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힐링, 콜링, 그 다음은? 행복의 불교에서 깨달음의 불교로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는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얻는다’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고(離苦)’라는 말은 와 닿는다. 그러나 ‘득락(得樂)’이라는 말은 좀처럼 받아 들이기 힘들다. 왜냐하면 불교수행의 목적이 단지 ‘행복’ 또는 ‘즐거움’, ‘즐김’을 뜻하는 즐거울 ‘락(樂)’또는 빠알리어로 ‘수카(sukha)’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서
행복(수카)은 ‘필요조건’이다. 따라서 불교의 목적에 있어서 행복이 필요조건은 될 수 있을 지언정 ‘충분조건’은 결코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대승불교권에서는 불교의 목적이 이고득락이라 한다. 이는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면 다른 종교는 그만두고 불교의 구경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부처님이 다른 경에서도 많이 말씀하셨지만 기신론(起信論)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고(苦)를 버리고 구경의 낙(樂)을 얻는다. 離一切苦하고 . 離一切苦 이니라.’
모든 고(苦)를 다 버려버리고 종국적인 최후의 낙,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樂)을 얻는다는 것이 우리 불교의 목표입니다. 그것은 곧 상대유한의 세계를 떠나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는 것과 그 내용이 꼭 같습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성철스님은 대승기신론의 문구를 근거로 하여 불교의 목적이 이고득락이라 하였다. 이런 영향이어서일까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이구동성으로 불교가 이고득락이라 한다. 그래서 즐거움(樂)을 얻는 것,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 우리불교의 목표라고 한다.
마하수카(mahasukha, 大樂)
성철스님이 말하는 즐거움은 빠알리어로 수카(sukha)이다. 그리고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것은 ‘열반락’을 말한다. 대승불교 열반경에서 말하는 ‘상락아정’의 열반이다.
후기 대승이라 볼 수 있는 금강승에서는 ‘마하수카’ 를 강조 한다. 이는 반야와 지혜가 결합된 형태로서 흔히 남녀의 ‘성적교합’으로도 설명된다. 타락한 불교인 좌도밀교에서는 성적쾌락과 결부된 지혜의 어머니와 방편의 아버지의 합일에 대하여 ‘마하수카(大樂)’이라 한다. 이렇게 불교가 즐거움, 즐김, 행복만을 강조 하였을 때 그 종착지가 어디인지 알게 해 준다.
한국불교에 이상한 풍조가
한국불교에 이상한 풍조가 있다. 그것은 깨달음보다 행복을 더 강조하는 것이다.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에 있음에도 불구 하고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 행복을 강조하는 현상이다. 다음과 같은 불교학자의 글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불교 교리를 보면 무상과 고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다. 무상과 고가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불교의 근본 취지가 무상과 고에 있지는 않다. 불교의 근본 취지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이다. 즉 고를 떠나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이다. 고나 무상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출가 중심 불교의 산물이다. 세속적 안락함을 떠난 출가자들에게 그 안락함의 무상함과 필연적 고를 강조했던 것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행복이 세속적인 행복과는 다른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깨달음의 불교에서 행복의 불교로, 조성택교수, 불교평론 2004-03-10)
고려대 조성택교수에 따르면 불교의 근본 취지는 ‘이고득락’이라 한다. 이는 성철스님의 이고득락론을 그대로 받아 들인 것이라 본다. 그래서 불교는 행복의 종교라고 한다. 그러면서 “불교의 근본 취지가 무상과 고에 있지는 않다.”라고 함으로서 부처님이 설한 근본가르침을 ‘부정’하고 있다. 과연 불교인이 말한 것인지 의문이 날 정도이다.
이처럼 불교의 목적이 행복, 즐거움, 즐김을 뜻하는 낙 또는 수카에 있다고 보는 조성택 교수는 지난 2011년 ‘종교평화선언문’을 기초한바 바 있다. 비록 초안에 머물러 있지만 은처, 도박, 폭력 의혹을 받고 있는 자승총무원장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선언할 수 있다.
불교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종교평화선언
종교평화선언을 보면 비불교적 요소로 가득하다. 그리고 불교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에 입각한 불교이기를 포기한 불교항복선언문과 같은 것이다. 초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첫째,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오직 불교를 통해서만 평화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 2011년)
종교평화선언 초안에서 놀라운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라는 문구이다. 불교에만 진리가 있지 않고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무장해제’ 하는 것과 같다.
불교가 불교만의 특징을 갖는 ‘해탈’과 ‘열반’이라는 고유성이 있다. 그래서 타종교와 차별화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선언문 초안에 따르면 불교가 타종교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무장해제 하며 불교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선언문에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행복’이다.
어느 종교이든지 행복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 행복을 강조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모두 행복해 지고 싶어 한다.
이렇게 지극히 당연한 것이 행복론이다. 그럼에도 행복이 불교의 목적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불교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해탈과 열반이라는 타종교에서 볼 수 없고 차별화 된 구원론이 있음에도 굳이 행복을 강조하는 것은 불교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에서도 이슬람교에서도 행복을 강조 한다. 그런데 선언문을 보면 “오직 불교를 통해서만 평화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행복이라는 키워드로 종교간 연결고리를 삼는 것이다. 더욱 더 가관인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 열린 진리관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종교를 대하는 기본 원칙이며 대화와 소통을 위한 출발입니다.
진리란 특정 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모든 믿음에 다 열려 있습니다.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 2011년)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다. 불교에만 진리가 있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는 말인가? 초안을 보면 놀랍게도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깨달음을 부정하고
불자들은 사성제가 진리라고 알고 있다. 고집멸도 이렇게 네 가지에 대하여 ‘짜따리 아리야 삿짜’라 하여 사성제라 한다. 이렇게 사성제만이 진리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초안문에 따르면 이웃종교에도 사성제가 있는 것이 된다. 이는 모순이다.
만일 조성택교수가 초안하고 조계종 도법스님이 주관한 선언문의 내용대로라면 기독교나 이슬람교에도 사성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타종교에는 사성제가 없다. 그래서 해탈이니 열반이니 하는 말 자체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토록 타종교와 불교가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부정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전세계 어느 종교에서나 공통으로 강조하고 있는 ‘행복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종교평화선언,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문의 초안자인 조성택교수는 ‘행복론’을 강조하였다. 불교는 이고득락이라 하여 불교의 목적은 행복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불교평론에 실린 자신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첫째, 수행의 목표는 깨달음에 있지 않다.
둘째, 수행의 목표는 (자신과 타인의) 행복의 증진에 있다.
(깨달음의 불교에서 행복의 불교로, 조성택교수, 불교평론 2004-03-10)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불교학 교수라 하는데 불교인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깨달음을 부정한 것이다. 수행의 목표는 깨달음에 있지 않고 수행의 목표는 행복이라 하였다.
불교에서 깨달음이 충분조건이고, 행복은 필요조건임에도 이를 반대로 보는 것은 왜 그럴까? 아마도 한국불교에 있어서 깨달음 지상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라 본다. 화두를 들고 깊은 산중에서 10년, 20년, 30년, 평생을 사는 선사들을 겨냥한 것이라 보여진다. 깨달음만 추구하는 선사들이 세상사람을 위하여 회향하는 것을 보여 주지 않기 때문에 그에 따른 반발로서 행복론을 주창하는 것이라 보여 진다.
그러나 나가도 너무 나갔다. 충분조건인 깨달음을 부정하며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은 행복론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다. 이런 경향은 불교평론에 실린 홍사성님의 논문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가’ 와 김나미박사의 논문 ‘깨달음과 열반의 상관관계’ 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재가불자들이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뛴다는 말이 있다. 선사들과 불교학자, 그리고 불교 오피니언 리더들이 행복론을 들고 나오자 인터넷에서 글 좀 쓴다고 하는 자들 역시 행복론을 들고 나온다. 그래서 불교의 목적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소위 ‘생활불교론’이다.
생활불교론에 따르면 “지금 쌀독에 쌀이 떨어져서 자식새끼는 밥달라고 우는데 무슨 놈의 해탈과 열반타령하느냐”는 것이다. 출세간의 수행자는 출세간의 삶이 있고, 세간에서는 세간의 삶이 있기 때문에 부모 잘 모시고, 아내와 자식을 잘 돌보는 삶 자체가 잘 사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재가자의 삶에 있어서 해탈이니 열반이니 하는 실현이 가능하지 않은 고상한 말 보다 여기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한다. 이 말도 원칙적으로 동의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가와 재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가르침에 출재가 차별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재가 차별없이 뭇삶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진리는 불교만이 갖는 타종교에서 볼 수 없는 궁극적 목표인 해탈과 열반이다. 따라서 불교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고, 재가불자들의 삶은 행복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근본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다.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 행복론은 불교의 목적이 될 수 없다. 만일 불교가 행복만을 추구하는 종교라면 타종교에서도 행복을 말하기 때문에 타종교와 차별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불교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교가 불교이게끔 만드는 독특한 교리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법의 바퀴가 굴러 온 것이다. 따라서 불교가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외도에 가깝다. 왜 외도인가?
행복만을 강조하면
행복만을 강조하면 ‘현법열반론자’가 되기 쉽다. 이는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 실려 있는 62가지 삿된 견해인 현법열반론을 말한다. 왜 그런가?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은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귀결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오욕락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각, 청각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만족하는 ‘경전상의 오욕락’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마슬로우 욕구 5단계설과 유사한 식욕, 성욕, 수면욕, 명예욕, 권력욕과 같은 ‘세속의 오욕락’이다.
이처럼 세속에는 오역락을 즐기고 오욕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 간다. 이 때 오욕락의 락이 바로 ‘행복(sukha)’을 뜻한다. 그래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다름아닌 오욕락의 추구라 볼 수 있다. 불교가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라거나 불교의 목표가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식욕’과 ‘성욕’ 등 오욕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법열반론자가 될 수 있다.
지금 살아 있는 이 순간에 최고의 행복을
그렇다면 현법열반론은 무엇인가?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는 이와 같은 이론을 갖고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벗이여, 이 자아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여 즐긴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 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Brahmajālasutta-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현법열반론은 지금 살아 있는 이 순간에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죽어서나 가능한 내세의 행복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 지고의 행복이라 한다. 그래서 현법열론은 감각적 욕망으로 흐르기 쉽다. 눈과 귀와 코 등 오감을 만족시켜 주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오감만족은 결국 식욕, 성욕, 수면욕, 명예욕, 권력욕으로 이어 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은 오욕락을 즐기거나 추구하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오욕락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의 흐름과 반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역류도(逆流道)’를 말한다. 세상의 흐름은 탐진치로 살아가지만,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는 탐진치에 거슬러 향하는 삶을 살아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가 오묘하며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S6.1)”라 하셨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필요조건에 불과한 행복이 결코 불교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선정삼매의 즐거움
디가니까야에 따르면 현법열반론은 감각기관에 따른 오욕락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해탈과 열반을 추구함 없이 단지 선정삼매의 즐거움만 누리는 것 역시 현법열반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열반처럼 보이는데 사실 알고 보면 ‘가짜열반’인 선정삼매를 즐기는 것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또한 다른 자는 그것에 관해 이와 같이 말한다. ‘벗이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있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최상의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거기에 사유과 있고 숙고가 있는 한, 그것은 거친 것이라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벗이여, 그래서 이 자아는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Brahmajālasutta-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네 가지 선정에 있어서 ‘이선정’과 ‘삼선정’에 대한 것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이선정에서는 ‘희열(piti)’을 경험하고, 삼선정에서는 ‘행복(sukha,樂)’을 경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선정삼매의 즐거움만 누렸을 때 경험되는 희열과 행복은 열반처럼 보이지만 일시적으로 번뇌가 억압된 가짜열반, 즉 지금 여기서 느끼는 희열과 행복을 열반으로 착각하는 ‘현법열반(diṭṭhadhammanibbāna)’이라 한다.
“선정도 만들어진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선정삼매에서 느끼는 희열과 행복에 대하여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까?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아난다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난다]
장자여, 또한 수행승이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와 숙고를 여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에 듭니다. 그는 이와 같이 ‘이 두 번째 선정도 만들어진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것이든 만들어지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압니다. 그는 그것에 입각해서 번뇌의 부숨을 성취합니다.
(앗타까 시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11.16, 전재성님역)
한국불교에서는 선정삼매를 강조한다. 그래서 위빠사나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법화경, 화엄경에서도 삼매를 강조한다. 화엄경을 보면 부처님이 삼매에 들었을 때 보살들이 대신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삼매에서 깨어나면 추인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반야심경 역시 부처님이 삼매에 들었을 때 관자재보살이 성문승인 사리불에게 한 수 가르쳐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반여심경 역시 부처님이 삼매에서 깨어난 추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는 삼매를 강조한다. 그래서 최상의 지혜는 삼매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삼매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그런 삼매 조차 경에서는 “선정도 만들어진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A11.16)”라 하였다. 초전법륜경에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 S56.11)”라는 말이 있듯이 삼매 역시 무상한 것이다. 그래서 아난다는 “어떠한 것이든 만들어지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 .(A11.16)”라고 분명히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삼매에서 경험된 희열과 행복을 집착하여 잡착한다면 이는 ‘현법열반론자’라 볼 수 있다.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아”
청정도론에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하고 행복한 자는 행복을 더 많이 원한다. (청정도론 제17장 238절)”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누구나 바라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더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라고, 지금 괴로움에 처해 있는 자는 이 고통이 어서 끝나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누구나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세 가지 중의 하나이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 중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 즐거운 느낌이 수카(sukha)이다. 이를 우리말로 행복이라 번역하고 한자어로는 이고득락 할 때 ‘락(樂)’이라 한다.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에 목숨을 건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 즉 행복을 위하여 “죽어도 좋아”라고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가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보는 순간, 듣는 순간, 접촉 하는 순간 등 즐거운 느낌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런 즐거운 느낌은 결국 갈애로 발전하여 집착하게 된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접촉하면 느낌이 발생하게 된다. 십이연기에서도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일어난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곧바로 갈애로 이어진다. 그래서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갈애는 결국 집착을 유발하여 존재를 ‘얽매이게’ 한다.
어떻게 영원주의자와 허무주의자가 되는가?
이처럼 느낌은 갈애를 유발하게 되는데, 알아차리지 못하면 영원주의자 또는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 그렇다면 즐거운 느낌, 즉 행복만을 추구하였을 때 어떻게 영원주의자와 허무주의자가 되는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보면 알 수 있다.
한편 DN.II, 61에서는 이 갈애를 여섯 가지가 아닌 세 가지의 복합인과관계의 조건으로 설명하고 있다: 1)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2) 존재에 대한 갈애, 3) 비존재에 대한 갈애. 이 세 가지로 보아 갈애는 그 토대가 되는 쾌-불쾌의 느낌으로 설명된다. 불쾌를 회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존재에 대한 갈애이며, 쾌락의 존재가 무상의 속성에 의해 불쾌의 존재로 변화 되었를 때 불쾌의 존재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비존재의 갈애의 보다 본질적인 의미이다. 쾌락의 유지와 불쾌에서 벗어남은 각각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의 심리적 토대가 될수 있다.
(오두막의 경 S1.19, 갈애 각주, 전재성님)
갈애에 대한 설명이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갈애로 발전하였를 때 영원주의자와 허무주의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 행복한 느낌이 계속 유지 되기를 바라는 갈애가 일어나면 ‘영원주의자’가 되기 쉽고, 반대로 이 고통스런 느낌이 어서 끝나기를 바라는 갈애가 일어나면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목적이 행복에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영원주의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영원주의자들은 서로 통한다. 그래서일까 종교평화선언에서는 ‘행복’을 매개로 하여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종교평화선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타종교와 불교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다원주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초안을 작성한 자들은 스스로 영원주의자임을 알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면 그만이다”라는 발상은 영원주의자 아니면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단멸론적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
행복론을 앞세워
조성택 교수는 “수행의 목표는 깨달음에 있지 않고 행복의 증진에 있다. (불교평론 2004-03-10)”라고 놀라운 발언을 하였다. 이런 자가 소위 ‘21세기 아쇼카 선언’이라는 ‘종교평화선언’ 초안을 작성하였다. 이 초안은 조만간 공표 될 것이다. 은처승, 도박승, 폭력승 이렇게 삼관왕의 혐의를 받고 있는 자승총무원장에 의하여 공표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불교를 결국 타종교에 팔아 먹는 꼴이 될 것이다. 불교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행복론을 앞세워 종교다원주의자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이런 매불 또는 폐불행위의 배경에 ‘행복론’이 자리잡고 있다. 불교의 목적이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없고, 다른 종교와 가장 차별화 되는 ‘해탈’과 ‘열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하나의 필요조건에 불과한 행복론으로 불교를 ‘말아 먹으려’ 하고 있다.
팔정도는 출세간의 진리
그런데 망둥이가 뛰면 꼴뚜기도 뛴다고 넷상에서도 행복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래서 재가자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행복’이라는 것이다. 해탈이니 열반이니 하는 것들은 출가자의 일이기 때문에 재가자가 따라 가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경전조차 재가자용과 출가자용으로 구별하고자 한다.
부처님은 재가자와 출가자의 구별 없이 진리를 설하였다. 그런 부처님은 진리는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 같은 보편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출세간적 진리’이다. 불자들의 실천덕목이라 일컬어 지고 있는 ‘팔정도’ 역시 출세간의 진리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역류도(逆流道)’이기 때문이다.
만일 재가불자라 하여 믿음과 보시와 지계만을 강조하는 경전만을 읽는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어서 믿음과 보시와 지계가 필요조건은 될 수 있지만 결코 충분조건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 하는 데 있어서 행복론에 필요조건은 될 수 있지만 결코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깨달음 보다 행복’이라느니, ‘재가불자의 목적은 행복에 있다’느니 하는 말들은 가르침을 크게 왜곡하는 말이다.
행복, 힐링, 콜링 그 다음은?
한때 ‘행복(happy)’이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지금은 행복대신에 ‘힐링(healing)’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그래서일까 ‘행복콘서트’ 대신 ‘힐링콘서트’가 열린다. 그렇다면 힐링다음에는 무엇일까? 학자들에 따르면 ‘콜링(calling)’시대가 될 것이라 한다. 콜링이란 ‘천직(天職)’ 혹은 ‘소명(召命)’을 뜻한다. 이렇게 시대에 따라 관심도가 변한다. 그럼에도 불교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행복전도사의 자살
행복전도사라고 불리우는 방송인이 자살하였다. 그것도 자신 혼자서만 죽은 것이 아니라 늘 함께 하였던 남편까지 자살하게 만들었다. 무엇이 이토록 행복을 전하는 전도사를 자살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오로지 행복, 즉 즐거움(樂)을 추구해서라고 본다.
즐거운 느낌, 즉 행복(sukha,樂)은 조건에 따라 발생된 ‘일시적 현상’이다. 조건이 사라지면 소멸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는 ‘갈애’가 일어 났을 때 괴롭게 된다. 행복한 느낌은 결코 오래 지속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느낌이 발생하였을 때 그 느낌이 빨리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통증이 계속된다면 절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견해를 가지게 되면 자살하게 된다.
느낌에 목숨을 걸게 되면
이렇게 느낌에 목숨을 걸게 되면 불행해진다. 그래서 부처님은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고,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한다.(S36:5)”라고 하였다. 그래야 괴로움의 종극, 즉 고통으로 부터 해방될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아닌 해탈과 열반이다. 그 어떤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서 볼 수 없는 불교만이 가지는 독특한 구원관이다. 이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이런 목적에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고, 출가경전과 재가경전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깨달음’인 것이다.
행복이 아니라 깨달음
지금 여기에서 “죽어도 좋아”라며 ‘일시적인 행복한 느낌’에 목숨을 건다는 것은 ‘식욕’과 ‘성욕’ 등 ‘오욕락’으로 귀결 될 것이다. 또 느낌에 집착하였을 때 필연적으로 ‘영원주의자’나 ‘허무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고,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본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탐욕의 경향을 버린 ‘바른 관찰자’ 라고 한다.
그는 갈애를 부수고 결박을 자르고
아만에 대한 바른 이해로 괴로움의 종극에 도달한다” (S36:5)
2013-11-06
진흙속의연꽃
'불교를 생각한다 > 한국불교를 생각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진실은 밝혀지고 정의는 승리한다 (0) | 2018.05.01 |
---|---|
[스크랩] 공(空)으로 세상바라보기 (0) | 2018.04.06 |
[스크랩] ‘이것’을 말하는 자들 (0) | 2018.03.28 |
[스크랩] 친일파 인명사전 드디어 발간 (0) | 2018.03.11 |
[스크랩]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 (0) | 2018.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