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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빠다(Dhammapada)/담마빠다 이야기

[게송47] 사끼야족(석가족)을 몰살시킨 위두다바

moksha 2018. 10. 1. 18:31

[게송47] 사끼야족(석가족)을 몰살시킨 위두다바

 

어느 날 빠세나디(Pasenadi) 왕은 사왓티의 자기 왕궁 위층 창가에 앉아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왕은 수 천 명의 빅쿠들이 탁발을 하기 위해 거리를 지나 아나타삔디까 쭐라아나타삔디까 위사카, 그리고 숩빠와사의 집으로 가는 것을 보고 시종에게 물었다.

“저 빅쿠들은 어느 집으로 탁발들을 가시는 건가?”

시종이 대답했다.

“대왕이시여, 저 수천의 빅쿠들은 매일같이 음식이나 약품을 공급받기 위해서 아나타삔디까 쭐라아나타삔디까 위사카, 그리고 숩빠와사의 집으로 가십니다.”

이런 대답을 들은 빠세나디 왕은 자기도 그들과 같이 빅쿠 상가를 위해서 무언가 봉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곧 수도원으로 부처님을 찾아 뵙고 빅쿠들을 초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빅쿠들을 초청하게 된 왕은 이레 동안 부처님께 자기가 직접 공양을 올렸고, 마지막 날에 이르러 부처님께 이렇게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이후부터는 매일같이 제 왕궁에 오시어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었다.

“대왕이여, 여래는 한 곳에서 규칙적으로 공양을 받는 법이 아니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여래에게 공양을 올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오. 여래는 그들의 집을 골고루 방문하여 그들의 정성을 받아 주지 않으면 안 되오.”

 

“부처님이시여, 정 그러시다면 한 분의 테라님만이라도 규칙적으로 저의 왕궁으로 탁발 오시도록 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왕의 청을 받아들여 부처님께서는 아난다 테라를 왕궁에서 공양받는 빅쿠로 정하시었다. 그래서 아난다 테라가 중심이 된 일군의 빅쿠들은 매일같이 왕궁에 가서 공양을 받게 되었다. 왕은 빅쿠들이 도착하면 자기가 직접 발우를 받아 들고 음식을 담아 빅쿠에게 건네주곤 했다. 왕은 그처럼 자기가 직접 빅쿠들을 공양하면서, 시종들은 다만 자기를 돕는데 그치도록 했다. 이같이 공양을 베풀던 도중 여드레째가 되던 날 왕은 정신이 약간 흐트러져서 직접 공양 올리던 일을 소홀히 했다. 그러자 빅쿠들 간에 이런 말이 돌았다.

 

“이제 왕궁에서는 아무도 우리에게 앉을 자리를 권해주지 않는다. 혹시 왕이 챙겨서 명령을 내리면 모를까 왕궁 사람들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기다리지 말고 다른 곳으로 탁발을 가도록 하자."

그래서 빅쿠들은 다른 곳으로 다 떠나고 책임이 있는 아난다 테라만 혼자서 왕궁에 가 음식을 받아오곤 했다. 그래서 왕은 많은 빅쿠들을 공양하지 못했다.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한 제자가 있다. 아난다 테라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들 특별한 인연을 가진 제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법을 수호하고 빅쿠 상가를 지키는 신심 깊은 사람들인데, 이는 빅쿠 상수 제자인 사리뿟따마하목갈라나 테라, 빅쿠니 상수제자인 케마웁빨라완나 테리, 남자 재가신자로서 으뜸인 찟따핫타까알라와까, 그리고 여자 재가 신자로써 으뜸인 난다의 어머니 웰루깐타끼쿠주따라를 말한다.

 

이들 여덟 사람은 과거 전생부터 큰 서원을 세우고 열 가지 공덕을 성취하여 금생에 부처님의 으뜸가는 제자가 된 것인데, 아난다 테라도 이들에 못지않아서 과거 십만 겁 동안을 큰 서원과 열 가지 공덕을 성취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초인적인 인내와 으뜸가는 지혜로써 부처님의 정법을 지키며 책임있는 역할을 수행하게 마련이었다.

 

빅쿠들이 왕궁을 떠날 시간이 되어 음식을 살펴 본 빠세나디 왕은 많은 음식이 건드려지지도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시종에게 물었다.

“빅쿠 존자들은 오늘도 오시지 않았느냐?”

“예, 오직 아난다 테라만이 오셨을 뿐입니다.”

“빅쿠들이 나에게 큰 손해만 끼치는구나!”

이같이 화를 내고 그는 곧 부처님을 찾아뵙고 자기의 심정을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오늘도 500명의 빅쿠들이 드실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은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직 아난다 테라만이 오셨을 뿐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까닭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대왕이여, 여래의 제자들이 대왕에게 가지 않은 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오.”

 

부처님께서는 곧 빅쿠들을 불러서 수행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는 공양을 받고, 어떤 경우에는 공양을 받지 않아야 하는지, 그 바른 태도에 대해 이렇게 설법하시었다.

 

“빅쿠들이여, 어떤 집에 아홉 가지의 결함이 있으면 빅쿠들은 그 집에 가서는 안 되며, 만일 부득이하여 방문했을 때에는 그 집에 들어가 앉아서는 안 되느니라. 무엇이 그 아홉 가지인가?

①가족이 모두 일어나 반갑게 맞이하지 않을 때,

②가족이 모두 반갑게 인사하지 않을 때,

③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 앉지 않을 때,

④그들이 소유한 것을 감출 때,

⑤너무 많은 음식을 준비했거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적게 공양을 올리거나,

⑥좋은 음식이 있으면서도 나쁜 음식을 공양할 때,

⑦공양 올리는 마음이 존경스럽지 않고 불경스러울 때,

⑧그들이 앉아서 여래의 가르침을 듣고자 청하지 않을 때,

⑨그들이 기쁘고 즐겁지 않은 목소리로 말할 때 등이니라.

 

빅쿠들이여, 그런 집에는 가지 말아야 하며 그럴 책임도 없느니라. 또 행여 그런 집을 방문할 때에는 그 집 안에 들어가 앉아야 할 책임이 없느니라. 빅쿠들이여, 그러나 어떤 집에 아홉 가지 좋은 태도가 있으면 그 집은 빅쿠의 방문을 받을 자격이 있느니라. 그런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방문하도록 해야 하며, 만일 방문했다면 마땅히 집안에 들어가 앉아야 하느니라. 그렇다면 그 아홉이란 무엇인가?

빅쿠가 그 집을 방문하였을 때 가족 모두가 반갑게 맞이하며,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인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 앉고,

가진 것을 감추지 않으며,

충분한 음식을 준비하여 다 공양하고,

좋은 음식을 공양하며,

불경스럽지 않고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며,

공양이 끝난 다음에는 여래의 가르침을 청하고,

그들이 즐겁고 기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니라.”

 

부처님의 이 같은 설법을 듣고 빠세나디 왕은 스스로 생각했다.

 

“내가 빅쿠들의 신임을 다시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부처님의 혈족을 왕실에 두어 빅쿠들에게 공양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왕은 왕궁으로 돌아오자 곧 사신을 까삘라왓투에 보내어 사끼야족의 공주를 자기 왕비로 삼겠다고 제의했다. 이 요청을 받은 사끼야 족 사람들은 회의를 열고 마하나마 왕(정확히는 왕족)과 노예 사이에 태어난, 아주 예쁜 와사바깟띠야1를 공주로 만들어서 꼬살라국의 빠세나디 왕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빠세나디 왕의 사신이 돌아와서 왕의 청을 사끼야 사람들이 받아들였다고 보고하자 왕은 공주가 누구의 딸이냐고 물었고, 사신은 사끼야 족의 마하나마 왕의 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매우 흡족해 했다.

왕은 즉시 그녀를 왕비로 책봉하고 500명의 궁녀들로 하여금 왕비를 보호하도록 했다. 그리고 왕비는 곧 아들을 낳았는데, 왕은 아들의 이름을 사끼야 족에서 받아와 위두다바(Vidudabha)2라고 지었다. 위두다바는 그렇게 왕자가 되었는데, 그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 저에게는 왜 외가에서 아무런 선물이 오지 않나요? 다른 왕비 슬하에서 난 왕자들은 다들 외가에서 선물로 장난감을 보내 준다든지 하는데 말예요. 어머니에게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안 계신가요?"”

이에 당황한 왕비는

“그건 네 외조부모님이 사끼야 왕족으로서 여기서 너무 먼 데 사시기 때문이란다.”

 

그러자 위두다바는 자기가 외가에 가겠다고 말했다. 위두다바가 외가에 가겠다는 마음은 끈질긴 것이어서 왕비는 더 이상 막지 못하고, 그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그를 사끼야 족들에게 보내게 되었다. 그 전에 왕비는 따로 사끼야 족들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 편지에다 왕비는 말하기를, 자기는 지금 꼬살라 국의 왕비가 되어 매우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이제 아들이 외가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아들에게 왕자에 합당한 대우를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사끼야 족들은 회의를 열었고, 노예의 아들과 상대하지 않게 하려고 왕자 위두다바를 객사에 쉬게 하는 한편, 자기네의 나이 어린 공주나 왕자들은 모두 지방으로 여행을 보냈다. 그래서 위두다바는 사끼야 족의 어른들에게만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어른들에게 여기에는 어린 왕자나 공주가 없느냐고 물었고, 사끼야 족의 어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들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네.”

위두다바는 이 말을 별로 의심하지 않고, 얼마 더 머물다가 까삘라왓투를 떠났다.

 

위두다바가 그렇게 떠나고 나서 그가 묵었던 방을 청소하던 궁녀들은 기분이 나빴다. 그녀들은 여기가 노예의 아들이 묵었던 곳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우유와 물로 방을 닦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위두다바의 일행 중의 한 사람이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는 위두다바의 친위대에 속한 사람으로 마침 놓고 간 소지품을 찾으려고 왔다가 무심코 그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놀라서 궁녀에게 되물었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소?”

궁녀가 지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노예의 자식이 앉았다 간 곳을 청소한다고 했소이다.”

“그러면 우리 왕자님의 어머니가 노예였단 말이오?”

“그렇고말고요. 마하나마 왕과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와사바깟띠야니까요.”

 

이 말에 기겁을 한 그 병사는 그 이야기를 곧 위두다바에게 전했다. 위두다바는 놀라고 흥분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소리쳤다.

"더러운 사끼야 족 놈들! 내가 만약 왕권을 잡으면 사끼야 족 놈들을 모두 말살하고 그놈들의 피로 내가 앉았던 그 자리를 씻으리라!"

 

위두다바는 이렇게 사욋티에 돌아왔고, 이 사실은 왕자를 호위했던 대신을 통하여 빠세나디 왕에게도 전해졌다. 빠세나디 왕도 사끼야 족에 대해 대단히 화를 냈고, 왕비와 위두다바의 지위를 박탈하여 노예로 삼아버렸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다음 부처님께서 왕실을 방문하시게 되었다. 왕은 멀리까지 나와서 부처님을 매우 공손하게 마중하여 궁내의 아주 높은 자리에 앉으시게 한 뒤 세 번 절을 올렸다. 왕은 저간의 사정을 모두 부처님께 사뢰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대왕이여, 사끼야 족이 왕에게 한 행위는 참으로 옳지 않은 것이었소. 그들이 왕에게 딸을 시집보내려면 대왕의 신분에 맞는 배필을 보냈어야 마땅했소. 그러나 대왕이여, 여래는 와사바깟띠야가 분명 마하나마의 왕의 딸이기도 한 만큼 귀족의 피를 받은 여인이라고 말하고 싶소. 그의 어머니 쪽이 누구였든 간에 아버지 쪽은 왕족이 아니오? 그리고 위두다바로 말하더라도 또한 왕의 아들임이 분명하오. 자식들의 혈통은 아버지로부터 이어지는 것이 아니겠소? 대왕이여, 예전의 왕들은 길거리에서 나무를 줍는 가엾은 여인을 왕비로 삼기도 했는데, 그녀는 미린나레스우 왕의 왕비로서 강대국을 건설했던 깟타와나 왕이 그의 아들이었소. 그러니 그들의 신분을 노예로 만든 것은 재고해야 할 것이오.”

 

이에 빠세나디 왕은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와사바깟띠야와 위두다바의 신분을 예전대로 회복시켜 주었다.

 

이즈음 꾸시나라 국에 말리까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꼬살라 국의 군 최고사령관인 반둘라의 부인이었는데, 결혼 초기에 한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해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반둘라는 아내를 친정으로 보냈다. 그래서 말리까는 친정으로 가던 길에 먼저 부처님을 뵈었다. 부처님은 그녀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시었고, 그녀가 대답했다.

“제 남편이 저를 친정으로 보냈으므로 저는 친정으로 갑니다.”

“그건 무슨 까닭에서인가?”

“제가 아기를 낳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다면 걱정하지 말고 집으로 되돌아가라.”

그래서 말리까 부인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남편은 왜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말리까는 부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고 대답했는데, 남편은

“먼 미래를 내다보시는 여래께서 하신 말씀이니 반드시 까닭이 있겠지.”

하고 그녀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후에 말리까는 아이를 열여섯 쌍이나 낳았다. 그래서 자녀가 모두 서른두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들 건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주가 있었고, 무술에도 뛰어났다. 그래서 그녀의 아들에게는 많은 추종자들이 따랐다.

 

그러던 어느 때 법정에서 상대방의 허위 문서 때문에 재판에 패한 시민 한 사람이 반둘라를 찾아와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의협심이 남달랐던 반둘라는 곧 그를 따라 재판정에 나가서 자신이 직접 재판을 지휘하여 그의 정당함을 증명해 주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잃어버렸던 재산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이때 그 경과를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박수로써 반둘라를 칭찬해 주는 바람에 법정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이때 빠세나디 왕은 법정 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런 소리에 무슨 까닭인지를 알아보게 했다. 왕은 곧 반둘라의 정의로운 판결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크게 감탄하여 반둘라를 곧 판사에 임명하고 다른 판사들을 해고시켜 버렸다.

이렇게 되자 해고된 판사들은 큰 타격을 입게 되어, 반둘라를 모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왕족들에게 반둘라가 왕권을 탐내는 사람이라고 모함했다. 그래서 반둘라에게 불리한 소문이 빠세나디 왕에게도 전해졌다. 왕은 불같이 노하여 반둘라를 처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를 처형하면 그를 신망하는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계략을 꾸몄다.

 

왕은 국경 근처에 반란이 일어난 것처럼 가짜 반란군을 조작한 뒤에, 반둘라로 하여금 그를 진압하라고 명령한 다음 그가 돌아오는 길에 그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하여 곧 조작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반둘라는 국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자마자 조작된 반란군은 흩어져 버렸다. 그래서 반둘라는 싸울 필요도 없이 군대를 돌렸다.

이때 왕이 보낸 용맹한 친위대가 나타나 그의 아들 서른두 명과 함께 그를 참살해 버렸다. 바로 이날 반둘라의 아내 말리까는 부처님의 으뜸가는 두 제자인 사리뿟따 마하테라와 마하목갈라나 마하테라, 그리고 다른 500명의 빅쿠들을 자기 집에 초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있었다. 이때 심부름꾼이 도착하여 그녀에게 편지 하나를 전했다.

 

그 편지에는 “부인의 남편과 아들 서른두 명의 목이 모두 잘리는 참변이 지금 막 성 밖에서 일어났습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그 편지를 읽더니 그것을 접어 말없이 옷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빅쿠들에게 공양 올리던 일을 계속했다. 그런 뒤 말리까 부인의 심부름하는 시녀가 기름 항아리를 옮기다가 사리뿟따 테라 앞에서 항아리를 떨어뜨려 깨뜨리고 말았다. 사리뿟따 테라는 침착하게 말했다.

 

“재가 신자여, 항아리란 본래부터 깨어지는 것으로 만들어진 것인 만큼 신경 쓰지 마시오.”

 

그러자 말리까 부인은 품 안에서 편지를 꺼내어 테라에게 보이면서

 

“저는 방금 이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 편지에는 제 남편과 아들 서른두 명이 모두 머리를 잘리는 참변을 당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별로 그 일에 마음이 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거늘 하물며 단지 하나가 깨진 것에 무슨 신경을 쓰겠습니까?”

 

사람들은 말리까 부인의 태도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사리뿟따 테라도 공양이 끝나자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허무하며, 또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언제, 어떻게 떠날지 아무런 표시도 없고 그때도 알 수 없다는 내용의 설법을 함으로써 말리까 부인을 위로했다. 말리까는 빅쿠들이 돌아가고 난 다음에 서른두 명의 며느리들을 불러들여 이렇게 말했다.

 

“너희 남편들에게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과거 전생에 심은 불선법이 오늘날 이런 결과를 불렀을 것이다. 너희들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비탄에 빠지지도 말라 너희는 너희 남편들을 살해한 국왕에게 대해 결코 원한심은 갖지 말아야 한다.”

 

이때 마침 국왕 빠세나디는 첩자를 보내어 반둘라의 집을 감시하고 있었는데, 첩자는 말리까 부인이 며느리들에게 대해 한 말을 왕에게 보고했다.

 

국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감정이 복받쳐 올랐고, 더 이상 왕실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당장에 말리까 부인과 그 며느리들을 찾아갔다. 그러고는 부인과 며느리에게 백배 용서를 빌고, 어떠한 보상이라도 하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러자 말리까 부인은 왕의 사죄를 받아들였다.

왕을 보낸 뒤 말리까 부인은 남편과 아들들의 장례식을 치렀다. 그리고 나서 빅쿠들에게 공양을 올린 다음 왕을 찾아가 이렇게 부탁했다.

 

“대왕께서는 저희들에게 보상을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만, 저희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저와 서른두 명의 며느리들은 제 친정 나라로 가고 싶을 뿐입니다.”

 

왕은 이를 허락했고, 그녀들은 꾸시나라 국으로 갔다.

왕손 반둘라의 후임에 반둘라의 조카인 디가까리야나를 임명했는데, 의협심이 강했던 그는 왕에게 아무 죄도 없는 삼촌을 죽인 문제를 준엄하게 따졌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빠세나디 왕은 후회스럽고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마음이 평화롭지 못했고, 통치의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마을 울룸빠에 계시었는데, 국왕은 부처님을 뵙기 위해 그곳으로 가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데를 잡아 임시 천막을 쳤다. 그런 다음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다섯 가지 표지(왕관, 옥쇄, 왕홀, 반지, 망토)를 군사령관 까라야나에게 맡겨 두고 몇 사람의 수행원만을 거느린 채 부처님을 찾아갔다.

국왕이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떠나는 것을 본 군사령관 까라야나는 즉석에서 결단을 내렸다. 그는 왕자 위두다바에게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다섯 가지 표지를 주어 왕으로 추대한 뒤 빠세나디를 위해서는 말 한 마리와 시녀 한 사람만을 남겨둔 채 사왓티로 돌아와 버렸다.

 

한편 빠세나디는 부처님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설법을 들은 다음 밖으로 나와 보니 단지 말 한 필과 시녀 한 사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매우 놀라 남아 있는 시녀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시녀가 모든 사실을 고했다.

 

빠세나디는 새로 왕이 된 위두다바를 붙잡기 위해서는 마가다 국의 젊은 조카 왕에게 힘을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마가다 국에는 빠세나디의 누이가 시집을 갔기 때문에 지금의 왕은 그의 조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움을 청하려고 시녀와 함께 급히 말을 달려 라자가하(마가다 국의 수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날은 이미 저물어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에 빠세나디는 성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늙은데다가 더위와 피로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리하여 늙은 왕은 허술한 휴게소에서 누운 채로 죽고 말았다.

 

다음날이 되어 시녀는 왕이 죽은 것을 알고 통곡했다. 그리고 빠세나디 왕이 죽었다는 사실은 위두다바에게도 전해졌다. 위두다바 왕은 부왕의 장례를 치렀다.

이렇게 왕이 된 위두다바3는 지난날 사끼야 족에게서 당한 모욕을 상기했다. 그는 곧 군대를 일으켜 사끼야 족을 멸망시키려고 진군해 나갔다.

 

이날 새벽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으로써 당신의 출신국인 사끼야 족들이 파멸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을 아시었다. 부처님께서는 사끼야 족을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하시었다. 그래서 탁발을 하시고 응향각에 돌아오신 다음 사자와 같은 위용으로 오른편으로 누우시어 저녁 해를 보내시었고, 석양 무렵에 허공을 날아 까삘라왓투 근처로 가시었다. 부처님께서는 그늘이 아주 짧은 나무 밑에 앉으시었다. 그때 그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던 위두다바는 아주 큰 반얀나무 그늘 아래 서 있다가 부처님을 보았다.

그는 곧 가까이에 다가와 부처님께 머리를 땅에 대고 인사를 올린 뒤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이 더운 날씨에 왜 이렇게 그늘이 엷은 곳에 앉아 계십니까? 저쪽에 그늘이 좋은 반얀나무가 있으니 그곳으로 가시어 앉으시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대왕이여, 여래에 대해 상관하지 마시오. 내 종족의 그늘이 나를 시원하게 해주고 있소.”

 

위두다바는 곧 부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하였다.

‘부처님께서 이곳에 계시는 것은 사끼야 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곧 부처님께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드린 다음 군대를 이끌고 사왓티로 떠났다. 이에 부처님께서도 허공을 날아 제따와나 수도원으로 돌아오시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서 위두다바 왕은 다시 사끼야 족에 대한 분노를 일으켜 두 번째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부처님은 같은 장소에 앉으셔서 위두다바를 제지하시었기 때문에 위두다바는 거의 까삘라왓투 국경까지 갔다가 군대를 철수할 수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사끼야 족을 치러 갔고, 이때에도 부처님이 이를 막아내시었다. 부처님께서는 이 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모국을 세 번이나 지키시었으나, 사실은 이 또한 임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네 번째로 위두다바가 군대를 이끌고 사끼야 족을 치러 가자 부처님께서는 사끼야 족의 업을 읽으시고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하지 않고 그냥 수도원에 남아 계시었다. 꼬살라의 위두다바는 국경에 이르러 부처님이 보이지 않자 주저하지 않고 까삘라왓투로 진격해 나갔다.

위두다바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사끼야 족을 공격했다. 이때 사끼야 족 중에서도 정각자 붓다의 친족들은 비록 자기들이 희생되더라도 적을 죽이지는 않으리라는 결심을 다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끼야 족은 매우 능숙한 전술가들이고 또 훈련이 잘 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활 쏘는 데 있어서 어떤 종족보다도 우수하다. 특히 우리의 긴 활은 매우 평판이 높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솜씨만을 보일 뿐 사람은 죽이지 말자.”

그래서 그들의 창이나 화살은 사람은 다치지 않고 위두다바의 병사들 사이로 날아가기만 했다. 위두다바도 곧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편 위두다바는 병사들에게 사끼야 족은 모두 죽이되 마하나마를 따르는 자들은 살려 주라고 지시해 두었다. 그래서 힘이 부족하고 숫자도 적은 사끼야 족은 마침내 다 멸망하였고, 단지 마하나마를 따르거나 사끼야 족이 아니라고 자기 출신을 부정하는 자만이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사끼야 족들은 여간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그들 중 일부는 살기 위해서 풀잎을 뜯어 입게 물거나 갈대를 꺾어 입에 물고 있었다. 그것은 병사들이 그들에게

“너희는 사끼야 족이냐?” 하고 물으면 그들은

“아니요, 우리는 풀잎이요.” 라든가,

“아니요. 우리는 갈대잎이요.” 라고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방법으로 그들은 살아날 수 있었는데, 이후부터 그들은‘풀잎 사끼야 족’,‘갈대잎 사끼야 족’이라고 불리었다. 그런 풀잎과 갈대잎 사끼야를 제외한 모든 사끼야 족은 비록 젖먹이일지라도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다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위두다바는 결국 자기가 어릴 때 앉았던 자리(우유와 물로 바닥을 씻으며 궁녀가 자신을 노예의 자식이라고 비웃던)를 맹세했던 말 그대로 사끼야 족의 피로 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복수를 한 다음 그는 군대를 철수시켰다.

 

위두다바는 군대를 철수하는 도중 날이 저물자 아찌라와띠 강변에 천막을 치고 하룻밤 야영을 하기로 했다. 그때 위두다바를 비롯하여 전생에 악업을 짓고 사끼야 족을 직접 살해한 병사들은 강둑에 천막을 쳤고, 전생과 금생에 악업을 짓지 않은 병사들은 강가 모래밭에 천막을 쳤다. 그런데 밤이 되자 이상스럽게도 많은 개미들이 떼를 지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천막을 옮기게 되었다. 그래서 강둑에서 자던 병사들이 강가 모래밭으로 잠자리를 옮기는 대신 강가 모래밭에서 자던 병사들은 잠자리를 강둑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자리를 옮기고 나서 개미들의 등살은 좀 덜해져서 그들은 잠이 들었다. 그런데 밤중에 강의 상류에서 큰 폭우가 내려 순식간에 강물이 불었다.

그리하여 강가 모래밭에서 잠자던 수천 명의 병사들과 위두다바는 급류에 휩쓸려가 버림으로써 물고기와 거북이의 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출신 종족이 멸망한 것과, 위두다바를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물에 휩쓸려 가버린 두 비참한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말씀하시었다.

 

“사끼야 족들은 과거 전생에 강물에 독약을 풀어서 많은 고기들을 죽게 한 일이 있었느니라. 그들은 그런 집단적인 불선업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런 불행을 당하게 되었느니라.”

 

부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었다.

“너희들은 홍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위두다바의 일을 계기로 다시금 느꼈으리라. 거센 홍수가 잠자는 마을을 휩쓸어 가듯이 죽음이라는 이름의 홍수 또한 감각적인 쾌락에 집착해 있는 중생들을 휩쓸어 가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Dhp47]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이 마음을 빼앗기면,

격류가 잠든 마을을 휩쓸어가듯,

악마가 그를 잡아간다.”

 

  1. 사까족은 부족의 자부심을 지키려고 공주를 보내지 않고, 마하나마(Mahānāma)의 하녀 나가문다(Nāgamuṇḍā)사이에서 태어난 와사바깟띠아(Vāsabhakhattiya)를 보내게 되었고 결국 이 문제와 관련되어 샤까족은 와사바깟띠아의 아들 위두다바(Vidudabha)에게 몰살당하는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된다. [본문으로]
  2. 위두다바(Viḍūḍabha) :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과 와사바캇따[와사바깟띠아(Vāsabhakhattiya)] 왕비 사이에 태어난 왕자이며 사끼야족 마하나마의 외손자이다. 반둘라의 조카 디가까라야나(Dīghakārāyaṇa)와 쿠데타에 성공하여 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사끼야족을 멸망시켰다. [본문으로]
  3. 위두다바(Viḍūḍabha, ⓢVirūḍhaka) = 비두다바 : [Dha15 ~ Dha18] 법구경 인연담 이야기 ; 한역하여 비유리(毘琉璃) 혹은 유리(琉璃)라 음역한다. 꼬쌀라(Kosala, ⓢKauśala) 빠쎄나디(Pasenadi)왕이 석가족인 마하나마(Mahanama)의 하녀를 부인으로 하여 낳은 아들이다. 기타(祇陀, Jeta)태자는 이복형이다. 어렸을 때 카필라성(Kapilavathu)에 있는 석가족의 마을에 갔다가 이들이 부처님을 강당에 모시고 공양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곳에 찾아가 부처님이 앉는 자리에 올라갔다. 분노한 석가족은 하녀의 자식이라고 멸시하면서 그를 문밖으로 쫓아내고 그는 이 일로 석가족에게 한을 품게 되었다. 20살이 되었을 때, 부왕을 쫓아내고 이복형인 기타왕자를 죽이고 왕이 된 후, 품었던 원한을 풀기 위해 석가족을 침공하여 몰살시킨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