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불교감별사가 될 수 있다
한때 정치권에서 ‘친박감별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특정정치인에 대하여 붙여준 호칭입니다. ‘병아리감별사’라는 직업도 있습니다. 병아리 부화 직후에 암컷인지 숫컷인지 감별하는 자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감별사는 전문직종에 해당됩니다. 진짜와 가짜를 감별해야 하고 양품과 불량품을 구분해 낼 줄 아는 자는 그 분야의 전문가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교감별사’는 없을까요?
불교인지 아닌지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가장 간단한 것은 ‘삼법인(三法印)’입니다.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를 말하는 자는 불교인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와 반대로 말하는 자는 불교인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를 삼법인이라 하여 세 가지 법의 도장이라 합니다.
네 가지 전도(顚倒)가 있는데
삼법이라는 법의 도장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가려 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불교인 것처럼 보이지만 삼법인에 맞지 않으면 불교라 볼 수 없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전도의 경’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실체없음에 대하여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더러운 것에 대하여 청정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A4.49)
전도(vipallāso: 顚倒)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여기는 것,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고 여기는 것, 실체없음에 대하여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 더러운 것에 대하여 청정하다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 오온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 부정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상, 락, 아, 정을 말한다면 불교인이라 볼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지각의 전도(saññāvipallāsā), 마음의 전도(cittavipallāsā), 견해의 전도(diṭṭhivipallāsā)가 있다고 했습니다.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전도된 인식을 가지면 마음의 오염을 초래합니다. 마음이 오염되면 견해의 오염으로 확산됩니다. 이 세 가지 전도 중에 지각(인식)의 전도가 가장 근원적입니다. 문둥병 환자가 불속에서도 즐겁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각의 전도에 따른 것입니다. 주석에 따르면 세 가지 전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숲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를 보고, 귀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각의 전도이고, 그것으로 인해 공포가 생겨나면 그것은 마음의 전도이고, 이 귀신을 제거하기 위해 퇴마의식을 거행한다면 그것은 견해의 전도이다.”(Lba.II.208)
귀신이야기는 스리랑카의 바지라냐냐 마하나야까 장로가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Lba’는 ‘Die Lehrreden des Buddha aus Angereihten Sammlung’의 약어로서 독일어판 앙굿따라니까야입니다. 독일어판 앙굿따라니까야 2권 208페이지 주석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귀신이야기는 초불연 각주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귀신은 있을까 없을까? 어느 스님은 불교방송에서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귀신이 있고,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귀신이 없겠지요”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어느 쪽에도 걸리지 않는 미꾸라지 같은 답변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싼다까의 경’에 따르면 “나는 그것은 이와 같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은 그와 같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은 다르다고도 말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것은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은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M76)라 하여 뱀장어를 잡는 듯 혼란으로 빠뜨리게 하는 말과 같습니다.
한국명상원 묘원법사에 따르면 “귀신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경희대 서정범 교수와 무속인을 상대로 연구한 바 있다고 했는데 귀신은 확실히 없다고 했습니다. 귀신이 있다면 자신이 만들어낸 영상일 것이라 했습니다. 귀신을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귀신은 몸은 없고 영혼만 있다고 합니다. 영혼이 있는 이상 귀신도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 없이 영혼이 떠도는 것을 귀신이라 합니다. 귀신은 영혼을 가진 존재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영혼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고정불변의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귀신은 없다”라 볼 수 있습니다.
독일어판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귀신을 예로 들어 세 가지 전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귀신이 없음에도 캄캄한 숲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를 보고 귀신이라 생각한다면 지각의 전도이고, 이로 인하여 공포심이 일어나면 마음의 전도라 하며, 귀신을 떼어내기 위한 퇴마의식을 행한다면 견해의 전도라 했습니다.
전도된 견해를 가지면
세 가지 전도중에서 최악은 견해의 전도라 볼 수 있습니다. 전도된 견해를 가지게 되면 잘못된 믿음과 잘못된 수행으로 현생은 물론 내생에 이르기까지 고통과 불행으로 몰고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된 견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쌀라 마을 장자들에 대한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는 ‘보시에는 공덕이 없다. 제사의 공덕도 없다. 공양의 공덕도 없다. 선악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마음에서 흘연히 생겨나는 존재도 없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며 스스로 깨달아 가르치는 올바로 도달된 수행자 성직자는 세상에 없다.’라고 전도된 견해를 갖습니다.” (M41)
허무주의 견해에 대한 것입니다.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에 따른 것입니다. 아지따 께사깜발린은 네 가지 참된 실재, 즉 지, 수, 화, 풍, 사대만이 참된 실재라고 하여 영혼을 부정했습니다. 설령 생명 기능이 있는 영혼이 있다고 하더라도 물질에서 나온 것이 되기 때문에 몸이 무너지면 정신도 무너져서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단멸론적 견해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유물론에 대하여 고대인도에서는 로까야따(lokayata)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S12.35)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청정한 삶을 살기 힘들 것이라 했습니다. 물질에서 발생된 정신이 물질의 소멸과 함께 정신도 소멸하여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된다면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나 정진이 없는 셈이다.”(A3.61)라 했습니다. 이런 견해를 가지면 “어리석은 자이건 현명한 자이건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는 괴멸하여 사라져 존재하지 않게 된다.”(M76)라고 보는 견해의 전도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전도된 견해를 가진 자에 대하여 부처님은 “장자들이여, 이와 같이 가르침이 아닌 것을 따르고 바른 길이 아닌 것을 실천하는 것을 원인으로 어떤 뭇 삶들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M42)라 했습니다.
아소까대왕의 불교감별법
불교감별사가 있다면 삼법인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불교인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불교가 아닌 경우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불교도인지 이교도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토론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스리랑카 역사서 마하왕사에 따르면 제3차 결집당시 아소까 대왕은 “어떤 가르침을 온전히 깨달으신 분은 제시하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질문하자 영원주의자들은 부처님은 영원주의자였다고 답하고, 또 어떤 이는 유한주의자, 무한주의자, 궤변론자, 단멸론자, 회의론자 등으로 답했다고 합니다. 이는 아소까대왕이 전국 마을 마다 8만4천개의 승원을 세워 가르침을 장려한 결과 이교도들이 흘러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토론하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지혜로운지 알려면 토론해 보면 된다고 했습니다. 제3차 결집당시 이교도를 구분하는 과정에서 토론식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불교도인지에 대한 답변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마하왐사에 따르면 “부처님은 분석적인 교리의 주창자셨습니다.”라 되어 있습니다. 짤막한 답변이지만 이 말은 부처님이 분별하고 분석하여 설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으로 분별하고 분석적으로 설하신 것입니다. 외도의 가르침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감별서 까타왓투(kathāvatthu: 論事)
마하왐사에 따르면 불교인지 확실히 감별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교도의 교리를 반박하는 논서 ‘까타왓투(kathāvatthu)’를 말합니다. 까타왓투는 아비담마 칠론 중의 하나입니다. 제3차 결집을 주도한 목갈라뿟따 띳사 장로는 슬그머니 상가에 붙어 살던 이교도들을 몰아기 위하여 까타왓투를 지어서 많은 비구들과 함께 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까타왓투로 이교도의 교리를 부순 것입니다.
까타왓투는 일종의 불교감별서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인지 외도의 가르침인지 분별해 낼 수 있는 논장입니다. 까타왓투에 대하여 한자어로는 논사(論事) 또는 논사론(論事論)이라 합니다. 아직까지 한국에는 공식적으로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비담마 칠론 중에 담마상가니(법집론)가 2016년 초불연 각묵스님에 의해서 최초로 번역된 바 있습니다.
영문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까타왓투에 대하여 “The Kathavatthu documents over 200 points of contention”라 하여 200개 이상의 논점이 기록된 논서라 합니다. 영문으로 소개 되어 있는 20가지 논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The views of the Pudgalavada school, which held that a 'person' exists as a real and ultimate fact and that it transmigrates from one life to the next.
2) That a perfected being (Arhat) can fall away from perfection.
3) The views of the Sarvastivadins, that "all [dharmas] exists" in the three times (past, present, future), a form of temporal eternalism.
4) That an Arhat can have a nocturnal emission.
5) That an Arhat may be lacking in knowledge, have doubts or be excelled by others.
6) That the duration of an awareness event can last a day or more.
7) That penetration and insight into the various stages of enlightenment is achieved gradually.
8) That the Buddha's worldly speech was somehow supramundane.
9) That all the powers of the Buddha are also possessed by his leading disciples.
10) That a layperson can become an Arhat.
11) That one can attain enlightenment at the moment of rebirth.
12) That the four noble truths, the immaterial states, space, and dependent origination are unconditioned.
13) That there is an intermediate state (Bardo) of existence
14) That all dhammas last for only a moment (ksana).
15) That all is due to Karma.
16) That it ought not be said the monastic order accepts gifts.
17) That the Buddha himself did not teach the dharma, but that it was taught by his magical creation.
18) That one who has attained jhana continues to hear sound
19) That the five gravest transgressions (matricide, patricide, etc.) involve immediate retribution even when committed unintentionally.
20) That final liberation can be obtained without eliminating a certain fetter.
(Kathavatthu, 위키백과)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친박감별사, 병아리감별사 등 세상에는 갖가지 감별사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에도 감별사가 있는 듯 합니다. 바이블과 내용이 맞지 않으면 이단 취급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불교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것이 많습니다. 겉으로는 불교인 것 같은데 내부적으로는 전혀 불교가 아닌 것도 많습니다. 불교도라 하지만 신앙행위하는 것을 보면 무늬만 불자인 경우도 많습니다.
한국불교에서는 깨달으면 모두 부처라 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각자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십인십색이어서 누구 말이 옳은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럴 때는 부처님이 어떤 말씀 했는지 초기경전을 열어 보아야 합니다. 법과 율에 맞으면 부처님 가르침으로 수용하고 맞지 않으면 물리쳐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벗들이여, 아무개 거처에 많이 배우고 전승에 밝고 가르침을 수지하고 계율을 수지하고 논의의 주제를 수지하고 있는 한 분의 장로가 있는데, 나는 이것을 그 장로의 앞에서 듣고 그 장로의 앞에서 받았습니다. 이것이 가르침이고 이것이 계율이고 이것이 스승의 교시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들의 말에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고, 그 말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맞지 않고 계율에 적합하지 않다면, ‘이것은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말이 아니다. 이 수행승은 잘못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해서 그것을 물리쳐야 한다.”(A4.180)
앙굿따라니까야 ‘위대한 정통성의 경(A4.180)’에 실려 있는 가르침입니다. 디가니까야 ‘완전한 열반의 큰 경(D16)’과도 병행합니다. 네 가지 경우에 있어서 네 번째에 해당되는 가르침입니다. 포인트는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는 빠알리니까야와 빠알리위나야에 근거해야 함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마지막 당부의 말씀으로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뒤에 내가 가르치고 제정한 가르침과 계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D16.123)라 했습니다. 또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맞고 계율에 적합하다면”(A4.180)라 하여 법과 율에 맞으면 부처님 가르침으로 인정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마치 판결 내릴 때 법율(法律)에 근거하듯이,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Dhamma: 法)과 부처님의 계율(Vinaya: 律)에 근거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누구나 불교감별사가 될 수 있다
누구나 불교감별사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이것뿐이야, 이것 뿐이거든, 이것 뿐이라니까”라며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며 이것뿐 타령한다면 경장과 율장을 열어 보아야 합니다. 요즘은 빠알리 니까야가 모두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감별하기가 쉽습니다.
경장과 율장을 열어 보아서 다르다면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상락아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부처님이 무상, 고, 무아, 부정을 설하였음에도 누군가 상, 락, 아, 정을 말한다면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된 것이기 때문에 물리쳐야 합니다. 빠알리삼장이 번역되어 있는 시대에 누구나 불교감별사가 될 수 있습니다.
2017-09-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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