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와 자만에 기반하여 사람을 평가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잘 모르거든
이 세상에 가장 재미 있는 것이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자연의 경이에 대하여 감탄 하지만 사람만한 것이 없습니다. 공항에서 대기 할 때 여러 시간 있어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사람구경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사람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며 시간 보내는 것도 즐거움 중의 하나입니다. 대개 험담이 되기 쉽습니다. 그 사람을 안주삼아 이야기 했을 때 씹는 맛이 날 것입니다.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함께 살아 보기 전에는 어떤 성품을 가졌는지 장점은 무엇인지 단점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설령 그 사람에 대하여 실망했을지라도 그 사람에 대하여 잘 모른다면 차라리 그 사람의 장점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저는 그 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평가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에 사람에 대한 평가가 있습니다. ‘미가쌀라의 경(A10.75)’에 따르면 여신도 미가쌀라는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의 삼촌에 대하여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한평생 청정한 삶을 살아 간 아버지는 죽어서 불환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다지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은 삼촌 역시 죽어서 불환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안 미가쌀라는 아난다에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라며 불만을 표출합니다.
선인선과 악인악과라 합니다. 이런 원칙에 따르면 자신의 아버지가 죽어서 불환자가 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았고 자신의 아내에 만족한 삶을 살았던 삼촌 역시 불환자로 태어난 것을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아난다로부터 들은 부처님은 재가여신도 미가쌀라에 대하여 “어리석고 슬기롭지 못하고 아낙의 지혜를 어리석은 여자는 누구인가?” (A10.75)라며 나무랍니다. 이어서 파계, 계행, 탐욕, 분노, 흥분을 예로 들어 설합니다.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Tadantaraṃ ko jāneyya aññatra tathāgatena. Tasmā tihānanda mā puggalesu pamāṇikā ahuvattha, mā puggalesu pamāṇaṃ gaṇhittha. Khaññatihānanda puggalesu pamāṇaṃ gaṇhanto. Ahaṃ vā ānanda puggalesu pamāṇaṃ gaṇheyyaṃ, yo vā panassa mādiso.
“그러므로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자가 되지 말라.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지 말라.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면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아난다여,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다.”(A10.7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평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리 잘 한 평가라도 자아에 바탕을 둔다면 편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다.”라 한 것입니다. 자아에 입각한 자만이 발동된 것입니다.
초불연 번역을 보니
한국에는 두 번역서가 있습니다. 두 번역서를 비교해서 읽다 보면 종종 다른 내용을 발견합니다. 사람의 평가와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의 차이를 여래 말고 누가 알겠는가?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인간을 평가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인간에 대한 평가를 하지 말라. 인간에 대한 평가를 하는 자는 파멸한다. 아난다여, 나나 나와 같은 사람이 인간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다.”(A10.75, 대림스님역)
가장 큰 차이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탈역이고 또 하나는 서로 다른 번역입니다. 먼저 탈역과 관련하여 빠알리구문 “Tadantaraṃ ko jāneyya aññatra tathāgatena”이 있습니다. 전재성님 번역에서 이 구문에 대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탈역으로 봅니다. 서로 다른 번역과 관련해서는 “pamāṇaṃ gaṇhanto”에 대한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어떻게 번역이 다른가?
초불연에서 “나나 나와 같은 사람이 인간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다”라 했습니다. 의미상으로 부처님과 부처님과 동급인 자가 평가하는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다.”라 하여 자아와 자만을 가진 자가 편견과 단견으로 평가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차이는 ‘나와 같은 사람(깨달은 자)’와 ‘자만을 가진 자’로서 내용이 전혀 다르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전재성님은 자만에 입각한 평가는 편견이나 단견을 가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때 자만은 우월, 동등, 열등으로 분류됩니다. 우월감도 자만이지만 동등이나 열등감도 자만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초불연의 경우 자만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고 사람이 인간에 대한 평가를 하면 위험하다는 식으로 번역했습니다.
서로 다른 번역은 빠알리 구문‘pamāṇaṃ gaṇheyyaṃ’ 에 대한 것입니다. 이구문의 주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자만을 가진 자’라 했고, 대림스님은 ‘나와 같은 사람(깨달은 자)’라 했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을 알아 보기 위하여 빠알리구문‘pamāṇaṃ gaṇheyyaṃ’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빠알리어 ‘pamāṇaṃ’은 빠알리어 사전 PCED194에 따르면 ‘Measure, rate, scale, standard, dimensions, size, length, weight, etc.; rule, sanction, authority, warrant; a decider, on e whose word is an authority; cause, motive’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측량을 뜻하는 말입니다. 문제는 ‘gaṇheyyaṃ’입니다. 이말은 ‘gāha’를 어근으로 합니다. 빠알리어 ‘gāha’는 ‘seizure; grip; 2. obsession; 3. an idea; a view.’의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견해(view) 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자아에 기반한 견해입니다.
자아에 기반한 견해로 사람을 평가했을 때 자만이기 쉽습니다. 자만은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성인의 경지에 올라 서지 않는 한 편견이기 쉽습니다. 범부들은 견해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자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없다”라고 번역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나나 나와 같은 사람이 인간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다”라 하여, 깨달은 자가 평가하는 것이라 하여 전혀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그렇다면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NDB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But who can know this difference except the Tathagata? “Therefore, Ananda, do not be judgmental regarding people. Do not pass judgment on people. Those who pass judgment on people harm themselves. I alone, or on e like me, may pass judgment on people. (A10.75, 빅쿠보디역)
빅쿠보디는 “Tadantaraṃ ko jāneyya aññatra tathāgatena”에 대하여 “But who can know this difference except the Tathagata?”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묻고 나서 “I alone, or on e like me, may pass judgment on people.”라 번역했습니다. 이는 초불연 대림스님 번역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다”와 일치합니다.
전재성님번역과 초불연 번역에서 크게 차이나는 것은 탈역과 서로 다른 번역입니다. PCED194에서 제공된 빠알리원문에서도 “Tadantaraṃ ko jāneyya aññatra tathāgatena!”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 부분 탈역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서로 다른 번역에 있어서는 자만에 대한 것입니다. 전재성님은 사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 했을 때 자아에 기반 자만이 개입 되어 있기 때문에, 빠알리 구문 “Ahaṃ vā, ānanda, puggalesu pamāṇaṃ gaṇheyyaṃ yo vā panassa mādiso.”에 대하여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대림스님과 빅쿠보디는 깨달은 자만이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고 하여 “나나 나와 같은 사람이 인간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두 번역서를 비교 하다 보니 정반대의 번역도 발견했습니다. ‘미가쌀라의 경’에서 웃닷짜(uddhacca)에 대한 부분입니다. 전재성님은 “흥분을 잘하지만”이라 번역했지만, 대림스님은 경솔하지 않고”라 하여 전혀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빠알리 원문과 함께 세 번역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Idha panānanda ekacco puggalo uddhato hoti, tañca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Yatthassa taṃ uddhaccaṃ aparisesaṃ nirujjhati, tassa savaṇenapi akataṃ hoti, bāhusaccenapi akataṃ hoti, diṭṭhiyāpi appaṭividdhaṃ hoti, sāmayikampi vimuttiṃ na labhati. So kāyassa bhedā parammaraṇā hānāya pareti no visesāya, hānagāmīyeva hoti no visesagāmī.
“아난다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흥분을 잘하지만, 그 흥분이 남김 없이 소멸된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뿐만 아니라, 그에게 들은 바도 있고, 노력하여 이룬 것도 있고, 바른 견해로 잘 관통하는 것도 있고, 일시적인 해탈의 성취도 있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탁월한 곳에 이르지 저열한 곳에 이르지 않으므로, 탁월한 곳에 가는 자이지 저열한 곳에 가는 자가 아니다.”(A10.75, 전재성님역)
“아난다여, 여기 어떤 사람은 경솔하지 않고 마음의 해탈[심해탈]과 통찰지를 통한 해탈[혜해탈]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그는 거기서 경솔함을 남김없이 소멸한다. 그리고 그는 [들어야 할 법도] 듣고, 정진을 가하여 [해야 할 바도]하고, 견해로 [꿰뚫어야 할 것도] 꿰뚫고, 일시적인 해탈을 얻는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특별함으로 향하게 되고 쇠퇴로 향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특별함으로 갈뿐 쇠퇴로 가는 자가 아니다.” (A10.75, 대림스님역)
“Then, Ananda, there is on e person who is restless yet understands as it really is that liberation of mind, liberation by wisdom, where that restlessness of his ceases without remainder. And he has listened [to the teachings], become learned [in them], penetrated [them] by view, [143] and he attains temporary liberation. With the breakup of the body, after death, he heads for distinction, not for deterioration; he is on e going to
distinction, not to deterioration.” (A10.75, 대림스님역)
세 번역을 보면 가장 차이 나는 것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흥분을 잘하지만”과 “여기 어떤 사람은 경솔하지 않고”입니다. 긍정문과 부정문의 차이도 있고 흥분과 경솔이라는 용어의 차이도 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빠알리 원문을 보면 “ekacco puggalo uddhato hoti”입니다. 이 말은 ‘어떤(ekacco) 사람이 (puggalo) 흥분하다( uddhato hoti)’의 뜻입니다. 그런데 초불연 대림스님은 “여기 어떤 사람은 경솔하지 않고”라 하여 부정문으로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는 “Then, Ananda, there is on e person who is restless yet”라 하여 ‘여기 어떤 사람은 초조하다. 그러나’의 뜻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의 번역과 빅쿠보디의 번역이 일치합니다. 대림스님 번역“여기 어떤 사람은 경솔하지 않고”라 번역한 것은 부적절한 번역이라 보여집니다. 원문에 없는 부정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올바로 번역한다면“여기 어떤 사람은 경솔하지만”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자아와 자만에 기반하여 사람을 평가하면
사람이 사람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말하면 험담이기 쉽습니다. 마치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를 나무란다’라는 식이 될 수 있습니다. 자아관념이 파괴되어 무아의 성자가 되지 않는 한 사람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럴 경우 차라리 그 사람의 장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릅니다. 단점에 대해 말하더라도 자애의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계행을 지켜도 지켜도 지혜를 닦지 않는다면 악처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계행도지키고 지혜도 닦는다면 탁월한 경지에 날 것입니다. 이는 탐욕, 분노, 흥분도 마찬거지 일 것입니다. 분노가 많지만 지혜를 닦는다면 탁월한 경지에 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의 계행이 바르지 않다 하여, 탐욕이 있다하여, 분노가 있다하여, 흥분한다고 하여 단지 보이는 현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면 잘못 볼 수 있음을 말합니다.
자아를 가지고 있는 한 남과 나를 비교하게 됩니다. 이는 자만입니다. 자만은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을 말합니다. 자만은 자아에 기반하기 때문에 자아가 있는 한 올바른 판단이 될 수 없습니다. 자아와 자만이 있는 자가 “이 사람에게 그 성품이 있고, 저 사람에게도 그 성품이 있다. 어째서 그들 가운데 하나는 열등하고 하나는 탁월한가”(A10.75) 라고 말한다면 이에 대하여 “그것은 그에게 오랜 세월 불익과 고통이 된다.” (A10.75) 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자아와 자만에 기반하여 사람을 평가 했을 때 불이익 받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자가 되지 말라.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지 말라.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면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A10.75)라 했습니다. 그래서 자아에 입각한 자만으로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다.”라 한 것입니다.
2017-07-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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