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행복하여라! sukho Buddhānaṃ uppādo!

▣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숫따니빠따(Suttanipāta)/숫따니빠따 독송

Sn3:12 두 가지 관찰의 경(Dvayatānupassanāsutta) : 두 가지의 진리, 발생과 소멸의 연기법

moksha 2016. 10. 20. 15:59


Sn3:12 두 가지 관찰의 경(Dvayatānupassanāsutta)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뿝빠라마1에 있는 미가라마뚜 강당2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보름날의 포살일에 수행승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바깥의 한가한 곳에 앉아 계셨다. 세존께서는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수행승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고귀하여 세속을 떠나며,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착하고 건전한 가르침이 있는데,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고귀하여 세속을 떠나며,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착하고 건전한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묻는 자들이 있거든, 그들에게 이와 같이 ‘두 가지 원리를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라고 말하라. 그렇다면 ‘그대들이 말하는 두 가지란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하는 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하는 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한다든가, 집착이 남아있더라도 하느님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724. [세존] “괴로움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또한 괴로움의 발생을 모르며, 괴로움이 모든 면에서 남김없이 그쳐버린 상태도,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길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725. 그들은 마음에 의한 해탈뿐만 아니라, 지혜에 의한 해탈도 얻지 못한다. 윤회를 끝낼 수가 없는 그들은 참으로 나고 늙음을 받는다.

 

726. 괴로움을 분명히 알고, 또한 괴로움의 발생을 분명히 알며, 괴로움이 모든 면에서 남김없이 그쳐버린 상태도,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길도 분명히 아는 사람들이 있다.

 

727. 그들은 마음에 의한 해탈뿐만 아니라, 지혜에 의한 해탈도 구현한다. 윤회를 끝내 버릴 수가 있는 그들은 참으로 나고 늙음을 받지 않는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원리의 관찰이 있을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자들이 있거든,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도 좋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어떤 괴로움이 생겨나더라도 모두 집착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고, 그러나 집착을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여 소멸시켜 버린다면,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의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든가, 집착이 남아 있더라도 하느님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728. [세존] “세상에서 갖가지 형태를 지닌 어떠한 괴로움이라도 집착을 원인으로 생겨난다. 참으로 알지 못하고 집착을 만들어 내는 어리석은 자는 되풀이해서 괴로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생성과 발생을 관찰하여 분명히 알아 집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원리의 관찰이 있을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자들이 있거든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도 좋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어떤 괴로움이 생겨나더라도 모두 무명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고, 그러나 무명을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여 소멸시켜 버린다면,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든가, 집착이 남아 있더라도 하느님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729. [세존] “이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거듭하여 나가며, 나고 죽는 윤회를 받는다면 그 근본 원인은 무명에 있다.

 

730. 이 무명이란 커다란 어리석음3인데, 이로 말미암아 오래도록 윤회하는 것이다. 그러나 밝은 지혜에 이른 뭇삶들은 다시는 존재에 도달하지 않는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원리의 관찰이 있을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자들이 있거든,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도 좋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어떤 괴로움이 생겨나더라도 모두 형성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고, 그러나 형성을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여 소멸시켜 버린다면,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든가, 집착이 남아 있더라도 하느님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731. [세존] “어떠한 괴로움이 생겨나든 모두 형성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모든 형성이 없어진다면 괴로움이 생기지도 않는다.

 

732. 괴로움은 형성을 조건으로 하므로 바로 그 재난을 알아서, 모든 형성을 그치고, 지각을 부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안다면, 이처럼 괴로움은 부수어지고 만다.

 

733. 올바른 봄을 지닌 지혜로운 님들, 올바른 앎을 지닌 현명한 님들은 악마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다시는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원리의 관찰이 있을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자들이 있거든,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도 좋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어떤 괴로움이 생겨나더라도 모두 의식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고, 그러나 의식을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여 소멸시켜 버린다면,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두 번째 원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든가, 집착이 남아 있더라도 하느님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734. [세존] “어떠한 괴로움이 생기더라도 모두 의식을 조건으로 한다. 의식이 소멸된다면 괴로움은 발생하지 않는다.

 

735. 괴로움은 의식을 조건으로 하므로 수행승은 바로 그 재난을 알아서, 의식을 고요히 가라앉혀 바램 없이 완전히 열반에 든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원리의 관찰이 있을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자들이 있거든,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도 좋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어떤 괴로움이 생겨나더라도 모두 접촉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고, 그러나 접촉을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여 소멸시켜 버린다면,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든가, 집착이 남아 있더라도 하느님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736. [세존] “존재의 흐름을 추구하여 접촉에 패배 당한 사특한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장애를 부수기 어렵다.

 

737. 그러나 접촉에 대하여 두루 알아 최상의 지혜와 그침을 즐기는 사람은, 접촉을 고요히 가라앉혀 바램 없이 완전히 열반에 든다.”

 

[세존] “수행승들이여,‘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원리의 관찰이 있을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자들이 있거든,‘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도 좋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어떤 괴로움이 생겨나더라도 모두 느낌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고, 그러나 느낌을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여 소멸시켜 버린다면,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한다든가, 집착이 남아 있더라도 하느님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738. [세존]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안으로나 밖으로나 어떠한 것이든 느껴진 것이다.

 

739.수행승은 ‘느껴진 모든 것이 괴롭다.’고 알고, 부서지고 마는 허망한 사실에 접촉할 때마다 그 소멸을 보아 이처럼 그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모든 느낌을 부수고 바램 없이 완전히 열반에 든다.”

 

[세존] “수행승들이여,‘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원리의 관찰이 있을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자들이 있거든,‘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도 좋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어떤 괴로움이 생겨나더라도 모두 갈애를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고, 그러나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여 소멸시켜 버린다면,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든가, 집착이 남아 있더라도 하느님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740. [세존] “갈애를 벗 삼는 사람은 이 존재에서 저 존재로 오랜 세월 유전하며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741. 갈애는 괴로움의 원인이므로 바로 그 재난을 알아서 수행승은 갈애를 떠나고, 집착을 벗어나, 새김을 확립하고, 유행해야 하리라.”

 

[세존] “수행승들이여,‘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원리의 관찰이 있을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자들이 있거든,‘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도 좋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어떤 괴로움이 생겨나더라도 모두 집착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고, 그러나 집착을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여 소멸시켜 버린다며,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든가, 집착이 남아 있더라도 하느님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742. [세존]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긴다. 존재하는 자는 괴로움을 받는다. 태어난 자에게 죽음이 있게 된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

 

743. 그러므로 집착의 소멸에 대해 현명한 자들은 올바로 알고, 태어남의 소멸에 대해 잘 알아 다시는 생존을 받지 않는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원리의 관찰이 있울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자들이 있거든,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도 좋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어떤 괴로움이 생겨나더라도 모두 동기를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고, 그러나 동기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여 소멸시켜 버린다면,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든가, 집착이 남아 있더라도 하느니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744. [세존] “어떠한 괴로움도 모두 동기4를 조건으로 생긴다. 동기가 소멸되면 괴로움도 생기지 않는다.

 

745. 괴로움은 동기를 조건으로 하므로 그 재난을 알아 모든 동기를 버리고 동기가 없는 곳에서 해탈한다.

 

746. 존재에 대한 갈애를 끊고 마음이 고요한 수행승은 태어남으로 인한 윤회를 벗어나 다시는 존재를 받지 않는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원리의 관찰이 있을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자들이 있거든,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도 좋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어떤 괴로움이 생겨나더라도 모두 자양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고, 그러나 자양을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여 소멸시켜 버린다면,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서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든가, 집착이 남아 있더라도 하느님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 말씀하시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747. [세존] “어떠한 괴로움이 생기더라도 모두 자양을 조건으로 한다. 자양들이 소멸되면 괴로움도 생겨나지 않는다.

 

748. 괴로움은 자양을 조건으로 한다는 그 재난을 알아서 모든 자양을 두루 알아 모든 자양에 의지하지 않는다.

 

749. 질병을 여읜 상태를 올바로 알아서 번뇌들을 부수고 가르침에 입각하여 성찰하는 지혜에 통달한 님은 헤아림을 벗어난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원리의 관찰이 있을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자들이 있거든,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도 좋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어떤 괴로움이 생겨나더라도 모두 동요를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고, 그러나 동요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여 소멸시켜 버린다면,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든가, 집착이 남아 있더라도 하느님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750. [세존] “어떠한 괴로움이 생겨날지라도 모두 동요5를 조건으로 한다. 동요들이 그치게 되면 괴로움도 생겨나지 않는다.

 

751. 괴로움은 동요를 조건으로 하므로 그 재난을 알아서, 그러므로 동요를 버리고, 형성을 종식시켜, 수행승이라면 동요 없이 집착 없이 새김을 확립하고 유행해야 한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원리의 관찰이 있을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자들이 있거든,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도 좋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의착하는 사람에게 떨림이 있다는 것6이 관찰의 한 원리이고, 집착하지 않는 사람에게 떨림이 없다는 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든가, 집착이 남아 있더라도 하느님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752. [세존] “의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떨림이 없다. 그러나 의착이 있는 사람은 이 존재에서 저 존재로 집착하며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753. 의착 가운데 커다란 두려움이 있으므로 그 재난을 알아, 수행승이라면, 의착 없이 애착 없이 새김을 확립하고 유행해야 한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원리의 관찰이 있을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자들이 있거든,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도 좋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미세한 물질적 세계보다 비물질적 세계가 더욱 더 고요하다는 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고, 비물질적 세계보다 소멸의 편이 더욱 고요하다는 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든가, 집착이 남아 있더라도 하느님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754. [세존] “미세한 물질계에 속하는 뭇삶들과 비물질계에 사는 뭇삶들은 소멸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에,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

 

755. 그렇지만 미세한 물질계를 잘 알고, 비물질적 세계에도 머물지 않고, 소멸 가운데 해탈한 님들은 악마에게서 벗어난 자들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원리의 관찰이 있을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자들이 있거든,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도 좋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과 수행자들과 성직자들과 왕들과 인간들과 그 자손들의 세계에서 그들이 ‘이것은 진리이다.’고 생각한 것을, 고귀한 님들은 ‘이것은 허망하다.’고 사실대로 바른 지혜를 가지고 본다. 이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다. 그러나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과 수행자들과 성직자들과 왕들과 인간들과 그 자손들의 세계에서 그들이 ‘이것은 허망하다.’고 생각한 것을, 고귀한 님들은 ‘이것은 진리이다.’라고 사실대로 바른 지혜를 가지고 본다. 이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든가, 집착이 남아 있더라도 하느니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756. [세존] “보라! 신들을 포함한 세상의 사람들은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생각하여 정신·신체적인 것에 집착해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라고 생각한다.

 

757. 그들이 이렇다 저렇다고 여기더라도 그것은 생각과는 다른 것이 된다. 참으로 그것은 허망한 것이고, 허망한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758. 그러나 열반은 허망한 것이 아니다. 고귀한 님들은 이것을 진리로 아는 님들이다. 그들은 진리를 이해하기 때문에, 탐욕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든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원리의 관찰이 있을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자들이 있거든,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도 좋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과 수행자들과 성직자들과 왕들과 인간들과 그 자손들의 세계에서 그들이 ‘이것은 즐거움이다.’고 생각한 것을, 고귀한 님들은 ‘이것은 괴로움이다.’고 사실대로 바른 지혜를 가지고 본다. 이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다. 그러나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과 수행자들과 성직자들과 왕들과 인간들과 그 자손들의 세계에서 그들이 ‘이것은 괴로움이다.’고 생각한 것을, 고귀한 님들은 ‘이것은 즐거움이다.’라고 사실대로 바른 지혜를 가지고 본다. 이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든가, 집착이 남아 있더라도 하느님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759. [세존]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사실들은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하는 한, 모두가 그들에게 갖고 싶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것이다.

 

760. 그들은 신들을 포함한, 이 세상에서 이것들이야말로 즐거움이라 여긴다. 그래서 그것들이 사라질 때에는 그것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한다.

 

761. 고귀한 님들은 존재의 다발을 소멸시키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본다. 세상의 사람들이 보는 것과 이것은 정반대이다.

 

762. 다른 사람들이 즐거움이라 하는 것을, 고귀한 님들은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을, 고귀한 님들은 즐거움이라고 안다. 알기 어려운 진리를 보라. 무지한 사람들은 여기서 헤매게 된다.

 

763. 덮여 있는 사람에게는 어둠이 있다.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암흑이 있다. 참사람에게는 열림이 있다. 보는 사람에게 빛이 있는 것처럼,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는 앞에 있어도 그것을 모른다.

 

764. 존재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히고 존재의 흐름을 추구하며, 악마의 영토에 들어간 자들은 이 진리를 깨닫기 힘들다.

 

765. 고귀한 님들을 빼놓고 누가 이 경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이 경지를 올바로 알면, 번뇌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리라.”

 

이처럼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들 수행승들은 만족하여 세존께서 하신 말씀에 기뻐했다. 더구나 이러한 설법이 설해졌을 때, 예순 명의 수행승들의 마음은 집착 없이 번뇌에서 해탈되었다.


두 가지 관찰의 경이 끝났다.


  1. 뿝바라마(Pubbārāma) : 싸빳티 시의 동문 밖의 승원(東園)이었다. 그래서 한역하여 동원정사(東園精舍)라고도 부른다. 세존께서는 아나타삔디까의 승원에서 시간을 보내신 뒤에는 여기서 오후를 보내셨다. [본문으로]
  2. 미가라마뚜(Migāramatu)강당 이 정사는 사밧티의 동쪽 교외에 있었는데, 비사카(Visākhā)의 별명인 녹자모(鹿子母)를 따서 미가라마뚜-빠사다(Migāramātu pāsāda) 즉 녹자모강당(鹿子母講堂)이라 하기도 하며, 사밧티의 동쪽에 있는 정사이므로 동원정사(東園精舍, 뿝바라마(Pubbārāma)라고도 부르고 혹은 동원녹자모강당(東園鹿子母講堂)이라 하였다. 1층과 2층에는 각각 5백 개의 승방이 만들어졌다. 비사카는 뿝바라마를 9천만 까하빠나로 사들여 다시 9천만 까하빠나를 들여 각층에 500개의 방사가 있는 중각(重閣)의 미가라마뚜 강당을 지었고, 6개월 만에 완성되자 다시 9천만 까하빠나를 들여 4개월간 낙성축제를 했다. [본문으로]
  3. 대미망(大迷妄, avijjā mahāmoha)이다. 무명(無明)은 사실상 불선근(不善根)인 치암(癡暗 moha)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래서 부처님도 심리학적 문맥에서 정신적 요인에 관해 말씀할 때는 대체로‘치암(moha)’이라는 용어를 쓰시고 윤회의 인과적 근거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는‘무명(avijjā)’이라는 용어를 쓰신다. [본문으로]
  4. 동기(ārambba) : Prj. Ⅱ. 507에 따르면, ‘업과 관련된 노력을 말한다. [본문으로]
  5. 갈애, 자만, 견해, 업, 번뇌의 동요이다. 한역에서는 동탐(動貪)이라 한다. Prj. Ⅱ. 504에 따르면 갈애를 말한다. [본문으로]
  6. 의착하는 사람에게 : Prj. Ⅱ. 508에 따르면, ‘갈애-견해-자만으로 존재의 다발에 집착하는 자에게’라는 뜻이다. 떨림이 있다 : 여기서는 공포의 떨림을 말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