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가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
출구전략이 있습니다. 좋지 못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수단을 일컫는 말입니다. 원래 경제 용어이지만 대개 정치권에서 사용합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빠져 나가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유도리가 있는
출구전략에서 출구라는 말은 빠져 나갈 구멍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경전에서도 이런 말이 사용됩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출구가 있는 것의 경(A10.175)’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계와 십선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불살생계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Pāṇātipātissa bhikkhave pāṇātipātā veramaṇī parikkamanaṃ hoti.
“수행승들이여,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자에게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것이 출구이다.” (A10.175, 전재성님역)
오계를 포함하여 구족계에 대하여 학습계율이라 합니다. 평생지니고 배우고 지켜야할 계율을 말합니다. 그런데 학습계율의 특징을 보면 속된 말로 ‘유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도리에 대한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형편이나 경우에 따라서 여유있게 신축성있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일컫는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 합니다.
계행에서 출구란?
계행에 있어서 유도리는 바로 ‘삼가다’라든가 ‘억제하다’ 등의 말일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앙굿따라니까야 해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출구가 있는 것의 경(A10:175)은 계행이 하지말라든가 삼가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려 버린다. 계행에도 출구가 있다. 계행은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자에게는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것이 출구이다.”(앙굿따라니까야 10권 해제, 전재성님)
일반적으로 대승불교에서 계행은 한문식 문구를 따릅니다. 불살생이라 했을 때 “살생하지 말라”가 되어 버립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유도리도 없습니다. 살생하지 말라고 했는데 살생했다면 계를 파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게 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일까 대승불교에서는 ‘개차법(開遮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개차법(開遮法)
개차법은 상황에 따라 계를 열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계를 닫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를 들 수 있습니다. 세속오계 중에서 ‘살생유택’이라 하여 ‘살생도 가려서 하라’고 합니다. 이런 계율은 그 시대의 산물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살생을 가려서 하라는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개차법을 적용하면서 계는 있으나마나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다보니 ‘계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라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실제로 한국불교에서는 계를 잘 지키지 않습니다. 스님들이 구족계를 받지만, 수 백가지나 되는 계대로 사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한국불교에서 구족계는 스님이 되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합니다.
개차법 적용예로 법보신문에서 주관하는 불자로 살기 운동도 해당될 것입니다. 법보신문에서는 ‘불자답게 삽시다’라 하여 모두 37가지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음주에 대한 것을 보면 ‘취하도록 술 마시지 않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긴 마시되 취하도록 마시지 말자는 것입니다. 사실상 음주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유도리 없는 보살계본
대승불교에서 오계는 매우 엄격합니다. 범망경 보살계본에 실려 있는 오계를 보면 “살생하지 말라,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술을 팔지 말라”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 “하지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유도리도 없습니다.
범망경에서는 불살생계에 대하여 “살생하지 말라”식으로 한자용어를 그대로 풀어 놓았습니다. 범망경에 실려 있는 불살생계에 대한 세부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자들아, 만일 너희가 직접 죽이거나,
다른 사람을 시켜서 죽이거나, 방편을 써서 죽이거나,
칭찬을 하면서 죽이게 하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을 외어서 죽이는 그 모든 짓을 하지 말지니,
죽이는 원인이나, 죽이는 반연이나, 죽이는 방법이나,
죽이는 업을 지어서 생명 있는 온갖 것을 짐짓 죽이지 말아야 한다.
보살은 항상 자비로운 마음과 효순하는 마음을 내어
일체중생을 방편을 다해서 구원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즐거운 생각과 마음으로 거침없이 살생하는 것은
보살의 큰 죄가 된다.”(범망경, 보살계본)
살생을 하면 죄업이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초기경전에서도 살생하면 악처에 떨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는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살생하지 말라”라고만 했을 때 빠져 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미물이라도 살생했다면 계를 어겼다는 죄책감으로 평생 살아야 할 것입니다.
빠져 나갈 구멍이 없는
계행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죄책감에 시달릴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오계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유일신교에서도 계는 매우 엄격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십계명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3. 주(야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5.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해서는 안 된다.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하지 말라.)
9.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십계명, 위키백과)
기독교의 십계명을 보면 ‘하지말라’거나 ‘안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도리도 없고 빠져 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만일 도둑질을 한번이라도 했다면 계행을 어겼기 때문에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살 것입니다. 만일 십일조를 어겼다면 하나님의 것을 가져 간 것이기 때문에 역시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살 것입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살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습니다.
죄의식과 두려움
블로그 활동하면서 종종 메인 뉴스로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올린 글이 대문에 실린 것입니다. 블로그 초창기때의 일입니다. 대문에 글이 올라가면 수 만명이 조회합니다. 그런 글 중에 ‘개종(改宗)을 생각 하는 친구에게(2008-06-01)’라는 글이 있습니다. 2008년에 작성된 이 글은 조회수가 무려 십만회 가량 되었고 댓글이 900개가 넘었습니다. 거의 천 개에 달하는 댓글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겪는 두려움과 죄의식을 알 수 있었습니다. 관련 댓글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일을 빠지면 큰일난다 교회를 안가면 지옥간다 , 이런거 솔직히 별로 안좋아 하거든요 믿음은 자기 마음에 우러러 나오는것 ...” (산초하)
2) “정말 가슴에 와닿네요.
저의 아내는 매주 의무적으로 교회 갑니다. 안가면 화를 입을 까봐...누가 그랫는지는 모르지요.” (보석상자)
3) “어떤 종교든 마음이 움직여야 가는 것이지..누구처럼 안다니면 뭔가 벌을 받을거 같은 마음에” (야수)
(개종(改宗)을 생각 하는 친구에게(2008-06-01), 댓글모음 중에서)
댓글을 보면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다니다가 교회에 다니지 않았을 때 벌받을 것 같은 기분을 표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화를 입을 까봐” 라든가 “뭔가 벌을 받을거 같은 마음”이라 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계를 엄격하게 적용했을 때 일어나는 부작용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계행에도 출구가 있다
대부분 종교에서 계행은 “하지말라”라든가 “해서는 안된다”라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엄격하게 계를 적용했을 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식이고, 또하나는 지키지 못해서 죄책감과 두려움을 갖는 것입니다. 전자는 대승불교에 해당되고 후자는 유일신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계는 출구가 있습니다. 이는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에는 출구가 있는 것이지 이 가르침에 출구가 없는 것이 아니다. Saparikkamano ayaṃ bhikkhave dhammo, nāyaṃ dhammo aparikkamano.) (A10.175)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왜 학습계율(sikkhāpada)인가?
부처님은 처음부터 계를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평생배우고 지니고 지켜야 할 계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학습계율입니다. 그런데 학습계율(sikkhāpada)을 보면 유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학습계율은 배우고 익혀 내것으로 만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라는 것은 평생동안 이루어질 때까지 합니다. 마찬가지로 계율 또한 완성될 때까지 평생 학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습계율은 “배워나간다”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오계에서 불살생계를 보면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습니다. (Pāṇātipātā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삼가다’는 뜻의 ‘veramaṇī’와 학습계율이라는 뜻의 ‘sikkhāpada’입니다.
빠알리어 ‘veramaṇī’는 영어로 ‘Abstaining from’의 뜻으로 ‘삼가하다’또는 ‘절제하다’의 의미입니다. 엄격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유도리가 있고 출구가 있는 계행입니다. 또 빠알리어 ‘sikkhāpada’는 ‘steps of training’이라 하여 단계적으로 성취 되는 계율인데 이를 ‘학습계율’이라 합니다.
부처님이 설한 오계는 단계적 성취에 대한 것입니다. 비록 지금 성취 되지 않았지만 평생동안 지니며 배우며 지키며 성취되도록 끊임 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차님이 설한 학습계율입니다.
계는 본래 지키기 어려운 것
계는 본래 지키기 어려운 것입니다. 오계라 하여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라 하지만 수계를 한 순간부터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오계입니다.
지키지 힘들다고 하여 ‘개차법’을 적용하거나 아예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고 여기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닙니다. 계를 어기면 참회하고 다시 받아 지니면 됩니다. 부처님은 평생 배우고 지녀야할 학습계율을 설한 것입니다. 이런 점이 타종교의 계와 확연히 비교되고 타종교가 따라 올 수 없는 월등한 가르침입니다.
난해한 번역
전재성님은 ‘출구가 있는 것의 경’에서 “이 가르침에는 출구가 있는 것이지 이 가르침에 출구가 없는 것이 아니다. Saparikkamano ayaṃ bhikkhave dhammo, nāyaṃ dhammo aparikkamano.) (A10.175)라고 번역했습니다. 초불연 대림스님은 “이 법은 피해야 하고, 피하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니다.”라 하여 난해하게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는 “this Dhamma offers a means of avoidance. It does
not lack a means of avoidance.”라고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와 대림스님은 공통적으로 ‘피함(avoidance)’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러나 모두 난해한 번역입니다.
전재성님이 출구라 번역한 것은 빠알리어 ‘saparikkamana’에 대한 것입니다. 빠알리어 ‘saparikkamana’에 대하여 PCED194에서는 ‘能親近的, 適於遊歷四方. [=法]’ 또는 ‘接近できる, 遍歴に適する. [=法]’이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전재성님은 ‘parikkamana’에 대하여 “원래 parikkamana는 돌아다님, 거님, 또는 출리를 위미하는데, 여기서는 출리란 뜻으로 쓰인 것이다. 출구란 Lba.V.175를 따라 번역한 것이다.”(10권 399번 각주)라 했습니다. 독일어 주석 ‘Lba.V.175’에 따라 ‘saparikkamana’를 출구로 번역한 것입니다.
초불연에서는 ‘parikkamana’에 대하여 “피함(saparikkamana)이란 멀리함을 말한다.”라고 각주했습니다. 이어서 “그것을 피하고 멀리하기 위해서는 준비단계의 일을 잘 할 수 있는 평탄한 땅과 같은 곧은 도를 닦아야 한다.”(MA.i.192)라고 주석을 인용하여 각주했습니다. 그러나 본문과는 맞지 않는 매우 난해한 설명입니다. 빅쿠보디의 각주는 보이지 않습니다.
전재성박사가 ‘saparikkamana’에 대하여 ‘출구’라 번역한 것은 이해가 매우 쉽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출구전략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빠져 나갈 구멍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유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르침에는 출구가 있는 것이지 이 가르침에 출구가 없는 것이 아니다.”라 했습니다.
번역비교 해보면
계는 지키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겨 가면서 지켜 가는 것이 계입니다. 그래서 학습계율이라 합니다. 그런데 ‘saparikkamana’에 대하여 피함이라 번역했을 때 “이 법은 피해야 하고, 피하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니다.”가 되어 버려서 난해 하기 그지 없는 번역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차이는 구체적은 계의 항목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불살생에 대하여 빠알리원문과 세 번역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빠알리원문:
Saparikkamano ayaṃ bhikkhave dhammo, nāyaṃ dhammo aparikkamano. Kathañca bhikkhave saparikkamano ayaṃ dhammo, nāyaṃ dhammo aparikkamano:
Pāṇātipātissa bhikkhave pāṇātipātā veramaṇī parikkamanaṃ hoti. (A10.175)
2) 전재성님역: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에는 출구가 있는 것이지 이 가르침에는 출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이 가르침에는 출구가 있는 것이지 이 가르침에 출구가 없는 것이 아닌가?
수행승들이여,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자에게는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것이 출구이다.” (A10.175)
3) 대림스님역:
“비구들이여, 이 법은 피해야 하고, 피하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이 법은 피해야 하고, 피하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생명을 죽이는 자에게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것은 피하는 것이다.” (A10.175)
4) 빅쿠보디역:
"Bhikkhus, this Dhamma offers a means of avoidance. It does not lack a means of avoidance. And how does this Dhamma offer a means of avoidance and not lack a means of avoidance?
“One who destroys life has abstention from the destruction of life as the means to avoid it.” (A10.175)
가르침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했을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불살생계를 예를 든다면 농업이나 어업을 생계로 하는 사람은 살생을 피할 수 없습니다. 도시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벌레 등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피치 못하게 살생하게 되었을 때 지키지 못할 것이라 하여 무시한다거나 반대로 죄책감을 갖는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참회하고 다시 저지르지 않으면 됩니다.
번역을 비교해 보면 ‘saparikkamana’에 대하여 ‘출구’ ‘피함’‘avoidance’로 달리 번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재성님은 출구라는 말을 사용하여 계행의 적용에 유도리가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초불연의 경우 피함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전반적으로 이해하기가 난해합니다.
십선계를 보면
오계 뿐만 아니라 십계 역시 유도리가 있습니다.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자에게는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것이 출구이다.
2)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자에게는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는 것이 출구이다.
3)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자에게는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출구이다.
4) 거짓말을 하는 자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출구이다.
5) 이간질하는 자에게는 이간질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출구이다.
6) 욕지거리하는 자에게는 욕지거리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출구이다.
7) 꾸며대는 말을 하는 자에게는 꾸며대는 말을 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출구이다.
8) 탐착을 갖는 자에게는 탐착을 여의는 것이 출구이다.
9) 악의를 갖는 자에게는 악의를 여의는 것이 출구이다.
10) 잘못된 견해를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견해가 출구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출구가 있는 것의 경, A10.175, 전재성님역)
열 가지 십선행에 대한 것입니다. 공통적으로 출구라는 말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빠져 나갈 구멍을 마련 해 놓은 것 같습니다. 이는 ‘삼가다’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탐착과 악의와 잘못된 견해(사견)에는 삼가다는 말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대신 ‘여의다’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십선계에서 마지막은 사견에 대한 것입니다. 천수경 십악참회에서는 ‘치암중죄금일참회’라 하여 ‘어리석음’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라 했습니다.
경에 따르면 “잘못된 견해를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견해가 출구이다. (Micchādiṭṭhikassa bhikkhave sammā diṭṭhi parikkamanaṃ hoti)”라 했습니다. 여기에 ‘출구’라는 말도 ‘삼가다’는 말도 ‘여의다’라는 말도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된 견해는 정견외에 다른 것이 없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그릇된 견해를 가진 자에게 바른 견해는 피하는 것이다.”라 했습니다. 지극히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입니다. 빅쿠보디는 “One who holds wrong view has right view as the means to avoid it.”라 하여 “그릇된 견해를 가진 자는 그것을 피함으로써 바른 견해를 갖는다.”라는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마지막 것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Micchādiṭṭhikassa bhikkhave sammā diṭṭhi parikkamanaṃ hoti.(빠알리원문)
2) “잘못된 견해를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견해가 출구이다.”(전재성님역)
3) “그릇된 견해를 가진 자에게 바른 견해는 피하는 것이다.”(대림스님역)
4) “One who holds wrong view has right view as the means to avoid it.(비구보디역)
빠알리어 ‘saparikkamana’에 대하여 어떤 번역어를 적용했는가에 따라 번역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빠알리 ‘saparikkamana’는 ‘parikkamana’의 형태로서 ‘walking about’의 뜻이지만 일본어사전에서는 ‘歩き廻ること, 回避, 出離’의 뜻입니다. 피함의 뜻이 강합니다. 빠져나감의 뜻도 있습니다. 전재성님은 독일어 주석 Lba를 인용하여 ‘출구’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잘못된 견해를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견해가 출구이다.”로 번역하여 이해가 쉽습니다. 그러나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그릇된 견해를 가진 자에게 바른 견해는 피하는 것이다.”라 하여 대단히 난해하게 번역했습니다.
출구가 있는 가르침
한국불교 예불의식에서 오계를 볼 수 없습니다. 설령 오계를 낭송한다고 해도 ‘하지말라’는 식으로 되어 있어서 지키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음주계의 경우 “술마시지말라”가 됩니다. 술을 한방울이라도 마시면 불음주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일까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개차법이라 하여 상황에 따라 어겨도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테라와다불교 예불의식에서 오계는 필수입니다. 요즘은 법회모임에서 테라와다식 오계 독송이 확산되는 추세에 있습니다. 이는 오계가 평생지니고 배워야 할 학습계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지말라’가 아니라 ‘삼간다’는 말이 들어갑니다. 삼간다는 말은 일종의 ‘출구’와도 같습니다. 속된말로 ‘유도리’가 있는 계율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이 가르침에는 출구가 있는 것이지 이 가르침에 출구가 없는 것이 아니다.”라 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평생 지니고 배우고 익혀야 하듯이, 계율 역시 평생지녀서 배우고 익혀야 하는 학습계율입니다. 부처님은 유도리가 있는 가르침이고,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구가 있는 가르침입니다.
2017-06-2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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