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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폭류에 머무는 삶과 폭류에 휘말라는 삶

moksha 2017. 7. 20. 00:25

 

폭류에 머무는 삶과 폭류에 휘말라는 삶

 

 

강물이 집어 삼킬 듯

 

흘러 가는 강물이 집어 삼킬 듯 합니다. 평소 다니던 학의천길 작은 다리에 서 있습니다. 다리에는 물이 넘칠 듯 찰랑거립니다. 도도히 밀려 오는 흙탕물을 바라 보았습니다. 인해전술처럼 끊임 없이 밀려 옵니다. 가만 보고 있으니 물에 빠져 드는 것 같습니다. 물과 하나 되어 휩쓸려 갈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불과 삼사주전만 해도 전국토는 가뭄으로 타들어 갔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비가 너무 오지 않아도 걱정이고 비가 너무 와도 걱정입니다. 비가 적당히 와서 산하대지를 촉촉히 적셔 주었으면 하는 것이 농민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인정사정 없습니다. 비가 올 때는 퍼붓듯이 내립니다. 모든 것을 휩쓸어 가 버립니다.

 

재산을 휩쓸어 가는 홍수

 

폭우가 내리면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립니다. 이제까지 쌓아 왔던 것 모든 것이 거센 흐름에 떠 밀려 내려갑니다. 생명과도 같은 농작물, 안은한 거처까지 남김 없이 쓸었을 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됩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루어낸 재산이 모두 떠내려 갔을 때 모든 것을 다 잃은 듯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의 재산을 왕들이 빼앗지 않을까, 도둑들이 빼앗지 않을까, 불이 태워버리지 않을까, 홍수가 휩쓸지 않을까, 사랑하지 않는 상속자가 빼앗지 않을까”(M13)라 했습니다. 애써 이루어 놓은 재산이 왕, 도둑, , 홍수, 상속자에게 빼앗기게 됨을 말합니다.

 

모은 재산을 써 보지도 못하고 다섯 가지 도둑에게 빼앗긴다면 억울할 것입니다. 설령 빼앗기지 않는다 해도 죽어서 가져 갈 수 없습니다. 재산형성 과정에서 발생한 업만 고스란히 안고 갑니다. 그러나 무엇 보다 재산은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날씨를 예측 할 수 없듯이 언제 폭우가 내려 농작물과 집을 모두 휩쓸어 버린다면 홍수가 내 재산을 빼앗아 가게 된 것과 같습니다.

 

애써 이루어 놓은 재산은 가져 갈 수도 없고 도중에 오적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빼앗길 수 없는 재산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가져 갈 수 있는 재산을 모아야 합니다. 그것이 일곱 가지 재산입니다. 부처님은 믿음의 재물(saddhādhana), 계행의 재물(sīladhana),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hiri ottappiya dhana), 배움의 재물(sutadhana), 보시의 재물(cāgadhana), 지혜의 재물(paññādhana)이라 했습니다.

 

일곱 가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 든든합니다. 어느 부자가 부럽지 않습니다. 홍수가 나도, 불이 나도 안심입니다. 왕도 도둑도 가져 갈 수 없습니다. 물론 상속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일곱 가지 재물을 가진 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이고 가장 행복한 자입니다. 그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태어나거나 인간으로 태어나도 높은 지위로 태어 나는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아치형 다리에 쓰레기가 잔뜩

 

간밤에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밤새 내린 비로 인하여 학의천이 범람했습니다. 최근 몇 년 만에 보는 큰 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비가 내려도 아직까지 저지대가 침수된 적은 없습니다. 만일 큰 비가 내려 제방을 넘어선다면 이재민이 발생할 것입니다. 아무리 비가 내려도 아치형 다리 이상으로 넘친 적은 없습니다.

 

이른 아침 아치형 다리에는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습니다. 얼마나 큰 비가 밤사이에 왔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장면입니다. 주로 나뭇가지나 풀입니다. 종종 생활쓰레기도 발견됩니다. 쓰레기 더미를 헤치고 일터로 향합니다.

 

 

 

 

 

 

네 가지 폭류가 있는데

 

거세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 다이내믹합니다. 이른바 물구경입니다. 구경 중에 최고가 사람구경이라 하지만 불구경이나 물구경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그것은 동적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현란한 TV화면에 눈을 빼앗기는 것처럼 끊임 없이 흘러 가는 폭류나 춤추듯이 타오르는 불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거센 흐름에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폭류를 빠알리어로 오가(ogha)라 합니다. 오가는 영어로 ‘floods’라 하며 홍수, 급류, 소용돌이의 뜻입니다. 홍수가 나면 사람과 동물을 바다로 휩쓸어 가서 그들을 압도 하고 질식시키고 익사시키듯이, 네 가지 폭류도 존재들을 윤회의 거대한 대양으로 휩쓸어 가서 존재들을 압도하고 질식시키고 익사시키고 맙니다.

 

폭류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폭류의 경(S50.99)’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거센 흐름이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감각적 욕망의 거센 흐름, 존재의 거센 흐름, 견해의 거센 흐름, 무명의 거센 흐름이다.” (S50.99) 라 했습니다.

 

초기경전에 언급된 폭류

 

네 가지 폭류에 휩쓸리면 어떤 존재이든지 윤회의 바다로 끌려 내려 가기 때문에 폭류를 건너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감각적 욕망의 폭류(kamaohga), 존재의 폭류(bhaogha), 견해의 폭류(diṭṭhiogha), 무명의 폭류(avijjaohga)를 건널 수 있을까?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오가(폭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참고 자료를 제시합니다.

 

 

Ogha

 

,[Vedic ogha and augha; BSk. ogha, e. g. Divy 95 caturogh’ottīra, Jtm 215 mahaugha. Etym. uncertain]. 1. (rare in the old texts) a flood of water VvA.48 (udak’ogha); usually as mahogha a great flood Dh.47; Vism.512; VvA.110; DhA.II,274 = ThA.175. -- 2. (always in sg.) the flood of ignorance and vain desires which sweep a man down, away from the security of emancipation.

 

To him who has “crossed the flood”, oghatiṇṇo, are ascribed all, or nearly all, the mental and moral qualifications of the Arahant. For details see Sn.173, 219, 471, 495, 1059, 1064, 1070, 1082; A.II,200 sq. Less often we have details of what the flood consists of. Thus kāmogha the fl. of lusts A.III,69 (cp. Dhs.1095, where o. is on e of the many names of tahā, craving, thirst).

 

In the popular old riddle at S.I,3 and Th.1, 15, 633 (included also in the Dhp. Anthology, 370) the “flood” is 15 states of mind (the 5 bonds which impede a man on his entrance upon the Aryan Path, the 5 which impede him in his progress towards the end of the Path, and 5 other bonds: lust, ill-temper, stupidity, conceit, and vain speculation).

 

Five Oghas referred to at S.I,126 are possibly these last. Sn.945 says that the flood is gedha greed, and the avijjogha of Pug.21 may perhaps belong here. As means of crossing the flood we have the Path S.I,193 (°assa nittharaattha); IV,257; V,59; It III (°assa nittharanatthāya); faith S.I,214 = Sn.184 = Miln.36; mindfulness S.V,168, 186; the island Dh.25; and the dyke Th.1,7 = Sn.4 (cp. D.II,89). 3.

 

Towards the close of the Nikāya period we find, for the first time, the use of the word in the pl., and the mention of 4 Oghas identical with the 4 Āsavas (mental Intoxicants). See D.III,230, 276; S.IV,175, 257; V,59, 292, 309; Nd1 57, 159; Nd2 178. When the oghas had been thus grouped and classified in the livery, as it were, of a more popular simile, the older use of the word fell off, a tendency arose to think on ly of 4 oghas, and of these on ly as a name or phase of the 4 āsavas. So the Abhidhamma books (Dhs.1151; Vbh.25 sq., 43, 65, 77, 129; Comp. Phil. 171). The Netti follows this (31, 114--24).

 

Grouped in combn. āsavagantha-ogha-yoga-agati-tah’upādāna at Vism.211. The later history of the word has yet to be investigated. But it may be already stated that the 5th cent. commentators persist in the error of explaining the old word ogha, used in the singular, as referring to the 4 Āsavas; and they extend the old simile in other ways. Dhammapāla of Kāñcipura twice uses the word in the sense of flood of water (VvA.48, 110, see above 1).

 

 

참고자료를 보면 초기경전에서 폭류(ogha)에 대하여 도처에 언급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 중에 숫따니빠따가 가장 많습니다.

 

열두 소용돌이의 큰 바다

 

숫따니빠따에는 Sn.173, 219, 471, 495, 1059, 1064, 1070, 1082 구문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중에서 Sn.173을 보면 야차 헤마바따가 부처님에게 누가 거센 흐름을 건넙니까? 누가 큰바다를 건넙니까? 의지할 것도, 붙잡을 것도 없는 심연에 누가 가라 앉지 않습니까?”(stn173)라고 물어 봅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Sabbadā sīlasampanno,

paññavā susamāhito;

Ajjhattacintī satimā,

ogha tarati duttara.

 

언제나 계행을 갖추고, 지혜가 있고,

삼매에 들고, 성찰할 줄 알고,

새김을 확립한 님만이

건너기 어려운 거센 흐름을 건넙니다.”(stn174)

 

 

야차 헤마바따가 거센 흐름(ogha)’이라 말한 것은 윤회의 폭류를 말합니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상윳따니까야 한 뿌리의 경(S1.44)’에 나오는 열두 소용돌이의 큰 바다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는 다름아닌 육내입처와 육외입처에 대한 것입니다. 열두 가지의 감각장소, 즉 십이처가 현실적인 윤회의 큰바다임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계, , 혜 삼학을 갖춘자가 폭류를 건널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사띠해야만 합니다. 이어서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묶인 지각을 여의고 모든 결박을 뛰어넘어, 존재에 대한 욕구를 멸해 버린 님, 그는 깊은 바다의 심연에 가라앉지 않습니다.”(stn174)라 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거센 흐름을 건너셨습니까?”

 

초기경전 도처에는 폭류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숫따니빠따 학인 우빠씨바의 질문에 대한 경(Sn4.70’을 보면 절박합니다. 우빠씨바는 부처님에게 싸끼야시여,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는 커다란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없습니다.”(stn1060)라 말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폭류를 건널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의지해 이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있도록 의지처를 가르쳐 주십시오.”(stn1060)라고 말합니다. 지금 생사의 기로에 있는 자가 물었을 때 절박한 심정일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표적인 답이 상윳따니까야 거센 흐름을 건넘의 경(S1.1)’일 것입니다. 하늘사람이 스승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거센 흐름을 건너셨습니까?”라며 묻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Yadā svāha āvuso santiṭṭhāmi. Tadāssu sasīdāmi. Yadā svāha āvuso āyūhāmi tadāssu nibbuyhāmi1. Eva khvāha āvuso appatiṭṭha anāyūha oghamatarintī.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 흐름을 건넜던 것입니다.(S1.1)

 

 

방대한 상윳따니까야에서 가장 처음 나오는 말이 바로 이 경입니다. 상윳따니까야 제1장 제1절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말은 “appatiṭṭha anāyūha(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입니다.  부처님은 이 경에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폭류를 건넜다고 했습니다.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appatiṭṭha anāyūhaṃ)

 

폭류를 헤쳐 나가려면 애써서 건너가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잘못된 의지와 노력은 운명적 파탄을 초래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10번 각주)라 했습니다. 이는 올바른 수행을 통해서 힘들이지 않고 윤회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경에서는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습니다.”라 했습니다. 폭류를 건너기 위해 애쓰면 애쓸수록 휘말려 버리고 휩쓸려 버림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가만 있으면 빠져 버릴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한 주석을 보면 번뇌 때문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조건적인 발생이나 의도적 형성에 매이지 않도록 애써서도 안된다는 것이다.”(Srp.I.19)라 했습니다. 폭류에 머무는 것은 번뇌 때문에 머물고, 폭류에 휘말려 버리는 것은 잘못된 견해를 가졌기 떄문임을 말합니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appatiṭṭha anāyūha 문구와 관련하여 나는 멈추지 않고 아등바등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류를 건넜노라”(S1.1)라 했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 것에 대하여 오염원 등 때문에 가라 앉지 않는다라 했고, 아등바등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잘못된 정진 등을 통해서 애쓰지 않는다.”라고 주석을 인용해서 각주 했습니다.

 

중도로서 폭류를 건넌다

 

상윳따니까야 거센 흐름을 건넘의 경(S1.1)’에 대하여 색다른 해석을 낸 사람이 있습니다. 중도세미나에서 들은 이유미교수의 논문입니다. 이유미 교수는 문제의 “appatiṭṭha anāyūha 문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해설 했습니다.

 

 

폭류는 행(sakhāra)의 거센 흐름, 즉 윤회를 말한다. 거기에 딛고 선다는 것은 행에 의지하여 거기에 자리 잡고 정착하고 안주함을 말하고, 바둥거린다는 것은 행의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고투하며 애쓴다는 말이다. 의지하려고 디디면 빠지고, 행 속에서 행과 싸우면 오히려 행에 휩쓸려버린다는 내용으로 행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발 디딜(안주할) 곳이 없으며 행과의 싸움은 헛된 수고일 뿐이라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중도라는 단어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와 같이 안주와 바둥거림, 양쪽을 다 버리고 중도로서 폭류, 즉 행의 세상을 건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이유미 교수수, 니까야를 바탕으로 한 중도의 이해와 실천)

 

 

빠알리 구문 “appatiṭṭha anāyūha에 대한 해석을 보면 공통적으로 번뇌(āsava)와 행위(sakhāra)에 대한 것입니다.  머물면 번뇌 때문에 가라앉고, 건너려 하면 행위 때문에 휩쓸려 떠내려 가버림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양극단이라 했습니다. 머물면 빠져 버리고, 건너려면 휩쓸려 버리는 것이 양극단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양극단을 벗어나 중도를 설했듯이 폭류를 건너려면 중도의 이치로 건너야 함을 말합니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팔정도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십이연기입니다. 부처님은 십이연기로 유무, 단상, 고락 등 양극단을 논파했습니다. 윤회의 거센 흐름, 윤회의 바다를 건너는데도 중도의 원리가 적용 되어야 합니다. 중도는 팔정도로 실천 됩니다. 팔정도의 정견은 사성제입니다. 사성제는 십이연기에서 고와 멸이라는 이지 연기에 대한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거센 흐름, 폭류를 건널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폭류에 머무는 삶과 폭류에 휘말라는 삶

 

매일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습니다. 또 하루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 보면 세월이 흘러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강물이 흘러 가는 것 같습니다. 때로 삶도 거센흐름일 수 있습니다. 폭류와 같은 삶입니다. 폭류에 휩쓸려 가는 삶입니다.

 

폭류에 휩쓸려 가는 자는 폭류에 빠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폭류와 함께 흘러가 윤회의 바다에 이를 것입니다. 폭류의 흐름에 맡겨진 삶이고 폭류에 머무는 삶입니다. 그런데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는다.(Yadā svāha āvuso santiṭṭhāmi. Tadāssu sasīdāmi)”라 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 욕망의 폭류(kamaogha)를 말합니다. 대부분 감각적 욕망으로 살기 때문에 폭류에 휩쓸려 살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폭류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폭류에 내맡겨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폭류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물에 머물면 빠져버려 떠밀려 갈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에 탐닉하는 삶을 살았을 때 흐름에 내밀려 사는 삶과 같습니다. 대부분 이렇게 살아갑니다.

 

폭류에서 빠져 나오고자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폭류에 흘러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빠져 나오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 더 폭류에 휘말려 가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다. (Yadā svāha āvuso āyūhāmi tadāssu nibbuyhāmi)”라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견해의 폭류(diṭṭhiogha)를 말합니다. 영원주의나 허무주의와 같은 잘못된 견해로 인하여 폭류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잘못된 수행방법도 해당됩니다. 견해에 폭류에 빠진자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무명의 폭류(avijjaogha)라 볼 수 있습니다.

 

경에서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라는 말은 감각적 쾌락의 폭류와 존재의 폭류에 대한 것이고,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다라는 것은 견해의 폭류와 무명의 폭류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폭류에서 빠져 나와 저언덕으로 건너 가려면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아야 합니다. 감각적 쾌락의 재난을 아는 자는 번뇌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폭류에 머물지 않아 휩말려 가지 않고, 정견을 가진 자는 애쓰지도 않고 휘말리지도 않아 쉽게 저 언덕으로 건너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거센 흐름에 휘말려 가고 맙니다.

 

 

 

바른 견해를 가진 자들만이

 

이른 아침 학의천이 거세게 흘러갑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삶도 흘러 갑니다. 큰도로에 차들도 흐름을 형성하여 흘러갑니다. 그러나 흐름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자들입니다. 수행자들입니다. 흐름을 거슬러서 저언덕에 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도중에 대부분 휩쓸려 떠내려 가고 맙니다.

 

바른 견해를 가진 자들만이 저언덕으로 건너갑니다. 정견을 가진 자는 팔정도를 실천하는 자이고, 팔정도의 정견은 사성제이기 때문에 사성제를 아는 자는 연기를 아는 자입니다. 연기를 아는 자만 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쉽게 저언덕으로 건너 갈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2017-07-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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