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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다나상가(Dānasaṅgha)담마 이야기

17. 윤회(輪廻)의 진실

moksha 2017. 6. 13. 22:44

17. 윤회(輪廻)의 진실

 

윤회(輪廻)라 번역한 삼사라(saṃsāra)는 문자적으로 ‘함께 움직이는 것,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윤회(輪廻)라고 번역했고, 영역하여 round of rebirth라고 한다. 이외에도 윤회라고 번역되는 빨리어에는 회전을 의미하는 왓따(vaṭṭa)가 있다.

 

담마상가니[Dhamma Saṅgaṇī, 법집론(法集論)]의 주석서인 앗타살리니(Atthasālinī, Asl. 354, 355)에서 오온(五蘊),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이라고 정의되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란 영혼(jīva)이나 자아(atta)와 같은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매 찰나 전개되는 오온의 생멸자체가 윤회이고, 생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생에서의 마지막 마음, 즉 죽음의 마음(cuti-citta)이 일어났다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 paṭisandhi-viññāṇa)이 일어나는 것이 윤회이다.

 

그래서 힌두교나 다른 종교에서 설하는 윤회설과는 구분해야 한다. 브라만교나 자이나교 그리고 힌두교 등의 윤회는 불변하는 아뜨만(atman)이 있어서 금생의 육신을 버리고 내생의 새로운 육신으로 옮겨가는 재육화(再肉化, reincarnation)를 뜻하지만 불교의 윤회는 무명(avijiā)과 갈애(taṇhā)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再生, rebirth)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윤회는 전적으로 특정한 개체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연기적 흐름이다. 윤회는

“무명(avijiā)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taṇhā)에 속박되어 치달리고 윤회하므로 그 시작점을 꿰뚫어 알 수 없다.”                                                                           [삼십 명의 경(Tiṃsamattasuttaṃ, S15:13)]

이와 같은 내용이 여러 경에서 누누이 언급되고 있다.

 

【업과 윤회에 대한 개념 비교】

 

브라만교ㆍ힌두교ㆍ타 종교

불교

주체

영원불멸의 아트만(Atman)ㆍ영혼(靈魂)

무아(無我)

[업력(業力, Kamma energy)에 의한 연기적 흐름]

개념

주체의 옷 갈아입기식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님

원인

자기원인ㆍ타자원인

스스로의 의도적 행위의 과보

과보에 대한 입장

결정론(決定論)ㆍ숙명론(宿命論)

자업자득(自業自得)ㆍ자유의지

언어표현

재육화(再肉化, Reincarnation)

ㆍ대개 환생(還生)이라고 표현한다.

재생(再生, Rebirth)

ㆍ사실 재생이란 용어도 정확한 의미의 표현은 아니다.

 

또한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신 후에 법구경(法句經)의 오도송(悟道頌)에서

 

[Dhp11-153] [부처님의 오도송]

anekajātisaṃsāraṃ sandhāvissaṃ anibbisaṃ         집 짓는 자를 찾으려 했지만 찾아내지 못하고

  아네까자띠삼사랑         산다위쌍     아닙비상           수많은 생을 윤회했다.

gahakāraṃ gavesanto, dukkhā jāti punappunaṃ.     거듭하여 태어나는 것은 고통스럽다.

  가하까랑    가웨산또      둑카  자띠    뿌납뿌낭

 

[Dhp11-154] [부처님의 오도송]

gahakāraka diṭṭho si puna gehaṃ na kāhasi,                  집을 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가하까라까  딧토 시  뿌나  게항  나 까하시                    [그대는]또다시 집을 짓지 못할 것이다.

sabbā ete phāsukā bhaggā gahakūṭaṃ visaṃkhitaṃ,       이 모든 서까래들은 파괴되었고,

 삽바 에떼 빠수까    박가    가하꾸땅     위상키땅           지붕도 부서졌다.

visaṃkhāragataṃ cittaṃ taṇhānaṃ khayam ajjhagā.        조건 지어진 것이 제거된 마음은

   위산카라가땅     찟땅     딴하낭     카양   앗자가         갈애의 파괴에 이르렀다.


라고 윤회가 종식(=열반)된 데에 대한 감회를 밝히고 계신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갈애와 무명이 윤회의 원인이라고 밝히셨고 그 중에서 갈애(taṇhā)를 ‘재생을 하게 하는 것[뽀노바위까(ponobhavikā)]’이라고 하셨다.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시작과 끝을 알 수없는 생사윤회의 바퀴는 계속 굴러간다. 하지만 갈애로 대별되는 모든 번뇌들을 쳐부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의 윤회가 없다.

 

윤회는 갈애와 무명에 휩싸여 치달리고 흘러가는 중생들의 가장 생생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윤회를 설하셨으니 이것이 고성제(苦聖諦)이고, 윤회의 원인인 갈애를 설하셨으니 이것이 집성제(集聖諦)이며, 윤회가 다한 경지인 열반을 설하셨으니 이것이 멸성제(滅聖諦)이며, 윤회가 다한 경지를 실현하는 방법인 팔정도를 설하셨으니 이것이 도성제(道聖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