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행복하여라! sukho Buddhānaṃ uppādo!

▣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불교를 생각한다/[스크랩]

[스크랩] 아항까라마망까라마나누사야, ‘나’라는 환상 ‘나의 것’이라는 환상 교만의 경향

moksha 2018. 1. 28. 19:49


아항까라마망까라마나누사야, ‘라는 환상 나의 것이라는 환상 교만의 경향

 

 

몹시 추운 날입니다. 최고의 추위에 최장한파입니다. 어제는 한파주의보가 한파경보로 격상되었습니다. 그래서일까 거리에는 평소보다 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고양 삼송역 니까야강독모임 가는 길도 그랬습니다.

 

동장군을 물리치고

 

겨울에는 추워서 살기 힘들고, 여름에는 더워서 견디기 힘듭니다. 봄날과 가을날은 온지도 간지도 모르게 지나가 버립니다. 뇌리에는 항상 추운 날 아니면 더운 날입니다. 어제가 그랬습니다.

 

니까야 강독모임 가는 날 단단히 준비하고 갔습니다. 모자가 달린 두터운 외투, 그리고 긴 두루마리형 목도리, 여기에 마스크까지 쓰니 마치 전장에 나간 장수같습니다. 아무리 한파경보가 내렸다고 해도 추위가 뚫을 수 없습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비 온다고 전쟁 안하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은 상대방의 헛점을 이용합니다.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공략하여 승리로 이끌어 냅니다. 남들이 잘 때 이동하고 최고로 빠른 속도로 주파합니다. 삼십육계에서와 같이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승자와 패자로 명확히 구분 되는 전쟁에서 비 온다고, 춥다고, 바람 분다고, 눈 온다고 전쟁 안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도 수행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평소보다는 적은 숫자이지만 동장군을 물리치고 온 전사들 같아 보입니다. 금년 들어서 처음 열리는 니까야 강독모임에 참가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무언가 배울 것을 기대해 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분위기입니다.

 

1월 초 인도성지순례 갔었습니다. 긴 일정에 상당한 비용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가 보고자 한 것은 다름 아닌 분위기 때문입니다. 벽돌만 남아 있는 폐허에서 챈팅하고 독송하고 명상했지만 그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폐허 속에 앉아 있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분위기입니다. 현장 분위기로 인하여 내내 충만(充滿)했습니다.

 

성지에 앉아 있으면 옛사람과 교감하는 듯 합니다. 공간은 그대로인데 시간만 지나간 것입니다. 부처님이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마치 부처님 당시 부처님 앞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청정해지는 것 같은 기분일 것입니다. 니까야 강독모임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환상

 

2018년 들어 처음 열리는 전재성박사의 니까야강독모임은 싸리뿟따의 경(A3.33)’을 독송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교재 생활속의 명상수행에서는 나라는 환상과 나의 것이라는 환상과 교만의 경향이라고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핵심구절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Yato ca kho, sāriputta, bhikkhuno imasmiñca saviññāake kāye ahakāramamakāramānānusayā na honti, bahiddhā ca sabbanimittesu ahakāramamakāramānānusayā na honti, yañca cetovimutti paññāvimutti upasampajja viharato ahakāramamakāramānānusayā na honti tañca cetovimutti paññāvimutti upasampajja viharati.

 

싸리뿟따여, 그렇다면 이와 같이 이 의식을 갖춘 몸에서 라는 환상, ‘나의 것이라는 환상, 교만의 경향이 없애고, 외부의 일체의 인상에서 라는 환상, ‘나의 것이라는 환상, 교만의 경향이 없애고,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닦아서,  라는 환상, ‘나의 것이라는 환상, 교만의 경향이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성취하리라.’라고 배워야 한다.”(A3.33)

 

 

여기서 핵심어는 라는 환상, ‘나의 것이라는 환상, 교만의 경향”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ahakāramamakāramānānusayā’를 번역한 것입니다.

 

아항까라마망까라마나누사야(ahakāramamakāramānānusayā)

 

복합어 ahakāramamakāramānānusayā‘ahakāra+mamakāra+mānānusayā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항까라(ahakāra)‘aha+kara’의 형태로서 내가 행위한다라는 뜻입니다. 나를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라는 환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라는 생각으로 번역했습니다.

 

또 빠알리어 마망까라(mamakāra)‘selfish attachment’의 뜻으로 나의 것또는 내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나누사야(mānānusayā)‘mānā+anusayā의 형태로 자만의 경향이라는 뜻입니다. 초불연에서는 잠재성향이라 번역했습니다.

 

복합어 아항까라마망까라마나누사야(ahakāramamakāramānānusayā)“‘라는 환상, ‘나의 것이라는 환상, 교만의 경향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다름 아닌 유신견입니다. 오온이 나의 것이라는 견해를 말합니다. , 느낌, 지각, 형성, 의식 등 이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라는 자아관념에 사로 잡혀 있을 때 괴로움의 발생을 넘어 재난이 일어 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착각속에서 살아 갑니다. 대학 캠퍼스에 가면 젊음만 있는 것 같습니다. 이십대 초반의 생기발랄한 청춘들을 보면 이 세상은 온통 젊음의 향연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젊은 청춘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을 거쳐 간 자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늙고 병들고 죽어 가는 자들을 보았을 때 대학의 생기발랄함은 환상입니다.

 

부처님은 끊임 없이 나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교만의 경향을 부수라고 합니다. 만약 자아개념이 끝까지 남아 있다면 파국을 맞을 것이라 합니다. 느낌을 자신과 동일시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탐욕과 분노를 참아 내지 못할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한다고 하여 화를 내는 것도 느낌을 자아와 동일시 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말다툼이 살인으로 까지 전개 되는 것도 오온을 자아와 동일시 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유신견(有身見)을 쥐고 있는 한

 

나는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이라는 오온의 결합물이 나인 것입니다. 이를 경에서는 사빈냐까라(saviññā kaya)’라 하여 의식을 갖춘 몸이라 합니다. 만약 의식(viññāa)이 없다면 우리 몸은 나무토막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식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을 때 괴로움이 발생하고 불행이 일어나고 재난이 생겨난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오온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물질을 예로 든다면“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rūpa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 vā attāna, attani vā rūpa, rūpasmi vā attāna)(S22.1)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물질 대신에, 느낌, 지각 등을 대입하면 모두 20가지 유신견(sakkāyadiṭṭhi: 有身見)이 있습니다.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해탈과 열반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오온이 나의 것이라고 꽉 움켜 쥐고 있는 한 그는 결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추려면 오온이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놓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경에서는 마음에 의한 해탈(cetovimutti: 心解脫)’지혜에 의한 해탈(paññāvimutti: 慧解脫)’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가진 자일수록, 배운 자일수록

 

경에 따르면 유신견과 함께 부수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교만의 경향(mānānusayā)’입니다. 이 말은 자만을 뜻하는 마나(mānā)와 잠재성향을 뜻하는 아누사야(anusayā)의 결합어입니다. 빠알리어 마나(mānā)는 자만, 교만, 아만 등으로 번역됩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我相)도 이에 해당됩니다.

 

누구에게나 아상이 있습니다. 자아가 있다는 관념을 말합니다. 그런데 가진 자일수록, 배운 자일수록 아상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누군데!”라든가 내가 누군데 감히!”라는 말로 나타납니다. 수행자에게도 아상이 있습니다.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스님에게는 스님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스님인데라는 아만을 말합니다.

 

아상, 교만, 자만, 아만을 뜻하는 마나(mānā: )는 사향사과의 성인이라도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집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수다원에게는 내가 수다원인데라는 아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누군데라는 아만은 대체 어떻게 해야 없어질까? 이는 상윳따니까야 케마까의 경(S22.89)’ 있습니다.

 

아상(我相)을 없애려면

 

옷이 더러워지면 빨래를 합니다. 그때 비누와 같은 세제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깨끗이 빨아진 옷에서는 세제냄새가 납니다. 세제냄새마져 없애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케마까의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향기가 밴

상자에 넣어 보관해서,

그는 거기에 배어있는

소금물냄새나 잿물냄새나

쇠똥냄새를 없애버립니다.(S22.89)

 

 

성자에게도 남아 있는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은 세제냄새와 같은 것입니다. 세제가 있어서 오염물질을 제거 하듯이, 자만이라는 세제로 탐욕 등 오염원을 제거 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자만입니다. 마치 비누냄새가 나는 옷을 향기박스에 넣으면 없어 지듯이. 자만이라는 마지막 오염원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향기박스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고귀한 제자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끊었다고 하더라도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 가운데 미세하게 발견되는 라는 자만, ‘라는 욕망, ‘라는 경향을 아직 끊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 가운데 일어나는 생멸을 물질은 이와 같고 물질의 소멸은 이와 같다. 느낌은 이와 같고 느낌의 소멸은 이와 같다. 지각은 이와 같고 지각의 소멸은 이와 같다. 형성은 이와 같고 형성의 소멸은 이와 같다. 의식은 이와 같고 의식의 소멸은 이와 같다.’라고 관찰해야 합니다.”(S22.89)

 

 

자만을 여의는 향기박스는 다름 아닌 오온을 나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온은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조건에 따라 소멸되는 것일 뿐 나의 것이라는 실체가 없음을 말합니다. 우리 몸과 마음을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관념을 놓아 버렸을 때 자만도 사라질 것이라 합니다. 마치 세탁물의 비누 냄새를 제거 하기 위해 향기박스에 넣는 것과 같습니다.

 

세 가지 자만이 있는데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우리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을 자신과 동일시 하고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 합니다. 자존심도 일종의 자아 의식이 강화 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소한 말다툼이 자존심을 건드려서 큰 싸움으로 발전될 수도 있습니다. 부부싸움 하다 우발적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자존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심 때문입니다. 순간적 분노를 참지 못하여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느낌을 자아와 동일시 했을 때 일어난 참사입니다.

 

오온을 자아와 동일시 했을 때 우월감이나 동등감, 열등감을 갖게 됩니다. 부자에게는 가진자의 자만, 학자에게는 배운자의 자만이 마음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이를 마나누사야(mānānusayā)라 하여 자만의 경향 또는 자만의 잠재성향이라 합니다. 이런 경향은 대개 우월의식으로 나타납니다.

 

우월의식은 말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내가 누군데라는 생각이 잠재 되어 있습니다. 반면 열등감도 있습니다. 비록 말은 하지 않지만 나보다 나은 자에 대한 질투와 시기의 감정이 마음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Tisso vidhā:

seyyo'hamasmī'ti vidhā.

Sadiso'hamasmī'ti vidhā,

hīno'hamasmī'ti vīdhā.

 

“세 가지 교만 곧,

내가 우월하다는 교만,

내가 동등하다는 교만,

내가 열등하다는 교만이 있습니다.”(D33)

 

 

자만에는 우월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등감도 자만이고, 동등감도 자만입니다. 모두 자아에 기반합니다. 느낌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한, 지각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한 자만은 잘난 자나 못난 자에게나 늘 잠재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만의 성향을 뿌리 뽑아야 아라한이 된다고 합니다.

 

심해탈과 혜해탈로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유신견과 자만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열 가지 결박 중에서 유신견이 타파 되면 성자의 흐름(수다원)에 들어 갑니다. 그러나 최후로 남아 있는 것은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입니다. 자만을 부수어야 아라한이 됩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싸리뿟따여, 수행승이 이 의식을 갖춘 몸에서 라는 환상, ‘나의 것이라는 환상, 교만의 경향이 없고, 외부의 일체의 인상에서 라는 환상, ‘나의 것이라는 환상, 교만의 경향이 없고,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닦으면,  라는 환상, ‘나의 것이라는 환상, 교만의 경향이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성취한다. 그러한 수행승을 두고 갈애를 끊고, 결박을 끊고, 완전히 자만을 꿰뚫어보아 괴로움의 종식을 이루었다고 한다.”(A3.33)

 

 

자만(mānā)을 영어로 프라이드(pride)’라 합니다. 우리말로 긍지 또는 자부심이라 볼 수 있습니다. 프라이드가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많은 것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철학자 디오게네스였습니다.

 

내가 대왕이 아니라면 당신처럼 되고 싶습니다

 

전재성박사는 강독시간에 자만을 설명하면서 하나의 책을 소개 했습니다. 그것은 곰브리치 교수가 지은 곰브리치 세계사라는 책입니다. 여기서 곰브리치 교수는 빠알리성전협회 회장을 역임한 분이 아니라 그 분의 형을 말합니다. 역사학자 곰브리 교수입니다.

 

전재성박사는 강독시간에 곰브리치 교수가 지은 책을 서점에서 샀다고 했습니다. 딱 한구절이 마음에 들어서 그 자리에서 구입했다고 합니다. 그 말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퀴즈 식으로 질문했습니다.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의 대화는 유명합니다. 세계를 정복한 대제국의 대왕인 젊은 알렉산더는 평소 존경하던 철학자를 찾아 갔습니다. 개집 같은 곳에서 누추하게 살고 있는 철학자에게 손수 찾아 간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존경하는 철학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철학자는 햇볕을 가리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곰브리치 세계사에 따르면 한 줄이 더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에게 햇볕을 가리지 말아 달라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개집 같은 곳에서 누추하게 사는 철학자의 단 한가지 소원은 따스한 햇볕이었습니다. 이에 알렉산더는 어떻게 답했을까? 이에 참석자들은 각자 의견을 내었지만 모두 빗나갔습니다. 알렉산더가 한 말은 내가 대왕이 아니라면 당신처럼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Diogenes of Sinope

 

 

디오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안티스테네스를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스승은 인간은 덕()을 위해 살아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선한 마음만 필요할 뿐 재산과 명성과 외모 따위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일까 디오게네스는 평생 ()’처럼 살았습니다. 개처럼 살았다고 해서 견유학파(犬儒學派)라 합니다. 일체의 유혹과 소유를 거부하며 살았는데 후대 스콜라 학파로 발전합니다.

 

디오게네스를 보면 불교의 수행자를 떠 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그리스 철학자들도 명상을 했다고 합니다. 소유하지 않고 탁발에 의존하는 소욕지족의 수행자였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알렉산더가 동경하여 그와 같이 되고자 했습니다.

 

만일 알렉산더가 조그마한 성공에 만족했더라면 대제국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진 자에게는 늘 유혹이 뒤따르는데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와 같은 청정한 삶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대제국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프라이드, 즉 자만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풍요로운 세상에서

 

풍요로운 세상입니다. 세상은 즐길 것으로 넘쳐 나고 있습니다. 눈만 뜨면 온 갓 것들이 유혹합니다. 소유의 시대에 많이 가진 자는 가진 자의 자만에 빠져 있습니다. 학력이 높은 자는 배운자의 자만이 있고, 고시에 합격한 자는 든 자의 자만이 있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자아와 동일시 했을 때 자만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라 끝까지 남아 있는 자만마져 내려 놓아야 한다고 말씀 했습니다. 이에 경에서는 숫따니빠따 피안으로 가는 길에 실려 있는 하나의 게송 (Stn.1107)을 소개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숫따니빠따가 제자들에게 암송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해 줍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과,

그것이 충족되지 못했을 경우의 불만,

그 두 가지를 버리고

해태를 없애고 회환을 품지 말아야 하리.

 

평정과 새김으로 청정해지고

가르침에 대한 탐구가 앞서 가면,

무명을 부수는 것이며,

지혜에 의한 해탈이라고 나는 말하네.”(Stn.1107, A3.34)

 

 

 

2018-01-2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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