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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깔라마의 경에 대한 이중적 잣대

moksha 2017. 7. 3. 18:00

 

깔라마의 경에 대한 이중적 잣대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이라도 믿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유명법사의 유튜브법문입니다. 거두절미한 것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도 자신이 체험해서 증득해야만 진리로서 받아 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심지어 스승이 이야기하는 것이라도, 부처님도 포함됩니다, 그대로 믿지마라.”라고 말한 것은 불자들에게 혼란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중적인 잣대를 보이는 자들

 

자칭타칭 도인이라 하는 사람들, 자칭타칭 법사라 하는 사람들이 종종 인용하는 경이 깔라마의 경(A3.65)’입니다. 그런데 상당수가 부처님이 말한 것도 믿어서는 안됩니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입니다. 마치 불교를 부정하는 듯 합니다.

 

불교인이 된다는 것은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지 말라고 했을 때 불자들은 큰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자가 있다면 그렇게 말한 자신의 말도 믿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도인이나 법사나 자신이 말한 것도 믿지 말라는 식의 말은 하지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 실컫 말해 놓고서는 내가 한 말이라고 해서 모두 믿지 마십시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마나한 말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실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내말도 믿지 마십시오.”라고 말한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부처님에 대해서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라도 믿지 마십시오.”라고 하여 이중적인 잣대를 보이고 있습니다.

 

깔라마의 경을 다시 찾아보니

 

깔라마의 경을 다시 찾아 보았습니다. 가장 핵심이 되는 열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Iti kho kālāmā yanta avocumha. Etha tumhe kālāmā mā anussavena, mā paramparāya, mā itikirāya, mā piakasampadānena, mā takkahetu, mā nayahetu, mā ākāraparivitakkena, mā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mā bhabbarūpatāya, mā samao no garū'ti. Yadā tumhe kālāmā attanā'va jāneyyātha: ime dhammā akusalā, ime dhammā sāvajjā, ime dhammā viññūgarahitā, ime dhammā samattā samādinnā ahitāya dukkhāya savattantī'ti. Atha tumhe kālāmā pajaheyyāthā'ti iti yanta vutta idameta paicca vutta.

 

“깔라마들이여, 당신들이 미심쩍어하고 의심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의심스러운 것은 미심쩍은 일에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나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 깔라마들이여, 이러한 것들이 악하고 건전하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이 잘못된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식자에게 비난받을 만하고, 이러한 것들을 실천하여 받아 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깔라마들이여, 그 때에 그것들을 버리십시오.(A3.65, 전재성님역)

 

 

 

 

 

 

 

 

경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이 그럴듯한 개인적인 인상이나‘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 (mā bhabbarūpatāya, mā samao no garū'ti)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빠알리어 bhabbarūpatāya’는 각주에 따르면 그럴듯한 가능성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유력한 인물의 발언은 받아들이기에 적당하다.”(Mrp.II.305) 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수행자(samaa)이나 종교적 스승(garū)이 말했다고 해서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스승이 말을 그럴싸 했을 때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행자나 스승을 믿고 따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먼저 수행자나 스승에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남아 있는지 파악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탐욕이 남아 있거나, 조금이라도 성냄이 남아 있거나, 조금이라도 어리석음이 남아 있다면 따라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수행자나 스승의 말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이는 체험해 보아야 함을 말합니다. 수행자나 스승이 말한대로 따라 했을 때 나에게 탐욕이나 분노나 어리석음이 발생했을 때 따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경에 따르면 수행자나 스승이 말한 것에도 끄달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외도의 수행자나 스승에 대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를 확대해석하여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도 믿어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경의 의미를 잘못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석적으로 살펴보면

 

깔라마의 경에는 모두 열 가지 사례가 소개 되어 있습니다. 이를 분석적으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전통(anussavena):

베다 성전의 전통에 의해

2) 전승(paramparāya):

여러 세대에 걸쳐 스승들을 통해 전승되어 온 온전한 전통에 의해

3) 소문(itikirāya):

들려오는 소문에 의해

4) 장경구족(藏經具足, piakasampadānena):

공인된 문헌상의 전통이 그러하므로

5) 논리(takkahetu):

추측에 의해

6) 추론(nayahetu):

공인된 도리(공리)가 그러하므로

7) 논거의 연구(ākāraparivitakkena):

가르침에 들어 있는 논거의 타당성에 의해

8) 견심체인(見審諦忍,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가르침과 개인적 견해들 간의 일치에 따라

9) 유능한 형상(bhabbarūpatāya):

스승의 권능에 미루어보아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10)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samao no garū):

스승의 인품과 평판에 대한 존경심에서

 

 

열 가지 구분은 사나트 나나야까라가 지은 깔라마 경 다시 읽기에서 참고한 것입니다.

 

왜 자기부정하는가?

 

과학적 합리주의 입각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는 자들은 경전을 믿지말라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후대에 편집되었다거나 후대에 삽입 되어서 진정한 부처님 가르침으로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깔라마의 경에 실려 있는 성전의 권위에 끄달리지 말고(piakasampadānena)”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이를 한자어로 장경구족(藏經具足)’이라 합니다.

 

경에서 성전이라는 말은 ‘piaka’를 뜻합니다. 영어로 ‘a basket’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one of the three main division of Pāli Canon’라 하여 빠알리성전을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이 ‘piaka’라 이야기 했을 때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라문교나 외도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기 쉽습니다. 특히 바라문 성전을 뜻하기 쉽습니다. 이는 경에서 가장 첫 번째로 전통(anussavena)”이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경에서 전통이라 했을 때 이는 베다 성전의 전통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을 성전이라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성전이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기경전에서 성전이라 했을 때 이는 베다성전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과학적 실증주의자들이나 회의론자들은 이를 확대해석하여 경전에 쓰여져 있다고 해서 모두 믿어서서는 안됩니다.”라 하여 자기부정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 어느 경전에서도 자기부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누군가성전의 권위에 끄달리지 말고(piakasampadānena)”라는 구절에 대하여 부처님도 자신이 한 말을 믿지 말라고 했다.’라고 한다면 부처님 스스로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모순이 됩니다.

 

왜 실없는 사람이 되는가?

 

만일 누군가가 부처님이 말씀 하신것도 믿지 마십시오.”라든가, “경전에 쓰여 있는 것도 믿지 마십시오.”라고 말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인이 되는 조건은 삼보에 귀의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그 가운데 가르침에 대한 귀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부처님 가르침이라도 믿지 말라든가 경전이라고 다 믿어서는 안된다라 했을 때 이는 삼보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 버려서 결국 불교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부처님은 자귀의법귀의를 말씀 했습니다. 이는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깔라마의 경을 들먹이며 부처님의 말씀도 경전도 믿지 말라고 한다면 불자들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까요? 그렇게 말한 자의 말을 믿어야 할까요? 그러나 그렇게 말한 자는 나의 말도 믿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스스로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실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왜 깔라마의 경이 왜곡되었나?

 

부처님은 결코 내 말도 믿지 말라.”고 말씀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후대사람들은 깔라마의 경을 예로 들어 부처님도 부처님의 말을 믿지 말라라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깔라마의 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서 일어난 오류로 봅니다.

 

스리랑카 사나트 나나야까라가 지은 불교와 합리주의(깔라마의 경 다시읽기)’에 따르면, 서양의 합리주의에 의하여 깔라마의 경이 왜곡되었다고 합니다. 과학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서양학자들에 의하여 그들 시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열 가지로 말씀 했지만 이를 부처님 가르침에게 까지 적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깔라마의 경에서 말씀 하신 것은 외도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깔라마인들에게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나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라고 말한 것은 외도에 대해서 말한 것이지 부처님 가르침에 까지 확대해석할 어떤 근거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열 가지를 부처님 자신에게 까지 확대했다면 이는 자기부정이 됩니다.

 

열 가지 기준을 설한 배경은

 

부처님이 깔라마인들에게 열 가지를 설한 것에 대한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육사외도 등 수 많은 사상이 난립했습니다. 온갖 사상이 광풍처럼 마을을 휩쓸고 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누구 말이 옳은지 혼란 스러웠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마을에 왔을 때 깔라마인들은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곳 께싸뿟따를 방문한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의 가르침만을 설명하고 계몽할 뿐, 다른 교리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욕하고 경멸하고 코웃음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이 왔는데 그들도 역시 차례로 자기의 가르침만을 설명하고 계몽할 뿐, 다른 교리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욕하고 경멸하고 코웃음치는 것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로서는 그들 존경스러운 수행자들과 성직자들 가운데 누가 진리를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미심쩍고 의심스럽기만 합니다.”(A3.65, 전재성님역)

 

 

깔라마인들이 사는 마을에 외도들이 다녀 간 것입니다. 외도 들은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사상의 혼란을 겪었습니다. 사상의 혼란을 부처님에게 호소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깔라마인들에게 깔라마의 경을 설한 것은 혼란을 덜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열 가지 기준입니다. 이런 기준을 적용하여 몸소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도 해당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느 경우에서든지 항상 올바랐다는 것입니다.

 

맛지마니까야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이 있습니다. 외도의 가르침에 사상의 혼란을 겪고 있는 장자들에게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좋습니다.”(M60)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하여 내말도 믿지 마십시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연기의 소멸과 생성원리로서 외도의 견해를 논파 했습니다. 부처님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란 다름 아닌 연기법입니다.

 

열 가지에 대한 판단 기준은

 

부처님이 깔라마인들에게 말한 열 가지에 대한 판단 기준은 결국 탐, , 치에 대한 것입니다. 외도들이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며 주장하지만 이런 것들을 실천했을 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증가 하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실천해서 탐, , 치가 소멸 되어 간다면 진리로서 받아 들여도 될 것입니다. 부처님은 탐욕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깔라마들이여, 탐욕을 여읜 사람이 탐욕에서 벗어나 마음이 현혹되지 않아,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고, 남의 아내를 겁탈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타인에게 이와 같은 것을 권하지 않으면, 그는 오랜 세월 유익하고 행복할 것입니다.”(A3.65,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깔라마인들에게 해준 가르침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장 기본적인 윤리에 대한 것입니다. 깔라마인들에게 처음부터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사성제를 설하지 않았습니다. 또 외도들 처럼 이것만이 진리이고 나머지는 거짓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사람들에게 지극히 평범하고 기본적인 윤리적 가르침을 설한 것입니다. 깔라마경에서 언급된 열가지는 외도들의 가르침이 올바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한 것입니다.

 

왜 확대해석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소멸시켜서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깔라마의 경에서 열 가지를 말했다고 하여 이를 부처님에게 까지 확대해석해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 해서 믿어서는 안된다거나 경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다 믿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부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초기경전 그 어디를 보아도 부처님이 자기부정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연기의 생성과 소멸의 원리로 외도들의 견해를 논파했습니다. 그럼에도 과학적 실증주의자들이나 소위 자칭타칭 도인, 자칭타칭 법사라고 하는 자들은 간단히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지나친 확대해석입니다. 이와 같은 확대해석에 대하여 사나트 나나야까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유 탐구라는 방법을 써서 붓다의 가르침(Dhamma)에 관한 일체의 지혜를 얻도록 「깔라마 경」이 백지위임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깔라마 경」뿐 아니라 다른 어떤 주석서에서도 이런 가정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불교와 합리주의)

 

 

깔라마의 경이 부처님의 지혜에 대한 출세간 가르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상의 혼란을 겪고 있는 범부들에게 윤리적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외도들이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하지만, 그런 이론이 삶에 이익이 되는지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그 판단 기준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입니다. 가르침을 따랐을 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증장하고 불행으로 이끈다면 무익한 가르침이라 했습니다. 그럼에도 경을 이해 못하는 자들은 열 가지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부처님에게도 적용하려는 것입니다.

 

깔라마의 경은 부처님 제자들에게 설한 것이 아닙니다. 외도들의 방문에 사상혼란을 겪고 있는 범부들에게 설한 것입니다. 범부들에게 처음부터 출세간적 가르침부터 설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믿음을 주는 가르침을 설하는 것입니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가르침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이 점차 성숙하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위험에 대한 가르침,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여읨의 가르침 순으로 진행합니다. 이렇게 가르침에 대한 기반이 확립 더되었을 때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사성제의 가르침을 설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차제설법입니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깔라마인들에게 설한 가르침에 대하여 부처님도 부처님이 한 말을 믿지 말라고 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중적인 잣대를 가진 자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업이나 윤회 등의 문제는 출세간적 지혜로 이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상의 혼란을 겪고 있는 일반인들에게 미칠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깔라마인들과 같은 범부들에게는 큰 지혜를 얻기 전까지는 믿음이 중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깔라마인들에게 설법한 것은 범부들에게 말한 것이고 열가지 사항은 외도에 해당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사상의 혼란을 겪고 있는 깔라마인들에게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나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라고 말한 것은 외도의 가르침에 해당됩니다.

 

만일 부처님이 부처님 말씀조차 믿지 말라고 했다면 자기부정에 해당됩니다. 그럼에도 자칭타칭 도인들, 자칭타칭 법사라하는 자들은 부처님이 말한 것도 믿어서는 안됩니다.”라든가, “경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다 믿어서는 안됩니다.”라 말하는 것은 자기부정이 됩니다이런 말이 진정성이 있으려면 내가 한말도 믿지 마십시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중적인 잣대를 가진 자들입니다.

 

 

2017-07-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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