사람들로부터 높이 추앙을 받으셨으나 한 번도 자신을 신격화한 적은 없었다. 그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다만 놀랄 만큼 비범한 인간이었다. 불교의 출발은 인간이지만 그 밖의 모든 종교는 신(神)으로부터 출발한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볼 때 “부처님만큼 신이 아니면서도 또한 그렇게 신보다 더 거룩했던 스승은 없다.”고 아니 할 수 없다. 부처님은 가르침의 실천을 무엇보다 강조하셨다.

 

[세존]“믿음으로 베풀면 여러 가지로 칭찬받지만 보시보다 진리의 말씀을 실천함이 더 훌륭하네. 예전에도 그 이전에도 그러한 참 사람, 지혜로운 자는 모두 열반에 들었다네.”

사두 경(Sādhusuttaṃ, 좋은 것 경, S1:33)


이러한 가르침에 복종이라든지 맹종 혹은 창조신(創造神)이나 유일신(唯一神)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보이지 않는 전지전능(全知全能)의 신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올바른 견해와 도덕적 삶 그리고 자유의지에 의한 자기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기 구원을 얻을 것을 강조하신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굳이 믿어야하는 교리도 없고, 이치를 떠나 믿음으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교의도 없으며, 신자가 되기 위해 치뤄야 할 허례적 의식이나 예식도 없고, 속죄를 위한 무의미한 희생이나 고해의식도 없다.

 

종교가 인간을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행복으로의 길로 인도하는 구원체계라고 한다면 불교는 “‘나’를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는 자는 ‘나’ 스스로일 뿐이다.’는 의미를 되새겨 볼 때 종교중의 종교인 위대한 종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자의 의지처

부처님의 가르침의 특징을 나타내는 정형구를 경전에서 보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진실로 나를 생각하면 공포나 전율이나 소름끼치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만약에 나를 생각할 수 없다면, 그 때는‘세존께서 잘 설하신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가르침을 생각하라.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진실로 가르침을 생각하면, 공포나 전율이나 소름끼치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다작가 경(Dhajaggasuttaṃ, 깃발의 경, S11:3)

 

위의 내용은‘깃발의 경’에 나오는 삼보예찬 공덕의 내용 중에서 담마(Dhamma)공덕문에 해당한다. 이는 예불문이자 보호주(保護呪)5이며 명상의 주제이기도 하다. 뿐만아니라 부처님 가르침(Dhamma)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산딧티코sandiṭṭhika)이란 불교를 믿으면 이익이 되고 가르침을 따르면 지금여기서 바로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아깔리꼬akāliko)이란 사실 시간이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적 시간은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적 의미에서 시간은 존재 하지 않는다. 시간의 초월이란 시간을 뛰어넘는다는 의미로써 연기의 특징인 무시간성을 말한다.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에히빳시꼬ehipassiko)이란 진리에 대한 자신감으로 모든 사람을 초대할 만하고 가르침에 비밀스런 그 어떤 것도 없는 개방성을 말한다. 어떤 특정인에게만 전수되는 비밀스런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래에게 감추어진 사권이 없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오빠나이꼬opanayiko)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의 목표를 말한다. 최상의 목표란 바로 열반을 말한다. 앙굿따라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 나오는‘열반 경’의 내용을 보면 가르침의 목표가 뚜렷해진다.

 

[세존]“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남김없이 탐욕이 부수어진 것을 경험하고, 남김없이 성냄이 부수어진 것을 경험하고, 남김없이 어리석음이 부수어진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바라문이여, 이와 같은 열반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열반 경(Nibbāna-sutta, A3:55)

 

[세존]“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없다면,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윔이 알려질 수 없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윔이 알려진다.”

[열반의 경 ③(Tatiyanibbānasutta, Ud.8-3)]

 

열반(涅槃)에 관한 예시한 경전의 내용에서 열반은 탐ㆍ진ㆍ치가 소멸한 상태를 말한다. 청정한 삶을 살아 탐ㆍ진ㆍ치가 소멸 되었을 때 열반이 실현되는데, 이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의 최상의 목표이자 궁극의 목표이다.

열반이란 탐ㆍ진ㆍ치의 소멸(消滅)로 표현되어 불꽃을 끄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해서 열반이 단지 이 불꽃을 끄는 것만이라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수단은 목적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불꽃을 끄는 것은 열반을 얻는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열반은 단순히 괴로움을 멈추게 하거나 갈애가 사라지게 하는 것만이 아님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멸(斷滅)이라해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열반은 절대적인 상태이고 조건지워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거기에서는 단멸될 것이라고는 없다. 불교는 영구불변하는 영혼, 즉 아트만(Ātman)6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니 열반에서 단멸 운운은 어불성설이다.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 즉, 열반을 아무리 묘사한다하려해도 정확하게 선명하게 묘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어뿐만 아니라 사유의 세계마저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 즉, 열반은 자아(自我)의 소멸(消滅)이지만 이것이 단순하게 무존재 또는 허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미망(迷妄)의 소멸(消滅)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수승함에 대하여 경전에서는 또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 세상과 내세의 그 어떤 재물이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 우리들의 여래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Stn224)

라따나 경(Ratanasutta, 보배경, Sn2.1)

 

이 말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보배중의 보배이고, 그 어느 가르침보다 가장 수승하여 비교할만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스라니 보전되어 경전으로 전하고 있다. 그 경전에서 부처님은 자신이 간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계시며 제자들이 입증해 보였다. 그런 가르침이 초기경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한 가르침은 역사상 그 누구에 의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거나 거부되지 않았다. 참다운 진리의 모습이다. 진리란 특별한 조건을 필요로 하거나 특정한 존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에게 무차별적이고 무시간적이며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이러한 진리를 쌍윳따니까야(Saṁyutta-Nikāya, 상응부)의 첫 번째 경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하면 열반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하늘사람] “스승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거센 물결을 건너셨습니까?”

[세존]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물결을 건넜다.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 물결을 건넜던 것이다.”

오가따라나 경(Oghataraṇasutta, 거센 흐름을 건넘의 경, S1:1)

 

“아난다 존자님, 부처님이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이 사람이 그대들의 의지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의지해라.’고 지명하신 제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의지처로 지명한 제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고빠까 목갈라나의 경(Gopakamoggallānasutta, M108)]

 

마가다국 대신인 브라만 왓사까라가 아난다존자에게 의지처로 지명한 제자가 있는지 아난다 존자에게 물어보자, 아난다 존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한다. 온전히 깨달으신 부처님의 자질을 가진 제자는 단 한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그러나 아난다 존자님, 의지처가 없다면 무엇이 화합의 이유입니까?”

브라흐민이여, 우리에게 의지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지처가 있습니다. 가르침이 우리의 의지처입니다.”                              [고빠까 목갈라나의 경(Gopakamoggallānasutta, M108)]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담마)이 의지처라고 말하였다.

누구에게나 경전은 볼 때마다 구절구절이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감동의 물결을 일으키고, 뇌리에 강한 충격을 남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자애(慈愛)와 연민(憐愍)을 바탕으로 합리(合理)와 이성(理性) 그리고 도덕(道德)과 윤리(倫理)에 기반한 호소력 때문일 것이다.

 

불교는 맹목적으로 믿고 매달리는 신앙인 구원의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와서 믿으라’고 말하지 않는다.‘와서 보라(에히빠씨까ehipassika)’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철저히 의심하고 검증하여 자신의 삶에 유익하고 더 없는 행복을 가져오고 유가안온을 가져오는 것이란 확신이 들 때 믿으라고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납득되었기 때문에 믿는 신해(信解)의 종교이며, 확신하기 때문에 행동에 옮기는 신행(信行)의 종교이다.

 

행운의 겁에서 불법을 만난 축복

과거칠불 중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부처님이 91겁전에 출현한 위빠시(Vipassī)붓다이다. 이어서 31겁전에 시키(Sikhī)붓다, 역시 31겁전에 웻사부(Vessabhū)붓다가 드문드문 출현하였다. 이후 현겁에 이르러 까꾸산다(Kakusandha)붓다, 꼬나가마나(Koṇāgamana)붓다, 깟사빠(Kassapa)붓다, 고따마(Gotama)붓다 이렇게 네 분의 부처님이 연달아 출현하였다. 현겁에서 네 분의 부처님이 출현하였고 미래불인 마이트레야(Maitreya, 미륵)붓다가 현겁의 다섯 번째의 부처로 출현한다. 매 겁(劫)마다 부처님이 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현겁(現劫)을‘행운의 겁(bhadda-kappa)’이라 한다.


불명

한역

출현시기

인간수명

삼세

 

위빠시(Vipasī)

비바시불

91겁전

8만 세

과거 장엄겁

제998불

시키(Sikhī)

시기불

31겁전

7만 세

과거 장엄겁

제999불

웻사부(Vessabhū)

비사부불

31겁전

6만 세

과거 장엄겁

제1,000불

까꾸산다(Kakusandha)

구류손불

현겁

4만 세

현겁 제1불

꼬나가마나(Koṇāgamana)

구나함모니불

현겁

3만 세

현겁 제2불

깟사빠(Kassapa)

가섭불

현겁

2만 세

현겁 제3불

고따마(Gotama)

석가모니불

현겁

100세

현겁 제4불

미래불

마이트레야(Maitreya)

미륵불

현겁

현겁 제5불

 

디가니까야(Dīgha Nikāya) 비유의 큰 경(Mahāpadāna Sutta, 대전기경(大傳記經), D14)에서 과거의 부처님에 대한 법문에 따르면 과거부처님들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출신은 무엇이고, 성씨와 수명은 얼마이며 심지어 어느 나무에서 깨달았는지, 상수제자와 시자는 누구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밝혀 놓았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의 여정에서, 이 행운의 겁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난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다. 불교의 궁극이 해탈성불이기에 열반의 길을 갈 수 있기에 축복이다. 이 축복의 일기일회(一期一回)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는 분명하다.


시계생천의 가르침

부처님은 처음부터 사성제(四聖諦)7와 같은 심오한 가르침을 말씀하지 않았다.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은 쉬운 가르침부터 시작하여 차츰 심오한 가르침으로 이끌어 가는데 있다. 이를 차제설법(次第說法)이라 한다. 가르침을 듣는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처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는 사람에게는‘보시(관대하게 베풀고)하고 지계(도덕적인 삶)하면 하늘나라(행복한 세상)에 태어난다.’는 시계생천(施戒生天) 등의 가르침을 펼쳤다.

나병환자 쑵빠붓다의 경에 나타나는 시계생천의 설법을 살펴보면,

 

“세존께서는 나병환자 쑵빠붓다가 대중 가운데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보고나서 이와 같이 생각했다.‘이 자가 참으로 세상에서 가르침을 알아챌 수 있다.’

세존께서는 나병환자 쑵빠붓다를 위해서 차제적인 설법을 행했다. 예를 들어,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하늘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가져오는 위험과 타락과 오염, 그것을 여읨의 공덕에 관하여 설명했다.

세존께서는 나병환자 쑵빠붓다가 마음이 준비되고 마음이 유연하고 마음이 장애를 벗어나고 마음이 고양되고 마음이 청정해진 것을 알자, 깨달은 님들이 칭찬하는 법문, 즉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설명했다. 예를 들어 때가 없는 깨끗한 옷이 올바로 물드는 것과 같이, 나병환자 쑵빠붓다에게 그 자리에서 앉은 채, 이와 같이 ‘무릇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되는 법이다.’라는 때 없고 티끌 없는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나병환자 쑵빠붓다의 경(Suppabuddhakuṭṭhisutta, Ud5-3)

 

[세존]“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 공덕을 낳는 토대가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보시로 이루어진 공덕을 낳는 토대, 계행으로 이루어진 공덕을 낳는 토대, 수행으로 이루어진 공덕을 낳는 토대가 있다.

공덕을 낳는 토대의 경(Puññakiriyavatthusutta, A8:36)

 

공덕행의 토대를 보시를 통한 공덕행의 토대와 계를 통한 공덕행의 토대와 수행을 통한 공덕행의 토대로 나눈 뒤 인간에 태어나는 두 가지와 욕계 여섯 가지 천상[육욕천(六欲天)]8에 태어나는 경우를 들고 있다. 육욕천은 보시와 지계를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곳이며 삼매나 통찰지의 수행이 없어도 가능한 곳으로 언급되고 있다.

 

보시(봉사하는 삶)와 지계(건전한 삶)는 불자가 추구해야 할 가치있는 삶의 지표이다. 불교는 이러한 삶을 바탕으로[계(戒)] 정신적인 편안함과 고요함이 생기고[정(定)], 삶의 궁극을 꿰뚫어 보는 통찰지가 완성되는 것이며[혜(慧)], 그래서 궁극적인 행복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니[해탈(解脫)], 이러한 삶이야말로 모든 생명이 필경에 성취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자(佛子)란 누구인가

사찰의 신도들에게 불자의 의미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면 의외로 그 의미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불자를 불교용어사전에서 찾아보면 (1)부처님의 교법(敎法)을 신봉(信奉)하는 이들 (2)일체 중생, 모두 불성(佛性)을 갖추어서 부처가 될 수 있으므로 불자라 함 이라는 설명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교법(敎法)이란 부처님께서 가르친 진리(眞理)란 뜻이다.

그런가하면 포털사이트의 사전에는 불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부처님의 제자(弟子)’,‘부처님 집안의 자식(子息)’이란 뜻을 담고 있다. (2)‘보살(菩薩)’을 달리 이르는 말 (3)계(戒)를 받아 출가한 사람 (4)불교 신자 (5)부처의 아들딸, 곧 모든 중생을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불자의 한자는 불자(佛者)가 아니고 불자(佛子)이다. 아들 자(子)를 쓰고 있다. 이는 불법을 믿는 이는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지혜 목숨(慧命)을 이어가고, 법의 집과 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님이 될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시어, 마침내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1)믿음이 종자가 되고, (2)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3)선정은 태(胎)가 되고, (4)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5)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신다고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았을 때 불자(佛子)란‘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성불의 길을 가는 제자’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올바른 불자가 되기 위해선 믿음의 대상인 부처님에 대하여 확실한 앎을 가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공부하고 익혀서 그 가르침에 따라 실천해야 한다.

반면에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면 불교의 교주인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확실하게 모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배우고 공부하고 익히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불자가 될 수 없다.

 

위대한 종교의 자랑스러운 불자(佛子)

부처님의 가르침에 점철되어 있는 것은 무상ㆍ고ㆍ무아의 가르침이다.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가르침이 불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이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하여 완벽한 가르침을 설하시고 계신다. 그러기에 불교는 위대한 종교이다.

만일 불교가 보시ㆍ지계하여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든가 단지 현세에서 안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굳이 불교를 종교로 가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 가르침은 타종교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긍극적 행복(Parama sukha)을 가져오는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불자(佛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며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것이다.

 

맹구우목(盲龜遇木)의 진실

불자들이 자주 독송하는 천수경에‘무상심심미묘법(無上深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란 구절이 있다. 이는‘위없이 깊고깊은 미묘한 법, 백천만겁이 지나도 만나기 어렵네’라는 의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백천만겁이 지나도 만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법난봉(佛法難奉)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겁(劫)이란 세월만 해도 참으로 가름하기가 쉽지 않다. 겁이란 시간의 길이를 개자겁(芥子劫)ㆍ반석겁(盤石劫)ㆍ증감겁(增減劫) 등으로 비유적으로 말하지만 과학적으로 43억 2천만년이라고 계산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백천만겁이란 세월의 길이는 산술적 계산이 쉽지 않다.

이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이 인신난득(人身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奉)이라 한다.

인신난득이란 ‘사람 몸 받기 어렵다’는 뜻인데, 이를 흔히들 맹구우목의 비유로 얘기하곤 한다. 이는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비유적인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내용을 보면, 숨을 쉬기 위해 백 년마다 한 번씩 물 위로 올라오는 눈 먼 거북이가 바다에 떠다니는 널빤지에 뚫린 구멍에 목을 끼워 넣기 만큼이나 어렵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경전을 보면 그간 들었던 내용과 상이함을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구멍이 하나 뚫린 멍에를 바다에 던져 넣는다. 동풍이 불면 그것은 서쪽으로 떠내려가고, 서풍이 불면 그것은 동쪽으로 떠내려가고, 북풍이 불면 그것은 남쪽으로 떠내려가고, 남풍이 불면 그것은 북쪽으로 떠내려간다. 그런데 그곳에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오른다. 어떤 사람이 큰 바다에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를 던져 넣었는데 그때에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오른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을 수가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언젠가 어느 땐가 오랜 세월이 지나야 할 것입니다.”

“수행승들이여,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 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sutta, 우현경(愚賢經), M129]

 

경에서 부처님은 눈 먼 거북이가 바다에 떠다니는 널빤지에 뚫린 구멍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그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

수승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불자로서 어떻게 받아 지녀야 할지를 불자로서 깊이 숙고하여야 한다. 부처님의 마지막 여정을 담고 있는 대반열반경(大槃涅槃經)에서 부처님은 오로지 자신을 귀의처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그 어떤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계신다. 또한‘왁깔리 경’에서는‘법을 볼 때 여래를 보고, 여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이 구절은 금강경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제26의 게송인‘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를 연상케 한다.

 

[세존]“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자신을 섬으로의 경(Attadīpasutta, S22:43)

 

그 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말한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한 것이다.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다.”

완전한 열반의 경(Mahāparinibbana Sutta, S6:15)

 

“왁깔리여, 그만 하여라. 그대가 썩어문드러질 이 몸을 봐서 무엇 하겠는가?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왁깔리여, 법을 볼 때 나를 보고 나를 볼 때 법을 보기 때문이다.” 왁깔리 경(Vakkali-sutta, S22:87)

 

이러한 경의 내용은 불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본 내용일 것이다. 이러한 경전의 가르침에서 볼 때 불자가 귀의하고 의지해야 할 것은 바로 법(法, Dhamma)이다.

그러나 이 고구정녕(苦口叮嚀)9한 말씀을 항상 가슴깊이 새겨 간직하고 있는 불자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이 불자의 생활지침이고 실천지침이며 수행지침이 되어야 한다. 지금 모든 불자는 부처님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불자의 역할이란

 

(1) 봉사와 보시로 공덕행을 쌓는 불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삶을 사는 불자는 5가지 공덕행을 짓는 삶을 살아야 한다. 5가지 공덕행이란 보시(봉사ㆍ계율), 배움, 논의, 선정, 지혜를 말한다. [깨달음의 경(Sambodhisutta, A9:1)]

경에 의하면 삼귀의와 오계를 지키며 사는 불자의 삶 자체가 큰 보시이다.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보시의 이익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①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하고, ②선하고 참된 사람들이 가까이 하고, ③좋은 명성이 따르고, ④재가자의 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⑤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善處], 천상에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지 보시의 이익이 있다.”

보시의 공덕에 대한 경(Dānānisaṃsa-sutta, A5:35)

 

“수행자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보시가 있는데, 위대한 보시로서 처음부터 알려진 것이고, 세월을 통해 알려진 것이고, 세대를 걸쳐 알려진 것이고, 오래되었고, 논파되지 않은 것으로, 예전에 논파되지 않았고, 지금 논파되지 않는 것이고, 앞으로도 논파되지 않을 것이고, 양식 있는 수행자나 성직자에게 비난받지 않는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공덕의 넘침, 착하고 선한 것의 넘침이 있는데, 그것들은 행복을 가져오고, 천상에 속하고, 지복을 초래하고, 하늘로 인도하는 것으로 원하는 것, 바라는 것, 마음에 드는 것, 유익한 것, 행복한 것으로 이끈다.”

공덕의 넘침에 대한 경(PuññaAbhisandasutta, A8:39)

 

웰라마 바라문이 부처님이 계시는 승단에 공양 올렸다면 그 과보가 훨씬 컸을 것이다.

웰라마 바라문이 네 방향에서 오는 스님들을 위해 사원을 지었다면 그 과보가 훨씬 컸을 것이다.

웰라마 바라문이 기쁜 마음으로 불ㆍ법ㆍ승 삼보에 귀의했다면 그 과보가 훨씬 컸을 것이다.

웰라마 바라문이 살생하지 않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고, 삿된 음행을 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고, 자애심을 개발하고, 손가락을 튕길 순간만큼이라도 무상의 인식을 개발했다면 그 과보가 훨씬 더 컸을 것이다.

웰라마 경(velama sutta, A9:20)

 

‘보시(布施)’로 옮긴 다나(dāna)는 관대함(cāga)이 그 특성이다. 그래서 영어에서 almsgiving, offering 외에도 generosity라고도 번역한다.

보시는 부처님의 차제설법(次第說法)의 첫 번째 주제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세 가지 공덕행의 토대10(puññākiriyavatthu)나 네 가지 섭수하는 토대11(四攝法, saṅgaha-vatthu), 그리고 열 가지 바라밀12(dasa-pāramī)에서도 항상 첫 번째 덕목으로 꼽힌다.

보시는 세 가지 불선의 뿌리(akusala-mūla)의 첫 번째인 탐욕(lobha)을 극복하는데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모든 선행(善行)을 일으키는 시발점이다. 그리고 보시는 가진 것을 편한 마음으로 놓아버리고 그것들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습성을 키운다. 보시의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다.


① 물질적인 보시[재시(財施), āmisadāna]

②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무외시(無畏施), abhayadāna]

③ 법을 베푸는 보시[법시(法施), dhammadāna]

 

보시(布施)는 베푸는 것이다. 아낌없이 남김없이 베풀 때 그 과보가 크다. 보시는 모든 선행을 일으키는 시발점이다. 또한 보시는 자애롭게 머무는 네 가지 길[사범주13(四梵住)] 육바라밀 가운데 첫 번째에 위치한다.

불교의 수행(修行)이란 자신을 비워나가는 과정이다. 우선 물질적인 소유물을 내주는 것으로 첫 걸음을 삼는다. 점차 마음속에 베푸는 성품이 자리 잡고, 그러한 성품이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깊은 이해로 힘을 얻게 될 때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의 미망으로부터 깨어나게 된다. 다음은 감관을 잘 제어함으로써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유혹들을 비워낸다. 그리고 깊이 들어앉은 번뇌들을 명상을 통해 제거하고 그 자리를 고결한 자질들로 채운다. 그러나 부정적인 요소들을 제거해 나가는 이 모든 과정은 보시의 실천에서 시작된다.

 

(2) 십악업을 여의고 십선업을 짓는 불자

불자는 삼보에 귀의하고 법명을 받고 오계를 수지하겠다는 맹서의 의식인 수계식을 통하여 진정한 의미의 불자의 삶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불자의 역할은 오계를 지키는 것을 생명과 같이 여겨야 한다. 경에서 오계를 지키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원리를 갖춘 자는 마치 누가 그를 데려가서 놓는 것처럼 지옥에 떨어진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고, 거짓말을 하고, 방일의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섭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원리를 갖춘 자는 마치 누가 그를 데려가서 놓는 것처럼 지옥에 떨어진다.”

지옥 경(Nirayasutta, A5:145)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의 삶 속에서 사악도에는 떨어지지 말아야 할 곳이다. 천수경의 10악업의 참회를 염송하면서 참회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불자라면 적극적으로 10선행의 삶을 살 것을 다짐해야 한다. 10선행의 삶이란 10악업을 짓는 삶의 반대이다.

 

“쭌다여,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청정함이 있고, 말로 짓는 네 가지 청정함이 있고,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청정함이 있다. 쭌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청정함인가?”

“쭌다여, 여기 어떤 자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버리고,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읜다. 그는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버리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여읜다. 그는 삿된 음행을 버리고 삿된 음행을 멀리 여읜다. 쭌다여, 이것이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청정함이다.”

“쭌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말로 짓는 네 가지 청정함인가?

쭌다여, 여기 어떤 자는 거짓말을 버리고, 거짓말을 멀리 여읜다. 그는 중상모략을 버리고, 중상모략을 멀리 여읜다. 그는 욕설을 버리고, 욕설을 여읜다. 그는 잡담을 버리고, 잡담을 멀리 여읜다. 쭌다여, 이것이 말로 짓는 네 가지 청정함이다.”

“쭌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청정함인가?

쭌다여, 여기 어떤 자는 간탐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악의가 없다. 그는 바른 견해를 가진다.쭌다여,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청정함이다.”

“쭌다여, 이것이 열 가지 유익한 업의 길[십선업도(十善業道)]이다. 이러한 열 가지 유익한 업의 길 자체가 청정하고, 또 청정함을 만들기 때문이다. 쭌다여, 이러한 열 가지 유익한 업의 길을 갖춤으로써 천상이 알려졌으며, 인간이 알려졌으며, 여러 좋은 곳[선취善趣]들이 알려진 것이다.” 쭌다 경(Cundasutta, A10:176)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 (Buddhasāsana cira tiṭṭhatu!)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행복하길! (sabbe sattā bhavantu sukkhitattā!)


  1. 범천(梵天, brahmā)은 초선천(初禪天)의 세 천 즉 범중천(梵衆天, Brahma-pārisajjā)과 범보천(梵輔天, brahmapurohita)과 대범천(大梵天, Mahābrahmā) 중에서 세 번째 천상인 대범천(大梵天, Mahābrahmā)을 뜻하기도 하고 여기서처럼 유력한 범천을 뜻하기도 한다. 범천(梵天)을 하느님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하느님 싸함빠띠는 깟싸빠(Kassapa Baddha) 시대에 싸하까(Sahaka)라는 장로였다. 그는 첫 번째의 선정(禪定)에서 열반(涅槃)에 들어 일 겁(劫, 56억 7천만년)을 사는 하느님(Kappāyugabrahmā)이 되었다. 이러한 유력한 범천(梵天)으로 경에서는 뚜두(Tudu), 나라다(Nārada), 가띠까라(Ghaṭikāra), 바까(Baka), 사냥꾸마라(Sanaṅkumarā), 사함빠띠(Sahampatī) 등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서 사함빠띠 범천이 대범천으로 많이 등장한다. 부처님께 법륜을 굴려주시길 간청한 대범천이 바로 사함빠띠이다. 이중에서 싸함빠띠(Sahaṁpati)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였을 때 법(法)을 설하도록 부처님께 간청을 하는 범천(梵天)이다. [본문으로]
  2. 부처님의 구공덕게(九功德偈)와 여래십호 참조 [본문으로]
  3. 도그마(dogma) : 원래 이 말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말하는 것으로 인간의 구제를 위해 신(神)이 계시한 진리로써 교회가 신적권위를 강조한 신앙신조를 말한다. [본문으로]
  4. 지금 여기(diṭṭhadhamma) : 한역하여 현법(現法)이라 한다. 주석에 따르면 놀랍게도 “여기서 감각기능[근(根)]에 감각대상[경(境)]이 아닌 선(禪)의 경지등도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감각기능의 대상처럼 간주될 수가 있다.”라고 했다. 선정수행에서 체험 역시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현법열반론자들은 자아가 있다고 여겨 이 자아가 다섯 가지 감각을 소유하고 즐긴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자아는 지금 여기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다고 주장한다.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이것이 열반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현법열반론은 자아(自我)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래서 눈, 귀 등 오감으로 지금 여기서 느끼고 지각하고 인식하는 것에 대하여 큰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에서의 ‘지금 여기’의 의미는 존재론적 자아에 기반한 유신견(有身見)으로서의 현법열반론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현세에서의 직접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5. 보호주(保護呪) : 쿠다까니까야(Khuddaka Nikāya, 소부)에 속해 있는 종교적 행사나 공공장소, 사적인 행사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사람에게 축복해 주기 위하여 암송되고, 또 불운과 액운을 막아내기 위하여 암송된다. 불교전통에서는 이런 경전을 수호경[(守護經, 빠릿따(Paritta-호신주)]이라 한다. 이러한 보호주(수호경)는 15경 정도가 전하고 있으며 대부분이 쿠다까니까야에 속해 있다. 대표적인 수호경이 자애경(Metta-sutta), 보배경(Ratana-sutta), 행복경(Maṅgala-sutta), 깃발의 경(Dhajaggasuttaṃ) 등이다. [본문으로]
  6. 힌두교와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자아(自我), 개아(個我), 진아(眞我)로 번역되는 산스끄리뜨어 아트만(ātman)은 빨리어로는 아따(atta)라고 하는데, 만물 속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을 뜻한다. 인도의 철학자들은 이 말을 둘러싸고 많은 학설을 전개하였다. 우파니샤드나 베단타학파에서는 이것을 보편적 실재라고 생각하여 세계원리인 브라만(brahman)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하였으며, 자아인 아트만은 브라만과 하나가 됨으로써 최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소위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다. [본문으로]
  7. 불교의 가르침은 모두 사성제(四聖諦, cattari-ariya-saccani)로 집약되고 종합된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의 상적유대경(象跡喩大經, Mahāhatthipadopama-sutta, M28)에서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는 이렇게 설하였다.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움직이는 모든 생명들의 발자국들은 모두 코끼리 발자국에 포괄되고 코끼리 발자국이야말로 그 크기로서 최상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어떤 유익한 법이던 그것들은 모두 사성제(四聖諦)에 포괄됩니다. 무엇이 넷인가? ①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dukkhaṃ ariyasaccaṃ, 고성제(苦聖諦)], ②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dukkhasamudayo ariyasaccaṃ, 집성제(集聖諦)], ③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멸dukkhanirodho ariyasaccaṃ, 멸성제(滅聖諦)], ④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ṃ, 도성제(道聖諦)]입니다.” 이처럼 사성제는 불교의 초석이라 할 수 있으며 깨달음이란 바로 이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스스로도 “나는 알아야 할 바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노라.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부처, 즉 깨달은 사람이노라.”(Sn.558)라고 말씀하셨다. 사성제는 괴로움(현실)을 철저하게 알고(pariññā) 그 원인인 갈애를 제거하고(padhāna) 괴로움의 소멸(열반)을 실현하고(sacchikiriya) 그러기 위해서 팔정도를 수행하는 것(bhāvan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고성제와 집성제는 12연기의 순관(順觀, anuloma) 즉 유전문(流轉門)과 동의어이고 멸성제와 도성제는 12연기의 역관(逆觀, paṭiloma) 즉 환멸문(還滅門)과 동의어이다. [본문으로]
  8. 31가지 중생계[삼계(三界)] 중에서 ‘여섯 욕계천상’은 깜마와짜라-데와(kāmāvacara-deva)의 역어로, 육욕천(六慾天) 이라고도 한다. 욕계(慾界)에서 가장 높은 세계이며, 말 그대로 감각적 욕망(kāma)을 즐기는 천상세상이다. 보통 보시(dāna)와 지계(sīla)를 닦아서 태어난다. 여기에는 사대왕천(四大王天, Cātumāharajikā), 삼십삼천(三十三天, Tāvatiṁsa), 야마천(夜摩天, Yāmā), 도솔천(兜率天, Tusitā), 화락천(化樂天, Nimmānarati),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Paranimmitavasavatti)의 여섯 하늘이 있다. [본문으로]
  9. 고구정녕(苦口叮嚀) : 고구(苦口) 즉 입이 쓰도록, 입이 닳도록 정성을 다하여 간곡히 당부함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0. 세 가지 공덕행의 토대(puññakiriyavatthu) : 시(施, dāna)ㆍ계(戒, sīla)ㆍ수(修, bhāvanā)]를 말하며 한역으로는 삼복업사(三福業事)라 한다. [본문으로]
  11. 네 가지 섭수하는 토대[사섭법(四攝法), saṅgahavatthu] : 네 가지 남들을 이롭게 하는 일들을 의미하며 ㆍ보시(布施, dāna) : 물질[재시(財施)]이든, 진리의 가르침[법시(法施)]이든 정신적 위안[무외시(無畏施)]이든 조건 없이 베푸는 일. ㆍ애어(愛語, peyyavajja) : 사람들에게 늘 따뜻한 얼굴로 대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는 일. ㆍ이행(利行, atthacariyā) : 신ㆍ구ㆍ의 삼업에 의한 선행으로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일. ㆍ동사(同事, samānattatā) : 나와 남이 일심동체가 되어 협력하는 일, 중생과 함께 하면서 제도하는 일을 말한다. [본문으로]
  12. ‘바라밀’이라 번역한 빠라미(pāramī)는 pāram(~넘어서=깨달음)+√ī(가다)의 합성어이다. 즉 ‘피안(彼岸)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혹은 빠라미타(pāramitta)라고도 하는데 같은 뜻으로 쓰인다. 중국에서 바라밀(波羅密) 혹은 바라밀다(波羅密多)로 음역되었고, 영어권에서는 perfection이라 한다. 성불의 수기(授記)를 받은 보살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윤회(saṃsāra)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닦아야 하는 덕성으로 후기 주석서에서 10가지 바라밀(dasa-pāramiyo)로 정리되었다.「짜리야삐따까(小行藏, Cariya-piṭaka)」에 근거하여 이러한 10가지 바라밀은 다음과 같다.  ①보시(dāna): 관대함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나누어 줌으로써 사물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는 나누어 주는 집착 없음으로 표현되고 근접 원인은 시물(施物)이다. ②지계(sīla): 몸과 말로 하는 선한 행위를 유지하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불선하거나 제멋대로 구는 몸이나 말의 행동을 제어한다. 그것은 언행이 청정해짐으로써 표현된다. 근접원인은 잘못을 두려워함(hiri)과 도덕적 두려움(ottappa)이다. ③출리(nekkhamma): 감각적 쾌락을 버려서 존재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청정하게 하는 것으로 감각적 쾌락과 존재의 위험스러움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감각적 욕망을 멀리하는 것으로 표출되고, 근접원인은 사려 깊은 두려움으로 감각적 쾌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④지혜(paññā): 참된 성질로 사물을 보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감각의 모든 대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혼동하지 않음으로 표출되고, 근접원인은 집중(samādhi)이다. ⑤정진(viriya) : 부지런함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분발하게 하는 것이다. 끈질김으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과 부수적으로 수반하는 모든 괴로움에 대한 사려 깊은 두려움에서 일어나는 긴박감이다. ⑥인욕(khanti): 참을성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싫어함이나 좋아함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극도로 성을 돋우는 상황에 처해서도 참는 것으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⑦진실(sacca): 말로 다른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않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보거나 아는 그대로 발견하는 것이다. 감미롭고 상냥한 언어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모든 중생들에 대한 연민어린 상냥함이다. ⑧결의(adhiṭṭhāna): 바라밀을 완성하기 위해 공덕행을 하고자 하는 결심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자신의 길에 놓인 모든 반대와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기 입장을 확고히 함으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바라밀을 수행할 때 보시와 같은 매우 공덕이 되는 행위이다. ⑨자애(mettā): 다른 중생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다른 중생의 행복을 열렬히 바라는 것이다. 도움을 주려는 태도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다른 이들의 좋은 점만을 보는 것이다. ⑩평온(upekkhā): 칭찬과 비난에 직면해서 평등심을 유지하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감정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 놓는 것이다. 공평함으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자신의 과거행위에 대한 사려 깊은 지혜이다.  [본문으로]
  13. 자애롭게 머무는 네 가지 길 : 한역하여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 한다. 테라와다불교(상좌불교)에서는 네 가지 청정한 삶[brahma-vihāra, 사범주(四梵住)]라고 하는데 네 가지 청정한 삶은 ①자애(慈, mettā), ②연민(悲, karuṇā), ③더불어 기뻐함(喜, muditā), ④평온(捨, upekkhā)을 말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