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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따마 붓다의 가르침/다나상가(Dānasaṅgha)담마 이야기

(7) 사띠(sati, 念)와 새김

moksha 2017. 8. 21. 20:26

사띠(sati, 念)와 새김

 

초기 경전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사띠(sati)’의 번역어를 보면 ‘마음챙김’,‘마음지킴’,‘알아차림’,‘새김’등이 혼잡되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번역어가 가장 원어인 ‘사띠(sati)’의 뜻에 부합하며 타당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다음의 내용은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퇴현 전재성님의 견해를 게재한 것이다.

 

최근에 위빠싸나 수행자들 사이에 이‘사띠’를 두고‘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대세가 되고 있다. 일부에서는‘마음지킴’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사띠’는 내용적으로, 마음이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것이며, 분별적인 사유나 숙고에 휩싸이지 않고 대상을 알아채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을 단순히 고려한다면,‘사띠’를‘마음챙김’이나‘마음지킴’으로 번역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을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몇 가지 모순을 갖는다.

 

 

첫째, 모든 가르침의 요소들이 마음과 관계되는 것인데 유독‘사띠’에만 별도로 원래는 없는 마음이란 단어가 부가될 이유가 없다.

 

둘째, 올바른‘마음챙김’이나‘마음지킴’이라는 말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지향하는 올바른 정진과 특히 내용상 구분이 어려워질 수 있다.

 

셋째, 네 가지 새김의 토대[cattāro satipaṭṭhāna, 사념처(四念處)]에서 토대가 되는 명상주제의 하나에 마음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을 두고 마음에 대한 마음의‘마음챙김’이나 마음에 대한 마음의‘마음지킴’이라고 삼중적으로 번역하는 잘못이 발생할 수 있다.

 

넷째,‘사띠’라는 빠알리어 자체에는‘마음’은 커녕‘챙김’이나‘지킴’이라는 뜻도 어원적으로 없다.

 

이‘사띠’에 대해서는 부처님이 직접 쌍윳따니까야에서 정의 내린 부분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시작한다. (SN.45:3)”-을 고려하여 번역하는 것이 제일 타당하다. 여기서는 분명히 기억과 사유가 새김의 전제조건으로 확실히 이에 대해 해석적인 설명 즉 기억과 사유의 일치점을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사띠(sati)’라는 말은 범어의‘스므르띠’(sk. smṛti)의 빠알리어 형태로 원천적으로‘기억’이란 뜻을 갖고 있으나,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지금 여기에서의 분명한 앎’이란 의미도 갖고 있으므로 그 둘 다의 의미를 지닌 우리말을 찾던 역자는‘새김’이란 가장 적절한 번역어라고 생각한다. 새김은 과거에 대한 ‘기억’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조각(彫刻)’-물론 사유를 은유적으로 이해할 때에 - 이라는 의미를 모두 함축하기 때문이다. 기억이 없이는 사물에 대한 지각을 올바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새김의 토대에 대한 경[Satipaṭṭhānasutta, MN.10 : 염처경(念處經)]에서‘사띠’가 주로 관찰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지금 여기에서의 분명한 앎’으로서의 새김과 관련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