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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사섭(同事攝)은 고락을 함께 하는 것? 동등한 배려와 눈높이 설법

moksha 2017. 6. 27. 13:31

 

동사섭(同事攝)은 고락을 함께 하는 것? 동등한 배려와 눈높이 설법

 

 

이른 아침 학의천에 생기가 돕니다. 그 동안 메말랐던 대지가 흠뻑 젖어 있습니다. 하늘은 잔뜩 찌뿌리고 가끔 가는 빗방울이 내리긴 하지만 어느 때 보다 마음이 차분합니다. 대체로 비가 오는 날은 마음이 착 가라 앉아 있습니다. 어제 내린 비와 밤에 내린 비로 학의천 수위는 약간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물은 부족한 듯 합니다.

 

 

 

 

 

 

동사(同事)와 동등한 배려

 

학의천을 지나 새로 지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걸어 갈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사섭법에서 동사(同事)에 대한 것은눈높이가 아니겠냐고. 불현듯 떠 오른 생각은 이틀 전 앙굿따라니까야 통합본 교정작업할 때 읽은 구절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힘에 의한 섭수의 경(A9.5)’에서 동사와 관련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etadagga bhikkhave, samānattatāna yadida sotāpanno sotāpannassa samānatto, sakadāgāmī sakadāgāmissa samānatto, anāgāmī anāgāmissa samānatto, araha arahato samānatto. Ida vuccati bhikkhave sagahabala. Imāni kho bhikkhave cattāri balānīti.

 

수행승들이여, 동등한 배려 가운데 최상의 것은 흐름의 든 님의 입장에서 흐름에 든 님을 동등하게 배려하고, 한번 돌아 오는 님의 든 님의 입장에서 한번 돌아 오는 님을 동등하게 배려하고, 돌아 오지 않는 님의 입장에서 돌아 오지 않는 님을 동등하게 배려하고, 거룩한 님의 입장에서 거룩한 님을 동등하게 배려하는 것이다.”(A9.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네 가지 힘에 대하여 말씀 했습니다. 그것은 지혜의 힘, 정진의 힘, 무죄의 힘, 섭수의 힘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무죄의 힘이란세상에 제자가 허물 없는 신체적 행위를 갖추고, 허물 없는 언어적 행위를 갖추고, 허물 없는 정신적 행위를 갖춘다,”(A9.5)라 했습니다. 신구의 삼업이 청정한 것에 대하여 무죄의 힘이라 했습니다. 섭수의 힘과 관련해서는보시하는 것, 사랑스런 말, 이로운 행위, 동등한 배려이다.”(A9.5)라 했습니다. 섭수의 힘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사섭법입니다.

 

동사(同事)에 대하여 전재성님은동등한 배려라고 번역했습니다. 대부분 번역자들이함께 거드는 것또는함께 일하는 것등으로 번역한 것과 대조적입니다. 그래서힘에 의한 섭수의 경(A9.5)’에서 동사에 대하여흐름의 든 님의 입장에서 흐름에 든 님을 동등하게 배려하고라는 식으로 번역했습니다.

 

동등한 배려라고 번역했을까?

 

전재성님은 동사에 대하여 동등한 배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와 같은 번역은 기존 번역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역자는 이 <<앙굿따라니까여>> 의 문장을 숙고한 결과 동사(同事)는 일반적인 불교사전에 나와 있듯이함께 일하는 것이거나함께 지내는 것이 아니라동등한 배려를 의미한다. Lba.IV.198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동등한 표명 가운데 최상인 것은 흐름에 든 님으로서 흐름에 든 님에게 동등하게 스스로를 표명하고, 한번 돌아 오는 님으로서 한번 돌아 오는 님에게 동등하게 스스로를 표명하고, 돌아 오지 않는 님으로서 돌아 오지 않는 님에게 동등하게 스스로를 표명하고, 거룩한 님으로서 거룩한 님에게 동등하게 스스로를 표명한다.’는 의미이다.”(앙굿따라니까야 3678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에 따르면 불교사전에 동사는함께 일하는 것또는함께 지내는 것이라 합니다. 불교사전을 찾아 보았습니다. 고려대장경연구소의 용어사전에 따르면 동사에 대하여 “4() 중의 하나. 불보살이 중생의 근성에 따라 고락(苦樂)을 함께 함으로써 교화시키는 것.”라 되어 있습니다. 고락을 함께 하는 것이 동사라 합니다. 운허스님이 편찬하고 동국역경원에서 편찬한 불교사전에서는 “4()의 하나. 불ㆍ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몸을 나타내되, 그들과 사업ㆍ이익을 같이하면서, 고락을 같이하고 화복을 함께 함으로써 진리의 길로 이끌어 들이는 것을 말함.”라 되어 있습니다. 사업이나 이익을 같이 하는 것이라 말이 눈에 띕니다.  

 

동사섭과 관련하여 검색해 보니 용타스님의 동사섭수행법이 눈에 띕니다. 1980년부터 동사섭수행을 지도 해 오고 있다는 스님은행복마을 동사섭사이트에서우리 모두의 지고한 행복을 찾아 가는 길, 동사섭의 철합입니다.”라 했습니다. 그러나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는 것처럼, 동사섭에 대한 정확한 용어정의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수행참가자의 후기에동사섭은중생과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며 배운다는 의미라고 불교사전적 의미만 설명되어 있을 뿐입니다.

 

전쟁성님은 한국불교에서 통용되고 있는 동사섭에 대하여 동등한 배려라는 뜻으로 번역하여 경의 취지에 맞게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사섭법의 원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섭법의 원래 의미는?

 

사섭법은 보시하는 것(Dāna: 布施), 사랑스런 말(peyyavajja: 愛語), 이로운 행위 (atthacariyā: 利行), 동등한 배려(samānattatā: 同事)를 말합니다. 이 네 가지 용어는 단지 한자풀이식으로는 그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초기경전을 열어 보아야만 부처님이 어떤 뜻으로 말씀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섭법 중에 보시가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보시를 빠알리어로 ‘Dāna이라 하며 영어로는 ‘Giving’ 또는a donation’ 의 뜻입니다. 보시는 단지 준다는 뜻을 넘어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보시와 관련해서는 보시하는 것 가운데 최상의 것은 가르침의 보시이다. (Etadagga bhikkhave, dānāna yadida dhammadāna)”(A9.5)라 했습니다. 이 말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재보시보다 법보시가 훨씬 더 수승하다는 말을 연상케 합니다. 보시라 하여 물질적 보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즉 부처님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보시임을 말합니다. 이처럼 부연 설명해 놓은 것은 후대 사람들이 사섭법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라고 배려 해 놓은 듯 합니다.

 

사랑스런 말을 한자어로 애어(愛語)라 합니다. 빠알리어로는 ‘peyyavajja이고 영어로 ‘Kindness of language’입니다. 상대방에게 사랑스런 말로 이야기하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경전을 열어서 확인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애어에 대하여 사랑스런 말 가운데 최상의 것은 청원하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거듭해서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다. (Etadagga bhikkhave, peyyavajjāna yadida atthikassa ohitasotassa punappuna dhamma deseti).” (A9.5)라 했습니다. 이런 말은 이제까지 불자들이 생각했던 말과 다릅니다. 애어라 하여 단지 사랑스럽게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줄 알았으나,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로운 행위를 이행(利行)이라 합니다. 이행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atthacariyā라 하며 영어로는 ‘doing good’ 또는 ‘Wise or beneficial conduct’의 뜻입니다. 문자 그대로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전에서는 어떻게 풀이 해 놓았을까요? 경전에 따르면 이행에 대하여 이로운 행위 가운데 최상은 믿음이 없는 자가 믿음을 갖추도록 그를 고무하고 격려하고 정립시키고,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가 계행을 지키도록 그를 고무하고 격려하고 정립시키고, 간탐이 있는 자가 보시를 갖추도록 그를 고무하고 격려하고 정립시키는 것이다. (Etadagga bhikkhave, atthacariyāna yadida assaddha saddhāsampadāya samādapeti niveseti patiṭṭhāpeti. Dussīla sīlasampadāya samādapeti nivesati patiṭṭhāpeti, macchari cāgasampadāya samādapeti niveseti patiṭṭhāpeti.)” (A9.5)라 했습니다. 이런 말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이행의 설명에서 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초기경전에서만 그 원뜻이 정확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동사입니다. 동사에 대하여 빠알리어로는 ‘samānattatā라 하며 영어로는 ‘impartiality; sociability’ 또는 ‘equanimity’ 의 뜻입니다. 우리말로 공평무사, 공명정대, 사교, 평정의 뜻입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단어만 나열해서는 그 원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단지 한자어풀이만으로는 부처님의 말씀 하신 뜻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럴 때는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동등한 배려 가운데 최상의 것은 흐름의 든 님의 입장에서 흐름에 든 님을 동등하게 배려하고,..”라고 식으로 예를 들어 설명해 놓았습니다.

 

사섭법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이 동사(同事)입니다. 동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문장을 숙고한 결과 동등한 배려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서 ‘Lba.IV.198’을 들고 있습니다. 주석 ‘Lba.IV.198’에서는 동사에 대하여 동등한 표명 가운데 최상인 것은 흐름에 든 님으로서 흐름에 든 님에게 동등하게 스스로를 표명하고,..”라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석 ‘Lba’에 대하여 찾아 보았습니다. 약어표에 따르면 ‘Lba’‘Die Lehrreden des Buddha aus Angereihten Sammlung’의 약어입니다. 독일어로 된 주석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재성님은 독일어판 주석서를 참고하여 동사에 대하여 동등한 배려로 번역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동사를 뜻하는 빠알리어 ‘samānattatā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함께 함[同事]’으로로 번역했습니다. 한글과 함께 대괄호를 이용하여 한자를 삽입한 전형적인 초불연식 번역입니다. 그러나 초불연 번역은 기존 한문용어를 우리말로 풀어 놓은 것을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초불연에서 동사에 대한 번역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함께함 가운데 으뜸은 예류자는 예류자와 함께 하고, 일래자는 일래자와 함께 하고, 불환자는 불환자와 함께 하고, 아라한은 아라한과 함께 한다.”(A9.5, 대림스님역)

 

 

대림스님이 번역하고 각묵스님이 감수한 초불연의 동사에 대한 번역을 보면 단순명료합니다. 번역문만 보면 마치 유유상종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예류자는 예류자와 어울린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그렇게 말했을 리 없습니다. 초불연의 번역은 난해 합니다. 이에 대한 각주도 보이지 않습니다.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왜 예류자가 예류자와 함께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전재성님의 번역에서는 동등한 배려 가운데 최상의 것은 흐름의 든 님의 입장에서 흐름에 든 님을 동등하게 배려하고,”라고 한 것과 비교됩니다. 전재성님의 번역문을 보면 흐름에 든 자의 입장에서 흐름에 든 자를 동등하게 배려 한다고 좀 더 구체적으로 번역했습니다. 핵심키워드는 입장에서입니다. 이것이 동등한 배려의 정확한 설명문이 됩니다.

 

혹시 눈높이를 뜻하는 말이 아닐까?

 

이른 아침 학의천 길을 지나 일터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동사(同事)에 대한 구절이 떠 올랐습니다. 전재성님이 번역한 동등한 배려라는 말이 혹시 눈높이를 뜻하는 말이 아닐까 하고 번개처럼 떠 올랐습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숙고 해 보았습니다.

 

흔히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라고 합니다. 유치원 교사가 아이들과 이야기 할 때 자세를 낮추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서 있는 유치원 생에게 이야기할 때 눈높이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쪼그리고 앉듯이 이야기 해야 합니다.

 

사람들 마다 눈높이가 다릅니다. 유치원생에게는 유치원생에게 맞는 이야기를 해야 눈높이를 맞출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에게는 초등학생에게 맞는 눈높이로 이야기 해야 하고, 중학교 학생이나 고등학생 역시 마찬 가지 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긴 모습이 다 다릅니다. 성향 또한 모두 다릅니다. 얼굴이 다르고 성형이 다른 것은 이전 생에 지은 업이 모두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업이 뭇삶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태어납니다.”(M135)라 하여 우리 모두가 업의 상속자라 했습니다.

 

사람마다 근기가 모드 다릅니다. 어떤 이는 둔하고 어떤 이는 민첩합니다. 어떤 이는 지혜가 있고 어떤 이는 지혜가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조금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들을 보았다.”(S6.1) 라 했습니다.

 

중생들의 근기는 모두 다릅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설법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팔만사천법문이 되었습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중생의 근기에 대하여 1) 탐하는 기질, 2) 성내는 기질, 3) 어리석은 기질, 4) 믿는 기질, 5) 지적인 기질, 6) 사색하는 기질, 이렇게 여섯 가지 기질로 분류했습니다. 이렇게 중생들의 다양한 근기에 맞게 설하진 부처님의 법문을 방편설(方便說), 또는 대기설법(對機說法: pariyāya-desanā)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차제설법(Ānupubbīkatha  kathessāmīti) 이라 하여 보시를 설한 다음에 계행을 설하고 계행을 설한 다음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설하고, 다음에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재난과 욕망의 여읨의 공덕을 설하고, 그 다음에 부처님의 본질적인 가르침인 네 가지 거룩한 진리와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설했습니다. 모두 중생에 근기를 고려한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눈높이에 맞는 설법입니다.

 

부처님은 늘 상대방의 입장에서 법을 설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봐!”가 될 것입니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것이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동사는 눈높이이자 역지사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동사(同事)는 역지사지(易地思之)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사섭법과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사섭법은 다릅니다. 대승불교에서 사섭법은 육바라밀과 함께 보살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수행방법에 대한 것이지만,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볼 수 있는 사섭법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보시에 대해서는 법보시가 가장 최상이라 하여 가르침을 강조했고, 애어에 대해서는 가르침을 설할 때 가장 사랑스런 말이라 했고, 이행에 대해서는 계행과 보시와 지혜를 갖추도록 격려하고 정립시키는 것이 이행이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동사에 대해서는 흐름에 든 님의 입장에서 흐름에 든 님을 동등하게 배려하고라 해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 볼 것을 말씀 했습니다. 한자성어로 역지사지라 할 것입니다.

 

빅쿠보디가 이해하는 동사(同事)?

 

동사를 뜻하는 빠알리어 ‘samānattatā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함께 함[同事]’으로로 번역했습니다. 전재성님은 동등한 배려라고 경전에 근거하여 재해석 했습니다. 이를 숙고한 결과 눈높이또는 역지사지임을 알았습니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사섭법과 관련된 항목을 옮겨 놓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And what is the power of sustaining a favorable relationship? There are these four means of sustaining a favorable relationship: giving, endearing speech, beneficent conduct, and impartiality. Among gifts, the best is the gift of the Dhamma.

 

Among types of endearing speech, the best is repeatedly teaching the Dhamma to on e who is interested in it and listens with eager ears. Among types of beneficent conduct, the best is when on e encourages, settles, and establishes a person without faith in the accomplishment of faith, an immoral person in the accomplishment of virtuous behavior, a miserly person in the accomplishment of generosity, and an unwise person in the accomplishment of wisdom. Among types of impartiality, the best is that a stream-enterer is equal to a stream-enterer, a on cereturner is equal to a on ce-returner, a non-returner is equal to a non-returner , and an arahant is equal to an arahant. This is called the power of sustaining a favorable relationship.”(A9.5, 빅쿠보디역)

 

 

빅쿠보디역에서 동사(同事)와 관련하여 ‘impartiality’라 번역했습니다. 우리말로 공평무사, 공명정대라는 뜻입니다. 한국불교 사전에 나와 있는 함께 일하는 것또는 함께 지내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동사를 뜻하는 빠알리어 ‘samānattatā’에 근접한 번역이라 생각합니다.

 

빅쿠보디는 동사(同事)를 뜻하는 번역어 ‘impartiality’에 대하여 각주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he explanation of “impartiality” given here may be puzzling. 'Samanattata is a compound of "equal" (samana) and " oneself" (attan). As applied to conduct, it means treating others as on e would have them treat on eself, without bias or partiality. Here the word is being used to express the equality between those at the four levels of awakening, all with himself or herself.” (NDB 1843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는 각주에서 “impartiality”에 대하여 어리둥절할 것 (puzzling)’ 이라 했습니다. 이는 난해하다는 말입니다. 별도로 설명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별도로 각주에서 “impartiality”에 대해 설명해 놓았습니다.

 

빅쿠보디가 이해하는 동사는 “treating others as on e would have them treat on eself”입니다. 대우에 대한 것입니다. 동등하게 대우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남의 입장에서 보라는 말과 같습니다. ‘역지사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경에서 예류자의 입장에서 예류자를 동등하게 배려하고라는 말과 일치됩니다. 유치원생이라면 유치원생의 입장에서 유치원생에게 대우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동사의 의미라 합니다. 그래서 번역어로 공평무사, 공명정대라는 뜻을 지닌 “impartiality”을 사용했습니다.

 

빠알리어 samānattatā’

 

초불연에서는 동사를 뜻하는‘samānattatā’에 대하여 함께 [同事]’이라번역했습니다. 이는 단지 한자어를 우리말로 풀이 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존 한문번역을 답습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빠알리어 samānattatā’samāna+attan’의 복합어에 기원합니다. 빠알리어 ‘samāna’‘equal; same; similar’의 뜻이고, 빠알리어 ‘attan’oneself’의 뜻입니다. 따라서 samānattatā’자신과 동등한의 뜻이 됩니다. 한문식 풀이인 함께 일하는 것또는 함께 지내는 것과 전혀 다른 뜻입니다.

 

초불연에서는 동사에 대하여 함께함이라 번역했습니다. 그 결과 예류자는 예류자와 함께 하고라 했습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마치 예류자는 예류자끼리 어울리고, 아라한은 아라한끼리 어울린다는 뜻으로 오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samānattatā’에 대하여 동등한 배려라고 번역했습니다. 나와 동등한 입장에서 상대방을 대했을 때 입니다. 그래서흐름의 든 님의 입장에서 흐름에 든 님을 동등하게 배려하고라 했습니다. 이는 유유상종이라는 말과 다른 것입니다.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됩니다.

 

부처님의 눈높이 설법

 

부처님은 눈높이에 맞추어 설법했습니다. 부처님이 유치원 생을 만났다면 가장 먼저 자세를 낮추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었을 것입니다. 유치원 생의 입장에서 설법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처음 접한 사람에게 대뜸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사성제부터 설하지 않았습니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가르침부터 설했습니다. 이어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감각적 쾌락의 위험 과 재난에 대하여 설했습니다. 다음으로 감각적 쾌락의 여읨으로 설한다음 어느 정도 법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이것이 괴로움이다.”로 시작되는 사성제를 설했습니다. 이것이  중생의 근기에 맞는 대기설법이고 차제설법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눈높이 설법이 됩니다.

 

절에 10, 20, 30, 평생을 다녀도

 

초기불교를 접하면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됩니다. 그만큼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보는 것으로 그친다면 한번 들은 것으로 그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법문이라도 들을 때 뿐이라면 매번 똑 같은 법문을 반복해야 알아 들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동창 중에 CEO로 있는 친구는 사장님, 그 말씀 전에 했었습니다.”라는 말이 나오면 잘 전달된 것이라 합니다.

 

사람들은 들은 것을 쉽게 잊어 버립니다. 절에 10, 20, 30, 평생을 다녀도 들을 때 뿐이라면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열심히 기도하세요라는 말만 들을 것입니다. 법문을 들으면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사유해야 합니다. 사유하다 보면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사섭법에서 동사도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학의천 길을 걷다가 마음 속에 의문으로 품고 있었던 동사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동사가 빠알리로 samānattatā’인데 전재성님은 동등한 배려로 재해석 했습니다. 그래서 “~입장에서 ~에게 동등한 배려한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런 번역은 빅쿠보디도 “treating others as on e would have them treat on eself”라 하여 동등한 배려라는 뜻인 “impartiality”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동등한 배려에 대하여 갑자기 순수한 우리말 눈높이라는 말이 불현듯 떠 올랐습니다. 이 눈높이라는 말 하나로 인하여 모든 것이 다 이해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즉 중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법했던 것입니다.

 

가르침은 늘 기억하고 사유해야

 

부처님 가르침은 늘 기억하고 사유해야 합니다.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하고 사유하다 보면 마치 퍼즐이 맞추어지듯이 정리가 됩니다.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세상에 수행승이 경,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과 같은 가르침을 철저하게 터득합니다. 그는 배운 대로 터득한 대로 가르침을 상세히 남들을 위해 가르칩니다. 그는 배운 대로 터득한 대로 가르침을 연구합니다. 그는 배운 대로 터득한 대로 가르침을 마음으로 사유하고 숙고하고 정신으로 관찰합니다. 우기가 닥치면, 그는 많이 배우고, 전승에 숙달하고, 가르침을 기억하고 계율을 기억하는 장로 수행승들이 있는 곳에 거처를 정합니다. 그는 때때로 그들에게 이와 같이 존자여, 어떻게 그러한가? 어디에 그 의미가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또한 재차 질문합니다. 그들은 그 존자에게 닫힌 것을 열개하고, 불분명한 것을 명료하게 해주고, 여러 가지 종류의 의심이 야기 되는 원리에 대하여 의심을 제거합니다.”(A6.51, 전재성님역)

 

 

 

2017-06-2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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