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행복하여라! sukho Buddhānaṃ uppādo!

▣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정해(正解) 불교학 총정리/제3장 부처님의 가르침

제3장 부처님의 가르침 1. 부처님의 가르침 (3) 중도(中道)

moksha 2025. 3. 8. 18:56

(3) 중도(中道)

1) 불교의 핵심교설의 하나로서 한쪽에 치우친 양 극단을 떠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리이다.

2) 중도란 <중간 길> 또는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한 가운데>라는 식의 중간주의나 타협적인 중용(中庸)이 아니다.

3) 중도의 중()이란 팔정도의 정(), <바른 길>이라는 뜻이다. 이는 실제 인간생활에 적용되는 요긴한 도리로서, 공리공론(空理空論)이 아닌 정도(正道)를 말하는 것이다.

4) 중도의 중()은 한 가운데라는 고정적인 위치에서 벗어난 좀 더 자유로운 자연성을 뜻하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단순한 절충주의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하는 사상이며, 동시에 실천적으로는 대립된 입장의 어느 한편에 국집하지 않는 태도인 것이다.

5) 있는 그대로 보되 걸림(선입견, 편견 등)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6) 성도 후 석존께서 다섯 비구들에게 한 말씀

    :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 S56:11)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Yo cayāṃ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ṃhito,
yo cāyaṃ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ṃhito,
ete te bhikkhave,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7) 석존이 깨달은 연기의 법, 무상, 무아 등은 모두 이 <중도의 눈>으로 관찰한 것이다.

 

용수의 팔부중도설(八不中道設) 8장 불교 교리의 전개 참조

중도의 가르침을 대승불교에서 새롭게 발전시켜 계승한 사람이 바로 용수보살이다. 그는 중론(中論)을 저술하여 팔부중도를 정립하였다. 팔부중도는 불멸불생(不滅不生), 부단불상(不斷不常), 불래불거(不來不去), 불이불일(不二不一)을 말한다.

 

()ㆍ가()ㆍ중()삼제원융(三諦圓融)의 중도설

()은 모든 존재를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관찰하는 것이고, ()는 인연에 의해 잠시 거짓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은 그 공 가운데 가유(假有)하는 것을 똑바로 알아 그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는 없는 것이나 현실로는 없지 아니하니,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어 진공묘유(眞空妙有)한 것이므로 중도라 한다.

 

중도(中道)?

석존께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극단적인 두 가지 길이 있으니 하나는 관능(官能)이 이끄는 대로 욕망의 쾌락에 빠지는 일이고 또 하나는 고행으로 자기 자신을 의식적으로 괴롭히는 일이라고 하셨다.

쾌락에 빠지는 것은 비열하고 어리석어 무익하며 고행은 괴로울 뿐 이익이 없으므로 출가 수행자는 그 어느 쪽에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셨다이것이 중도의 가르침이다.

중도란 <중간 길> 또는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한 가운데>라는 식의 중간주의나 타협적인 중용(中庸)이 아니다. 중도의 중()이란 팔정도의 정(), <바른 길>이라는 뜻이다. 이는 실제 인간생활에 적용되는 요긴한 도리로서, 공리공론(空理空論)이 아닌 정도(正道)를 말하는 것이다

좌우 중간 할 때의 중간은 중앙에 대한 위치적인 처지를 말하지만 중도의 중은 그런 고정적인 위치에서 벗어난 좀더 자유로운 자연성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있는 그대로 보되 걸림(선입견, 편견 등)이 없는 상태이다.

석존은 다섯 비구들에게

나는 쾌락도 고행도 무익하고 하등한 것이어서 다 버렸으며, 두 극단을 버림으로써 중도를 깨닫게 되었고, 중도를 깨달음으로서 인간 세상의 일들을 바르게 통찰하고 바르게 인식하는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하셨다.

즉 석존이 깨달은 연기의 법, 무상, 무아 등은 모두 이 <중도의 눈>으로 관찰한 것이다.

연못의 진흙은 결코 깨끗한 것은 아니다. <더러움>이다. 반면에 백련(白蓮)은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답고 순백한 <깨끗함>이다. 이 더러움과 깨끗함은 극히 대조적이다. 그러면서도 연꽃은 이 더러움 속에서 피어난다. 진흙과 연꽃과는 서로 양극을 이루지만 사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즉 불이(不二)인 것이다.

독과 약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독과 약, 악마와 천사, ()와 이(), 슬픔과 기쁨과 같이 모든 것을 둘로 갈라서 생각한다. 그래서 유물(唯物)과 유심(唯心)도 분명히 구분해서 생각하려고 한다.

예컨대, 물질과 마음 중 어느 쪽이 주()이며 어느 쪽이 종()이냐 하는 따위의 사고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먹을 것(물질)이 없으면 죽고 만다. 먹을 것을 알맞게 먹어야 체내에서 생리적 화학작용을 해서 생각도 하게 되고 마음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먹을 것이 우위라고는 할 수 없다. 독도 때로는 약이 되며 반면에 병을 고치는 약도 지나치면 해롭다. 이렇듯 물()()은 둘이 아닌 하나인 것이다.

인간들이 대립적인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 생, , 부정, , , 더 나아가 나․・너라는 것은 모두 둘이 아닌 하나이며 다만 인간이 이를 둘로 갈라서 차별을 할 뿐인 것이다. 따라서 중도의 <()>은 둘이 아니라고 보는 눈()인 것이다.

욕망 그 자체는 무기(無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욕망 자체는 중도이다. 이 욕망이 갈애 쪽으로 기울면 고뇌가 생긴다는 것이며 욕망의 불꽃을 끄면 고뇌없이 즐겁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중도가 아니다. 선악도 역시 그렇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과 연에 따라 선인도 되고 악인도 되는 것입니다. 사성제 중의 고제()도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 까닭도, 이 고가 있음으로 극복의 길을 찾을 수 있고 또 고가 있음으로 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락도 하나이다.

모든 것을 고정적으로 또는 집착해서 보는 것은 중도가 아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번뇌가 곧 보리(깨달음)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