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은 번뇌가 없다고, 소처럼 개처럼 사는 자들
법륜스님의 윤회론
“내가 과학을 좋아 했는데 과학을 해서 내가 의도하지 않지 않게 승려가 되었는데, 스님이 되서 종교인이 됐는데, 과학을 좋하는 사람이 종교인이 됐으니까 과학을 포기하고 종교를 한게 아니라, 과학적 안목을 가지고 종교를 봤기 때문에 종교안에 있는 90%의 허황된 이야기를 걷어 내 버리고, 거기에 진실한 것만 봤단 말에요.”(법륜스님)
이 말은 법륜스님이 즉문즉설에서 한 말입니다. 스님은 윤회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눈으로 보았을 때 전생이나 내세, 윤회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합니다. 힌두교의 윤회사상이 불교에 스며 들어 온 것에 지나지 않다고 합니다. 윤회가 있다면 살아 있는 동안 지금을 기준으로 이전이면 전생이고 이후면 내생이라 합니다. 순간윤회는 인정하지만 일생윤회는 부정하는 것입니다. 육도윤회가 있다면 마음이 상태에 따라 있을 것이라 합니다.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은
법륜스님의 윤회론에 어느 정도 공감은 가는 것이 있지만 죽음 이전과 이후의 일생윤회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부처님 가르침과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하여 이른바 3종 외도와 비교하여 설했습니다.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는 숙명론, 창조주가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존우론, 어떤 것이든지 이유없이 원인 없이 발생한다는 무연론은 업과 업의 과보의 원칙에 맞지 않음을 말합니다.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 같습니다.
빠알리니까야로 대표 되는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이 외도들과 사상논쟁하는 장면이 무수하게 등장합니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외도의 사상을 논파합니다. 그런 외도의 사상은 크게 자아와 이세상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와 몸이 죽으면 정신도 죽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허무주의로 대별됩니다. 이런 외도의 주장은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관찰하면 모두 거짓이 됩니다.
입맛 벙긋하면 어긋나는 자
교계신문에서도 버젓이 윤회를 부정하는 자가 있습니다. 포항공대 수학과 강병균교수가 대표적입니다. 앞서 언급된 법륜스님처럼 철저하게 과학에 기반하여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갑니다. 강병균 교수는 최근 자신의 칼럼에서 “윤회론은, 생명체가 가장 밑으로는 지옥부터 가장 위로는 하늘나라까지 몸을 바꿔가며 환생한다는 이론이다.”라 했습니다. 윤회를 환생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환생이라는 말은 자아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는 환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재생(再生)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연기법에 따라 조건발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환생과 재생도 구별못하니 “내생은 현생에 지은 업(행위)에 대한 결과이며, 통속적으로는 상벌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입만 열면 어긋나는 것이 됩니다.
선가용어 중에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맛 벙긋하면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과학에 기반한 윤회론자의 주장이 그렇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고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면 믿지 않기 때문에 내생이나 윤회를 믿을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후 전개 되는 이야기는 모두 개구즉착입니다. 개구즉착으로서 강병균 교수는 지구생명체의 역사와 진화론을 들어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인도와 축생도를 하나로 볼 때(진화론은 이 둘이 같은 '동물도'라고 증명했다: 어느 두 동물이나 유전자가 반 이상 일치한다. 이것은 동서양에 공히 팽배한 '인간은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믿음에 정면으로 반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화론을 거부한다. 서양인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기독교인들은, 사람만 영혼이 있고 동물은 영혼이 없다고 믿었고, 지금도 대부분이 그렇게 믿는다), 6도윤회에서 5도는 실격·탈락하고 '동물도 윤회'만 남으며, 이는 정확히 현대생물학이 발견한 '유전자의 유전'에 해당한다! (강병균교수, 불교의 근본문제)
강병균교수가 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도윤회라는 것입니다. 6도 중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과 축생뿐인데, 인간과 축생은 유전자로 유전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이나 축생이나 한묶음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윤회가 있다면 1도 윤회이고, 1도 윤회는 다름 아닌 유전자 윤회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6도 윤회는 허구이고, 업과 업의 과보에 따른 윤회는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강병균교수는 수학자로서 과학을 신봉하는 자입니다. 과학의 눈으로 불교를 보았을 때 윤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윤회가 있다면 자손에게 전승되는 유전자윤회가 있을 뿐이라 합니다. 그러나 유전자도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것은 반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배우자의 것입니다. 유전자 윤회는 윤회가 아니라 자손을 남기고 죽는 축생과 같은 죽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단멸(斷滅)입니다.
유전자를 남기고 죽는다고 하지만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무너져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단멸론적 허무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하나 더 끼워 넣은 것이 ‘문화유전자(Meme)’입니다. 한공동체에서 삶의 방식이 다음 세대로 전승되어 감을 말합니다. 그러나 유전자윤회가 단멸론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면면히 이어져온 단멸론(斷滅論)
법륜스님도 강병균교수도 과학적 사실을 들어 윤회를 부정합니다. 법륜스님은 “천당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증명을 하겠어요?”라 합니다. 아직 죽어서 살아 되돌아 온 사람이 없기에 천상이나 지옥, 아수라 등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거는 있다 해도 증명할 수도 없고. 없다 해도 증명할 수도 없고”라 하며 육도윤회는 ‘믿음’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법륜스님에 따르면 육도윤회는 고대인도사상에 지나지 않고 설령 육도윤회가 있다고하더라도 우리 마음속에 있을 뿐이라 합니다. 강병균교수 역시 “지옥과 천국은 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환망공상으로 존재한다.”라며 칼럼을 맺습니다. 이처럼 윤회없음을 주장하는 자들은 단멸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은 물질을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구학, 우주학 등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물질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과학자의 눈으로 불교를 재단 했을 때 단멸론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업이나 업의 과보, 내세와 윤회를 연구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물질 영역이 아닌 정신영역입니다. 부처님이 물질로 이루어진 몸에 대해서만 설했다면 단멸론으로 귀결 되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부처님 당시 유물론이 그랬습니다.
외도의 스승 중에 ‘아지따 께사깜발린’으로 대표 되는 유물론은 우리 몸과 마음이 모두 물질로 된 것이라 했습니다. 정신도 물질에서 파생된 것이라 합니다. 이는 오늘날 뇌과학자들이 뇌에서 마음이 나오는 것과 같다는 주장과 일치합니다. 이렇게 우리 몸과 마음을 유물론적으로 보았을 때 단멸론이 됩니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몸에서 파생되어 나온 정신도 죽게 되므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손은 남길 것입니다. 이것이 강병균교수가 말하는 유전자윤회론입니다. 부처님당시의 유물론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 옴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과 축생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강병균교수의 주장대로 인간이 축생과 같이 유전자 유전하는 것으로 보아 1도 윤회 하는 것으로 본다면 인간은 사실상 동물적 삶이나 다름 없습니다. 축생은 말을 할 수도 없고 생각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단지 유전자유전을 한다 하여 같은 반열에 올려 놓는다는 것은 인간의 축생화로 인하여 디그레이드(Degrade)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부처님은 인간과 축생을 분리하여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라 했습니다. 한 공간에서 숨을 쉬고 살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것은 정신영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보는 세상과 개가 보는 세상이 다를 수밖에 없듯이, 인간에게는 축생에서 볼 수 없는 정신작용이 있습니다.
정신작용이 없는 축생은 번뇌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식입니다. 그리고 발정기가 되면 짝짓기를 하여 자손을 남기는 것입니다. 축생은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아 갑니다. 이런 축생에 번뇌가 있을 수 없습니다. 축생에게 번뇌가 없다고 하여 축생을 예로 들어 분별을 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축생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맹구우목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번 축생으로 떨어지면
본능에 충실한 축생은 사실상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축생의 세계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 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법다운 실천이 없고, 바른 실천이 없고, 착한 실천이 없고, 공덕 있는 실천이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M129)
맹구우목(盲龜遇木)의 비유입니다. 축생으로 떨어진 존재가 인간이 되기 힘들다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맹구우목의 비유 보다 더한 비유가 “한 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라 했습니다. 이 말은 한번 악도에 떨어진 자가 인간이 되기가 더 쉽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악도라 하면 지옥이나 아귀, 아수라를 말합니다. 축생이 인간되는 것 보다 악처에 떨어진 자가 과보가 다 했을 때 낮은 지위의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축생이 인간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약육강식입니다.
축생은 근본적으로 약육강식입니다. 자연다큐를 보면 곤충의 세계, 어류의 세계, 동물의 세계에서 약육강식이 일상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먹어야 살 수 있고 먹어야 번식할 수 있기 때문에 순환적인 먹이 사슬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인간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차라리 지옥중생이 인간이 될 수 있을지언정 축생이 인간이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축생계와 인간계를 별개의 세계에 사는 존재로 분류 했다고 보여집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
인간은 먹어야 살고 자손을 남기는 것으로 보아 동물 또는 축생의 범주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약육강식으로 표현되는 축생계와 다른 것은 사유할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정신작용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을 크게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 이렇게 다섯 가지 다발로 이루어진 것이라 설명했습니다.
축생에게는 오온이 없습니다. 식욕과 성욕이라는 욕망, 즉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배고프면 먹고 졸리는 자는 식으로 오로지 식욕과 성욕으로만 산다면 그는 축생과 같은 삶을 사는 자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축생과 같은 삶을 자는 기본적으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부처님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할 수 없다면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라고 시설할 수 없을 것이고, 세상은 염소, 양, 닭, 돼지, 개, 승냥이처럼 혼란에 빠질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하므로,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다라고 시설하는 것이다.”(It.36, A2.9)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은 이 세상을 지탱하는 축이라 합니다. 만일 인간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른다면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이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결과는 약육강식의 축생의 세계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약한 자는 먹히고 강한 자는 먹는 세계를 말합니다.
약육강식의 세계가 되었을 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시대가 됩니다. 약한 자는 먹히기 때문에 어머니라할 것도 없고 이모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도덕이 무너졌기 때문에 식욕과 성욕 등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 뿐 입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이라는 두 개의 기둥이 무너진 세상에 대하여 염소, 양, 닭, 돼지, 개, 승냥이처럼 혼란에 빠진 축생의 세계가 될 것이라 합니다.
과학자의 오만과 편견과 무지
흔히 과학 하는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불교를 재단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 되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하고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것은 모두 미신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과학은 물질을 탐구하는 영역입니다. 사유하고 말을 할 줄 아는 인간을 축생과 동급으로 취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간이 축생과 다른 것은 수온, 상온, 행온, 식온 이라는 정신작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생각하고 사유하고 말을 하는 인간을 단지 유전자가 유전한다고 하여 1도 윤회로 보는 것은 과학자의 오만이자 무지의 극치로 봅니다.
과학자의 오만과 편견은 윤회에서 나타납니다. 단지 물질 탐구에 지나지 않는 과학을 연구하는 자들은 과학의 잣대로 부처님 가르침을 재단하려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정신영역입니다. 물질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의 잣대로 가르침을 판단하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아무리 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해서 가르침을 설명하려 해도 개구즉착일 뿐입니다.
업과 업의 과보의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은 업과 업의 과보의 가르침으로 귀결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에 근거합니다. 연기법이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졌듯이, 업과 업의 과보는 인과법이고 인연법입니다. 살생, 투도, 망어, 음행 등 오계를 어겼을 때 과보를 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번 생에 못 받으면 내생에 받고, 내생에 못 받으면 후생에 받는 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믿음이라기 보다 조건 발생하고 조건 소멸하는 연기법에 따르면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법칙입니다.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 중에는 스님들도 있습니다. 마치 윤회를 인정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는 듯 합니다. 고대인도에서 계급의 산물로 취급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과학의 시대에 맞지 않는 이론이라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의 무지일 뿐입니다.
동물은 번뇌가 없다고
어떤 자들은 동물은 사유도 못하고 말도 못하기 때문에 번뇌가 없다고 합니다. 사람도 동물처럼 사유하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다면 번뇌가 없을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분별하지 말자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축생과 달라서 분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분별하지 말라고 한다면 축생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축생처럼 사는 자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에 소처럼 개처럼 사는 자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꼴리야 국의 할릿다바싸나라고 하는 마을에 갔을 때 소의 행실을 닦는 뿐나와 벌거벗고 다니며 개의 행실을 닦는 쎄니야라는 외도가 있었습니다. 소의 행실을 닦는 뿐나는 머리에 뿔을 달고 엉덩이에 꼬리를 달고 소들과 함께 풀을 뜯어 먹었습니다. 개처럼 사는 쎄니야는 모든 행동을 개처럼 똑같이 했습니다. 그렇다면 외도들은 왜 소처럼 개처럼 행위를 했을까요? 이에 대한 단서가 경에 실려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쎄니야여,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행실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습관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마음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행동을 닦는다고 합시다. 그가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행실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습관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마음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행동을 닦으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소들의 동료로 태어납니다.”(M57)
소처럼 사는 외도는 계금취견에 사로 잡힌 자입니다. 아마 소처럼 살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본 것일지도 모릅니다. 강병균 교수는 지렁이의 예를 들어 번뇌를 설명한 바 있습니다. 지렁이는 사람처럼 말도 못하고 생각도 없기 때문에 지렁이는 해탈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식으로 칼럼을 쓴 바 있습니다. 이처럼 축생을 들어 생각 등 ‘분별’을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유능력이 없는 소나 개는 번뇌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 당시 외도중에는 소나 개처럼 살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소의 마음을 닦고”라는 구절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생각이 번뇌를 일으킨다하고 하여 동물에 빗대에 설명하는 자들도 이에 해당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소의 마음처럼 생각 없이 분별 없이 살려고 하는 자는 결국 다음 생에 소로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소처럼 개처럼 사는 자들
오늘날 과학에 기반하여 불교를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과학은 물질을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물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물론은 결국 단멸론으로 귀결됩니다. 그래서일까 과학적 사실을 들어 불교를 말하는 자들 대부분은 윤회가 없다고 합니다. 명백한 단멸론입니다.
어떤 자들은 인간의 생각이 번뇌의 원인이라 합니다. 분별하기 때문에 괴롭다고합니다. 분별하기 때문에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번뇌가 없는 동물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말도 못하고 사유능력도 없는 동물은 번뇌가 없어서 이미 해탈한 자나 같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명백한 외도의 주장입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 당시에 소처럼 개처럼 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외도의 견해를 따를 것인가?
인간은 물질 뿐만 아니라 정신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그것도 말을 하고 사유하는 능력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온으로 우리 몸과 마음을 분석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온입니다. 초기경전 어디에도 번뇌 없는 축생을 예로 들어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내세와 윤회 없음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초기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거나 부처님 가르침에 무지한 자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갇혀 사는 자이거나 계금취견에 빠진 자들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자들이 깨달은 자라 행세하며 세상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초기경전에 잘 설명 되어 있습니다. 스승이 없으면 초기경전을 스승으로 삼으면 됩니다. 내세와 윤회없음을 말하는 자들은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외도들입니다. 유전자를 예로 들어 윤회를 설명하거나 동물의 번뇌없음을 예로 들어 자신의 깨달음을 말하는 자들 역시 외도들입니다. 모두 연기법을 부정하는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외도들의 개인적인 견해를 따를 것인가?
2017-11-0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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