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행복하여라! sukho Buddhānaṃ uppādo!

▣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불교를 생각한다/한국불교를 생각하다

[스크랩] ‘이것’을 말하는 자들

moksha 2018. 3. 28. 21:48


이것을 말하는 자들

 

 



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명백히 드러났는데

달리 알아야 하고 닦아야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말하는 스승들이 한 말입니다.

 

하늘엔 구름이 떠 있고 새는 지저귑니다.

이른 아침 사람들은 분주히 일터로 향합니다.

각자 해야 할일, 각자 노릇을 하기에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졸리면 잘 줄 압니다.

이것 외에 달리 할 것이 없습니다.

 

알아야 할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고

달리 닦아야 할 것도 이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본래 없음에도 분별망상으로

이렇게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유위(有爲)로 이루어진 이것이

 꿈인 줄 알면 깨닫는 다고 합니다.

이것을 말하는 스승은 책상을 , 치며

오직 이것만 알면 된다.’라 합니다.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Ud.66, M72)

 

 

영원주의자들은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진리이면 다른 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허무주의자들은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 합니다.

 

모두 열 가지 이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말하면서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서로가 서로를 찌릅니다.

마치 선천적인 눈먼 자들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이것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더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만들어진 것이다.”(A3.61)

 

 

이것 중에 무인론(無因論)이 있습니다.

원인도 조건도 없습니다.

그냥 눈앞에 이렇게 명백히 드러나 있을 뿐입니다.

달리 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나 정진이 없는 샘이다.”(A3.61)

 

 

이것을 말하는 스승들은

달리 해야 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경전을 공부한다거나 좌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명백히 드러나 있는데

그가 따로 해야 할 일이 없음을 말합니다.

 

달리 해야 할 일이 없을 때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면 됩니다.

사람 노릇 잘 하는 것 외 달리 할 것이 없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내가

이러한 것들이 여섯 가지 세계이다.’라고

설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 것이다.”(A3.61)

 

 

부처님도 이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에게 비난 받지 않는 이것입니다.

부처님은 이것으로서 여섯 가지 세계’,

 여섯 가지 접촉감역’,‘열여덟 가지 정신적 탐구’,

그리고네 가지 진리(四聖諦)’를 설했습니다.

 

 

그것들은 현자에 의해서 조사되고,

탐구되고, 철저하게 연구되고,

단지 전승 때문에 그것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무작설로 드러난다.”(A3.61)

 

 

무작설(無作說: akiriyā),

인간의 도덕적인 삶을 부정하는

강한 결정론이나 비결정론을 말합니다.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자들,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

이것을 말하는 자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수행자와 설법자의 가르침 가운데

막칼리고쌀라의 가르침을 최악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 막칼리는

업도 없고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이와 같이 설하고 이와 같이 보기 때문이다.”(A3.135)

 

 

이것을 말하는 자들 중에서

최악이 막칼리 고쌀라라 합니다.

무인론을 주장하는 고쌀라의 이것에 대한 가르침에는

업도 없고 업에 대한 과보도 없어서

달리 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분별해서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분석하여 설했습니다.

 “바라문 청년이여, 그것에 대해

나는 분별하여 말하는 사람입니다. (M99)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분별론자(Vibhajjavādo)’라 했습니다.

 

 

“바라문 청년이여,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

 

 

부처님은 업과 업의 과보를 설했습니다.

연기의 법칙에 적용되기 때문에

누구도 비난 받지 않는 가르침입니다.

업의 작용을 설한 부처님은 스스로

작론자(作論者: Kiriyavādin)라 불렀습니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달리 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에

알아야 할 것도 없고 닦아야 할 것도 없다고 합니다.

당연히 교리도 알 필요도 없고

경전을 볼 필요도 없습니다.

논서는 더더구나 보아서는 안될 것들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여시아문(如是我聞)에서

여시(如是)에서 다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에서

이와 같이에서 다 드러나 있기 때문에

달리 경전을 볼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에봥메수땅 (Eva me suta)

부처님 가르침은 이와 같이 시작됩니다.

한역으로 여시아문(如是我聞)’이고,

우리말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입니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It.121)

 

 

부처님 가르침에 비밀은 없습니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경이나 게송 등

구분교(九分敎)의 형태로 잘 전승되어 왔습니다.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빠알리 니까야가 그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방편도 아니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도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진리 그 자체입니다.

누군가 방편, 손가락, 뗏목이라 한다면

그는 가르침을 훼손하는 자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말하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서가모니불, 서가모니불하지만

다른 것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고,

포대기에 애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불교에는 부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비로자나, 아미타불 다음입니다.

조사스님들에게 밀려 뒷방신세입니다.

불교라 하지만 무뉘만 불교입니다.

 

불교를 믿는 자들을 불교인이라 합니다.

그러나 불교인들은 불교를 잘 모릅니다.

특히 부처님을 잘 모릅니다.

부처님 그분이 누구인지,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 잘 모릅니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부처님과 가르침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시아문에서 여시(如是)’로 족하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할 것도 없고 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데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합니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부처님과 가르침을 부정합니다.

만약 부처님과 가르침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이 말하는 이것은 설자리를 잃게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방편, 손가락,

뗏목일 뿐이라고 그토록 폄하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2018-03-2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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