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승들이여, 이 사람을 쫓아내라” 자비로움의 분노에 대하여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사람들은 좀처럼 남의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남말은 열심히 하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종단의 일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을 겁니다. 재야불교단체에서 대규모로 추진 된 7.27촛불법회에 대하여 알고 지내는 법우님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단 한사람만 답신이 있었고 참여하겠다고 했습니다. 나머지 법우님들은 긴 침묵모드인 것 같습니다. 괜히 문자보낸 것 같아 후회의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래도 가능성 있는 법우님들에게 보낸 것인데 침묵이 길어지자 큰 실례를 한 것 같아 안절부절했습니다. 결국 실례한 것 같다는 사과 문제를 보냈습니다.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모이게 한 것이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매일 조계사일주문앞에서 피켓팅하는 법우님들은 놀랍습니다. 아니 불가사의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그 자리에 서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정성이어서일까 조계사일주문피켓팅은 성공적으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관심했던 불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보이고 스님들도 나와 지켜 보는가 하면 직접 피켓인증샷을 찍기도 합니다.
문자로 소통하는 시대에
활동가들의 모임에 참여한지는 오래 되지 않습니다. 3년전 우연한 기회에 밖으로 나온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작년 100인 대중공사에 참여 하면서 본격화 되었습니다. 처음 총무원직선실현이라는 취지로 적은 인원으로 출발했으나 지금은 제불교단체, 제승가단체가 결집하는 단계로 발전하여 마침내 7.27촛불법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추진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이 개진 되었습니다. 이른바 방법론에 대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효과를 극대화 하는 것입니다. 특히 촛불행진에 대하여 첨예하게 대립되었습니다. 촛불도 집회이기 때문에 집회의 성격을 살려 구호를 외쳐 의사를 전달하자는 측이 있는 반면 촛불이 법회이기 때문에 명상걷기 식으로 여법하게 하자는 주장이 대립되었습니다. 이런 논의는 바람직한 것입니다. 결정된 대로 따라 가기 보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표출하여 공감대를 확산한다면 바꾸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것은 견해차이로 인한 갈등입니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이든 갈등이 없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이를 잘 승화한다면 발전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로지 문자로만 소통했을 때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자의 한계일 것입니다. 이른바 ‘워딩(Wording)’이라 하여 글이나 연설, 발언 등에서 신중하게 골라 쓰는 문자나 어구를 파악해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오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문자로 풀기 보다 직접대화로 푸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찜찜한 것은 안고 갈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해소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각자 자신의 정진과 수행력으로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문자로 소통하는 시대에 가급적 격려하는 말, 칭찬하는 말, 자애로운 말이 필요합니다. 한마디 문자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오해가 발생하여 뛰쳐 나갈 수 있습니다. 가급적 문자를 줄이고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말을 많이 하면 반드시 실수하게 되었습니다. 문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르침의 테두리 안에서 언어 행위한다면 얼마 든지 가능한 것이고 실수는 줄어 들 것이라 봅니다. 문자 한마디에 상처 받고, 문자 한마디에 격려 받는 것이 요즘 세상입니다. 이왕이면 격려나 칭찬, 사랑스런 언어 행위를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습니다.
불교인들이 크게 결집했다
마침내 7월 27일 저녁 7시 보신각광장에서 촛불이 타올랐습니다. 비록 LED촛불이기는 하지만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서 빛을 발산한 것입니다. 행사가 시작 전에 광장에는 한 두 사람 안면 있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서로 반갑게 맞이 하며 서로 근황을 묻습니다. 이렇게 대규모 법회가 있는 날이면 오래 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한번 보면 초면이라 하지만, 두 번, 세 번 보면 이미 익숙한 얼굴이 되어 구면입니다. 서로 말한 적이 없는 사람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서로 반갑게 인사합니다. 일종의 ‘동지의식’일 것입니다.
보신각광장에는 500 가량 모였습니다. 특히 스님들이 많이 참석했습니다. 피부색깔이 가무잡잡한 외국인 스님들도 있었습니다. 스무명 가량 되는 스님들은 행사장 맨앞에 두 열로 앉았습니다. 그 뒤에는 제불교단체와 신도단체들의 불자들이 자리했습니다.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을 때는 광장이 꽉 차는 느낌이었습니다.
오랜 만에 불교인들이 크게 결집했습니다. 그동안 불교인들은 은인자중해 왔습니다. 알면서도 참고 지내온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계기가 되면 결집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작년 촛불집회가 그 동안 쌓이고 쌓인 힘이 폭발한 것과 같습니다. 그 동안 크고 작은 행사로 쌓이고 쌓인 힘이 응축되어 마침내 7월 27일 저녁에 폭발해 버린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
적극적인 참여자를 활동가들이라 합니다. 비록 숫자는 많지 않지만 한국불교를 이끌어 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늘 바른 길로 가도록 유도 하는 자발적 참여자들입니다. 만약 자발적 참여자들이 없다면 탐욕에 눈 먼 자들은 더욱 더 활개칠 것입니다. 이제 한계에 이른 상황에서 불자들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정의로운 분노 또는 거룩한 분노라 부를 수 있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사회용어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불의가 판칠 때 정의라는 말은 빛을 발합니다. 그런데 정의라는 말은 불교용어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숫타니빠따에 ‘정의로운 삶의 경(Sn2.6)’이 있습니다. 불과 열 개의 게송으로 되어 있는 짤막한 경이지만 현재 한국불교의 현실을 잘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경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마치 똥구덩이가
세월이 지나면,
똥으로 가득 차듯,
부정한 자는 참으로 깨끗해지기 어렵다.”(stn279)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자는,
실제로는 세속에 묶여,
악을 원하고 악한 의도를 갖고 있는 자로서,
수행의 초원에서 악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라.” (stn280)
“그대들은 화합해서
그러한 사람을 물리치고,
쌀겨처럼 그를 키질하여
쓰레기처럼 날려 버려라.” (stn281)
“그리하여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 체하는 악한 욕망에 사로 잡혀 있고,
수행의 초원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
그 쌀겨들을 날려 버려라.” (stn282)
정의로운 삶의 경은 출가수행자들을 위한 경입니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승들이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파당을 만들어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했을 때 이를 ‘똥’과 같이 본 것입니다.
똥은 조금만 묻어도 악취가 납니다. 그런데 똥구덩이에 쌓인 악취는 말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 자들은 똥과 같습니다. 이들이 승단에 남아 있는 한 마치 오물장 처럼 악취가 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정한 자들에 대하여 똥구덩이가 “세월이 지나면, 똥으로 가득 차듯 부정한 자는 참으로 깨끗해지기 어렵다.”라 한 것입니다.
담마짜리야(dhammacariyā)에 대하여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는 법대로 살지 않는 자입니다. 경의 제목이 ‘정의로운 삶의 경’인데 이는 빠알리어로 ‘Dhammacariyasutta’라 합니다. 여기서 담마짜리야는 ‘observance of righteousness, Religious life, piety’의 뜻으로 정직한 삶, 종교적 삶, 경건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빠알리어 ‘dhammacariyā’는 ‘dhamma+cariyā’의 형태로서 ‘법(dhamma)’과 ‘행위 (cariyā)’의 결합어입니다. 아닌 법대로 사는 삶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정의로운 삶입니다. 부처님 가르침(Dhamma)대로 사는 것도 정의로운 삶입니다. 이는 여법한 삶이고 법다운 삶입니다. 그런데 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처님은 놀랍게도 키질로 날려 버리라 했습니다.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자. 법대로 살지 않는 자,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척 하면서 사는 자들을 쌀겨를 키질하여 날려 버리듯이 쫓아 내버려 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로움의 분노에 대하여
법회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옆에 있던 이도흠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최근 이교수님은 조계종 적폐청산 10문 10답을 작성했습니다. 앞으로 수 천 장을 만들어 각 사찰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배포 예정입니다. 이도흠교수님은 문건과 관련하여 ‘자비로운 분노’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의 경을 예로 들었는데 초기불교는 물론 대승경전에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대방편경’입니다.
대방편경은 부처님께서 전생에 선원이 500명이 되는 배의 선장일 때의 이야기입니다. 1명의 악한 선원이 나머지 선원을 죽이고 배를 뺏으려 하는 음모를 알게 된 선장은 그를 설득하며 말렸습니다. 끝내 고집을 꺾지 않는 선원을 보며, 선장은 악한 선원때문에 499명이 죽을 것이라는 걸 알고 결국 자신이 무기를 들고 선원을 죽인다는 이야기입니다. 경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내가 저 선원을 죽이지 않으면 다른 499명이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죽이면 나는 499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또한 그가 499명을 죽이는 죄를 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인 죄에 따른 악업의 결과를 그대로 받게 된다. 게다가 만약 내가 음모를 꾸미는 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499명의 죽음에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래서 선장은 무기를 들고 그 선원을 죽입니다. 그가 바로 부처의 전생인 대비선장입니다.”
이도흠 교수님에 따르면 대방편경 대비선장이야기는 오로지 티벳장경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라 합니다. 한문으로 된 것도 있지만 달라이라마가 미국달마사에서 한 말씀을 옮겨 놓은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매우 생소한 내용입니다. 더구나 살생을 용인하는 듯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살생을 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이는 오계로서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상윳따니까야 ‘전사의 경’에서는 “그 전력을 다해서 싸우는 자를 적들이 살해하여 죽인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지옥이 있는데 있는데 그곳에 태어납니다.” (S42.3) 라 하여 전쟁터에서 전쟁하다 죽으면 모두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티벳장경에 있다는 대방편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된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조직이나 단체에서 불의가 판을 친다면 그대로 내 버려 둘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럴 때 흔히 정의로운 분노를 이야기합니다.
대방편경에서는 499명 구하기 위해 한명을 살해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모두가살해 될 운명에 처해 있을 때 악한 마음을 품은 자 한명을 살해하고 나머지 499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기꺼이 살인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경에 따르면 선장은 기꺼이 ‘지옥고’를 감수하며 살인합니다. 자신 한몸 희생해서 나머지 499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는 정의로운 분노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도흠 교수는 ‘자비로움의 분노’라 합니다. 분노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소멸의 대상이지만 공동체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중생에 대한 자비의 마음이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왜 푸른 목을 가지게 되었는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소멸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이는 개인적인 수행의 관점에서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조직이나 단체 등 공동체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분노를 필요로 합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거룩한 분노’라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정의로운 분노’라 합니다. 그런데 한차원 더 높은 것이 ‘자비로운 분노’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몸 희생에서 더 큰 악을 막아 보자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과보는 자신이 안고 가는 것입니다. 마치 ‘청경관음(靑頸觀音)’을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불교에 청경관음이 있습니다. 목이 푸른 관세음보살을 말합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닐라간타(Nilakantha)’라 합니다. 그렇다면 왜 푸른 목을 갖게 되었을까요?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의 ‘천수다라니와 붓다의 가르침’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뱀 바쑤끼가 있는 힘을 다해 푸른 독을 내 뿜었기 때문에 신들과 악마들이 눈이 멀고 말았다. 모든 생명들의 목숨도 절멸의 위험에 처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바신이 그 푸른 독을 한접시에 모아 간단히 마셔 버렸다. 그러나 삼키지는 않고 목에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바신은 ‘푸른 목’을 갖게 되었다. 이 사실은 시바신이 모든 생명을 독이 있는 고해에서 살려내기 위하여 자비를 실천한 불사의 신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전재성박사, 천수다라니와 붓다의 가르침, 73쪽)
천수경을 보면 “니라간타 나막 하리나야 마발다이사미”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 푸른 목을 지니게 된 것은 중생구제에 대한 자비심에 따른 것입니다. 중생을 위하여 윤회의 바다에 뛰어들어 기꺼이 독을 마셔 없애 버린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를 가장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은 독을 마시고도 죽지 않는 불사(不死)입니다. 그래서 천수경에서 “니라간타 나막 하리나야 마발다이사미”라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목에 푸른 빛을 띈, 그 마음을 노래합니다.”라고 번역됩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의 함성으로
부처님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분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살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개인적인 한정될 수 있습니다. 공동선을 위해서는 정의의 분노, 거룩한 분노, 자비의 분노는 허용될 것입니다. 모두 다 침묵하고 있을 때 기꺼이 나서는 것도 개인적인 분노를 넘어 자비로움의 분노라 볼 수 있습니다. 이날 7월 27일 저녁에 모인 5백명 가량 모인 촛불은 거대한 강을 이루었습니다. 조계사길 한쪽 차로를 따라 조계사까지 행진 했습니다. 원래 계획에는 명상걷기라 하여 묵언으로 행진 예정되어 있었으나 참을 수 없는 분노는 함성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작년 촛불집회에서처럼 깃발과 플랑카드, 피켓을 들고 자승아웃과 적폐청산을 외쳤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 사람을 쫓아내라.”
‘쭉정이는 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신동엽시인의 시로 4.19혁명의 순수성만 남고 허위는 가라는 현실참여에 대한 시입니다. 시에서는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라고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시의 모티브가 되는 듯한 것이 초기경전에서 발견됩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잡초의 경(A8.10)’이 그것입니다.
부처님은 잘못을 저지른 수행승을 꾸짖었습니다. 잘못을 추궁받은 수행승이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가 하면 화를 내고 불만을 드러내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 사람을 쫓아내라. 수행승들이여, 이 사람을 쫓아내라. 수행승들이여, 이 사람을 멀리해라. 왜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 때문에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가?”(A8.10)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잘못을 저지른 수행을 쫓아 내라고 했습니다. 다른 수행승들을 괴롭히는 수행승과 함께 살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런 수행승에 대하여 “그는 수행자를 더럽히는 자이고 수행자의 쭉정이고 수행자의 쓰레기이다.” (A8.10) 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대다수 수행자들이 싫어하는 수행승을 쓰레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쌀겨를 키질 하여 키질로 날려 버려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보리가 익어갈 때 보리를 더럽히는 것이고 보리의 쭉정이고 보리의 쓰레기가 생겨났는데, 이삭이 아직 생겨나지 않는 한, 그 뿌리가 다른 훌륭한 보리와 같고, 그 줄기가 다른 훌륭한 보리와 같고, 그 잎사귀가 다른 훌륭한 보리와 같다. 그러나 이삭이 생겨나면,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이것이 보리를 더럽히는 것이고 보리의 쭉정이고 보리의 쓰레기이다.’라고 안다. 그렇게 알고 나서 뿌리 채 뽑아 보리밭의 바깥에 버린다.”(A8.10)
부처님은 쭉정이는 뽑아서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뿌리 채 뽑아야 함을 말합니다. 다른 수행승들에게 고통을 주는 수행승과 함께 살 수 없음을 말합니다. 마음이 오염된 자는 마치 똥구덩이 똥이 쌓이듯이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악취가 납니다. 부처님은 단호하게 쌀겨를 키질하여 날리버리듯이, 쭉정이는 뿌리 채 뽑아 없애듯이, 악하고 불건하고 남에게 피해만 주는 사람들을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공동선(共同善)을 위하여
사람들은 좀처럼 자신의 일이 아니면 남의 일에 관여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설령 공동체가 붕괴되는데도 가만 있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과감히 나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동선(共同善)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현재 조계사일주문앞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피켓팅하는 활동가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외에도 공동선을 위해서 음으로 양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그나마 이정도만이라도 유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은 단호합니다. 부처님은 악을 원하고 악한 의도를 갖고 있는 자에 대하여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로 규정하면서 “그대들은 화합해서 그러한 사람을 물리치고, 쌀겨처럼 그를 키질하여 쓰레기처럼 날려 버려라.” (stn280)라 했습니다. 이는 티벳장경에서 볼 수 있다는 대방편경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합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자는 쫓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한사람의 잘못으로 인하여 공동체가 무너져 내려 갈 때 그 한사람을 제거하여 공동체가 살수가 있다면 기꺼이 자신 한 몸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 대방편경의 가르침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청경존의 푸른 목과 같습니다. 고해의 바다에서 모든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기꺼기 독배를 마신 자비심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분노는 개인적인 분노의 지멸을 넘어 공동선을 위한 자비로운 분노라 볼 수 있습니다. 7월 27일 적폐세력이 깜짝놀랄 만한 대규모 촛불행진이 조계사길에서 있었습니다.
2017-07-2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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