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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正解) 불교학 총정리/제7장 중국불교사

3. 북조의 불교 :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

moksha 2017. 5. 24. 22:22

3. 북조의 불교

 

(1) 북위(北魏)의 불교

 

  1) 불교의 성행과 교단의 발전

    사원수 3만, 승려가 3백만 명

  2) 태조 도무제

    불교를 신봉하고 보호

  3) 태무제(太武帝)의 폐불(廢佛):446

    ① 북방통일사업에 이은 내정혁신

    ② 도불(道佛) 이교의 세력다툼

    ③ 재상 최호(崔浩)가 신천사도(新天師道:도교)의 창시자인 구겸지(寇謙之)와 결탁

    ④ 북방민족과 한민족과의 투쟁

    ⑤ 국가재정상의 문제 : 사원과 승려의 증가로 인해 국가경제의 피폐

    ⑥ 교단의 타락 : 교단의 경이적인 발전으로 인한 승려의 타락과 교단의 부패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

남조의 불교가 양나라의 무제에 의해 크게 흥기한 데 비해 북조의 북위불교는 폐불로 황폐해 갔다. 북위의 초기시대에는 사원이 3만 개, 승려가 3백만이 될 정도로 불교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태무제때에 재상 최호(崔浩)가 신천사도 (新天師道;도교)의 창시자인 구겸지(寇謙之)와 결탁하여 도교를 장려하기 위하여 불교탄압의 기치를 들었다. 태연 4년(438)에 50세 이하의 사람은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승려 제한의 조칙을 공포하였고, 그 후 2년 후에 연호를 태평진군(太平眞君)으로 바꾸고 태무제는 스스로 도교 군주가 되었다. 태평진군 7년(446)에 태무제가 개오(蓋吳)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장안에 들어갔다가 장안의 한 사원에서 많은 병기와 술 담는 통과 부녀자를 숨겨 놓은 밀실을 발견하고 개오와 내통했고 불교가 타락했다고 하여 대대적인 폐불을 단행하였다. 사문들은 살육되고 불상과 경전들은 모두 불태워졌으며 승려는 모두 환속하게 하였다. 사원 근처에서 방황하는 사람은 잡히면 모두 참수하여 사원 경내에는 사문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폐불과 때를 맞춰 구겸지의 도교는 불교의 계율을 모방하여 <신과지계(新科之計)>를 만들고 불보살을 본떠 천존상(天尊像)・노군상(老君像) 등을 만들어 제사를 정성껏 지내는 등 무질서했던 도교교단을 체계화시켰다. 구겸지와 최호가 죽고 폐불 6년 후에 태무제가 죽자 불교는 다시 흥행하기 시작했다.

제2의 폐불사건은 북위가 분열하여 동위와 서위로 갈라지고 그 후손들에 의해 각기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갈라지면서 북주의 무제에 의해 단행된다. 무제는 부국강병책을 강행하는 데 승려를 많이 두는 것은 백해무익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던 중 천화(天和) 4년(567)에 환속승인 위원승(衛元崇)의 폐불에 관한 성서와 도사 장빈(張賓)의 암약이 발단이 되었다. 건덕(建德) 3년(574)에 도교, 불교 양교를 모두 폐한다는 칙서가 내려졌다. 사원의 경전과 불상은 모두 파괴되고 승려는 모두 환속(2백만)시켜 군민에 편입시켰다. 건덕 6년(577)에 무제가 북제를 토벌하였을 때 병란으로 북지의 불교는 한때 파멸지경에 달할 정도였다. 그 밖에도 중국불교사에서 폐불로 기록될 사건은 여러 번 있었다.

 

당나라 때 무종의 폐불사건과 후주(後周) 세종(世宗)의 폐불사건은 불교를 초토화 시킬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폐불(廢佛)은 무종에 의한 회창(會昌)의 폐불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 사건이 발생하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그 주된 동기 중의 하나는 도교의 불교 배격을 위한 책모(策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사원 소유의 장원이 증가함에 따른 국가의 경제적인 문제 발생과, 교단적으로 승니(僧尼)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사도승(私度僧)과 위람승(僞濫僧)의 횡행에 있었다. 이러한 불교 내부의 문제가 누적되면서 밖으로부터의 공격에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회창의 폐불사건은 회창(會昌) 2년(842)에 승니중 범죄자와 계행을 닦지 않는 자를 환속시켜 그 재산을 몰수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3년 후인 회창 5년(845)에는 훼불사 륵승니환속제(毁佛寺勒僧尼還俗制)가 발표되면서 전국적인 훼불을 단행하였다. 이 제도의 시행으로 폐사된 사찰이 4,600 여 개소, 환속된 승니는 약 260,000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천만 경(頃)의 토지가 몰수되고 노비에서 풀어준 인원이 약 150,000 명에 달하였다. 장안과 낙양에는 4개의 사찰만 남기고 승니 30 인만 주석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주에는 하나의 사찰만 남기고 3등급으로 나누어 20인 이하의 승니만 남게 하였다.

 

한편 後周의 3代王 世宗은 현덕 원년(954)에 천하의 칙액(勅額)없는 사원을 모두 폐쇄(廢鎖)하니 그 수가 3,336개소에 달하고 잔존하는 사원은 2,700개소에 불과하고 동상(銅像)을 폐기(廢棄)하여 동전 등을 만들게 하였으며 다음해인 AD955년에는 사원 3,366개소를 폐쇄하고 그곳의 동불상 등으로서 주도전을 주조(鑄造)하였으며, 남자의 年 15세 이상으로 경백장(經百帳)을 암송하거나 300장을 읽는 자만 출가케 하고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여 出家爲僧을 금하다시피 하였으니, 국가적 차원의 통제(統制)로서 불법(佛法)을 도태(淘汰)시켜 간 것이라고 하겠다.


 4) 문성제(文成帝):폐불 후 6년 태무제가 죽고 즉위

    ①불교부흥의 칙서

    ②대동 운강 대석굴을 개착

 5) 효문제(孝文帝)

    ♣용문 대석굴을 개착

 6) 담란(曇鸞)

    ♣ 정토교를 개창(시조)

    ♣ 낙양에서 보리유지를 만나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전수받음

    ♣ 정토염불을 주창


운강 대석굴・용문 대석굴 ⇒ 제9장 불교 문화 참조

의읍(義邑)

중국 남북조(南北朝)부터 수(隋)ㆍ당(唐)ㆍ오대(五代)에 이르는 재가불교신자(在家佛敎信者)가 조직한 신앙단체로서 시기에 따라서 읍회(邑會)ㆍ법사(法社)ㆍ사읍(社邑) 등으로도 호칭되었다. 구성원이 협동해서 공덕을 쌓아가는 구체적인 행위로서 조상(造像)ㆍ조사(造寺)ㆍ수사(修寺) 등의 사업을 했다.

당나라 중기에는 사읍(社邑)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이었고 사업내용도 소규모의 조상(造像)ㆍ조경당(造經幢)ㆍ재회(齋會)ㆍ송경(誦經)ㆍ사경(寫經)ㆍ속강지원(俗講支援) 등 비교적 경제적 부담이 적은 것으로 변화했다.

조직은 사승(社僧) 이하 사장(社長)ㆍ사로(社老)ㆍ녹사(錄事)ㆍ우후(虞候) 등의 간부와 사자(社子)ㆍ사인(社人)ㆍ사호(社戶) 등으로 불리는 일반구성원으로 이루어지며 특정사원에 전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사읍(社邑) 설립과 유지에 사원이 경제적 원조를 해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사원과 지역사회의 긴밀한 관계와 사원이 지역적인 특수세력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나라 후반 이후 특히 사읍(社邑)에 대해서는 금세기에 처음으로 발견된 돈황문서(敦煌文書)의 연구 결과 처음으로 구체적인 조직과 사원의 관계가 밝혀졌다.


(2) 북주(北周)의 불교 

     

   1)북주 무제(北周 武帝)의 폐불:574

     ①무제(武帝, 557~578)의 유학(儒學) 애호

     ②부국강병책을 강행(국가 재정상의 문제)

         3만의 사원과 2백만의 승려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③한인 문화에 대한 강렬한 동경

     ④환속승인 위원숭(衛元崇)의 폐불에 대한 상소 및 도사 장빈(張賓)의 암약

     ⑤도․불 이교의 대립

     ⑥교단의 타락

     ⑦‘검은 사람이 다음의 왕이어야 한다.’는 예언 ⇒ 승려의 검은색 옷을 황색으로 바꾸게 함.

   2)불교도측 상소

     ①견란(甄鸞)의 소도론(小道論)

     ②북주 도안(道安)의 이교론(二敎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