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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다나상가(Dānasaṅgha)담마 이야기

12연기 :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moksha 2017. 8. 23. 23:10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 티띨라 사야도 서문

 

1. 붓다의 연기법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1) 붓다의 가르침은 사성제다.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만 다룬다.

연기법은 원인과 조건에 따른 결과로 생길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삶에서 그 인과를 통찰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해준다.

 

2) 나라는 것은 물질과 정신의 무더기다.

이 무더기는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 조건에 의해 사라지면서 찰나마다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끊임없이 흐르는 다섯 무더기에 나라는 실체는 없다. 다만 이런 물질과 정신의 흐름을 나, 너,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여기에 어떤 실체가 있어서 현재의 몸과 마음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과 연이라는 조건의 성숙으로 생멸하는 물질과 정신이 있다. 연기법은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를 가르친다.

 

3) 생사윤회는 조건에 따른 것이다. 그 조건이 소멸하면 생사윤회도 없다.

모든 태어남은 조건이 있어서 시작할 뿐, 조건이 없으면 새로운 태어남이 없다. 태어남이 없다는 것은 생과 노사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모든 고통이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 12연기는 사성제의 원인과 결과를 보여준다.

집제를 원인으로 고제라는 결과가 있으며 다시 고제를 원인으로 집제라는 결과가 있다.

집->고->집->고->집->고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괴로움의 윤회다. 이런 윤회는 도제를 원인으로 멸제라는 결과를 성취할 때 비로소 끊어진다.

 

5) 12연기는 한 생명의 윤회에 대한 설명이다.

한 생명의 태어남과 죽음에 대한 과정, 그 안에서 겪는 괴로움과 그 소멸을 다루고 있을 뿐, 우주나 세상의 기원을 찾아내거나 진화에 대한 이론을 밝히는 것은 아니다.

  

2.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과 유사점

 

불교는 존재를 연기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신을 믿는 종교는 존재를 창조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존재를 창조자와 피조물로 보는 견해는 그 안에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는 믿음 하에 성립한다.

      

불교

기독교ㆍ힌두교ㆍ이슬람교

계와 정을 갖추고, 자비로 시작하여 지혜를 완성하고 해탈하는 길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신을 경배하고 신에게 귀의하라. 신과 하나가 되는 행복한 삶을 구한다.

자비(慈悲)와 청정(淸淨)으로, 성스러운 삶을 산다.

관용(寬容)과 순수(純粹)로, 성스러운 삶을 산다.

존재에 대하여 실체 없음(무아)을 말한다. 존재는 오직 정신과 물질이다. 물질은 지수화풍 사대의 조합이고, 정신은 마음과 마음작용의 조합이며 오온(물질ㆍ정신)의 흐름이 있다.

존재 안에는 몸과 분리되는 변하지 않는 실체(자아. 아트만)가 있다. 이 실체는 영원하다.

생명의 시원은 알 수 없다. 생명은 무명과 갈애라는 원인에 따른 결과물이다. 그 시작은 무지에 의해 막히고, 갈애에 의해 덮여서 알 수 없다.

생명은 시원이 있다. 그것이 창조주(대아 大我)다. 그럼 그 창조주는 어떻게 생겼는가?

무신론(無神論) → 인식론 → 무아를 통찰 → 집착을 소멸 → 괴로움에서 해탈한다.

유신론(有神論, 창조주) → 존재론 → 신과 합일 → 희열을 얻는다.

제법의 무상ㆍ고ㆍ무아ㆍ부정(不淨)을 통찰한다.

존재의 상락아정 (常樂我淨)을 추구한다.

 

불교는 관념과 실재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요구한다. 이 지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생기는 통찰지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사람, 개아, 남자. 여자는 관념(개념)이며, 이 관념이 가진 실재는 정신과 물질이다. 정신은 의식의 흐름으로 자신의 생각이 정신적 현상으로 표출된 것이며, 이 정신은 지수화풍 4대의 물질과 결합하여 한순간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런 물질과 정신의 상호작용은 완전한 해탈열반을 성취할 때까지 끊임없이 흐른다.

 

6근과 6경이 할 때 느낌이 일어나고, 그 느낌과 함께 일어난 지각생각을 일으키고, 다시 생각이 확장되면서 희론이나 망상으로 발전한다.

희론은 지금 경험한 느낌과 지각에 자기의 무의식을 덧칠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나다. 또는 내가 아니다. 내가 느끼고 지각했다. 이것은 옳다, 그르다 등으로 끝없이 관념(개념)을 확산해간다.

 

이것은 정신적 에너지, 곧 생각의 힘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실체는 없다는 것이 불교의 관점이다. 이런 현상은 현재라는 상황이 가진 여러 조건에 의한 것이다. 그 조건의 하나로 이런 생각의 흐름의 바탕에는 나라는 자아관념이 도사리고 있다.

이 자아관념은 자신의 자아를 확장하고 보호하려는 욕구로, 지금 접촉한 대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사량분별하는 희론을 일으킨다.

이처럼 희론에 빠져 있는 순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현실을 자기 색안경으로 보는 인지 왜곡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낸 희론은 고통이다.

붓다께서는 상윳따니까야, 육처상응, 보릿단의 경(S35:248)에서“희론은 질병이고, 희론은 종기이고, 희론은 화살이다. 그러므로 비구는 희론하지 않는 마음으로 지내야 한다.”라고 가르치셨다.


3. 연기법이 의미하는 것

 

1. 괴로움은 그 원인인 집제가 있고, 그 결과로 고제가 있다. 다시 고제가 원인이 되어 집제가 일어나는 결과가 있다. 연기법은 이렇게 계속 집⇒고⇒집⇒고⇒집...이 끊임없이 돌아가는 윤회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연기법은 이런 괴로움의 순환을 멈추는 길도 제시한다.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하는 도제와 그 결과로 괴로움이 소멸한 멸제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사성제의 다른 표현이다.

 

신을 믿는 종교는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있었고 신에 의해 창조된 나는 믿음과 수행을 통해 신과 합일하면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불교는 무신론으로 무아를 말하며 우주나 한 존재의 시작은 알 수 없다는 견해다. 그 이유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 무명과 갈애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점이나 장소는 관념이지 실재(reality)가 아니므로 불교는 존재의 시작을 실재(reality)의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무명과 갈애를 가진 중생은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수많은 새로운 조건들에 따라 매순간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면서 흘러간다는 것이다. 불교는 이런 존재의 흐름 안에 실제로 있는 것은 매순간 조건에 의해 변하는 일어남과 사라짐만 있다. 이런 무상한 성품으로 겪는 괴로움과 이런 생멸현상을 좌지우지하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를 통찰하는 수행법을 제시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몸과 마음을 나라고 알고 있던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보기 때문에, 나라는 관념에 대한 무명이 소멸되고, 나라는 존재에 대한 갈애가 소멸한다. 이것이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한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의 수행지도다.

 

2.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정신과 물질이다. 즉 정신과 물질은 실재이고 인간은 정신과 물질을 표현하기 위한 관념이다. 정신과 물질 안에 인간이라는 실체는 없다. 인간, 남자, 여자, 개아는 인습적 언어로 관념이다. 그들의 실재는 오온, 즉 색, 수, 상, 행, 식이다. 오온은 지수화풍 4대의 물질의 무더기와 느낌과 인식 지각과 축적된 성향인 행이라는 마음의 작용과 이들은 이끄는 식의 무더기가 모여서 생긴 물질과 정신이다.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오온에서 변하지 않는 실체, 자아나 영혼을 찾을 수 없다.

 

3. 세상에는 생명의 궁극적 근원이나 시원에 대해 제 1원인을 창조주로 보는 견해가 있고, 원인과 결과의 연속적 흐름에서 시원을 알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불교는 두 번째 견해로 존재의 시작은 무지에 의해 막히고 갈애에 의해 덮어져 알 수가 없다는 견해다. 원인과 결과로 돌고 도는 둥근 원에서 한 시작점을 정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단지 그럴만한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다. 그리고 이 결과는 다시 새로운 원인이 되어 새로운 결과를 가져온다.

 

4. 연기법은 삶과 죽음의 과정과 그것이 이어지는 원인과 조건을 밝힌 것이다. 현재의 삶은 지금 이전의 무명과 행을 원인으로 그에 맞는 물질과 정신이 생긴 것이며, 또한 이 물질과 정신으로 어떤 행위를 하는가에 따라 그에 맞는 물질과 정신이 다음 순간 새로 만들어진다. 이와 같이 물질과 정신의 연속적 흐름이 윤회이며 삶에서는 생과 노사로 경험한다.

 

5. 연기법은 자신의 삶의 질을 지금 여기에서 바꾸거나 수정할 수가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어떤 창조주의 뜻이나 사주팔자에 의해 미리 결정된 삶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이 순간에 항상 새로운 원인을 심기 때문에 그 결과를 미리 결정해 놓을 수는 없다.

과거와 미래는 지금 실재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여기만, 현재만 실재하는데, 이 현재는 다음 찰나 과거로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현재가 나타난다. 이처럼 현재는 업의 과보를 경험하는 현재가 있고, 이 과보로 인해 새로운 원인을 심는 현재가 함께 있다. 그러므로 항상 현재에 깨어있어서 지금 닥친 과보는 당당히 수용하고 선한 원인을 새로 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다.

 

현재는 오직 과거에 행한 행위의 결과일 뿐이고, 미래는 오직 현재에 행하는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여기에는 행위를 하는 ‘나’는 없고 행위를 한 업력인 에너지가 있다. 이 에너지의 질이 바로 현재 자신의 삶의 질인데, 그것은 다시 매순간 새로운 조건에 의해 변한다. 그래서 현재 어떤 원인을 만드는가에 따라 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삶의 질도 매순간 변한다. 이렇게 매순간이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성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해탈열반을 성취할 조건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6. 연기법을 이해하면‘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유신견, 상견, 단견을 제거하기 때문에 견청정(見淸淨)을 얻는다. 연기법을 이해하면 자신과 세상을 원인과 결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의심에서 해방되는 도의청정(度疑淸淨)을 얻는다.

모든 의심에서 해방되면 자신이나 세상을 수용하게 되며, 세상을 자애 연민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마음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며, 또한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남을 도울 수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일을 단지 원인과 결과로 볼 뿐, 그 안에 나이거나 남이라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라는 집착이 없는 순수한 자비희사의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낼 수 있다.

 

4. 연기법은 모든 의심을 건너는 가르침

  

연기법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1)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과거로부터 왔다. 과거에 행했던 행위로부터, 끝내지 못한 생의 노고로부터, 자신의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왔다. 무명을 우두머리로 갈애를 동반자로 행한 선하거나 불선한 업이 원인이다.

 

2) 우리는 여기에 왜 존재하는가?

지혜로운 이에게는 이번 생이 잘못된 행위, 그릇된 관점, 삶과 죽음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으며, 과거에 쌓아놓은 짐을 제거하며, 중도의 길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중도의 길이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 팔정도다. 매순간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은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3)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한 행위가 원인이 되어 그 결과를 향해서 나아간다. 삶의 수고를 다하지 않은 이는 생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고달픈 삶을 되풀이 할 것이다. 그러나 중도(中道)의 길을 따라가 삶의 수고를 다 마친 이는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에 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