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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

사자후에 대한 작은 경(Cūḷasīhanādasutta, M11)

moksha 2021. 10. 18. 20:40

사자후에 대한 작은 경(Cūḷasīhanādasutta, M11)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2. 그 때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불렀다. 수행승들은 세존께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3. “수행승들이여, 이곳에만 수행자(사문)가 있고, 두 번째 수행자가 있고, 세 번째 수행자가 있고, 네 번째 수행자가 있다. 그러나 이교도의 교리에는 수행자라고 부르는 자가 없다.(사문들이 텅비어 있다.) 이와 같이 그대들은 사자후를 올바로 부르짖어야 한다.

 

4.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교도의 유행자들이 ‘그런데 벗들이여, 존자들이 이와 같이 ‘이곳에는 수행자가 있고 두 번째 수행자가 있고, 세 번째 수행자가 있고, 네 번째 수행자가 있다. 그러나 이교도의 교리에는 수행자라고 부르는 자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확신은 무엇이고 근거는 무엇인가?’라고 말한다고 하자. 수행승들은 이와 같이 말하는 이교도의 유행자들에게 ‘벗들이여, 우리들은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 아는 님, 보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 설하신 네 가지가 있는데, 이 네 가지를 우리 자신 안에서 잘 관찰하면서 이와 같이‘이곳에는 수행자가 있고, 두 번째 수행자가 있고, 세 번째 수행자가 있고, 네 번째 수행자가 있다. 그러나 이교도의 교리에는 수행자라고 부르는 자가 없다.’라고 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5. 네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벗들이여, 우리에게는 스승에 대한 청정한 믿음이 있다. 우리에게는 가르침에 대한 청정한 믿음이 있다. 우리에게는 계행의 원만한 성취가 있다. 우리에게는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우리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가르침을 같이 받들어 섬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들은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 아는 님, 보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 설하신 네 가지 것인데, 이것들을 우리 자신 안에서 잘 관찰하면서 이와 같이 ‘이곳에는 수행자가 있고, 두 번째 수행자가 있고, 세 번째 수행자가 있고, 네 번째 수행자가 있다. 그러나 이교도의 교리에는 수행자라고 부르는 자가 없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6. 수행승들이여, 그런데 만약 이교도들이 이와 같이 ‘벗들이여,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스승인 스승에 대해 청정한 믿음이 있다.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가르침인 가르침에 대해 청정한 믿음이 있다.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계행인 계행의 성취가 있다. 우리들에게도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우리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가르침을 같이 받들어 섬기는 사람들이 있다. 벗들이여, 그렇다면 여기 존자들과 우리 사이에 어떠한 구별, 어떠한 차별,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7.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말하는 이교도의 유행자들에게는 이와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벗들이여,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양한가?’ 여기에 이교도의 유행자가 올바로 대답한다면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요, 다양하지 않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8. 또한 ‘벗들이여, 그 궁극적인 목표는 탐욕을 부리는 자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탐욕을 떠난 자에게 있는가?’라고 물으면, 여기에 이교도의 유행자가 올바로 대답한다면, ‘벗들이여, 그 궁극적인 목표는 탐욕을 떠난 자를 위하여 있지, 탐욕을 부리는 자에게 있지 않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9. 또한 ‘벗들이여 그 궁극적인 목표는 성내는 자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성냄을 떠난 자에게 있는가?’라고 물으면, 여기에 이교도의 유행자가 올바로 대답한다면, ‘궁극적인 목표는 성냄을 떠난 자에게 있지 성내는 자에게 있지 않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10. 또한 ‘벗들이여, 궁극적인 목표는 어리석은 자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음을 떠난 자에게 있는가?’라고 물으면, 여기에 이교도의 유행자가 올바로 대답한다면, ‘궁극적인 목표는 어리석음을 떠난 자에게 있지 어리석음이 있는 자에게 있지 않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11. 또한 ‘벗들이여, 그 궁극적인 목표는 갈애를 지닌 자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갈애를 떠난 자에게 있는가?’라고 물으면 여기에 이교도의 유행자가 올바로 대답한다면, ‘벗들이여, 그 궁극적인 목표는 갈애를 떠난 자에게 있지 갈애를 지닌 자에게 있지 않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12. 또한 ‘벗들이여, 그 궁극적인 목표는 집착하는 자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집착을 떠난 자에게 있는가?’라고 물으면, 여기에 이교도의 유행자가 올바로 대답한다면, ‘벗들이여, 그 궁극적인 목표는 집착을 떠난 자에게 있지 집착하는 자에게 있지 않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13. 또한 ‘벗들이여, 그 궁극적인 목표는 지혜로운 자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아둔한 자에게 있는가?’라고 물으면, 여기에 이교도의 유행자가 올바로 대답한다면, ‘벗들이여, 그 궁극적인 목표는 지혜로운 자에게 있지 아둔한 자에게 있지 않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14. 또한 ‘벗들이여, 그 궁극적인 목표는 낙관하는 자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비관하는 자에게 있는가?’라고 물으면, 여기에 이교도의 유행자가 올바로 대답한다면, ‘벗들이여, 그 궁극적인 목표는 낙관하지 않고 비관하지 않는 자에게 있지 낙관하거나 비관하는 자에게 있지 않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15. 또한 ‘벗들이여, 그 궁극적인 목표는 희론을 기뻐하고 희론을 즐기는 자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희론 없음을 기뻐하고 희론 없음을 즐기는 자에게 있는가?’라고 물으면, 여기에 이교도의 유행자가 올바로 대답한다면, ‘벗들이여, 그 궁극적인 목표는 희론 없음을 기뻐하고 희론 없음을 즐기는 자에게 있지 희론을 기뻐하고 희론을 즐기는 자에게 있지 않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16.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즉 존재에 대한 견해(있다는 견해)와 비존재에 대한 견해(없다는 견해)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수행자든 성직자들이든 존재에 대한 견해에 의존하여 존재에 대한 견해를 채택하고 존재에 대한 견해를 탐닉하면, 그들은 비존재에 대한 견해를 적대시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수행자든 성직자들이든 비존재에 대한 견해에 의존하여 비존재에 대한 견해를 채택하고 비존재에 대한 견해를 탐닉하면, 그들은 존재에 대한 견해를 적대시한다.

 

17. 어떠한 수행자든 바라문들이든 이 두 가지 견해의 생성(일어남)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 그들은 탐욕에 사로잡히고, 그들은 성냄에 사로잡히고, 그들은 어리석음에 사로잡히고, 그들은 갈애에 사로잡히고, 그들은 집착에 사로잡히고, 그들은 지혜를 잃어버리고, 그들은 호감과 반감에 사로잡히고, 그들은 희론을 기뻐하고 즐기고, 그들은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18. 어떠한 수행자든 바라문들이든 이 두 가지 견해의 생성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면, 그들은 탐욕에서 벗어나고, 그들은 성냄에서 벗어나고, 그들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 그들은 갈애에서 벗어나고, 그들은 집착에서 벗어나고, 그들은 지혜를 되찾고, 그들은 호감과 반감에서 벗어나고, 그들은 희론에서 벗어남을 기뻐하고 즐기고, 그들은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나고, 괴로움에서 해탈한다고 나는 말한다.

 

19.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집착이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규범과 금계(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이 있다.

 

20. 어떤 수행자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든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주장하더라도, 그들은 모든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올바로 시설하지 못한다.(사실 그대로 올바로 알지 못한다.) 즉,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더라도 견해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지 못하며,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지 못하며,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참으로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그 세 가지 경우에 관해서는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주장하더라도, 그들은 모든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지는 못한다. 즉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더라도 견해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지 못하며,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지 못하며,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지 못한다.

 

21. 어떤 수행자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든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주장하더라도, 그들은 모든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올바로 시설하지는 못한다. 즉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고 견해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더라도,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지 못하며,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지 못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참으로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그 두 가지 경우에 관해서는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모든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주장하더라도, 그들은 모든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올바로 시설하지 못한다. 즉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고 견해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더라도,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지 못하며,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지 못한다.

 

22. 어떤 수행자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든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주장하더라도, 그들은 모든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올바로 시설하지는 못한다. 즉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고 견해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고,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더라도,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지 못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참으로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그 한 가지 경우에 관해서는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 모든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주장하더라도, 그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 모든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주장하더라도, 그들은 모든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올바로 시설하지는 못한다. 즉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고 견해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고,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더라도,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지 못한다.

(네 가지 집착을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집착을 끊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일부분의 집착만을 알고 그것만을 끊어야 한다고 말하고 나머지 집착은 모르고 끊어야 함도 모른다.)

 

23. 수행승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스승에 대해 청정한 믿음을 지니더라도 그는 바르게 행한다고 말하지 못하며, 계행을 성취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바르게 행한다고 말하지 못하며, 가르침을 따르는 도반들 사이에서 그가 사랑 받고 총애 받더라도 바르게 행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잘못 설해지고 잘못 해석되고 해탈로 이끌지 못하고 적정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에 의해서 선언되지 않은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그가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법과 율에서 스승을 믿음. 법을 믿음. 계를 믿음. 도반을 존경함도 바르고 완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4가지 집착이) 잘 시설되지 않았고, (불완전한 집착의 소멸로 인해) 피안으로 이끌지도 못하며, 완전한 소멸로도 이끌지도 못하고 한마디로 정등각자에 의해 설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4.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오신 분, 거룩한 님, 올바로 깨달은 님이 모든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주장하면, 그것은 모든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는 것이다. 즉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고, 견해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고,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고,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에 관한 완전한 앎을 시설하는 것이다.

 

25. 수행승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스승에 대행 청정한 믿음이 있다고 하면 ‘그는 바르게 행한다.’라고 말하고, 계행을 원만히 성취한다고 하면, ‘그는 바르게 행한다.’라고 말하고, 가르침을 따르는 길벗들 사이에 사랑받고 총애 받는다면, ‘그는 바르게 행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잘 설해지고 잘 해석되고 해탈로 이끌고 적정에 도움이 되고 올바른 원만히 깨달은 님에 의해서 선언된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그가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래는 모든 집착을 끊어야 함을 말한다. 모든 집착은 4가지 집착이다. (집착에 관하여 바르게 설해진) 이러한 법과 율에서 스승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법, 계, 도반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무슨 이유인가? 법과 율은 잘 시설되었고 잘 설명되었고 피안으로 이끌고 소멸하게 하며 정등각자에 의해 가르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26.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집착은 무엇을 토대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기원으로 하고 무엇을 근원으로 하는가? 이들 네 가지 집착은 갈애를 토대로 하고, 갈애를 원인으로 하고, 갈애를 기원으로 하고, 갈애를 근원으로 삼는다.

 

27.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갈애는 무엇을 토대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기원으로 하고, 무엇을 근원으로 하는가? 갈애는 느낌을 토대로 하고, 느낌을 원인으로 하고, 느낌을 기원으로 하고, 느낌을 근원으로 삼는다.

 

28.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느낌은 무엇을 토대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기원으로 하고, 무엇을 근원으로 하는가? 느낌은 접촉을 토대로 하고, 접촉을 원인으로 하고, 접촉을 기원으로 하고, 접촉을 근원으로 삼는다.

 

29.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접촉은 무엇을 토대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기원으로 하고, 무엇을 근원으로 하는가? 접촉은 여섯 감역을 토대로 하고, 여섯 감역을 원인으로 하고, 여섯 감역을 기원으로 하고, 여섯 감역을 근원으로 삼는다.

 

30.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여섯 감각장소는 무엇을 토대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기원으로 하고, 무엇을 근원으로 하는가? 여섯 감각장소는 명색을 토대로 하고, 명색을 원인으로 하고, 명색을 기원으로 하고, 명색을 근원으로 삼는다.

 

31.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명색은 무엇을 토대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기원으로 하고, 무엇을 근원으로 하는가? 명색은 의식을 토대로 하고, 의식을 원인으로 하고, 의식을 기원으로 하고, 의식을 근원으로 삼는다.

 

32.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의식은 무엇을 토대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기원으로 하고, 무엇을 근원으로 하는가? 의식은 형성을 토대로 하고, 형성을 원인으로 하고, 형성을 기원으로 하고, 형성을 근원으로 삼는다.

 

33.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형성은 무엇을 토대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기원으로 하고, 무엇을 근원으로 하는가? 형성은 무명을 토대로 하고, 무명을 원인으로 하고, 무명을 기원으로 하고, 무명을 근원으로 삼는다.

 

34.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에게 무명이 버려지고 명지가 나타남으로써, 무명이 사라지고 명지가 생겨나면, 그는 결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견해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규범과 금계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자아 이론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되지 않고(흔들리지 않고), 혼란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그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는 일이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35. 이와 같이 세존께서 말씀하시자, 그 수행승들은 세존께서 하신 말씀에 만족하며 기뻐했다.

 

사자후에 대한 작은 경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