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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띠(sati)와 압빠마다(appamada)는 어떤 관계일까?

moksha 2017. 7. 3. 13:55

 

사띠(sati)와 압빠마다(appamada)는 어떤 관계일까?

 

 

페이스북을 하지 않습니다. 알려지는 것이 싫어서 입니다. 한번 만들어 보았지만 맞지 않은 것을 알아서 허물었습니다. 트위터도 하지 않습니다. 역시 알려지기 싫어서입니다. 누구나 다 하는 것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입니다. 특히 인기를 먹고 사는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전문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길게 쓰는 블로그에 비하여 비교적 짧게 표현 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대하여 어떤 이는 뜨내기 손님과도 같다.”라 했습니다. 누구나 지나가는 사람이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블로그는 전문가의 영역입니다. 무제한으로 표현이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익명성이 보장됩니다. 이런 이유로 블로그는 열심히 하지만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하지 않습니다.

 

허정스님 페이스북에서

 

조계종총무원장직선실현을 위한 단체카톡방이 있습니다. 스님들과 재가활동가들로 구성된 사부대중모임입니다. 이 모임의 좌장격인 허정스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어느 분이 카톡방에 올려 놓았습니다. 승랍 30년 이상이고 50세 이상인 스님들의 연수교육에 대한 글입니다. 출가자의 본분사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종단 최고지도자 연수 참가 후기

 

마곡사 근처 한국문화연수원에서 승랍30년 이상이 참가하는 종단 최초로 최고지도자 특별과정에 30년이상의 비구니스님 40명과 비구스님 16명이 참석하였다.

 

56명 참석은 전체연수대상 스님들 숫자에 비하면 아주 적다. 나는 올해 가까스로 30년이 되었는데 내 법랍의 두배가 넘는 까마득한 선배스님들도 보였다.

 

1952년도에 출가한 비구니 영운스님이 승랍이 65년으로 가장 높았고 올해 85세인 비구윤월스님이 세납이 가장 높았다.

 

연수교육이라는 걸 처음 참석했다는 스님은 토굴에 살기에 이제까지 종단에서 보낸 우편물은 한통도 받아보지 못하였는데 이번에는 연수교육을 알리는 우편물이 와서 참석하게 되었단다.

 

최근 포살을 위해 모든 스님들이 결계신고를 하게 된 효과이리라.

 

사실 최고지도자란 단지 승랍 30년이상이 되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최고지도자라고 부르는 것을 좋게 받아 들이자면 출가해서 30년이상 절집에 산 스님들을 어른으로 대접해드리겠다는 표현같기도 하고, 이제부터라도 최고지도자가 되셔야한다는 무언의 압력 같기도 하다.

 

최고지도자의 자질은 어떠해야할까? 정치와 오늘의 한국, 새로운 패러다임, 사회복지와 불교계 역활, 최고지도자로 가는 길, 수행과 건강이라는 다섯 개의 강의가 23일 동안 이루어졌다.

 

스님들이 시대의 변화를 읽고 시대가 요구하는 알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편성된 주제들일 것이다.

 

현실은 어떤가? 시대의 요구에 대응하기는 커녕 한국불교가 당면한 교리적 혼란이나 종단운영의 부조리에 눈감고 있는 스님들이 대부분이다.

 

한동안 사회를 잊고 산속에서 살아왔던 스님들은 대체로 강의를 신선하게 생각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적어도 최고의 지도자가 되려면 종단이 어떻게 운영되고 스님과 승가가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를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스님들을 피교육자로만 생각하여 강의를 듣게 하는 것으로 끝마쳐서는 미흡하다.

 

이번에 참석한 스님들은 사찰에서 평생 법문하고 참선하고 상담하고 불사를 하며 살아온 분들이다.

 

최고 지도자로서 이 분들을 대접하는 것은 스님들이 어떤 것을 원하고 어떻게 수행하고 포교 해오셨는지 총무원장스님과 교육원장스님이 직접 들어야한다.

 

선거권을 가진 스님들만 찾아 다니며 내편만 관리할 것이 아니라... 모시기 어려운 분들을 모셨놓고 재가자 강사들의 강의만 듣게하는 것은 사려 깊지 못하다.

 

다행스럽게도 나와같은 아쉬움을 느끼신 선배스님 한분이 저녁공양 후에 우리끼리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 하여 우리들만의 시간이 생겨났다.

 

자발적으로 모인 18명의 스님들이 자기소개, 연수교육 참석소감, 종단에 대한 생각과 바라는 점 등을 이야기했다.

 

만남이 그리워 모이셨기 때문인지 오가는 이야기들이 참 좋았다.

 

연수교육을 생전 처음 나왔다는 스님,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스님, 외로워서 스님들 얼굴 보려고 왔다는 스님, 교통사고를 당한 후 치료과정을 들려준 스님, 300만명 불자가 감소한 것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스님등 종종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를 하고 혼자서 오래 이야기하는 스님들이 있었지만 적절한 사회자의 재치로 별탈없이 끝마쳤다.

 

스님들 얼굴보고 싶어서 나왔다는 스님들이 가장 많았다. 독신으로 살아오신 스님들, 대중처소를 떠나 자의로 혹은 타의로 혼자 살아온 스님들이 요즘 유행하는 혼밥 혼술의 원조일 것이다.

 

혼자 살기위해 출가한 것은 아닐진데 홀로 머무는 것이 삶의 목표는 아니었을 텐데 스님들은 어젠가부터 공동체를 떠나 혼자살게 되었다. 승가에 모여살기가 퍽퍽해 졌다. 소유의 차이 때문이다.

 

승가안에서 벌어지는 부익부빈익빈의 경쟁, 각자도생하게 만드는 공동체의 붕괴가 만들어낸 모습이다.

 

대부분 얼굴도 모르고 이제까지 한번도 만난적이 없지만 맘속으로 그리워 했던 스님들이다. 다리를 쩔뚝이며 지팡이를 짚고 오신 스님, 농사를 짓다가 오셨는지 두툼한 손을 가진 스님, 페친스님, 20대에 같은 선방에서 공부했던 스님...나는 나에게 휴가를 주기 위해 참석했다.

 

조계사 일주문 앞에서 직선제와 적폐청산을 위해 1인시위를 하고 있는 나에게 휴식이 필요했다.

 

살면 살수록 인생은 혼자서 가는 길임을 느낀다. 또 그만큼 공동체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연수교육에 참가하니 그래도 같은 길을 가는 도반 선배스님들이 있다.

 

그분들과 자주 모여 토론하고 탁마하고 산책하고 차마시면 조금더 행복할텐데... 이렇게 자주 모이다보면 개인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나 시대정신을 배우고 승가의 책임을 말하는 그런 승가공동체가 되어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야 한다.나 자신의 이익과 나 자신의 괴로움만을 고민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안락과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기에...

 

몇몇스님들은 나와 불자님들의 1인시위 상황을 익히 알고 계셨고 위로를 해 주셨다.

 

서로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는 스님들을 보고 희망과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시간을 공유하고 생각을 교환하는 일이 늘어 났으면 좋겠다. 같이 고요하게 아늑하게 늙어 갔으면 좋겠다.

 

(허정스님)

 

 

허정스님의 연수교육참가 후기를 보면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출가한 스님들이 현실과 담을 쌓고 거의 은둔하다시피 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승랍이 높을수록 토굴에서 홀로 사는 경우가 많은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출가한지 오래 될수록 어른 대우를 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가자의 본분사는

 

스님들은 출가하면 거의 숨어서 살다시피 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도 없을 뿐더러 심지어 종단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되고 있는지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지향적인 스님들이 이권을 독차지 하고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독식하고 있습니다.

 

출가한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모두 다 어른이라 볼 수 없습니다. 어른 스님으로서 행위를 해야 어른 스님이라 볼 수 있습니다. 법구경에서도 “머리가 희다고 해서 그가 장로는 아니다 . 단지 나이가 들었으나 헛되이 늙은이라 불리운다. (Dhp.260) 라 했습니다. 출가자로서 본분사를 다 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나이를많이 먹어도 아무리 승랍이 높아도 어른이라 볼 수 없습니다. 출가자의 본분사는 다름 아닌 수행과 포교입니다.

 

재가자의 수행과 포교

 

수행과 포교는 이제 출가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재가자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정진하고 또한 능력껏 알리고 있습니다. 블로그에 매일 글을 올리는 것도 일종의 포교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어느 재가법사님은 인터넷포교사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대체적으로 인터넷글쓰기에 대하여 인터넷포교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포교를 목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불자가 일상에 느낀 점을 써 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블로그를 알리려고 한다든가 이름을 알리기 위하여 쓴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득을 취하기 위하여 글을 쓰는 것이라면 실명으로 써야 하고 얼굴도 알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만들어 팔로워를 많이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의미 있는 댓글을 받고

 

인터넷에 글을 쓰다 보니 의미 있는 댓글도 많이 받습니다. 이런 댓글에 답글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늘 미안하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매일 새로운 글을 올리는 것으로 답글을 대신합니다.

 

최근 받은 댓글 중에 수행과 관련하여 훌륭한 글을 받았습니다. 재가자가 수행에 임하는 자세에 대한 글입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 지도 받았을 때 나날이 향상되는 것을 글로서 표현 한 것입니다. 글에서 사띠와 불방일에 대한 것에 공감했습니다.

 

사띠와 압빠마다는 어떤 관계?

 

사띠와 압빠마다(불방일)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언젠가 쓴 글에서 사띠와 압빠마다는 사실상 같은 것이라는 취지로 글을 쓴 바 있습니다. 초기경전 도처에서 부처님은 사띠와 압빠마다를 이야기했습니다.

 

압빠마다와 관련해서는 디가니까야 완전한 열반의 큰 경(D16)’에서 부처님의 말씀이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직전에 마지막 유훈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했습니다.

 

 

vayadhammā sa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

 

모든 형성된 것들은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D16)

 

 

부처님은 마지막 유훈으로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appamādena sampādethā)”라 했습니다. 키워드는 불방일입니다. 이 말에 대한 주석을 보면  “Smv.593에 따르면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라는 것은 새김을 잃어 버리지 말고 모든 해야 할 일을 성취하라.’라는 뜻이다.”(1230번 각주) 라 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불방일(appamāda)은 사띠(sati)와 동의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방일이 사띠와 동의어인 것은 초불연 각주에서 좀더 분명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초불연에서는 불방일이란 마음챙김의 현전이다.”라고 언급하면서 복주서를 인용하여 그런데 이것의 뜻으로는 지혜를 수반한 마음챙김이다.”라 했습니다. 더구나 여기서 보듯이 불방일과 동의어인 마음챙김(sati)의 현전이야말로 부처님 45년 설법을 마무리하는 굉장한 가르침이라고 주석서와 복주석서는 강조하고 있다.”(초불연 디가니까야 2 310번 각주)라 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불방일과 사띠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자는

 

초기경전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말이 사띠입니다. 이에 못지 않게 많이 등장하는 말이 압빠마다(불방일)입니다. 압빠마다와 관련하여 법구경에는 방일하지 않음의 품(Appamānavagga)’이 있을 정도입니다. 품에서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Appamādo amatapada,

pamādo Maccuno pada,

Appamattā na mīyanti,

ye pamattā yathā matā.

 

방일하지 않음이 불사의 길이고

방일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니

방일하지 않은 사람은 죽지 않으며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 (Dhp21, 전재성님역)

 

 

 

 

 

방일한 자, 즉 게으른 자는 이미 죽은 자와 같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움직임이 없는 자는 이미 죽은 자와 같음을 말합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게으름과 노력의 토대의 경(A8.80)’에서 나는 일을 했다. 그런데 그 일을 해서 몸이 피곤하니 차라리 누워버리겠다.”(A8.80)로 나타납니다. 큰 대자로 드러 눕는 자는 게으른자입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잠을 잘 때 사자형상을 하며 옆으로 누워 잤습니다. 잠자기 전에 알아차리며 잠에 들고 잠에서 깨어날 때도 알아차리며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부지런히 움직이는 자는 살아 있습니다. 늘 깨어 있는 자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학인의 붙퇴전에 대한 경(A7.28)’에 따르면 세속적인 일을 즐기지 않는 것, 잡담을 즐기지 않는 것, 잠자는 것을 즐기지 않는 것, 무리지어 다니지 않는 것, 감관의 문을 수호하는 것, 식사에 알맞은 양을 아는 것”(A7.28)이라 했습니다. 이것들과 반대로 하는 자들은 게으른 자들이고 사띠를 놓친 자들입니다.

 

게으른 자는 일반사람을 지칭하며 부지런한 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를 지칭합니다. 게으른 자는 유아(有我)로 사는 자이기 때문에 오온의 죽음과 함께 정말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만, 가르침을 실천한  부지런한 자는 무아(無我)를 실천하는 자로 살기 때문에 오온이 죽어도 죽지 않는 자, 즉 불사에 이른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코끼리발자국 비유

 

부처님은 압빠마다에 대하여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 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수행승들이여, 태양이 떠 오를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바로 새벽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생겨날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 (S45.54)라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불방일을 새벽으로 비유했습니다.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뜨기 전에 새벽이 전조이듯이, 길과 경지에 대한 실현의 전조로 불방일이라 한 것입니다.

 

불방일은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우선합니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방일하지 않음의 경(6.53)’에서 코끼리발자국, 용마루, 골풀, 망고열매줄기, 별빛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중에서 코끼리발자국 비유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라문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걸어 다니는 생물들의 발자국이든지 그 모든 것들은 코끼리 발자국에 들어가고, 코끼리 발자국이 그 크기로 보아 최상이라고 하듯, 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닦고 익히면, 현세에서의 이익과 미래의 이익, 양면에서의 이익이 보장되는 단 하나의 원리는 방일하지 않는 것입니다.”(A6.53)

 

 

코끼리발자국의 비유는 사성제를 설명할 때도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압빠마다, 불방일에 대하여 코끼리 발자국 같은 것이라 하여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의 근본이 된다고 했습니다.

 

게으른 자는 도와 과를 이룰 수 없습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사띠와 함께 압빠마다에 대하여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와 압빠마다는 항상 함께 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법을 하고 나서 마지막 열반의 침상에 누웠을 때 한마디 말이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appamādena sampādethā)”입니다. 한단어로 요약하면 불방일입니다.

 

사띠가 기억인 근거 경

 

불방일은 사띠와 동의어입니다. 늘 깨어 있는 것은 사띠이고 동시에 불방일입니다. 여기서 사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새기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띠가 기억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를 갖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왕의 국경요새에는 내부에 대해서는 수호를 위하여, 외부에 대해서는 방어를 위하여 현명하고, 유능하고, 슬기롭고, 모르는 사람은 거부하고 아는 사람만 들여 보내는 파수꾼이 있듯이,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제자는 새김을 확립하여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한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제자는 새김의 파수꾼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버리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닦고, 허물을 버리고 허물없음을 닦고, 자신의 청정을 수호 한다. 이러한 여섯 번째 올바른 원리를 갖추고 있다.”(A7.6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사띠에 대하여 파수꾼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마치 성루에 있는 파수꾼이 모르는 사람은 거부하고 아는 사람만 들여 보내듯이, 사띠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거부하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닦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에 따르면 사띠에 대하여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는 것으로 묘사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사띠가 알아차림이나 마음챙김이라는 말 보다 기억이라는 말에 더욱 더 비중을 두는 근거가 되는 경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띠와 압빠마다는 같은 말

 

사띠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새김으로 번역했습니다. 이는 사띠의 원래 의미가 기억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앙굿따라니까야 요새의 비유에 대한 경(A7.67)’을 보면 사띠가 파수꾼 역할을 하는데 분명히 기억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르침에 대한 기억입니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어야만 그 다음 단계가 진행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가르침에 대한 기억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귀가 닳도록 이야기해도 이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되새기고 사유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띠의 진정한 의미라 볼 수 있습니다.

 

사띠가 단독으로 쓰일 때나 복합어로 사용될 때나 가장 기본이 되는 말은 기억입니다. 그 기억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가르침에 대한 기억입니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늘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사띠삼빠자나라는 말에 대하여 새기고 올바로 알아차리며라 했습니다. 이는 다름아닌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깨어있음이고 불방일(appamada)입니다.

 

부처님을 가르침을 알아야만 사성제도 있고, 팔정도도 있고, 십이연기도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아야만 도와 과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만 깨어 있음이 됩니다. 늘 깨어 있는 것은 불방일이고 정진입니다. 부처님이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라고 했을 때 이 말은 늘 가르침을 기억하고 알아차리며 깨어 있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띠(sati)와 압빠마다(appamada)는 같은 말입니다.

 

 

2017-06-3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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