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가 아니라 공업일 뿐이라고? 조계종 공업론(共業論)은 물타기
불교용어에 공업(共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별업은 들어 보았어도 공업이라는 말은 생소합니다. 공업이라는 말은 초기경전에서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공업이라는 말이 요즘 종종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 모두 공동책임이라 하여 공업을 강조합니다. 과연 공업이라는 말은 타당한 것일까요?
뭐? 우리 모두가 만든 공업(共業)이라고?
세월호사건이 났을 때 공업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크고 굵직굵직한 사건이터졌을 때 종종 공업이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공업이라는 말이 불교내부의 ‘모순’과 ‘위선’과 ‘거짓’을 감추는데도 활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불교신문 대담기사에서 “모든 결과 우리 모두 항께 만든 공업”라는 표제어와 함께 이런 기사 내용을 보았습니다.
적자생존과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라는 패러다임에 우리는 아직도 갇혀 있다. 그래서 이토록 괴롭다. 누군가가 나에게 ‘적폐 대상’이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기분이 나빠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참회는커녕 도리어 증오심과 적개심만 일어난다. 낱말마다 고유한 에너지가 있다. ‘적폐’라는 단어는 일말의 감동도 주지 못하며 저항적이고 협박적이며 분리와 배제의 언어다.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 따르면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과는 누구 하나의 과오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든 공업(共業)이다. (이향민 인드라망연구소장. 불교신문 2017-08-08)
이향민 소장에 따르면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과는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공업이라 합니다.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요즘 불교계 현안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요즘 의식 있는 스님들과 깨어 있는 불자들이 총무원장직선과 불교적폐청산을 거세게 외치고 있습니다. 자승종권 8년 동안 쌓인 적폐가 청산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득권자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적폐라는 것이 다름 아니라 공업에 따른 것이라 합니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적폐는 종단의 문제가 아니라 비판하는 자들의 몫이라고도 합니다. 종단이 잘못한 것도 불자들 모두의 문제라고 떠 넘기는 것과 같습니다. 전형적인 물타기라 볼 수 있습니다.
비열한 공업론(共業論)
공업이라는 말은 종단이 어려움을 겪을 때 마다 늘 나오는 말입니다. 불자수가 3백만명이나 감소한 것이 8년 집권한 자승총무원장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 하는가 하면,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우리 불자들 모두의 책임도 있다는 것입니다. 불자들은 졸지에 3백만 불자들이 감소하는데 일조하게 된 것입니다.
불자수가 3백만명이나 감소한 것은 스님들이 도박을 하고, 음주를 하고, 폭행을 하고, 은처를 두는 등 오계를 어기는 행위도 있을 것입니다. 또 사유지라 하여 등산로를 막아 놓고 입장료을 징수하는 행위가 10년 동안 벌어졌는데 이에 대한 국민들의 불쾌와 분노가 불자수 3백만명 감소의 영향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 공동의 책임이다’라고 넘겨 버리는 것이 소위 ‘공업론’입니다.
큰사건이나 사고가 터졌을 때 장관이 책임지고 물러납니다. 내각제라면 내각이 총사퇴하고 선거를 통해서 심판 받습니다. 종교단체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종단을 책임지고 있는 행정가형 총무원장의 경우 종단에 큰 문제가 발생 했을 때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잘못 했으면 사과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더 큰 잘못을 했으면 책임지고 사퇴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선거로 선출된 행정가형 총무원장의 태도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공업이라 하여 우리 모두 공동책임으로 돌린다는 것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물타기 하는 비열한 수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업론의 근거는
공업이라는 말은 초기경전에 없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공업이라는 말을 한적이 없습니다. 다만 대승경전 화엄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불자들이여, 비유를 들자면 삼천대천세계가 한 가지 인연이나 한 가지 사실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한량없는 인연과 한량없는 사실로써 이루어진다. 이른바 큰 구름을 일으켜 큰 비를 내리고 네 가지 풍륜이 서로 지속하여 의지가 된다.
네가지란, 하나는 능히 지님[能持]이니 큰 물을 지니기 때문이며, 둘은 능히 소멸함[能消]이니 큰 물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며, 셋은 건립함이니 모든 처소를 건립하기 때문이며, 넷은 장엄함이니 장엄하여 퍼뜨림이 다 교묘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모두 중생들의 공업과 보살들의 선근으로 일으키는 것인데, 그 가운데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저마다 마땅한 대로 받아서 쓰게 한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인연으로 삼천대천세계가 이루어지는데 법의 성질이 으레 그런 것이고, 내는 이도 없고 짓는 이도 없고 아는 이도 없고 이루어지는 것도 없지만 저 세계가 성취된다.
(화엄경, 여래수량품, 신역화엄경-동국역경원, 법정스님역)
이것이 공업론의 근거입니다. 대승경전 중에서도 화엄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단 한번 나옵니다. 업이라는 것이 개별적으로 짓는 것임에도 공업개념으로 확장하여 ‘우리모두의 책임이다’라고 근거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경에 따르면 삼천대천세계가 한량 없는 인연으로 엮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대승불교의 법계연기사상입니다. 연기법을 개인에서 우주로 확대시킨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상호의존관계로 보았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중생들의 공업’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공업론이란
공업은 화엄경에 한번 등장합니다. 이와 같은 공업에 대하여 대승불교의 아비달마구사론에서 보충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아비달마교학의 권위자 권오민 교수에 따르면 공업에 대하여 “유정의 업에는 크게 유정 각각의 개별적인 업(別業)과 그들 공동의 업(共業) 두 가지가 있는데, 전자가 유정 각자의 삶을 결정짓는 업이라면, 후자는 객관의 세계를 형성하는 업으로 말하자면 우주적 에네르기라고 할 수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공동의 업, 즉 공업은 객관의 세계를 형성하는 업이라 합니다. 객관의 세계란 기세간을 말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인간이라는 인간세계가 되고, 천상이라면 천상의 세계가 되고, 지옥이라면 지옥의 세계가 됩니다. 각 세계는 공통적인 업을 가진 자들이 만들어낸 세계입니다. 마치 끼리끼리 모이듯이 업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한세계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주적 에네르기’라 했을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 공업과 유사한 개념이 있기는 합니다. 디가니까야 ‘하느님의 그물의 경(D1)’이 그것입니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언제 어느 땐가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 세계가 생성되는 때가 있다. 세계가 생성될 때에 텅 빈 하느님의 궁전이 나타난다. 그 때 어떤 뭇삶이 수명을 다하고 공덕이 다하여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에서 죽어서 텅 빈 하느님의 궁전에 태어난다.”(D1)라 되어 있습니다. 업력으로 새로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최초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나중에 업력으로 태어나는 자들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을 창조한 자가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중생들은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납니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지옥의 경(A5.145)’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고, 거짓말을 하고,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리를 갖추면 그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 (A5.145)라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하는 말은 “그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입니다. 오계를 지키지 않아 지옥에 태어나기에 적합한 업을 지었기 때문에 지옥에 태어난 것입니다. 오계를 지키는 삶을 살았다면 인간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보시하고 지계하는 삶을 산다면 천상에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의 세계관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천상이라 하여 육도가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이 될 조건을 가졌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대개 오계를 준수하면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사는 세상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비슷한 조건을 가진 자들의 ‘업력’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공업(共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별업이 모여서 공업이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공업을 공동책임을 묻는 것으로 변질 되었습니다. 불자들이 3백만명이나 빠져 나가도 모두 공업으로 돌립니다. 마치 세월호사건이 났을 때 공업으로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으로 돌렸을 때 ‘물타기’가 됩니다. 책임 져야 할 사람은 책임지지 않고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떠 넘기는 것입니다.
자연과 환경파괴
공업이라는 말은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나옵니다. 여래출현품에 “이런 것이 모두 중생들의 공업과 보살들의 선근으로 일으키는 것인데”라 하는 것이 공업론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업에 대한 주석을 보면 “공동으로 선악의 행위를 하고, 공동으로 고락의 과보를 받는 것”(신역 화염경 167쪽, 법정스님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이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주석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에서 잘못을 저지른 자들에게 ‘빠져 나갈 구멍’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공동으로 선악의 행위를 한다는 것은 공동선과 공동악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해 애쓴다면 공동의 행복을 가져 올 것입니다. 반면 공동체가 모두 공동의 악을 저지른다면 모두 공동의 악과보를 받을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자연과 환경의 파괴를 들 수 있습니다.
에너지를 마구 낭비하고 공해물질을 배출한다면 자연과 환경파괴는 필연적입니다. 이산화탄소 배출 등으로 인하여 오존층이 파괴되면 기온이 상승하게 되고, 기온 상승은 북극관 남극의 얼음을 녹이게 되어서 해수면이 상승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공업이라면 공업일 것입니다.
행정가나 정치가가 자신의 실책을 감추고 면하기 위하여 모두의 잘못으로 돌린다면 공업이라 볼 수 없습니다. 공업론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고 책임을 모든 사람에게 떠 넘기는 면피용입니다. 한마디로 빠져 나갈 구멍을 마련하기 위하여 공업론을 외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부패한 조계종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식 공업론
세월호 참사가 났었을 때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아까운 목숨을 살렸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세상은 부처님의 말씀처럼 인드라망으로 연결돼 있다. 세월호 참사는 누구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저지른 공업의 결과다. 잘못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래서 참회와 반성 또한 우리의 몫이다.”라 합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세월호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국민들까지 끌어들여 ‘공업 운운’한다면 지나치다고 봅니다.
공업론자들에 따르면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 다리가 끊어져도 공업이라 할 것입니다. 하늘에서 비행기가 날다 추락해도 공업 운운하며 국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할 것입니다. 이런 논리가 요즘 불교계에서도 말해지고 있습니다. 종단의 기득권자들에 따르면 불자수가 3백만 불자수가 감소한 것도 불자들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불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나 단체의 영향도 있다고 합니다. 이는 면피용입니다. 공업론이 책임을 피하기 위하여 활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비판론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적반하장(賊反荷杖)입니다.
적반하장은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뜻으로 잘못한 사람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을 도리어 나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논리라면 스님들이 도박을 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도 공업이고, 스님들이 밤샘술판을 벌여 세간의 지탄의 대상이 된 것도 공업입니다. 용주사 은처승 문제도 공업이고, 마곡사 불법선거도 공업일 것입니다. 자승총무원장이 재임중 갖가지 잘못을 저지른 것도 자승원장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불자들 모두의 공업이 됩니다. 심지어 적광스님을 납치해서 죽도록 때린 것도 우리 불자들 모두 공동책임이 됩니다.
공업론은 물타기이자 물귀신작전
이향민 인드라망연구소장은 불교신문 대담에서 ‘공업론’을 꺼내 들었습니다. 현 종단이 처한 제반문제가 자승종권 8년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불자들 공동의 책임이라 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 따르면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과는 누구 하나의 과오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든 공업(共業)이다.”라 했습니다. 그리고 불교신문에서는 부제로서 “모든 결과 우리 모두 함께 맏는 공업”이라든가, 심지어 “적폐 아닌 공업”이라 합니다. 이는 물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적폐세력이 위기에 내몰리자 ‘적폐가 아니라 공업일 뿐’이라고 물귀신 작전을 쓰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공업이라는 말은 본래 부처님 가르침에 없는 말입니다. 공업은 “객관의 세계를 형성하는 업으로 말하자면 우주적 에네르기”라 하여 같은 업을 지은 중생들이 만든 세상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공업을 확대해석하여 “공동으로 선악의 행위를 하고, 공동으로 고락의 과보를 받는 것”라는 것은 지나친 것입니다. 이런 말은 초기경전에도 없고 대승경전 화엄경에도 없는 말입니다. 이런 논리를 잘못 적용하면 “누구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저지른 공업의 결과다.”가 됩니다. 전형적인 물타기이고 물귀신 작전입니다. 적반하장을 일삼는 자들이 흔히 쓰는 술책입니다.
2017-08-0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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