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부와 성자를 가르는 유신견(有身見), 쭐라웨달라경(교리문답의 작은 경, M44)
삿된 견해(邪見)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알게 된 것이 ‘유신견(有身見)’이다. 모든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이다. 이는 고정불변하는 자아나 영혼 같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몸은 죽어도 영혼만은 살아서 마치 새옷을 갈아 입듯이 환생하는 것을 말한다. 고대인도 브라만교에서 ‘아뜨만’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와 같은 고정불변하는 아뜨만은 없다고 하였다. 다만 원인과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법만 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존재를 설명한 것이다.
유신견은 빠알리어로 사까야딧띠(sakkāya-diṭṭhi)라 한다. sakkāya(존재의 무더기=오온)+diṭṭhi(견해)의 합성어이다. 사까야(sakkāya)는 다시 √sat(구분하다)+kāya(몸)로 분해된다. 따라서 사까야딧띠는 불멸하는 영혼이나 인격 주체와 같은 존재론적 실체가 있다고 믿는 ‘삿된 견해(邪見)’이다. 영어로는 ‘wrong view of self’로 번역된다.
이처럼 삿된견해에 지나지 않는 유신견은 범부와 성자를 가르는 기준으로도 활용된다.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열 가지 족쇄 중에 풀어야 할 가장 첫 번째 단계로서 유신견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신견이 타파되지 않는 한 결코 성자의 반열에 들어 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해탈과 열반도 실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 유신견은 어떤 경을 근거로 한 것일까.
M44, 쭐라웨달라경(Culavedalla-sutta, 교리문답의 작은 경)
유신견에 대하여 대강 설명해 놓은 것을 보았다.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 법문집에 실려 있는 주해서이다. 이 주해에서 유신견의 정형구에 대하여 설명하였는데 ‘M4’3이라는 숫자가 눈에 띄었다. 이것은 맛지마니까야 43번째 경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구입한 맛지마니까야에서 43경을 찾아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비슷한 문구를 발견할 수 없었다. 43경은 ‘마하웨달라경(Mahavedalla-sutta)’으로서 우리말로 ‘교리문답의 큰 경’이라고 되어 있다. 혹시나 싶어 바로 뒤의 경인 445경 즉, ‘쭐라웨달라경(Culavedalla-sutta, 교리문답의 작은 경)’을 보았다. 바로 그곳에 유신견의 근거가 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있는 주해서의 M43이 오타가 난 것이다. M43이 아니라 ‘M44’인 것이다.
쭐라웨달라경에서 유신견에 대한 정형구
쭐라웨달라경(교리문답의 작은 경)에 유신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8.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는 어떠한 것입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이세상의 배우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은 거룩한 이를 인정하지 않고, 거룩한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 거룩한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고, 참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참사람을 알지 못하고, 참 사람에 이끌리지 않아서,
1)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가 물질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2)느낌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가 느낌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느낌이 있다고 여기고, 느낌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3)지각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가 지각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지각이 있다고 여기고, 지각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4)형성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가 형성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형성이 있다고 여기고, 형성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5)의식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가 의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다고 여기고, 의식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벗이여 비싸카여,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는 이러한 것입니다.”
(쭐라웨달라경, Culavedallasutta, 교리문답의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44, 전재성박사역)
쭐라웨달라경(교리문답의 작은 경-M44).docx 쭐라웨달라경(교리문답의 작은 경-M44).pdf
사진 http://tipitakapali.blogspot.com/
이 것이 유신견의 정형구라 한다.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 담마딘나 비구가 오온의 예를 들어 20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다섯번째인 의식에서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다고 여기고, 의식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일 것이다. 이는 ‘아는 마음을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과 같다.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예외없이 ‘진아론적’ 이야기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마음은 망념에 지나지 않고 불생불멸하는 마음바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에 대하여 잘 표현한 것이 선가귀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게송일 것이다.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선가귀감)
이처럼 한 물건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 한다. 나지도 죽지도 않는 그 것을 그것은 모양도 없어서 굳이 표현을 한다면 동그라미(일원상)로, 명칭을 붙인다면 이름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가져다 붙일 수 있다.
탁 걸리는 날이 올 것
그 한 물건 찾기 위한 것이 선가에 말하는 화두수행이다. 대표적으로 이뭐꼬화두법이다. 그래서 이뭐코 화두를 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 뭣고 화두의 전제는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밝고 또렷또렷(昭昭靈靈)한 주인공 이 놈이 무엇인고?’ ‘부모 미생전 나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고?’ 등 그 밖에 여러 가지가 있다. 여기서 보듯이 전제는 화두의 전체 내용을 일컬으며, 단제는 ‘이 뭣고’만 드는 것이다.
‘이 뭣고’하면서 단제를 들다가 잡념과 번뇌망상이 들어오려고 하면 그 자리에다 전제로 바꾸어 화두를 들어나간다. 그러다 잡념이 들어오지 않으면 다시 단제로 바꾼다.
다섯째, 단제만 들면서 ‘이 뭣고’할 때는 ‘이-’를 약간 길게 하면서 마음속으로 ‘이-’하는 그 놈이 ‘뭣꼬?’하며 의심을 일으키든지, 아니면 조금 막연하지만 ‘이- 뭣-고’ 하면서 의심을 길게 이어간다. 그렇게 의심을 길게 가져가면서 그 의심을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뼈속과 핏줄까지 스며들듯이 온 몸과 마음으로 의심한다.
(화두참구를 잘 하는 길, 조계종 포교연구실 , 불교신문 2311호, http://blog.daum.net/bolee591/12082735)
이렇게 이뭐꼬 화두를 앉으나 서나 밤이나 낮이나 들다보면 마음에 탁 걸리는 날이 올 것이라 한다.
그놈이 바로 주인공이고 진아(眞我)
그런데 어떤 이는 “이뭐꼬 하는 이놈은 이뭐꼬?”라고 화두를 들라고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마음바탕에서 생각이 올라왔다 사라지고
마음바탕에서 소리가 나왔다 사라지고
마음바탕이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다.
그놈이 바로 주인공이고 진아(眞我)고 성품이다.
(혜민스님, 깨닫고 싶으면 봐라)
깨닫고_싶으면_봐라-혜민스님.docx 깨닫고_싶으면_봐라-혜민스님.pdf
마음바탕을 깨달으라고 말한다. 그래서 마치 영화가 끝나면 영화를 보던 자가 인식 되듯이 생각을 일으키는 근본 마음자리를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 놈은 어디를 가든지 항상 먼저 가 있는데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생각이 없는 상황에서도 알아채는 놈이 있다고 한다. 즉 아는 마음을 아는 마음이 참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쭐라웨달라경에서 담마딘나비구니는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다고 여기고, 의식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유신견이라고 하였다.
이는 실체가 있다는 환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삿된 견해’로 보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연기법을 무시한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빠알리어와 영어에서 유신견 정형구
유신견 정형구에 대하여 빠알리어와 영어 자료를 찾아 보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빠일리어)
6. Kathaṃ panayye sakkāyadiṭṭhi hotīti?
Idhāvuso visākha assutavā puthujjano ariyānaṃ adassāvī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to, sappurisānaṃ adassāvī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to rūpaṃ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rūpaṃ, rūpasmiṃ vā attānaṃ. Vedanaṃ attato samanupassati, vedanā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vedanaṃ, vedanāya vā attānaṃ saññaṃ attato samanupassati, saññā 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saññaṃ, saññāya vā attānaṃ. Saṃkhāre attato samanupassati, saṃkhār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saṃkhāre, saṅkhāresu vā attānaṃ viññāṇaṃ attato samanupassati, viññāṇ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smiṃ vā attānaṃ. Evaṃ kho āvuso visākha sakkāyadiṭṭhi hotīti.
(출처:http://awake.kiev.ua/dhamma/tipitaka/2Sutta-Pitaka/2Majjhima-Nikaya/Majjhima1/044-culavedalla-p.html)
(영어)
Noble Lady, how does the self view arise?
Here, friend, Visākha,
the not learned ordinary man who has not seen the noble ones and Great Beings, not clever in their Teaching and not trained in their Teaching,
reflects matter in self, or a material self, or in self matter, or in matter self.
Reflects feelings in self, or a feeling self, or in self feelings, or in feelings self.
Reflects perceptions in self, or a perceiving self, or in self perceptions, or in perceptions self.
Reflects determinations in self, or a determining self, or in self determinations, or in determinations self.
Reflects consciousness in self, or a conscious self, or in self consciousness, or in consciousness self.
Friend Visākha,
thus arises the self view.
쭐라웨달라경은 한역아함경에 대응경이 있다. 법락비구니경(法樂比丘尼經) 이라 하여 중아함경 제210경이 그것이다.
고려대장경연구소 사이트에 위사카는 비사거(毘舍 , Vis kha)로 되어 있고, 담마딘나는 의역하여 법락(法樂, Dhammadinna)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자기의 몸, 자기의 몸이 있다고 보는 견해, 자기의 몸이 없다고 보는 견해, 자신에 대한 견해를 멸하는 것, 성음(盛陰), 8지 성도, 초선(初禪), 정(定) 등 스물아홉 가지 개념에 대해 물은 것으로 되어 있다.
오온과 오취온
이렇게 많은 질문과 답이 있는데, 그 중 오온과 오취온의 관계에 대한 것도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7.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그 집착은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 다발과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별도로 집착이 있는 것입니까?”
[담마딘다]
“벗이여 비싸카여, 그 집착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동일한 것도 아니며,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는 별도로 집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벗이여 비싸카여,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을 지니면,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이 바로 그 집착(*)입니다.”
(쭐라웨달라경, Culavedallasutta, 교리문답의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44, 전재성박사역)
오온과 오취온에 대한 논쟁은 인터넷 토론 사이트에서 매우 뜨겁다. 여러가지 해석이 분분한데 어떤 이는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단멸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집착이라는 단어이다. 집착을 빠알리어로 ‘우빠다나(upadana)’라고 한다. 이에 대한 주석을 전재성박사는 다음과 같이 하였다.
집착은 욕망처럼 형성의 다발의 한 부분이므로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집착은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과 분리된 것도 아니다.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분리된 집착은 없기 때문이다.
(전재성박사, 쭐라웨달라경-M44, upadana주석에서)
집착은 감각적 욕망의 한 부분이고 또 갈애가 더욱 더 강화된 것으로서 한 번 들어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반드시 업을 생성시키고 마는데, 이런 집착으로 인하여 고통이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고통을 발생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집착인데, 이는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오온)을 나, 나의 것, 나의 자아인 것으로 착각하며 집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계든 색계든 무색계든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집착을 야기하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섯가지 다발(오온)과 다섯가지 다발에 대한 집착(오취온)은 같은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다섯가지 다발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행처에서 늘 상 하는 말은 ‘알아차림’이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기 전에 알아차리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느낌에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갈애로 넘어갔을 때 이미 늦은 것이다. 더구나 갈애가 더욱 더 강화되어 달라 붙었을 때(집착) 이제 떼지도 못한 단계에 이른다. 그래서 집착을 조건으로 ‘업유’가 생기는 것으로 본다. 그 결과 ‘생노병사우비고뇌’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재가신자 위사카와 담마딘나 비구니는 전에
쭐라웨달라경에 등장하는 재가신자 위사카와 담마딘나 비구니는 전에 ‘부부’이었다. 이에 관한 이야기가 법구경에 인연담으로 전한다. 법구경 인연담에 이들 부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담마딘나 빅쿠니 이야기(게송 421)
부처님께서 웰루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떄, 담마딘나빅쿠니와 관련하여 게송 421번을 설법하시었따.
담마딘나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어느 때 그녀의 남편 위사카는 부처님의 설법을 잘 듣고 아나가미 팔라를 성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속적 욕망을 여읜 그는 이제 내 재산은 모두 아내에게 물려주리라 생각하였다. 그는 이재 세상의 가치를 중히 여기지 않게 되었고, 일체를 기울어짐 없이 평등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담마딘나도 남편이 변한 것을 느꼈다. 전 같으면 남편이 밖에서 집으로 돌아올 떄 담마딘나는 창문 곁에 서서 남편을 마중했고, 그때마다 위사카는 애정어린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며 미소를 보내어 아내를 기쁘고 흐뭇하게 해주곤 했다. 그러나 이제 위사카에게 있어서 그런 미소 같은 것은 별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집에 돌아와도 아내에게 미소를 보내지도 않았고, 별다른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아내는 혼자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고 생각하다가, 식사 시간에 물어보리라고 마음먹고 평상시처럼 저녁 준비를 해서 남편에게 갖다 주었다. 그런데 전 같으면 남편은 자기에게
「여보, 이리 와서 함께 저녁을 먹읍시다.」
하고 다정하게 말했을 것인데, 이제는 아무 말도 없이 조용하고 정숙하게 혼자서만 식사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이 자기에게 단단히 화가 난 것이라고 판단했다.
남편 위사카는 저녁을 먹고 나서 아내 담마딘나를 불러 자기 옆에 앉히고 이렇게 말했다.
「여보, 이제부터 이집안의 재산은 모두 당신 것이오. 내 재산은 당신이 다 가지시오.」
그러자 담마딘나는 남편이 자기에게 화가 났다면 이렇게 재산을 주지는 않을 것인데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면 당신은 이제부터 어찌할 셈이신가요?」
「나는 오늘부터는 이제 세상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겠소.」
「그게 무슨 말씀이시지요?」
「나는 이제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렸다는 말이오.」
그러자 현명한 그의 아내는 즉각 대답했다.
「낭군이시여, 그렇다면 당신께서는 저보고 당신의 뱉은 침(재산)을 가지라는 말씀이십니까? 저 또한 물질에 대한 모든 애착을 버리고 가정을 떠나 빅쿠니가 되고 싶습니다.」
「그거 아주 훌륭한 생각이오.」
그래서 그는 아내를 데리고 수도우너에 들어가 많은 빅쿠, 빅쿠니들에게 충분한 공양을 올린 뒤 아내를 출가시켜 빅쿠니가 되게 해 주었다. 빅쿠니가 된 뒤로도 그녀는 계속해서 담마딘나라고 불리었다.
담마딘나 빅쿠니는 다른 빅쿠니들과 함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여러 해 동안 열심히 수행했다. 그녀는 조용한 지방의 수도우너에서 지내면서 좌선수행을 용맹스럽게 밀고 나갔고, 그 결과 오래지 않아서 아라핫따 팔라를 이루었고, 아울러 신통력도 얻었다. 그 뒤 담마딘나 빅쿠니는 이제 자기와 인연이 있었던 지인들에게 공덕을 지을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고향라자가하로 돌아왔다.
이때 재가 신자 위사카는 과거에 자기 아내였던 담마딘나 빅쿠니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원으로 그녀를 찾아갔다. 그는 담마딘나 빅쿠니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고 그녀 옆에 앉아서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만일 예전에 나의 아내였던 이 빅쿠니에게 빅쿠니 생활이 만족한지 어떤지를 직설적으로 묻는다면 그것은 예의 있는 행동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녀에게 짐짓 담마에 대해 물어 보아야겠다. 그러면 나는 그녀가 수행을 잘하여 현재 만족한 경지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으리라.>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소따빳띠 막가와 팔라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빅쿠니 담마딘나는 막힘 없이 대답했다. 그래서 그는 같은 방식으로 사까다미 막가와 팔라에 대해, 아나가미 막가와 팔라에 대해 질문했는데 역시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으로 아라핫따 막가와 팔라에 대해 물어 보았는데, 이에 대해 빅쿠니 담마딘나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훌륭하십니다. 재가 신자여! 그러나 아라핫따의 경지에 관해서만은 부처님께 직접 여쭙는 것이 좋겠소.」
그런 대답을 들은 위사카는 과거에 자기 아내였던 담마딘나 빅쿠니에게 인사를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담마딘나 빅쿠니와 나눈 대화를 말씀드리고 부처님의 법문을 청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여래의 딸 담마딘나는 참으로 대답을 잘했구나.! 너의 질문에 대한 여래의 대답은 다음과 같으니라.」
하시며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Yassa pure ca pacchā ca 야싸 뿌레 짜 빳차 짜
majjhe ca natthi kiñcanam 맛제 짜 낱티 낀짜낭
akiñcanaṃ anādānaṃ 아낀짜낭 아나다낭
tamahaṃ brūmi brāhmaṇaṃ 따마항 브루미 브라흐만앙
그는 과거. 현재.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물질의 소유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시간에 얽매임이 없으며 집착에서 벗어났나니
나는 그를 브라흐마나라 부른다.
(Dhp421)
(거해스님역)
위사카와 담마딘나는 부부이었는데, 어느 날 남편 위사카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난 뒤에 ‘아나함’이 된 것이다. 아나함이 되면 ‘감각적 욕망’이 소멸되었으므로 더 이상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위사카는 아내에게 떠나도 좋다고 말하고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주겠다고 말하고 심지어 좋은 사람 있으면 결혼까지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담마딘나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말하며 비구니가 된다. 그런 담마딘나는 마침내 아라한이 되어 전 남편인 위사카와 법담을 나누게 되는데, 그것에 대한 것이 법구경 421번 게송이고, 교리문답으로 정리된 것이 맞지마니까야 44번경인 쭐라웨달라경(교리문답의 작은 경)이다.
20가지 개체가 있다는 견해(유신견)
이 경에서 담마딘나비구니는 전남편의 유신견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20가지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 20가지 개체에 대한 견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20가지 개체가 있다는 견해(유신견)
오온 |
유신견 |
참 고 |
물질(색)4 |
물질을 자아로 여김 |
matter |
자아가 물질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김 |
| |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김 |
| |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김 |
| |
느낌(수)4 |
느낌을 자아로 여김 |
feelings |
자아가 느낌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김 |
| |
자아 가운데 느낌이 있다고 여김 |
| |
느낌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김 |
| |
지각(상)4 |
지각을 자아로 여김 |
perceptions |
자아가 지각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김 |
| |
자아 가운데 지각이 있다고 여김 |
| |
지각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김 |
| |
형성(행)4 |
형성을 자아로 여김 |
determinations |
자아가 형성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김 |
| |
자아 가운데 형성이 있다고 여김 |
| |
형성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김 |
| |
의식(식)4 |
의식을 자아로 여김 |
consciousness |
자아가 의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김 |
| |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다고 여김 |
| |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김 |
|
부처님이 추인하고
이렇게 아라한 담마딘나비구니가 전 남편 위사카에게 유신견에 대한 법문을 들려 주었는데, 이에 대하여 경의 끝 부분에 부처님이 칭찬하는 대목이 나온다.
[세존]
“비싸카여, 수행녀 담마딘나는 현명한 사람입니다. 수행녀 담마딘나는 크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비싸카여, 그대가 나에게 그 의미를 묻는다면, 나도 역시 수행녀 담마딘나가 설한 것과 같이 그와 같이 설명할 것입니다. 그 의미는 같으니, 그와 같이 받아 지니십시오.”
(쭐라웨달라경, Culavedallasutta, 교리문답의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44, 전재성박사역)
부처님은 담마딘나 비구니가 한 말에 대하여 추인한 것이다. 담마딘나 비구니가 한 말은 부처님이 말한 것과 같다는 말이다.
제 아무리 오랜 세월 수행을 하여도
이렇게 부처님은 자아가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 ‘삿된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려면 유신견부터 타파 하여야 하는데, 이 유신견은 중생과 성자를 가르는 ‘금강검’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 영혼, 참나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는 한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고, 제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수행을 하여 도를 닦았다고 할지라도 ‘범부(뿌툿자나, puthujjana)’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201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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