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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만에 따른 자기정당화 웃닷짜(uddhacca)

moksha 2017. 7. 13. 17:59

 

자만에 따른 자기정당화 웃닷짜(uddhacca)

 

 

삽베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이른 아침 잠을 잘 잔 것은 잠자기 전에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친 것에 대한 보상이라 봅니다. 해뜨기 전 전조가 새벽이듯이, 지금 몸과 마음이 평안한 것은 착하고 건전한 행위의 결과일 것입니다.

 

마음이 혼란스런 상태에서 잠을 자면 잠 못 이루는 밤이 되기 쉽습니다. 뒤척이다 새벽을 맞았을 때 날 샜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날이 샜을 때 하루를 설레임으로 맞이 한다면 행복한 자일 겁니다. 반면 날이 샜음에도 잠을 청하는 자라면 낮과 밤을 거꾸로 사는 자라 볼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은 잔잔한 호수와 같습니다. 명경지수와 같은 호수입니다. 마음의 오염원이 착 가라앉았을 때 자연스럽게 자애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럴 때 빠알리어로 삽베삿따 바완뚜 수키땃따(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라는 말이 떠 올려집니다.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라며 바라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미세한 마음의 장애가 있는데

 

동트기전 이른 새벽은 마음에 장애가 없습니다. 선정에 들어가지 않았어도 마음의 오염원이 가라 앉아 있어서 탐욕, 분노,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환, 의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흙탕물이 정화 된 듯합니다.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 중에 흥분과 회환이 있습니다. 미래와 과거에 대한 것으로 미세한 마음의 장애입니다. 회환은 지나간 일에 대한 부끄러움이기 쉽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정당하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곰곰히 생각해 보니 고개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한 것입니다. 반면 흥분은 자신만이 옳다라는 자만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입장을 드러낼 때 자만과 흥분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박사는 오상분결 중의 하나인 흥분(uddhacca)에 대하여 자기정당화라 했습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려면 마음의 족쇄가 풀려야합니다. 유신견,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 가르침에 대한 의심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 탐욕과 분노가 옅어지면 한번 돌아 오는 자라 하여 사다함이라 합니다.

 

오하분결이 모두 풀리면 돌아 오지 않는 자라 하여 아나함이라 합니다. 거룩한 자 아라한이 되려면 오상분결, 즉 미세한 마음의 장애가 풀려야 합니다. 그 중에 자만(māna)과 흥분(uddhacca)가 있습니다.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지는 번뇌

 

성자의 흐름에 들면 어지간한 번뇌는 모두 제거됩니다.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번뇌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손톱 끝의 경(S13.1)’에 따르면 손톱 끝에 있는 흙먼지 보다 더 작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수다원에 대하여 이미 파괴되어 끝나 버린 괴로움이 더 많고 남아 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다.” (S13.1)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아직 남아 있는 괴로움을 이미 파괴되어 끝나 버린 괴로움과 비교하면 백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천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며 또한 그 십만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S13.1)라 했습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매우 적음을 말합니다. 하물며 사다함이나 아라함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아라한에게는 번뇌가 없습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에 남아 있던 다섯 가지 번뇌가 모두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섯 가지는 색계에 대한 집착, 무색계에 대한 집착, 자만, 흥분, 무명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아라한이 되기 전에 남아 있는 장애라 하여 오상분결이라 합니다.

 

오상분결은 매우 미세한 번뇌입니다. 이에 반하여 탐욕, 성냄 등 오하분결은 거친번뇌라 볼 수 있습니다. 아라한에게는 미세한 심리적 번뇌마저 사라진 것입니다. 그 중에 자만과 흥분이 있습니다.

 

아라한에게 자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라한에게 흥분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내가 누구인데?”라는 자만이 있다면 그는 아라한이라 볼 수 없습니다. 누군가 흥분이 일어나 들뜬 상태가 된다면 역시 아라한이라 볼 수 없습니다.

 

우월한 자의 자만(mana)

 

자만과 관련하여 앙굿따라니까야 거룩한 경지의 경(A6.76)’에 따르면 여섯 가지를 끊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섯 가지는 자만, 열등, 우월, 교만, 완고, 비열을 말합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이런 자만이 있음을 말합니다.

 

자만은 비교의식입니다. 남과 비교하는 것이 바탕이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남과 비교하여 우월하다거나 동등하다거나 열등한 마음을 말합니다. 놀랍게도 우열감도 자만으로 본 것입니다.

 

우월, 동등, 열등이라는 세 종류의 자만은 무상, , 무아를 통찰했을 때 사라집니다. 상윳따니까야 쏘나의 경(S22.49)’에 따르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함을 말합니다.

 

자만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지만 이를 세분 하면 모두 아홉가지가 됩니다. 우월에 대하여 우월, 동등, 열등으로 세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동등하다는 교만’,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이 생겨납니다. 동등과 열등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자만은 어떻게 부수어지나?

 

그렇다면 아라한 단계에서는 어떤 자만이 부수어질까요? 이에 대하여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1)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 2)동등한 자 가운데 나는 동등하다는 교만, 3)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을 말합니다. 나머지 여섯 가지는 수다원 단계에서 부수어집니다.

 

자만중에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이 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왕들이나 출가자에게도 생겨난다. 왕은 왕국이나 재산의 담지자로서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고 교만을 만든다. 출가자에게도 계행-두타행 등을 통해서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고 교만을 만든다.” (Smv.999-991) 라고 설명됩니다. 이러한 자만이 남아 있는 한 거룩한 경지 아라한이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누구인데라는 미세한 우월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자만입니다. 어찌보면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 자만이 작용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마저 내려 놓아야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케마까의 경(S22.89)’에 따르면 향기상자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옷을 세탁할 때 세제를 사용합니다. 비누와 같은 세제를 사용했을 때 옷이 마르면 비누냄새가 날 것입니다. 비누로 찌든 때를 벗겨 냈지만 비누냄새는 제거 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만은 비누냄새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케마의 경에 따르면 비누냄새마저 제거하는 향기박스를 제안합니다. 비누로 세탁한 옷을 향기박스에 집어 넣으면 비누냄새까지 잡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케마까는 그것을 향기가 밴 상자에 넣어 보관해서, 그는 거기에 배어있는 소금물냄새나 잿물냄새가 쇠똥냄새를 없애버립니다.”(S22.89)라 했습니다.

 

비누냄새를 잡는 향기박스는 다름 아닌 삼법인입니다.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로 통찰했을 때 마음에 남아 있는 찌꺼기라 볼 수 있는 자만이 제거됩니다.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인 탐욕, 성냄 등 오하분결에 대한 결박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오온 가운데 미세하게 발견되는 자만을 끊어 내지 못한다면 나라는 자만, 나라는 욕망, 나라는 경향을 끊어 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 자기정당화라 했을까?  

 

자만과 함께 오하분결을 구성하는 것 중의 하나가 흥분입니다. 흥분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웃닷짜(uddhacca)라 합니다. 그런데 오하분결에 있어서 웃닷짜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앙굿따라니까야 미가쎌라의 경(A10.75)’의 각주에서 자기정당화라 했습니다. 이런 용어는 전통적인 주석에서는 보이지 않고 독일 가이거의 주석에 따른 것이라 합니다. 전재성님이 흥분을 뜻하는 웃닷짜에 대하여 자기정당화로 설명한 것은 미세한 심리적 흐름으로 대단히 섬세하여 자기정당화로 번역한다.”(228번 각주)라 했습니다.

 

자만이나 흥분은 미세한 오염원이기 때문에 탐욕이나 성냄처럼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바탕에는 내가 누구인데라는 자만이 버티고 있습니다. 이런 자만은 태생적 자만, 배운 자의 자문, 부자의 자만도 해당됩니다. 겉으로 들어나 보이지 않지만 마음 한켠 무의식 저편에 또아리를 틀고 있을지 모릅니다.

 

자만 마저 버리는 것이 삼법인에 대한 통찰이라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무아의 가르침입니다. 무아가 되었을 때 더 이상 자만이나 자기정당화(uddhacca)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상분결에서 웃닷짜의 의미

 

웃닷짜는 영어로 ‘restlessness’라 하여 침착하지 못함, 불안의 뜻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열가지 족쇄에 속하는 것으로 다섯 가지 장애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웃닷짜에 대하여 ‘distraction(주의산만); flurry(동요); haughtiness(오만한)’의 뜻도 있습니다.

 

웃닷짜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미가쎌라의 경(A10.75)’에서 전재성님은 흥분으로 번역했습니다. 각주에서는 자기정당화라 설명했습니다. 초불연 대림스님은 웃닷짜에 대하여 경솔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웃닷짜는 흥분 또는 들뜸으로 번역됩니다.

 

웃닷짜에 대하여 한자어로는 도거()라 합니다. 도거에 대한 PCED194에 따르면 心浮動不沉著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들떠 있어서 어쩔줄 몰라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또 일본어 사전에는  のうわつき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들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웃닷짜에 대하여 ‘restlessness(침착하지 못함), distraction(주의산만); flurry(동요), haughtiness(오만한), 心浮動不沉著(마음이 들떠 있어서 어쩔줄 몰라함), のうわつき(마음이 들떠 있는 상태)’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외에도 不平衡焦躁不安의 뜻도 있습니다.

 

웃닷짜가 선정을 방해 하는 요소로 사용된다면 흥분이나 들뜸이 될 것입니다. 들 뜬 상태에서는 선정에 들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다면 집중할 수 없습니다. 웃닷짜가 흥분 또는 들뜸, 초조, 불안, 동요 등으로 사용된다면 대상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장애 중의 흥분과 회환에 대하여 파도 치는 물로 비유합니다.

 

자만에 따른 마음의 동요

 

웃닷짜가 마나(자만)와 함께 왜 오상분결에 속했는지 궁금합니다. 그 많은 마음의 요소 중에 하필이면 이 두 가지에 대한 것일까에 대한 의문입니다. 웃닷짜에 대한 여러 설명어 중에 haughtiness’가 있습니다. 이를 오만한이라 합니다. 오만이라는 말은 자만, 교만이라는 말과도 관련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웃닷짜는 마나(mana)와 비슷한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영어 ‘haughtiness(오만한)’의 의미로 사용되는 웃닷짜에 대한 사용예가 있습니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SnA 492 (in sense of “haughtiness”? for Sn.702 uṇṇata)’라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Sn.702’를 찾아 보면 숫따니빠따 날라까의 경(Sn3.11)’에 있습니다. 관련 단어가 ‘uṇṇata’라 되어 있는데 이 말은 ‘haughty(已高)’의 의미입니다. 관련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Samānabhāga2- kubbetha gāme akkuṭṭhavandita,
Manopadosa
rakkheyya santo anunnato care

 

마을에서 거친 욕을 먹든지

예배를 받든지 한결 같은 태도로 대하고,

정신의 혼란을 수습하여 고요히 하고,

교만을 떨쳐버리고 유행하십시오.”(stn702)

 

 

 

 

여기서 교만을 떨쳐 버려라는 말이 ‘anunnato’입니다. 이 말은 ‘Permitted, sanctioned, ordained’의 뜻입니다. 빠알리사전에서는 ‘anunnato’에 대하여 ‘uṇṇata’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교만을 떨쳐 버려라는 말 ‘anunnato’에 대한 각주를 보면 “ ‘절을 받았을 때 생겨나는 교만을 떨쳐버리는 것을 말한다.”(Pri.II.492)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Pri.II.492’SnA 492’와 같은 뜻입니다.

 

수행승이 탁발 나갔을 때 두 가지의 경우의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천대받는 것이고 또 하나는 환대받는  것입니다. 천대의 경우 경에 따르면 “까까중아, 거기 섯거라. 가짜 수행자여, 거기 섰거라. 천한 놈아, 거기 섰거라. (tatreva muṇḍaka tatreva samaaka tatreva vasalaka)” 라는 식으로 표현 됩니다. 여기서 까까중은 ‘muṇḍaka’를 번역한 것으로 ‘shaven-headed’의 뜻이고, 천한 놈은 ‘vasala’를 번역한 것으로 ‘an outcast; a person of low birth’의 뜻입니다. 부처님 당시 바라문 자제들이 부처님 교단으로 출가하자 가족 바라문들이 화가 나서 까까중이나 천한 자로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천한 자라고 하는 것은 바라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천민이 교단에 들어 갔기 때문에 머리 깍은 자를 보면 모두 천한 자로 본 것입니다.

 

탁발중에 천대받기도 하고 환대 받기도 합니다. 환대 받을 때는 복전으로서일 것입니다. 그럴 경우 자신도 모르게 우쭐 할 수 있고 지극히 당연히 받아 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태생적으로 고귀한 가문에 태어난 자의 태생의 교만과 같고, 많이 배워 학위가 있다면 배움의 교만이 있는 것과 같고, 돈이 많아 부자라면 부자의 교만이 은연 중에 깔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자가 천대와 환대를 받았을 때 마음속으로 동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경우 정신의 혼란을 수습하여 고요히 하고, 교만을 떨쳐버리고 유행하십시오” (stn702)라 했습니다. 여기서 교만이라는 말이 웃닷짜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때 교만은 천대 또는 환대에 따른 마음의 동요이기 쉽습니다. 웃닷짜는 마음의 동요에 따른 오만입니다. 결론적으로 자만에 따른 마음의 동요가 오상분결에서 말하는 웃닷짜(uddhacca)’라 볼 수 있습니다.

 

자만의 따른 자기정당화

 

웃닷짜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흥분이나 들뜸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오상분결에서 웃닷짜가 들뜸 이나 흥분으로 번역 되어 있을 때 이해 하기 힘듭니다. 탐욕과 성냄 등 거친 번뇌가 소멸 되고 이제 남은 것은 미세한 번뇌만 몇 개 남았는데 그 중에 속한 것이 마나와 웃닷짜입니다. 자만과 흥분이라고 보통 번역됩니다. 아라한 단계에 가서나 없어진다는 마나와 웃닷짜가 왜 오상분결에 포함 되어 있는지를 이해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마나와 웃닷짜가 오상분결에 포함 된 것은 지위가 높은 자와 관련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오하분결이 해소 되어 아나함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욕망과 분노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남아 있는 것은 미세한 번뇌 몇 가지 뿐입니다. 그런 것들이 마나와 웃닷짜입니다.

 

마나는 지위가 높은 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문과 같은 태생의 자만, 박사학위를 가졌다면 배움의 자만, 돈이 많다면 부자의 자만이 될 것입니다. 성자에게도 자만이 있을 것입니다. 대게 내가 누군인데라는 식입니다. 귀한 집 사람이라면 내가 바라문인데라 할 것이고, 박사학위 소지자라면 내가 박사인데라 할 것이고, 돈 많은 부자라면 내가 부자인데라는 자만이 은연 중에 깔려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나함에게도 내가 아나함인데라는 자만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자만에 대하여 드러나지 않는 매우 미세한 장애이자 번뇌라 했습니다.

 

오상분결에서 마나와 웃닷짜는 늘 함께 갑니다. 웃닷짜는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restlessness(침착하지 못함), distraction(주의산만); flurry(동요), haughtiness(오만한), 心浮動不沉著(마음이 들떠 있어서 어쩔줄 몰라함), のうわつき(마음이 들떠 있는 상태)’라 되어 있습니다. 오상분결에서 웃닷짜는 마음의 동요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예배의 대상이 되었을 때 마음에 동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데라는 자만과 함께 동요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전재성님은 가이거의 주석을 인용하여 웃닷짜에 대하여 자기정당화라 했을 것입니다.

 

오상분결에서 마나와 웃닷짜는 모두 자아와 관련이 있습니다. 오하분결에서 유신견과는 다른 것입니다. 오하분결에서 유신견은 단지 견해가 타파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라한이 될려면 자아가 완전히 타파 되어야 합니다. 비록 탐욕과 성냄이 완전 소멸 되었어도 내가 누군인데라는 미세한 자아의식은 남아 있는 한 아라한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예배의 대상이 되었을 때 들뜰 수 있고 흥분할 수 있고 오만할 수 있고 동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를 자기정당화라 볼 수도 있습니다.  

 

오장애와 오상분결에서 웃닷짜에 대하여 들뜸 또는 흥분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그러나 미세한 마음의 장애인 웃닷짜는 마나와 관련되어진 것으로서 자아의식과 관련 되어 있습니다. 자아관념이 완전히 타파 되지 않고 최후 까지 남아 있는 것이 마나와 웃닷짜입니다. 이는 우월의식과도 관련 되어 있습니다. 수행승으로서 존경을 받을 때 내가 누구인데라는 자만과,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자기정당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상분결에 있어서 웃닷짜는 자만의 따른 마음의 동요이자 동시에 자만에 따른 자기정당화라 볼 수 있습니다.

 

 

2017-07-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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